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는 스타 작가님-158화 (158/263)

나는 자연인이다 (4)

“해피 엔딩이라···.”

정주빈의 시선은 우리를 향해 있었다. 역시 일류 배우라 그런지 눈빛에 남다른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그렇다고 합니다.”

“뭐···. 일단 세팅은 된 것 같으니 저녁을 먹고 드라마를 좀 봐야겠네요.”

“주빈 씨. 그런데 ‘나만의 세계’가 16부작이거든요. 시간이···.”

“저는 볼 수 있을 때까지 볼 겁니다. 매니저님하고 수현 씨는 피곤하면 주무세요.”

그 말을 하고 저녁을 준비한다며 다시 위로 올라가는 정주빈이었다.

“수현 씨···. 갑자기 그렇게 자고 가겠다고 결정하시면 어떻게 해요?”

“죄송해요. 작가님. 그런데 작가님도 주빈 씨를 꼭 캐스팅하실 거라면서요. 그러면 저도 옆에서 최대한 바람을 잡아야죠.”

“끄응···.”

뭐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일단 알겠습니다. 내일부터 주말이라 다행이네요.”

“저도 그래서 자고 간다고 한 거예요.”

흠···. 아닌 거 같은데···.

뭐 그건 내 사정이 아니기 때문에 눈감아 주기로 했다. 나와 이수현은 정주빈 옆에 붙어서 최대한 나만의 세계에 대해 긍정적인 코맨트를 하기로 서로 입을 맞췄다.

“어떻게 보세요? 제 차기작에 관심이 많은 것 같은가요? 아까부터 옆에서 쭉 지켜보셨잖아요.”

나는 일부러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이수현을 쳐다보았다.

“오, 오해하지 마세요.”

“오해라뇨? 전 오해 같은 거 안 합니다.”

“아, 아무튼 제가 봤을 땐 주빈 씨가 작가님 작품에 크게 흥미를 느낀 것 같아요. 이제 고지가 좀 보이는 것 같아요.”

“그럼 정말 다행이고요.”

일단 정주빈을 캐스팅하면 1시즌 흥행은 그냥 자동으로 먹고 들어간다. 솔직히 정주빈이 아니라고 해도 흥행에는 지장이 없을 것 같지만 나도 욕심이 있는 사람이다. 가장 어울리는 배우가 캐스팅되는 게 최선이었다.

“그런데 주빈 씨는 왜 ‘나만의 세계’를 보자고 할까요? 제 역량이 궁금한 걸까요?”

“음···. 그럴 수도 있지만···. 제 생각은 아마도 결심을 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어요. 우리는 캐스팅하기 위해서 온 거지만 주빈 씨는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잖아요. 배우도 자기가 먼저 하고 싶다고 의견을 전달할 때는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해요. 특히 주연 배우급들은 말이죠. 자신의 결정이 맞는지 몇 번씩 확인하는 배우도 있어요.”

“아···. 수현 씨 말을 들어보니 좀 이해가 되네요. 주빈 씨는 우리의 의도를 전혀 모르니까요···.”

그럴 것 같았다. 정주빈의 입장에서는 오랫동안 연기를 하지 않고 있던 자신이 배역을 하겠다고 역으로 제안을 해야 한다. 그래서 결심을 굳히기 위해 내 전작을 확인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1층에서 우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식사하러 올라오세요. 준비 다 됐어요.”

우리는 다시 1층으로 올라가야 했다.

“이쪽으로 오세요.”

정주빈은 우리를 식탁으로 안내했고 나는 차려진 음식을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구운 고구마, 찐 감자에 풋고추에 된장, 거기다 수현 씨가 싸 온 김치까지···.

‘아니···. 무슨 구황 작물 마니아도 아니고···. 지금이 아포칼립스야 뭐야?’

그가 차려 놓은 음식을 보니 지하실에서 했던 이야기들이 머릿속에서 싹 다 포맷이 되는 것 같았다.

마치 ‘나는 자연인이다’에 나오는 출연자가 차려준 식사 같았다.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드세요.”

나도 모르게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안 그래도 먼 길 오느라 점심을 샌드위치로 대충 때웠는데 저녁에 고구마를 먹어야 한다니···. 이런 된장하고···. 풋고추하고···.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바로 고구마다. 웹소설을 연재하면서 독자들에게 제일 많이 들었던 말이 바로 이 고구마라는 구황 작물!

영지물을 쓸 때 대부분 작가들이 굶주린 영지민을 이 구황 작물로 먹여 살리는데 내 작품에서는 영지민을 굶겨 죽이면 죽였지 절대 고구마를 먹이지 않았다.

하지만 시장이 반찬이라고 배가 고파서 그런지 입속으로 잘만 들어갔다.

‘고구마가 달달하니 맛있긴 하네.’

거기에 겉절이까지 곁들여 먹으니 맛이 일품이었다. 허겁지겁 먹고 나서 다시 지하로 내려가서 드라마를 시청하기 시작했다.

* * *

정주빈은 1화부터 드라마를 보는 중이었다. 처음부터 건너뛰기 없이 정주행을 시작한 것이다.

