걸그룹 이름 짓기 (1)
“세트장 공사는 일단 대표님 의견대로 진행하도록 하시고···.”
“험험···.”
김호진 PD를 제외하곤 다들 뭔가 불편한 얼굴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나이가 어려서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사실 통장에 자산이 200억이 넘어간 이후로는 신경을 끊고 있었다. 돈에 집착할 게 아니라 하던 일에 집중하면 자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임을 알게 되었달까?
그러니 셸터 건설 비용으로 20~30억 정도 사비로 충당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단순히 일회용이 아니라 나름 계획도 있었고···.
그래도 불안한 마음은 달래 줘야 하는 게 대표의 일 아니던가? 나는 사과 스튜디오가 자금난으로 어려웠던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세한 이야기는 못하더라도 제작에 전념할 수 있게 해 줘야 할 것 같았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영화의 성공으로 회사에 유보금이 100억이 훌쩍 넘어가고 제 자산도 그거보다 더 많으니까요.”
내 말에 스태프들이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 제 결정을 과잉 투자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작품의 퀄리티만 생각해 주세요. 회사가 좋은 작품을 제작하면 그게 다 회사 수익이 되고 재무 구조가 점점 건실해질 겁니다.”
“그, 그렇군요.”
“제가 여러분께 회사의 철학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안 해 드린 것 같아서 한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시간 괜찮을까요?”
“네. 말씀하십시오.”
“병원은 치료를 잘해야 하고 제조업은 좋은 물건을 잘 만들어야 하듯, 우리는 좋은 콘텐츠를 만들면 됩니다. 요즘은 굳이 마케팅하지 않더라도 좋은 게 있으면 SNS를 통해 알아서 퍼지는 시대입니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어 갔다.
“정보가 다 공개돼 있기 때문에 우리 콘텐츠가 훌륭하다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물론 가끔 이상하다고 생각되는 게 있으면 지금처럼 말씀해 주세요. 그게 말이 되는 의견이라면 의사 결정에 반영토록 하겠습니다.”
“······.”
“그리고 이번에 제작하는 세트는 드라마 제작 이외에 다른 용도로도 쓸 예정이니 현금 흐름에 대해 과도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다른···. 용도요?”
“네. 자세한 사항은 구체적인 계획이 나와야겠지만, 슈퍼 셸터는 3시즌 이후 수익 사업으로 변경될 예정입니다. 이미 계획된 사항이기 때문에 회사 자금 상황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입니다.”
말은 자세히 안 했지만, 이 정도 이야기했으면 대충 알아들었겠지. 내 말을 들은 임직원들이 눈빛으로 바쁘게 의사 교환을 하는 것 같았다.
“험···. 뭐···. 대표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을 하시니 저희는 드라마 제작만 신경 쓰겠습니다.”
내 말을 듣고 가장 불안한 표정이던 미술감독의 얼굴이 어느 정도는 풀어진 것 같았다.
“자꾸 걱정해서 죄송합니다. 저희가 안 좋았던 기억이 있어서요.”
“이해합니다. 저라도 그랬을 겁니다. 걱정거리가 있으시면 숨기지 마시고 저한테 꼭 이야기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좋은 관계가 유지될 수 있을 테니까요.”
“네. 알겠습니다. 대표님. 명심하겠습니다.”
나는 한숨을 내쉬는 김호진 PD를 불러 조용히 이야기했다.
“PD님, 너무 아끼실 생각 하지 마시고 쓸 때는 과감히 쓰세요. 어차피 예산은 넉넉하게 책정되어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고요.”
“알겠습니다. 저는 제 할 일만 잘 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저는 누구보다 PD님을 믿고 있으니까요.”
“가, 감사합니다.”
사나이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에게 목숨까지 바친다고 한다. 대작을 만들어 본 적 없다는 주위의 의구심을 묵살하고 작품을 맡겼으니 그가 이 작품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분명히 대단한 작품이 나올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미술감독님이 수고가 많으실 것 같은데 외주 전문 인력들을 잘 고용하셔서 무리 없이 진행해주세요.”
“네. 제가 알고 있는 업체들이 많으니 제대로 한번 만들어 보겠습니다.”
그렇게 훈훈하게 회의가 끝이 났다.
* * *
그룹명을 짓기 위한 회의가 열렸다. 카메라가 설치된 회의실로 다섯 명의 소녀가 입장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그래, 어서 와. 앉자.”
다섯 명의 멤버가 각자 착석하자 미소를 지으며 주제를 꺼냈다.
“오늘 그룹명을 짓는다고 했지? 다들 생각해 봤니?”
“대표님!”
“어···. 그래, 리더. 말해 봐.”
“왜 대표님만 계시고 다른 분들은 안 계시는 거죠? 혹시 팀명은 저희가 선정하면 그대로 결정되는 건가요?”
“아니! 너희랑 나랑···. 왜 나는 빼는 거냐? 아무래도 우리끼리 정하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리고 이걸 영상 콘텐츠로 만들 예정이거든.”
“아···. 그래서 회의실에 카메라가 있었군요?”
