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드 업의 정석 (1)
SG 트레이닝팀의 피드백이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내가 재미로 점검해 본 결과, 어빌(현재 능력)에 대한 트레이너들의 평가는 거의 정확한 것 같았다. 잘 모르는 내가 봐도 피드백이 그럴싸하게 정확했다. 어떤 트레이너는 정말 송곳 같은 분석을 해서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하지만 포텐(잠재 능력)에 대해서는 약 30% 확률로 놓치는 것 같았다. 지금은 실력이 부족해서 심하게 지적받고 있지만, 잠재력은 최상위인 연습생들이 눈에 띄었다.
‘잠깐. 설마 재능 있는 인재들이 이런 식으로 썰려 나가는 건가?’
의지력이 엄청나게 강하고 악착같은 연습생은 트레이너의 말을 묵묵히 견디며 이런 살벌한 경쟁을 뚫고 잠재 능력을 터트릴 수 있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경쟁하면서 스트레스를 받으면 오히려 더 못하는 사람도 있다. 칭찬으로 대성하게 할 인재를 가혹한 환경에 내던져 놓고 고사시키는 게 아닐까?
‘왠지 그런 경우가 상당히 많을 것 같은데···.’
나는 사람들을 굴려서 키우는 것은 고루한 마인드라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SG에서는 대체 얼마나 포기하고 나가는 거지?’
나도 매니저 출신이다 보니 웬만한 기획사 연습생들의 가혹한 연습 스케줄을 꿰고 있다. 보통 밤 10시까지 스케줄이 이어지는데,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새벽까지 연습하는 게 이들의 일과였다.
괴물 중의 괴물이 모여 있다는 SG 아니던가? 최근에는 경쟁사에 살짝 밀렸다는 평가가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습생들에게는 영원한 1티어였다.
당장 나 같아도 이들 중에서 몇 명만 선발한다고 생각하면 탈락한 연습생들이 너무 아까울 것 같았다.
“자, 다 수고했어. 열심히 한 사람도 있고 하나도 늘지 않은 사람도 있네? 이번 월말 평가는 대표님과 임원진들까지 다 오시기 때문에 더 신경 써서 잘해야 할 거야. 너희들 귀에 딱지가 앉을 때까지 들었겠지만, 거기서 눈에 들면 데뷔까지 아주 쉽게 갈 수 있다. 알겠냐?”
“넵!”
“그럼 열심히 해야 하겠지?”
“넵!”
남자 아이돌이라 그런지 대답이 아주 우렁차다. 데뷔라는 말을 들으니 다시 눈빛들이 빛나는 것 같았다.
“혹시···.”
‘응?’
갑자기 중앙에 앉아 있던 이희진이 고개를 돌려 우리를 바라보았다. 아까 그녀도 연습생들에게 가차 없는 피드백을 했었는데 잘한 점과 못한 점을 조목조목 짚어주는 세세한 조언이 일품이었다.
“저는 대표님과 유정 씨의 평을 듣고 싶습니다. 두 분은 방송으로 오디션 프로그램을 하셨잖아요. 혹시 다른 생각이나 의견이 있을까요? 아니면 감상평이라도···.”
‘오케이! 됐다. 좋은 타이밍에 희진 씨가 밑밥을 깔아 줬다.’
내가 그녀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려는 순간, 나유정이 냉큼 마이크를 건네받았다.
‘어이 어이··· 유정 씨!’
“안녕하세요. 배우 나유정입니다. 만나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나유정이 연습생들에게 꾸벅 인사하자 연습생들도 엉거주춤하게 따라서 인사를 하고 있었다.
“이렇게 전문가들이 계신데 제가 피드백 같은 걸 할 자신은 없구요. 이런 모습을 보니 정말 아이돌이 쉽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저도 프로젝트 걸그룹으로 데뷔를 한번 했었잖아요? 죄송한데 거기 웃지 마시고요.”
“하하하···.”
장내의 연습생들도 네미시스 센터로 활약했던 그녀의 모습을 알고 있는지 여기저기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저도 데뷔를 하기 위해서 잠시 연습생들이 받는 코스를 같이 하다가 정말 죽을 뻔했어요. 그때까지는 아이돌이 그렇게까지 힘든지 몰랐거든요. 보니까 정말 온종일 수업하면서 일과가 이어지더군요.”
나유정은 그때가 생각나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아무튼,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런 식으로 몰입을 하면 결과가 어쨌든 여러분 인생에 도움이 된다는 거예요. 아이돌로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할 수 있겠지만, 여기에서 했던 노력이면 어떤 분야에서도 성공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너무 초조해하지 마세요. 여러분은 그 노력 자체만으로 인정받아 마땅하니까요.”
