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필요한 이유 (3)
“자, 작가님.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이영상 실장이 나를 보며 반문했다.
“말 그대로입니다. 엉성하기 그지없는 저질 각본에 어처구니없는 편집, 무능한 감독이라는 삼박자가 딱딱 맞아 버린 영화더군요. 유명 독립영화제 수상자 출신의 실험적인 상업 영화라고요? 웃기는 소리죠.”
“······!!!”
“사실 개연성 없는 배역을 그 정도로 연기했다는 것 자체가 더 놀라운 일입니다.”
“흑흑···.”
이희진은 그동안 참아 왔던 눈물을 왈칵 쏟아 내고 있었다. 표현은 안 했지만 발연기 논란으로 마음의 상처가 제법 큰 모양이었다.
나는 어제 사무실에서 그녀가 출연했던 영화를 분석해 보았다. 초반에 설정 때려 박기, 스타일리시한 영상을 위해 불친절해져 버린 스토리텔링, 그리고 오직 작가만 재미있는 이야기···. 이런 것들은 전형적으로 초보들이 저지르는 실수였다.
내가 누구던가. 한때나마 웹소설에서 괴작 마스터로 불리던 작가 아니던가!
더구나 이 ‘리얼하게 잔혹하게’는 사건을 너무 꼬고 꼬다가 후반부부터 급격하게 무너지는 영화였다.
스토리만 엉성하면 상관없는데, 작가 겸 감독이 급발진하느라 개연성이 심하게 망가지고 이해할 수 없는 스토리가 나오면서 그야말로 폭망을 한 케이스였다.
거기서 이상한 연기를 선보이며 욕을 엄청나게 먹은 이희진은 처음엔 나름대로 자기 생각을 밀고 나가려고 했지만, 나중에는 어떻게 된 일인지 그 모습마저 보여 주지 못하고 개연성과 함께 캐릭터까지 침몰하고 만 것이다.
내가 주목한 부분은 바로 이희진이 중반부에 살짝 바뀌는 부분이다. 이미 무너지기 시작한 캐릭터를 어떻게든 잘 해석해서 연기해 보려는 마음이 느껴졌다.
물론 영화 후반부터는 그냥 정신줄을 놓은 연기를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긴 했지만 말이다.
나만 너무 말한 건가?
“이거 처음에 대본을 보시고 내용 이해도 안 됐을 거 같은데···.”
대본도 초기와 달리 거의 누더기처럼 수정된 것으로 보였다. 감독이 뭔가 욕심을 부린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달까?
“마, 맞아요. 네 번인가 다섯 번인가 읽고 감독님에게 설명을 듣고도 이해가 잘 안 갔어요.”
이희진은 티슈로 눈물을 닦으며 어렵게 말을 꺼냈다.
“그랬을 겁니다. 제가 봐도 그렇더군요. 어쩜 돈을 그렇게 들이고 그런 식으로 연출을 했는지···.”
“하아···.”
“그런 최악의 상황이었다면 연기력을 인정받는 여기 나유정 씨 같은 분들도 발연기 논란을 피할 순 없을 겁니다.”
나는 담담하게 옆에 있는 나유정을 바라보았다. 그녀도 내 눈을 보며 살짝 미소를 짓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저 같으면 영화가 초반과 달리 그런 식으로 변해 간다면 대본을 찢고 감독하고 싸우고 관뒀을 거예요.”
그래. 이건 확실히 맞는 이야기다. 그녀라면 이해할 수 없는 캐릭터에 공감을 못 하고 대판 싸웠을 확률이 높았다.
“혹시···. 그런 식으로 어필을 해 보시진 않으셨는지···.”
“하긴 했는데요. 항의가 받아들여지지도 않았고 제가 관둘 수도 없었어요. 저도 어쩔 수 없이 출연한 영화다 보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관둘 수도 없는 영화였다고?
“저희 회사 투자자 중 한 분이 그 영화에도 투자한 모양이더군요. 회사에서도 난감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죠.”