‘으음···. 지금 7시 조금 넘었으니 이렇게 보다가는 12시가 되도 4~5편밖에 못 보겠는데?’

1화가 끝난 후 그의 평이 이어졌다.

“드라마의 배경이 살짝 어둡고 독특하군요. 가까운 미래를 잘 표현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직 스토리에 뭔가 특색이 있다고 보기 힘들군요.”

“초반이니까요. 이제 1화잖아요.”

2화가 끝난 후에도 그의 평이 이어졌다.

“연기는 잘하시는데···. 스토리가 전형적인 한국 드라마···.”

3부까지 보는 그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런 거 싫어하시나 봐요?”

3부가 끝나고 살짝 물어보니 그도 싫어하진 않고 그냥 즐겨 보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했다. 나만의 세계가 그에게는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자신 있었다. 4화부터는 분위기가 급반전되니까···. 드디어 이수현이 도청 내용을 듣고 졸도하는 신이 나왔다. 그제야 흥미가 생겼는지 자세를 고쳐잡는 정주빈이었다.

“... 무슨 이런 전개가···. 이러려고 작가가 계속 떡밥을 깔았네요. 불륜 드라마에 왜 자꾸 강력 사건이 이리 자세히 나오나 싶었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나는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수현 씨 연기 잘 봤습니다. 실감 나게 잘하셨네요.”

“그거야 대본이 좋아서···.”

“아닙니다. 수현 씨 진짜 잘하셨어요. 지금까지만 봐도 충분히 최우수 연기상을 받을 만하세요.”

“고, 고마워요.”

거의 쉬지 않고 봐서 그런지 아직 자정도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언제까지 볼 작정이지? 설마 잠도 안 자고 달릴 생각은 아니겠지?’

“어때요? 작가의 전작 볼만한가요?”

“이전화 까진 그냥 괜찮은 수준이었는데 4화부터는 긴장감이 엄청나네요. 갑자기 퀄리티가 확 올라가는 느낌이 나네요. 작가가 누군지 몰라도 진짜 천재 같은데···.”

그는 진심으로 탄복한 듯싶었다.

‘놀라기엔 좀 이른데···. 갈수록 강한 게 많이 나온단 말이야.’

옆에서 장단을 맞춰주고 싶었지만, 갑자기 피곤함이 물 밀듯 밀려왔다.

‘으으···. 피곤하다.’

“수현 씨 죄송한데요. 저는 잠깐 눈 좀 붙여야 할 것 같아요.”

“그러세요. 제가 같이 주빈 씨랑 같이 볼게요.”

“수현 씨도 피곤하시면 주무셔도 되는데..”

정주빈이 이수현을 돌아보며 말을 했다.

“아, 아니에요. 주빈 씨. 저도 오랜만에 한꺼번에 몰아서 보니 좋은데요?”

“아···.”

나는 쏟아지는 수마와 싸우며 몸을 소파에 뉘었다. 이수현에게 잘 부탁한다며 엄지척을 날려주었다.

‘으···. 진짜 피곤하다.’

그간 쌓였던 피로가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느낌이랄까? 캐스팅이고 뭐고 나도 모르게 스르륵 잠이 들고 말았다.

얼마나 잔 걸까? 눈을 비비고 앞을 보니 수현 씨가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 잠을 자고 있었고 초대형 TV 화면에서는 몇 회인지 모르겠지만 엔딩 크레딧 음악이 나오고 있었다.

‘으음···. 지금 세시가 넘었으니 대략 7~8화쯤인가?’

나는 일어나서 잠에서 깼다는 티를 내려고 했으나, 미동도 없이 TV를 바라보고 있는 정주빈의 모습에 도저히 움직일 수 없었다.

‘집중력 대박이네.’

정주빈은 한숨을 훅 내쉬더니 소파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는 천천히 이수현에게 걸어가 그녀를 물끄러미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쳐다보는 게 아닌가?

그러더니 1층으로 올라가 얇은 이불을 가지고 내려왔다. 그는 이불을 펼쳐 이수현에게 덮어주었다.

‘나, 나는···.’

아무래도 이불이 딱 하나뿐인 모양이었고 나는 그냥 알아서 잘 자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다 갑자기 그가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아 조용히 자는 척을 했다.

“더 보고 싶지만 아무래도 이만 자야겠지?”

그는 나직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불을 끄고 소파에 누워 잠을 청했다.

“시리즈가 진짜 점점 재밌어지네.”

나에게는 정주빈의 그 말이 천사의 자장가처럼 들려왔다. 자리는 불편했지만, 왠지 좋은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다음 날이 밝았다.

달그락···. 달그락···.

나는 뭔가 부닥치는 소리를 듣고 눈을 번쩍 떴다. 정주빈이 쟁반을 들고 찻잔을 치우는 중이었다.

그도 아침에 세수를 안 한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나와 얼굴이 다른 걸까? 정말 미스터리였다.

“으음···.”

“일어나셨어요?”

“아침 드세요. 매니저님.”

쟁반에는 어제 먹었던 고구마가 담겨 있었다.