“맞아. 그룹명 정하는 거 촬영할 거야. 나중에 채널에 올라갈지 어떨진 모르겠지만···. 앞으로 이런 공식적인 것들은 웬만하면 촬영을 해 둘 생각이야. 이런 게 다 역사가 되는 거지.”
“혹시 저희 연습할 때 촬영했던 영상도···.”
“맞아. 물론 연습을 체크하는 목적도 있는데 나중을 위해서 내가 찍어 놓으라고 트레이너에게 말해놨지.”
흠···. 연습 동영상까지 연결을 시키다니···. 역시 우리 똑똑이 리더 지령이는 생각하는 게 남달랐다.
“대표님, 저 잘 나오나요?”
담희가 카메라를 보고 브이 자를 그리며 웃고 있었다.
“김담희, 이 바보야. 그걸 대표님이 어떻게 아시겠니. 나중에 영상을 확인해 봐야지.”
“아···. 그런가? 예원이 넌 오늘 영상 찍을 거 알고 온 거 아냐? 옷을 왜 그렇게 빼입었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내가 뭘 빼입고 왔다고 그래?”
생년월일로 따지면 예원이가 막내였지만 둘은 엄연히 동갑이었다.
“자! 다들 조용. 이제 회의 좀 시작하자.”
“넵!”
“지금부터 새롭게 데뷔하는 J&J 걸그룹의 이름 짓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와아!!”
짝짝짝···.
“이런 회의를 하면 눈치 보면서 말을 잘 안 하는 사람이 있는데, 한 가지 룰을 정하겠습니다. 누가 어떤 이상한 이름을 말하더라도 비난 금지입니다. 아시겠습니까?”
“네!”
“이런 걸 바로 브레인스토밍이라고 하는데요. 어떤 의견이라도 무시하지 않는 창의적 발상 기법입니다. 이 점을 유념해 주시고요. 아무나 자유롭게 하시면 됩니다.”
“저요!”
“그래. 유리가 먼저 말해 봐.”
“유니콘이요. 신비로운 컨셉이라고 하셨으니 무지갯빛 뿔이 달린 흰색의 유니콘 어때요?”
“자! 유니콘 나왔습니다.”
“잠깐, 유니콘은 너무 보이그룹 같지 않아요?”
“아까도 말했지만, 비난은 금물입니다.”
“비난이 아니라 그냥 의견입니다. 대표님.”
역시 똑 부러지는 예원이었다.
“그래요. 의견 정도는 괜찮습니다.”
“그게 이상하면 별빛천사 어떤가요? 어감이 귀엽지 않아요?”
“켁···. 언니! 무슨 애니메이션도 아니고!”
“띠! 경고! 장예원 경고 1회! 비난은 안 됩니다.”
“죄송합니다.”
“유리야 혹시 다른 거 또 있니?”
“그럼 해리포터 느낌으로···. 헤르미온 어때요?”
“음···. 나쁘지 않네. 그런데 워낙 유명한 소설에서 나온 이름이라 살짝 걱정되는구나.”
“헤르미온 괜찮지 않아요? 아니면 UFO라든가···.”
“···그래. 또 다른 사람?”
너무 과몰입한 것 같아 잠시 정유리 말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유리를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다른 이름을 말하기 위해 계속 손을 들고 있었다.
‘으음···. 유리는 취향이 약간 유아틱한 것 같기도 하고···. 안 되겠다. 최고 고학력인 지령이의 의견을 들어 보는 수밖에···.’
“리더? 리더는 좀 생각해 봤어?”
이지령은 그룹명에 대해 자신이 없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하기 시작했다.
“O-디멘션. ‘Other Dimensions’이라고 다른 차원이라는 뜻이에요. 앞에 붙은 O는 다섯 명의 5를 상징합니다. 5차원을 뜻하기도 하고 약간 신비한 느낌도 들고요.”
“···뭔가 멋있는 거 같은데, 너무 어렵지 않나? 보이그룹 느낌이고···.”
예원이가 리더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의견을 제시했다. 그래도 리더의 권위가 나름 있는 것 같았다.
“그럼···. 폭발력이 강하다는 뜻에서 A-Bomb 어떨까요?”
“A-Bomb라면 Atomic이라는 뜻 아냐? 원자폭탄?”
“저, 절대로 안 돼요. 원자의 ‘원’ 자도 꺼내지 마세요.”
일본에 살던 정유리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생각해 보니 엄청난 규모의 일본 시장도 고려해야 하는데 이건 안 될 것 같았다.
“그럼 절대영도(Absolute Zero), 절대오차(Absolute error), 반물질···. 이건 세상에 없는 물질이라는 건데···.”
“잠깐! 이지령. 이것들 물리학 용어 아냐? 디멘션이니, 절대영도라든지···.”
“네. 뭐···. 물리학책에 나오는 용어를 몇 개 따오긴 했는데, 멋있지 않나요?”
“······.”
크흠···. 우리 리더도 평범한 사람들과는 살짝 다른 감각을 지닌 것 같네.
