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는 스타 작가님-157화 (157/263)

나는 자연인이다 (3)

정주빈은 한숨을 내쉬더니 뭔가를 결심한 듯 대본을 달라고 했다.

“여, 여기 있어요.”

이수현이 들고 있던 대본을 정주빈에게 넘겨주었다.

‘그렇지! 이런 자연스러운 전개 너무 좋다.’

정주빈은 첫 페이지를 넘기며 대본을 읽기 시작했다. 10분, 20분, 30분···. 그는 가볍게 읽다가 점차 내용에 빠져들었다. 시시각각 표정이 변하더니 급기야 글을 읽는 데 모든 정신이 팔린 사람처럼 극도로 집중하기 시작했다.

‘나도 재미있는 소설을 읽을 때면 가끔 저런 경우가 있긴 한데···.’

물론 인생작을 만났을 경우였지만···.

30분이 지나자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내 작품을 저렇게 열심히 읽어 주고 있지만, 인간의 한계라는 게 있는 법이다.

하지만 이수현은 그게 지루하지 않은지 정주빈을 계속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좀이 쑤신 나머지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그리고 검지를 들어 입술에 가져다 댔다.

끄덕끄덕···.

이수현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조용히 신발을 신고 마당으로 나갔다.

‘집중력 대단하네.’

정주빈의 집중력은 놀라울 정도였다. 학교 다닐 적 단짝 친구였던 경태가 수학 문제를 풀 때 불러도 대답이 없을 정도로 집중하곤 했었는데 거의 그 수준인 것 같았다.

그래도 뭔가 내용이 흥미를 끌고 재미가 있으니 저러는 것 아닐까? 대본을 읽어 보고 과연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 정말 궁금했다.

2시즌 분량이면 아무리 저런 식으로 집중해서 읽는다고 해도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았다. 나는 마당에서 일광욕을 즐기고 있던 누렁이한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 녀석을 보니 갑자기 잡식누렁이가 생각나네.’

고개를 돌려 왼쪽을 보니 15평 남짓의 별동이 세워져 있었다. 아무래도 개러지 하우스(차고 겸 창고)가 아닌가 싶었다. 나는 호기심에 천천히 차고로 걸어갔다.

‘응? 문이 열려 있네?’

나는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중앙에 회색 지프 한 대가 주차되어 있었다. 미국 브랜드인데 사하라 사막을 건널 수 있다고 홍보하는 차였다.

‘허···. 차 취향까지 주인공이랑 비슷하네.’

아무래도 외진 산속에서 살다 보니 이런 오프로드용 모델을 고른 것 같았다.

‘AS 받으려면 힘들지 않나? 뭐 어쨌든···.’

잘 타고 다니지는 않는지 차 외관이 깨끗했다. 그리고 차고 옆면에 각종 공구가 다양하게 정리돼 있었다.

‘어라? 자동차도 셀프로 정비하나? 설마···.’

선반 위에 각종 공구와 여러 가지 물품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는데 약품이나 청소 도구들도 눈에 띄었다.

‘크···. 바로 이게 남자들의 로망인데···. 어라? 공간이 좀 협소하네? 아···. 공간이 분리돼 있구나.’

쪽문을 열고 이어진 공간으로 들어가 보았다. 놀랍게도 그곳엔 공방이 존재했다. 아무래도 간단한 가구는 직접 만드는 것 같았다. 가구 제작용 나무들과 공구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나는 믿기지 않는 광경을 보고 입을 틀어막을 수밖에 없었다.

‘미, 미쳤는데? 어떻게 이렇게 비슷할 수가 있지?’

주인공과 정주빈의 싱크로율이 점점 더 올라가고 있었다.

공방 구경까지 마치고 다시 마당으로 나와 마루를 보니 아직까지 대본을 읽고 있는 정주빈이 시야에 들어왔다.

‘다 읽으려면 아직 먼 것 같은데 뒷산에라도 올라가 봐야겠다.’

집 뒤편으로 올라갈 수 있는 그리 높지 않은 야산이 있었는데 경치가 꽤 좋은 편이었다. 오솔길을 따라 천천히 걷다 보니 정주빈의 말대로 야산 초입에 캠핑장으로 쓰이던 곳이 나타났다.

‘어라? 운영하지 않는 캠핑장 치고는 깨끗하네?’

아무래도 정주빈이 지나다니면서 주기적으로 청소를 하는 모양이었다. 식수대와 간이 화장실, 그리고 캠핑장 뒤로 작은 천이 흐르고 있었다.

“물도 맑고 인적도 드물고 캠핑도 할 수 있고···. 진짜 괜찮은데? 우리 연습생 애들 데려와서 미튜브 캠핑 영상을 찍으면 딱 좋겠다.”

나는 우리 연습생 다섯 명이 꽃미남 추노꾼 정주빈에게 캠핑 강의를 듣는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다.