“어? 수현 씨는요?”

“마당에서 누렁이랑 놀고 있어요.”

“으으으···. 그렇군요. 아우···. 왜 이렇게 개운하지? 별로 편하게 잔 거 같지도 않은데 피로가 싹 풀린 것 같아요.”

“산이라서 그럴 겁니다. 주변 환경이 너무 좋으니까요.”

그는 나에게 고구마 하나를 건넸다. 그리고 리모컨을 들어 8화를 플레이시켰다.

“드세요. 전 방금 먹었어요.”

“새벽까지 보신 거 같던데 안 피곤하세요?”

“드라마를 오랜만에 봤더니 피곤한 줄 모르겠는데요? 평소에 잠을 많이 자기도 하고요. 하하···. 이제 전 드라마에 집중하겠습니다. 이거 진짜 재미있네요. 연출도 잘했지만, 내용이 너무 재미있네요.”

“아···. 그 정도입니까?”

“네. 차기작 대본도 엄청 재밌던데 전작도 정말 흥미롭네요. 저랑 취향이 딱 맞는 거 같아요.”

그는 그 말을 끝으로 TV에 시선을 고정했다.

‘흐흐···. 됐다. 이제 거의 80~90%는 넘어온 듯.’

나는 고구마 껍질을 벗기며 득의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정주빈은 오전 내내 드라마를 쉬지 않고 시청하고 있었다. 상당히 몰입한 상태였기 때문에 굳이 옆에서 말을 걸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나는 정주빈을 이수현에게 맡겨 놓고 1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천외딸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어제 새벽 이수현에게 이불을 덮어주는 정주빈의 따뜻한 눈빛이 자꾸 아른거려서 그런지 로맨스가 잘 써질 것 같았다.

점심에는 수현 씨랑 차를 타고 밖으로 나가서 장을 봐왔다. 고구마로 삼시 세끼를 때울 수 없는 노릇 아닌가!

나와 이수현은 고기와 찌갯거리를 사서 다시 정주빈의 집으로 복귀했다. 그렇게 점심에 김치찌개를 맛있게 해 먹은 뒤 또다시 글을 썼다. 이렇게 집중이 잘 될 때 최대한 많이 써놓는 것이 비축분을 쌓는 요령이었다.

글을 쓰다 보니 벌써 4시가 다 돼가고 있었다.

이제 거의 시리즈가 끝나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지하실로 내려가 보니 마침 16부의 마지막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나지혜와 사이코패스 3인방이 죽고 김인애가 한승호의 일기를 찾아서 읽는 장면과 한승호의 비극적인 과거가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어린 한승호가 담벼락 너머 엄청난 고층 빌딩을 올려다보는 것으로 드라마가 끝이 났다.

‘휴···. 이제야 끝났네. 이제 정주빈과 결판을 짓고 집으로 가야···. 으응?’

“크흑···.”

내 시야에 소파에 앉아서 고개를 쳐들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정주빈의 모습이 들어왔다.

“주, 주빈 씨···. 괜찮으신지···.”

“휴지···. 거기 휴지 좀”

“여기요.”

“죄송합니다. 제가 못볼 꼴을 보였네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보기 좋은데요. 뭐···.”

“제 인생작이 또 하나가 추가됐네요.”

정주빈은 휴지로 눈물을 훔쳐내고 있었다. 아이처럼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한다고 할까? 자연인처럼 살더니 감수성이 풍부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외로워서일지도···.’

그는 잠시 감정을 추스르고 이수현을 바라보았다.

“수현 씨. 이거 쓰신 작가님 좀 소개해 줄 수 있나요?”

“네?”

“그 작가님이 쓰신 ‘나만 아는 세계멸망’에 출연하고 싶습니다.”

“정말요?”

끄덕끄덕···.

‘오케이! 나이스! 좋았어.’

이 미션은 험난했으나 보상은 너무도 달콤했다.

‘됐다. 좀비 벙커물에 자연인 정주빈이 나오면 게임 끝이다. 끝! 이게 바로 전쟁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기는 방법이지!’

“혹시 작가님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자, 작가님요? 이준형 작가님이라고···.”

이수현은 당황한 나머지 사실대로 내 이름을 발설하고 말았다.

“응? 이준형 작가님요? 수현 씨 매니저님하고 이름이 같네요. 이런 우연이 있나. 하하하···.”

그는 그 사실이 재미있는지 소리를 내며 웃고 있었다.

‘음···. 울다가 웃으면 똥꼬에···. 아, 아니다···.’

나는 얼굴에 웃음기를 지우고 정주빈을 차분하게 쳐다보았다. 그는 웃고 있다가 무표정한 내 얼굴을 보고 급히 웃음을 멈추었다.

“아니···. 왜 그런 표정을···.”

“접니다.”

“네? 갑자기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저라니요?”

“그 작가가 저라고요. 동명이인이 아니라···.”

“..........”

“제 권한으로 주빈 씨를 곧바로 캐스팅하겠습니다.”

“허···.”

말문이 막힌 정주빈은 아직도 이해가 안 가는지 이수현과 내 얼굴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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