이희진을 다독이는 이영상 실장의 말이었다.
“그래서 혹시 그 감독은···.”
“아! 맞아요. 그 감독은 그 투자자의 아들인가 그랬을 겁니다.”
어쩐지···. 이렇게까지 삼박자가 두루두루 맞아떨어질 수가 없는데 말이다. 말 그대로 폭망의 3대 요소가 동시에 등장한 셈이다. 허접한 각본, 무능한 감독, 외부 압력···.
“그런 감독이 어떻게 독립영화제에서 수상했을까요? 거참 신기하네.”
자연스럽게 의문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저도 그게 의심이 들어서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찾아봤는데···. 각본은 다른 사람이 썼더군요. 사실 그 감독이 영상미는 어느 정도 잘 뽑아내거든요. 뮤직비디오를 찍었던 감독이라···.”
“거기다가 촬영 도중 도저히 이해가 안 가서 감독님하고 언쟁이 있었어요. 그런데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이희진은 이제 마음을 추스른 듯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쪽대본이 난무했던 드라마도 어느 정도 이해는 갔어요. 사실 시청자 반응을 보면서 스토리를 고치다 보니 그러려니 했는데, 그 영화는 달랐어요. 감독님이 이해가 안 가는 연기를 하라고 종용하셨고···. 후반부터는 어쩔 수 없이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만···.”
“연기를 그렇게 하는데 오케이를 하던가요?”
“네···.”
허···. 그런 일이···.
“그리고 우리 희진이가 억울한 게 말이죠. 영화가 망하니 그 감독이 우리 희진이를 욕하고 다녔어요. 배우 때문에 망했다고 언론 플레이도 하고요.”
이영상 실장도 그때를 생각하면 화가 나는지 씩씩거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소인배의 전형을 보여 주는 감독이라고 할 수 있었다.
“흠···. 저는 작품하고 연기만 보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사실 그런 복잡한 사정은 몰랐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회사에서도 속 시원하게 대응을 못 했던 게 사실입니다. 우리 희진이만 SNS에서 테러당하고···.”
사실 그 감독도 신나게 욕을 먹고 있긴 했지만, 이희진도 그에 못지않게 피해를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 나를 만났으니 한숨을 돌려도 될 것이다. 아직 캐스팅 확정은 아니지만, 꼭 이번 작품이 아니라도 그녀를 캐스팅할 의사가 있었으니까.
어쨌든 처음부터 느낀 그 불안감의 실체가 바로 이거였던 거다. 그녀는 지속적인 악성 댓글로 심리 상태에 문제가 발생하고 있었다.
‘그래도 더 심각해지면 곤란한데···.’
최근엔 댓글이 없어졌지만 그건 포털 사이트에 한정된 이야기고, 오히려 음지로 숨어들면서 더 악질적으로 변해 가고 있었으며, 미튜브 등에서는 조회수 장사를 하는 채널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 가짜 정보가 무차별적으로 퍼지고 있었다.
“홀로 선 지 얼마 안 돼서 드라마에 출연하시고 호평을 받으셨는데 영화 때문에 많이 당황하셨겠네요.”
“그래서 더 적응이 안 됐던 거 같아요. 하아···.”
이희진은 그래도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나타났다고 느끼는지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것 같아 보였다.
원래 아이돌 그룹의 센터에는 비주얼이 강한 멤버를 세워 놓는 게 일반적이고, 대형 기획사인 SG에서 데뷔하는 그룹은 방송국에서 환대를 받고 팬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는 편이었다. 특히 이희진은 출중한 외모와 뛰어난 예능감으로 유독 인기가 많은 멤버였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심리적으로 좀 더 안정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로 했다.
“제가 봤을 때는···.”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기 위해 잠시 말을 끊고 한 박자 쉬었다. 이희진은 내 얼굴에 구멍이라도 낼 듯 집중해서 쳐다보고 있었다.