‘후후···. 이 녀석들 연습은 잘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갑자기 데뷔를 위해 불철주야 연습에 매진하고 있는 녀석들이 떠올랐다.

흐르는 물을 바라보다가 나무가 우거져 있는 오솔길을 따라 야산을 한번 돌아보았다. 그래도 나름 산이라 그런지 시간이 꽤 소요되었다. 산 정상에서 잠시 쉰 나는 다시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띠링!

휴대전화로 이수현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어디 계세요? 주빈 씨 대본 이제 거의 다 읽어 가요. 작가님 얼른 돌아오셔야 할 것 같아요.]

시계를 보니 벌써 오후 5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조금만 있으면 해가 질 것 같았다. 나는 황급히 빠른 속도로 산에서 내려갔다.

잠시 후 정주빈의 집에 도착한 나는 서둘러 비밀번호를 누르고 마당으로 들어갔다.

정주빈은 막 읽기를 끝마쳤는지 손으로 대본을 덮고 심호흡을 하며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어떤 상황인지 이수현의 얼굴을 쳐다보니 그녀가 살짝 윙크하며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게 아닌가?

나는 그것이 긍정적인 신호일 것이라 생각했다. 지금 현재 누구보다도 정주빈을 잘 아는 사람이 다름 아닌 그녀일 테니까···.

내가 근처로 다가가자 정주빈이 갑자기 눈을 뜨며 이수현을 바라보았다.

“수현 씨···.”

정주빈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뭔가를 살짝 억누르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네···. 말씀하세요.”

“이거 쓰신 분이 누구십니까?”

“자, 작가분이요? 그게···.”

그녀는 살짝 당황한 표정으로 대답을 하지 않고 내 얼굴만 보고 있었다.

아직 드라마의 전체적인 윤곽이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에 인쇄한 대본에는 작가나 감독의 이름이 없었다. 최종 확정이 나면 기획, 제작, 책임 프로듀서, 극본, 연출 등··· 모든 정보를 넣고 정식으로 인쇄할 예정이었다.

‘내가 쓴 거라고 이 자리에서 밝혀야 하나?’

나조차 살짝 고민할 수밖에 없었는데···.

“아! 잠시만요. 알려 주지 마세요.”

정주빈이 갑자기 손을 들어 이수현의 말을 막았다.

“혹시 말이죠. 이 작가님 전작이 있나요? 직접 봐야겠어요. 선입견 없이요.”

정주빈은 내 전작을 보고 결심을 굳힐 생각인 듯했고, 감정선을 살리기 위해 도움을 주려던 원래 목적은 온데간데없어지고 말았다.

이수현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눈만 굴리며 내 얼굴만 쳐다보고 있는 상황···.

“이 작가님 전작이 ‘나만의 세계’ 아닌가요?”

어쩔 수 없이 내가 끼어드는 수밖에 없었다.

“마, 맞아요. 그 작품이에요.”

“수현 씨가 그 작품으로 최우수 여자 연기상을 수상했잖아요?”

“그, 그렇죠. 이 대본이 그 작가님 후속작이에요.”

정주빈은 그 말을 듣고 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랫동안 드라마나 영화를 안 봤는데 한번 봐야겠군요.”

그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집 안으로 들어갔다. 나와 이수현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엉거주춤 일어나 그를 따라갔다.

정주빈이 사는 곳은 작지도 크지도 않았다. 그냥 딱 20~30평대로 집 내부에는 별다른 게 없었다. 기본적인 가구와 살림살이만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었다.

‘허···. 무슨 미니멀 라이프도 아니고···. 왜 이렇게 휑하지? 유정 씨 집보다 더한 집인데?’

정주빈은 갑자기 우리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곧 어두워지겠네요. 오신 김에 자고 가시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요?”

“예?”

“조, 좋아요.”

‘어라?’

내가 말릴 겨를도 없이 자고 가겠다고 하는 이수현이었다. 난감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수현 씨 뭐지? 혹시 주빈 씨를?’

생각해 보니 처음부터 이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아···. 그렇구나.’

[친구의 친구를 사랑했네.]

아주 어렸을 적에 들었던 노래가 생각났다. CF에서 나왔던 노래였다.

‘쓰읍···. 그건 그거고 일단 목표는 캐스팅이니까 긍정적으로 생각해 봐야겠는데?’

옆을 보니 이수현이 왜 대답을 안 하냐는 표정으로 초조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차피 내일부터 주말이니까 그냥 하룻밤 자고 갈까요? 하하···. 그런데 잘 곳이 마땅치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정주빈의 집은 사실상 원룸과 다름없었다. 주방 겸 거실엔 오로지 식탁뿐이었고, 잠을 자는 곳으로 보이는 작은 방 하나만 존재했다.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정주빈이 구석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돌돌 말린 침낭으로 보이는 것을 들어 옆으로 치우기 시작했다.