짝짝짝···.
연습생들은 나유정의 칭찬에 감동했는지 스스로 박수를 치고 있었다.
‘유정 씨는 역시 MC 체질이야. 말을 참 잘한단 말이지.’
그녀는 젊고 잘생긴 연습생들이 박수를 쳐 주자 쑥스러운 듯 나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그러자 연습생들의 이목이 나에게 집중됐다.
“음···. 안녕하세요. 아이돌 드라마인 ‘슬기로운 덕질생활’의 작가이자 테리우스 전 매니저, 그리고 작곡팀 쓰리콤보에서 작사를 맡고 있는 이준형입니다. 반갑습니다.”
“우와아아!!”
일부러 내 이력을 강조해서 읊었더니 반응이 꽤 좋았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모르는 사람을 위해 한 말인데 이렇게 좋아할 줄이야. 하긴 이 연습생들은 테리우스가 1티어에 올라가게 된 이유를 모두 다 알고 있을 것이다.
테리우스는 ‘슬기로운 덕질생활’의 대박으로 일본에서 크게 브레이크하며 1티어에 당당히 입성했다. 지금은 인피니티 드림즈로 이적하며 팬덤이 3배는 커진 상황으로, 슈퍼노바를 제외하곤 기존 1티어 그룹을 오히려 압도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더구나 타이틀 곡을 자체 제작해서 음악성까지 인정받고 있으니 SG 연습생들도 그런 것들을 엄청나게 부러워하고 있지 않을까?
“일단 오늘 여러분들의 퍼포먼스는 감동적이었습니다. 정말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결과물인 것 같습니다. 아! 거기 왜 웃으세요? 혹시 예전에 제가 투데이 아이돌에서 보여 줬던 ‘처절한 피눈물’ 댄스 흑역사를 떠올리신 거 아닙니까?”
“큭큭···. 죄송합니다!”
“좀 잊어 주시고요. 다 방송을 위해서 재미있으라고 한 겁니다. 정말이에요.”
“큭큭···.”
많은 사람이 그 장면을 알고 있는지 트레이너팀과 이희진, 그리고 유정 씨까지 모두 웃고 있었다.
‘저기요. 유정 씨. 당신은 웃으면 안 되죠. 역대급 음치···. 쩝···. 아니다.’
나에게 호감을 느끼게 하려고 일부러 예전 이야기를 꺼내 나를 낮춰 가며 분위기를 훈훈하게 만들었다.
“어쨌건 여기 계신 연습생분들은 참 능력이 대단하시네요. 칭찬을 받으신 분들은 정말 당장 데뷔하셔도 될 거 같고요. 아까 여기, 저기, 저기 몇 분들은 트레이너님들께 혼쭐이 나던데 솔직히 잘 모르는 제 눈에는 그분들조차 상당히 잘하시는 것 같습니다.”
나는 일부러 트레이너에게 혹평을 받은 멤버들 중 어빌과 포텐이 차이가 크게 나는 멤버들을 손가락으로 일일이 콕콕 짚었다. 그러니 풀이 죽어 있던 그들의 얼굴에 다시 생기가 감돌았다.
“여기서 데뷔를 못 하신다고 해서 끝이 아닙니다. 제가 업어서라도 모셔 가고 싶은 분들이 정말 많이 보입니다. 그 정도로 여러분들은 대단하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그러니 포기하지 말고 계속 노력하신다면 빛을 보실 수 있을 거라 확신합니다.”
짝짝짝···.
나는 말을 마치며 혹시나 내 의도가 들켰는지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이들은 우리가 이희진을 보러 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자신들의 연습생들을 칭찬하기 위한 말로 치부해 버리고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다행이네.’
아무래도 지금은 드라마 제작사로 알려져 있다 보니 경계심이 느슨했다. 그리고 그들의 눈에 우리가 경쟁사로 느껴질 리도 없고 말이다.
‘하지만 신인 걸그룹이 우리 회사에서 나온다면? 그리고 남자 아이돌 모집 공고를 띄운다면?’
여기서 데뷔도 못 하고 끙끙대며 사라져 갈 유망주들이 한 번쯤은 봐 주지 않을까?
아마도 무의식중에 내가 한 말이 생각나서 J&J를 생각해 보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는 그 말을 끝으로 내가 일일이 손가락으로 짚었던 연습생들과 눈을 마주치기 위해 노력했다.
솔직히 이런 기획사에서 데뷔도 못 하고 다른 기획사로 이적하거나 연습생을 관두는 인재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내가 빼내 가겠다고 한 것도 아니고···. 그냥 다른 가능성도 있다는 걸 무의식에 심어 준 것뿐이다.