“희진 씨의 연기력은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
“혹시 몰라서 전작인 드라마도 찾아봤습니다. 그게 애가 딸린 싱글 맘 역할이셨죠? 영화 속 역할보다 어려우면 어려웠지, 쉽지 않은 역할이었습니다. 심지어 영화에서도 생각보다 연기를 잘하셨어요.”
“가, 감사합니다. 작가님.”
“그래서 저는 희진 씨가 출연한 그 영화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을 것이고 편견도 갖지 않을 예정입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네네···.”
“아마도 기사를 보셔서 아시겠지만, 우리 회사에서 곧 차기작 제작에 들어갑니다. 남자 배우는 정주빈 씨로 결정됐고 여주인공은 가장 어울리는 배우를 찾고 있는 중이죠.”
“혹시 저에게도 오디션 기회를 주시는 건가요?”
“다른 배우들도 연락이 많이 오다 보니 제가 여기서 확답을 드릴 수가 없다는 것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이것은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네.”
“희진 씨는 장래가 촉망되는 배우입니다. 단지 재수가 없었던 겁니다. 만약 저와 같이하게 된다면 저는 제 작품으로 희진 씨의 잠재력을 극한까지 끌어내도록 하겠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저도 꼭 해 보고 싶습니다.”
이희진은 내 말을 듣고 심호흡을 하며 의지를 다지고 있었다. 굳이 보지 않더라도 아우라가 강하게 뿜어져 나올 것 같은 분위기였다.
‘후후···. 아무리 봐도 여주인공에 너무 잘 어울려.’
그렇게 훈훈한 분위기로 회의가 끝나 가고 있었다.
“이 정도면 대략 이야기가 된 것 같은데요. 대본을 보내 드릴 테니 역할에 대해 연구를 좀 해 보세요.”
“작가님. 일단 기회를 주셔서 감사드리고, 오늘 오후에는 회사 투어 한번 하셔야죠? 궁금하신 게 많다고 들었는데요.”
“네. 소개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당연히 해 드려야죠. 작가님께서 이렇게 저희 희진이를 생각해 주시는데요. 점심 드시고 안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희 1층 레스토랑이 진짜 괜찮거든요. 거기로 예약을 했으니 한번 경험해 보시면 좋을 겁니다.”
“네. 안 그래도 TV에서 많이 나오던데, 가 보고 싶은 곳이었습니다.”
* * *
우리는 아티스트가 식사하는 공간으로 이동해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음···. 음식이 좀 비싸긴 하지만 고급스럽고 좋네.’
나는 메뉴판을 덮으며 유정 씨를 쳐다보았다. 유정 씨는 안 그런 척하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솔직히 나야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음악 방송에서 보던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고 있으니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저기요. 눈 좀 그만 돌리세요.’
‘제, 제가 무슨 눈을 돌린다고 그러세요? 생사람 잡지 마세요.’
‘하여간···. 솔직하지 못하네. 쯧쯧.’
우리가 그렇게 안 들리게 이야기를 하고 있자 이희진이 우리를 보고 말을 걸어 왔다.
“두 분 정말 보기 좋으세요. 제작사도 같이 운영하시고···.”
뭔가 오해하는 거 같은데 우리는 공식적으로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다. 물론 썸을 타는 사이는 맞지만···.
“비즈니스 관계입니다.”
“희진 씨. 오해하지 마세요. 정말 잘 맞아서 사업까지 같이하는 거예요.”
이희진은 우리 둘의 말에 살짝 당황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하여간 다들 이렇게 착각을 하고 있다니까? 이런 게 바로 언론의 반복 세뇌라는 거다.
‘물론 언젠가는 정식으로···.’
“흠. 생각해 보니 연기는 유정 씨가 선배인데 나이는 희진 씨가 2살 많으시죠?”
“제가 언니라고 불러도 되죠?”
“그, 그래도 될까요?”