“치, 침낭인가요?”

군대에서 훈련받을 때 들어가던 침낭이 생각났다.

‘제길···. 군 시절에도 침낭에서는 한숨도 못 잤는데···.’

은근히 잠자리에 예민한 남자였다.

“아···. 이건 그냥 캠핑 갈 때 쓰는 거고요. 잠시만요···.”

정주빈은 침낭을 치운 자리에 있던 카펫까지 걷어 내기 시작했다. 카펫을 치웠더니 지하로 내려가는 비밀의 문이 보였다.

“오! 지하실인가요?”

“네···. 지금은 안 써서 막아 놓은 곳인데 매니저님하고 제가 여기에서 자면 됩니다. 물론 저는 드라마를 볼 거지만요.”

그가 말을 마치고 허리를 숙여 문을 여니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드러났다.

“오···. 뭔가 비밀의 방 같네요.”

“원래 이 집이 별장 개념으로 설계한 집이라 예전에 집 지을 때 만들어 놓은 공간입니다. 휴가 때 틀어박혀서 실컷 영화나 드라마를 보려고 했던 곳이죠.”

“그렇군요.”

그는 스위치를 눌러 조명을 켜고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와···. 대박···.”

이곳에서 그나마 제일 사람이 사는 것처럼 꾸며 놓은 공간이었다. 그리 크지 않았지만, ‘ㄷ’ 자 형태의 넓은 소파와 초대형 TV, 그리고 부부가 함께 다정하게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 같은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벽면을 예쁘게 장식하고 있었다.

나는 그 인테리어를 감상하며 뒤따라 내려오는 이수현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그녀는 지하 영화 감상실을 놀라워하더니 벽면에 도배된 예전 사진들을 보고 얼굴이 살짝 굳는 것 같았다.

“머, 멋지네요.”

맘에도 없는 말을 하는 것처럼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TV는 나옵니까? IPTV 같은 게 나와야 다시 보기라도 볼 텐데요.”

“위성 인터넷이랑 TV가 있습니다. 요즘은 안테나 없이도 되더라고요.”

그는 TV를 켜고 ‘나만의 세계’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거의 사용을 안 했는지 검색하는 게 능숙하지 않은 것 같았다.

“줘 보세요. 제가 할게요.”

“아···. 감사합니다. 그 리모컨은 적응이 안 되네요.”

“그나저나 아까 마루에서 대본을 엄청나게 집중해서 읽으시던데요. 어떠셨어요?”

나는 프로그램을 검색하면서 대본에 대해 살짝 물어봤다.

꿀꺽···.

이게 뭐라고 이렇게 긴장이 되지?

“하아···. 이걸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정주빈은 한숨을 푹 내쉬며 잠시 소파에 앉았다.

“왜 그러시는지···.”

“이제 은퇴를 하고 당분간 관심 있는 일을 하면서 살아보려고 했는데···.”

그는 말끝을 흐렸지만 뭔가 마음에 변화가 생긴 건 확실해 보였다. 속으로 무척 기뻤지만 직접 표현할 순 없었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보고 뒤쪽에 서 있던 이수현이 맞은편 소파에 앉으며 나를 거들었다.

“저는 엄청 재미있었어요. 이런 드라마라면 굳이 주연이 아니라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오! 수현 씨! 나이스 어시스트!’

“하···. 이제야 마음의 안정을 찾았는데···.”

갈등하는 저 모습을 보니 나까지 애가 탄다. 그냥 출연해도 될 거 같은데···.

그렇게 그를 지켜보다가 문득 뒤편에 예쁘게 장식되어 있던 커플 사진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 뭔가 번쩍하고 지나갔다.

‘어? 설마···. 그건가?’

나는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천천히 그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수현 씨! 수현 씨는 가져온 1, 2시즌 대본 말고 뒤 내용도 읽어 보셨죠?”

“네? 네네···.”

“거기 보면 히로인이 사라지지 않습니까?”

“네. 맞아요. 그래서 주인공이 셸터를 나와서 잡혀간 그녀와 동료를 찾아 나서는 게 3시즌의 시작이죠.”

“나중에 주인공과 히로인은 어떻게 되나요?”

나는 내용을 알고 있으면서 일부러 이수현에게 묻고 있었다.

“네? 아! 그거야 해피 엔딩으로 끝나죠.”

그녀도 이제야 뭔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2시즌의 끝부분은 좀비 웨이브를 막은 줄 알았던 셸터가 파괴되어 일행들의 일부는 죽고 일부는 사라지는 내용이다.

정주빈이 그 충격적인 장면에서 자신의 아픈 과거를 다시 떠올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왠지 모르게 배드 엔딩의 느낌이 모락모락 나는 2시즌. 그는 혹시 그걸 보고 주저했던 게 아닐까?

“해피 엔딩이라···.”

드디어 정주빈이 뭔가를 결심한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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