물론 베스트는 여기에서 데뷔하는 거겠지만, 혹시 생각나면 우리 회사도 한번 봐 달라는 간절한 메시지랄까? 괜찮은 친구들도 새끼 쳐서 같이 오면 더 좋고···.
‘뭐 이만하면 됐다. 더 나가면 상도덕에 어긋나지.’
그렇게 홀가분하게 빌드 업을 마치고 옆을 보니 유정 씨가 나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왜요? 왜 그래요?’
말은 하지 않고 입 모양으로 의사를 전달했다. 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고개를 숙이고 휴대전화를 들어 뭔가를 타이핑했다.
띠링.
나유정은 말을 하지 않고 톡을 보냈다. 아무래도 그녀는 내 속셈을 눈치챈 모양.
[준형 씨. 어떻게 거기서 그런 생각을 해요? 소름···. 와! 나 진짜 소름 돋았어요.]
‘후후후···. 이 정도야 뭐···. 그냥 운만 띄운 거지’
나는 고개를 한번 옆으로 까딱거리며 별거 아니라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나유정은 테이블 밑으로 엄지 척을 날려 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말없이 시선만 교환할 따름이었다. 척하면 척!
“이것으로 간이 주간 평가를 마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렇게 인사를 하고 연습생들이 줄줄이 방을 빠져나갔다. 우리는 잠시 차를 마시며 쉬었다가 이희진의 안내에 따라 SG 투어를 했다. 사무실, 녹음실, 연습실, 트레이닝 체계 등···. 우리는 이희진의 설명으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확실히 SG가 대단하긴 해. 그리고 여전히 저력 있다!’
그들은 이빨 빠진 호랑이가 아니라 몸을 잔뜩 움츠린 수사자였다.
사실상 우리나라 기획사들이 SG가 정립한 체계를 거의 그대로 쓰거나 살짝 변형한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거기에 한술 더 떠서 그들은 외국 작곡가들과 활발히 작업하면서 최고의 곡을 선별하고 있는 선진적인 시스템을 운영 중이었다.
SG는 타이틀 곡이 아니라도 글로벌로 통하는 퀄리티의 곡들이 많았고, 이런 혁신과 노하우가 모여 오늘날 SG가 된 것이다. 다른 경쟁사도 이런 전반적인 상황이 SG와 비슷했다.
하지만 이제는 새로운 경쟁자가 등장했다.
바로 슈퍼노바의 빅샷 엔터테인먼트!
이들은 자체적으로 연습생들을 육성하고 자신들의 색깔을 입혀서 최종 결과물을 시장에 내놓는 대형 3사와는 다른 정책을 펼쳐 나가고 있었다.
CA 미디어가 중소 기획사를 인수해서 자체 레이블로 휘하에 두는 것처럼, 빅샷도 중소형 기획사를 흡수하는 형태로 가고 있었다. 트레이닝 부서가 대형 3사와 비교해서 힘이 비교적 약하고, 심지어 매니지먼트 CEO는 전문적인 엔터 출신도 아니었다. IT 업체 CEO를 데려다가 엔터 업무를 보게 하는 파격적인 행보를 선보였다.
그들은 기존의 대형 3사를 답습하는 게 아니라 쓸 만한 그룹이 보인다면 과감히 인수하는 식으로 회사를 키우고 있었다. 플랫폼 기업처럼 자신들은 빅샷이라는 이름을 제공하고 중소 기획사에서 발굴한 신인들을 받아서 쓰는, 일종의 퍼블리싱 형태로 나가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벌써 중형 기획사 하나와 탄탄한 소형 기획사를 연달아 인수한 상태였다.
물론 대형 3사도 이에 자극을 받아서 비슷한 행보를 이어 갈 확률이 높았다. 이미 이들도 서로 협력해서 온라인 공연 회사까지 공동으로 설립했다. 심지어 대형 3사는 현지화 전략으로 전원 현지인으로 이루어진 아이돌을 론칭하며 각개 전투를 벌일 초장기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으니까.
이렇게 케이팝이 글로벌화되면서 기업 간 패권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대형 3사의 저력이 역시 강하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빅샷이 전인미답의 새로운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넷플릭이나 미튜브처럼 혹시 엔터 판을 쓸어 버리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러운 생각도 들곤 했다.
‘하지만 여기 J&J라는 다크호스도 있다···.’
내가 증명하고 싶은 건 바로 이거였다.
비록 지금은 아무것도 없지만, 이들과 다르게 콘텐츠라는 새로운 방향으로 진입 장벽을 허물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일단은 우리 연습생들부터 띄워야지.’
갑자기 한동안 미뤄 뒀던 아이돌 그룹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