“제가 영화로 데뷔했을 때 음악 방송에서 1위도 하고 그러셨는데요.”
“에이···. 그렇게 따지면 유정 씨는 아역 연기자 출신이신데···.”
“괜찮아요. 저 그런 거 별로 신경 안 써요. 우리 친하게 지내요.”
“그, 그럴까···.”
유정 씨는 선후배 관계에 대해서 그다지 민감하게 굴지 않는 편이었다. 그간 워낙 친구가 없었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았다.
“희진 씨는 예전하고 전혀 변함이 없으시군요. 제가 슈퍼걸즈 팬이었거든요.”
사실 팬은 아니고 좋아하긴 했다. 내 최애는 텐뮤지스였으니까···.
“아···. 정말요?”
“언니. 그거 정말일 거예요. 우리 대표님께서 저번에 언니를 시상식에서 보시고 표정이 그냥···. 쯧쯧···.”
“저기요. 그렇게 과장하지 마시고요. 당연히 팬심이죠. 팬심!”
내가 눈을 부릅뜨니 유정 씨가 나를 보고 혀를 빼꼼 내밀었다.
“하하하···. 진짜 부럽다.”
“뭐가 부럽습니까?”
“아, 아니에요. 그냥 하는 말이었어요.”
잠시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 나는 희진 씨에게 하고 싶은 말이 생각났다.
“희진 씨. 그 영화감독이 진상 짓을 많이 했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하···. 뭐 제 입으로 직접 말씀드리긴 어렵지만 지금도 밤잠을 설칠 정도죠. 이 정도까지만 말씀드릴게요.”
“그렇군요. 그 사람에게 가장 큰 복수가 뭔지 아십니까?”
“글쎄요? 그게 뭘까요?”
“차기작에서 연기력으로 증명하시면 됩니다. 인기를 얻고 연기도 인정받고요. 그럼 당연히 그 감독의 무능이 확 드러날 겁니다.”
“그럼 제가 노력을···.”
“아뇨. 희진 씨는 솔직히 노력도 필요 없어요. 제 생각에는 제대로 된 작품에서 그냥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만 100% 보여 준다면 그런 오명을 더는 듣지 않아도 될 겁니다. 이건 제가 보증합니다.”
“······.”
이희진은 내 단호한 표정을 보고 뭔가 울컥한 모양이었다. 두 눈가가 또 촉촉해지고 있었다.
“아휴···. 이 주책바가지! 요즘 진짜 나이가 들었나 봐요. 왜 자꾸 이렇게 눈물이 나는지···.”
그냥 사실이기 때문에 굳이 감동을 받으라고 한 이야기는 아니었는데···.
“언니. 우리 대표님이 자주 이래요. 말로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거든요? 그런데 그 말에 신비한 힘 같은 게 있는 거 아세요? 사람을 너무 정확히 봐서 허튼소리를 하지 않는 분이세요. 그러니까 믿으셔도 될 거예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왠지 힘이 나네요.”
그녀의 얼굴이 이전과 다르게 밝아진 느낌이었다.
“오늘 회사 투어를 하신다고요?”
“아···. 네. 평소에 궁금하기도 했고 해서요.”
“잘됐네요. 제가 소개를 해 드릴게요.”
“정말요? 안 그러셔도 되는데···.”
“어차피 일정도 없고 오후에 연습생들 주간 평가가 있거든요. 저도 심사위원이라 회사에 한번 물어볼게요. 특별 심사위원으로 참석할 수 있을지···.”
오오! 이런 횡재가!
유정 씨도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우리 J&J가 콘텐츠 제작 업체로 알려져 있다 보니 약간 경계심이 느슨한 것 같은데? 뭐 주간 평가를 본다고 연습생을 빼 온다거나 할 순 없겠지만···. 일류 기획사의 육성 시스템을 눈으로 직접 자세히 확인할 수 있겠어.’
나는 살짝 흥분한 상태로 허겁지겁 식사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