“···트, 특이한 의견 좋았구요. 하지만 단어들이 약간 어렵긴 하네요. 어쨌든 아주 잘 들었습니다. 다른 사람? 그래, 담희야. 너도 생각해 온 거 있어?”
얼른 주제를 바꾸려고 고개를 들다가 담희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 담희는 갑자기 배시시 웃더니 말을 하기 시작했다.
“미스테리우스 어떤가요?”
“응?”
“여성 테리우스라는 뜻이에요. 유리 언니가 테리우스 정이든의 친동생이기도 하고 뭔가 신비한 분위기를 뜻하는 단어죠. 미스테리우스. 히히···.”
“하하하···. 이건 좀 웃겼다. 미스테리우스라니···. 그런데 탈락!”
“아, 왜요! 그럼 이건 어떨까요?”
“뭔데? 뜸 들이지 말고 말해 봐.”
“마법사를 영어로 소서러라고 하잖아요. 다섯 명의 소서러라고 해서 오징어 소서러 어때요?”
“허···.”
“야! 김담희. 그건 아니지!”
“왜, 임팩트 있잖아. 솔직히 우리를 보고 누가 오징어라고 하겠어? 비주얼 그룹인데···.”
“땡···. 다른 거는?”
“쳇! 그럼 오파이브는 어때요?”
“오파이브? 그건 무슨 뜻이야? 그냥 다섯 명이라고 해서 지은 거면···.”
나는 말을 하면서 부들부들 떠는 주먹을 눈앞으로 들어 올렸다.
“대표님. 제가 그렇게 단순한 줄 아세요? 오파이브는 ‘오빠 나 이브’의 줄임말입니다. 아담의 반쪽이 되겠다는 그런 의지를 담고 있어요.”
“휴···. 담희야. 폭력이 두려워서 방금 생각한 거 아니냐?”
“헤헤···. 들켰당.”
“김담희! 내 인내심을 테스트하지 마.”
역시 정상적인 건 예원이뿐인가?
“브레인스토밍하는 건데 왜 그래···.”
“농담처럼 들리니까 그렇지!”
“그럼 오렌지 맛 캐러멜같이 오렌지 맛 밤양갱 어때?”
“······.”
“야! 너 숙소 가서 혼나 볼래? 지금 리더 언니 표정 보이지?”
‘와···. 전혀 몰랐다. 김담희 이 녀석, 생각하는 게 4차원이잖아?’
청순한 얼굴로 천연덕스럽게 농담을 하는 담희였다. 원래 이런 캐릭터였구나? 사람이 본래 모습을 되찾으니 예전 성격까지 나오는 모양이었다.
‘아···. 이거 영상을 찍고 있지?’
이야기하다가 까맣게 잊어먹고 있었다.
“얘들아, 이거 영상으로 써먹으면 재미있겠다. 편안하게 해, 편안하게.”
“큭큭···. 장예원. 너 내가 왜 이렇게 했는지 아직도 모르겠어? 동영상도 재미있어야 사람들이 볼 거 아냐.”
“칫···.”
“이 아마추어 같으니라고···.”
확실히 담희는 케이블 방송에 자주 나가서 그런지 방송을 아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특정 이미지를 보여 줘야 제대로 된 이름이 나올 거 같았다. 이런 식으로 아무거나 이야기해서는 끝날 기미가 안 보이니까.
나는 황급히 노트북을 켜서 웹소설 플랫폼으로 들어갔다.
‘그게 제목이 뭐였더라? 아!’
나는 드라마와 가장 어울리는 이미지를 생각하다가 해당 웹소설 제목을 떠올렸다.
<이세계에서 귀환한 절대자>.
“얘들아 잠시만. 내가 컨셉 이미지를 한번 띄워 볼게.”
이미지를 클릭해서 화면에 크게 띄웠다. 표지 일러스트에는 붉은 마나를 뿜고 있는 화려한 로브 차림의 한 남자가 시커먼 게이트를 뒤로하고 현실로 넘어오는 장면이 그려져 있었다.
“대표님. 이게 뭐예요? 이게 우리 컨셉인가요?”
장예원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묻고 있었다.
“느낌만 봐 느낌만···. 남자가 아니라 화려한 코스튬을 입은 여성 캐릭터들로 바꾸면 이미지가 비슷해져.”
“······.”
“와! 코스프레다! 전 맘에 들어요! 대표님!”
김담희가 아주 만족한 표정으로 손을 번쩍 들었다.
대충 멤버들의 표정을 살펴보니 담희와 정유리는 맘에 들어 하는 것 같았고, 예원이와 지령이는 ‘이게 뭐지?’ 하는 표정이었다. 리리는 무념무상에 아무 생각 없는 것 같고···.
“일단 이름을 짓기 전에 이런 컨셉이라는 걸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띄운 거야. 아직 내가 설명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너희들은 데뷔하고 바로 드라마를 찍을 거야.”
“네? 드라마요?”
“맞아. 이세계에서 넘어온 리치를 잡는 소녀 그룹이라는 컨셉이야.”
“네?”
멤버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