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연인이다 (1)
“응? 갑자기 주빈 씨는 왜?”
이수현은 정주빈과 친하냐는 물음에 웃음기를 지워 버렸다.
“저번에 언니가 정주빈 씨하고 친하다고 했던 게 기억나서요.”
나유정은 그녀의 특이한 반응에 이상을 감지했는지 농담을 배제하고 차분히 질문을 이어갔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주빈 씨가 아니라 세아랑 절친이었지.”
세아라면 아마도 임세아를 말하는 것 같았다. 인기 배우이자 정주빈의 사별한 아내 말이다. 생각해보니 그들은 얼마든지 친해질 수 있는 연예계의 동년배였다.
“주빈 씨랑도 친했다고 얼핏 들었던 거 같은데···.”
“당연히 주빈 씨와 함께 자주 만나긴 했지. 세아의 남자친구였으니까···. 결혼하고는 자주 못 봤지만 세아가 그렇게 되고 나서는 기일이라던지 김치 담근 거나 반찬 같은 거 갖다 줄 때 가끔 봐.”
“에? 반찬이요? 수현 씨가 반찬을 갖다 준다구요?”
가족도 아니고 뜬금없이 반찬이라니?
이수현은 우리 둘의 의아한 눈초리를 보고 별일 아니라는 듯 담담히 설명했다.
“주빈 씨가 부모님이 안 계시거든요. 두 분 다 돌아가셨어요. 친척들하고는 금전 문제 때문에 완전 남남이 됐구요. 원래 성격도 낯을 좀 가려서 친구도 많이 없어요. 그래서 제가 가끔 방문해서 김치 같은 걸 가져다주곤 해요. 뭐···. 최근에는 굳이 안 와도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구나. 그나마 언니가 몇 안 되는 지인 중에 하나겠네요.”
“그렇지. 휴···.”
이수현이 대답을 하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뭔가 걱정이 있으신가 보군요. 그 사고 이후로 상태가 많이 안 좋으신 것 같은데···. 얼핏 들어보니 아예 연예계를 은퇴하실 작정이신 거 같던데요. 혹시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으신 건 아닌지 걱정이네요.”
“정신적인 문제 같은 건 전혀 없어요!”
‘아이···. 깜짝이야.’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는 이수현이었다.
“갑자기 왜···.”
“미안해요. 말도 안 되는 이상한 소문이 퍼지면 안 되거든요.”
“저희는 믿으셔도 됩니다. 어디 가서 절대 이상한 소리를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주빈 씨 사정은 왜 물으시는 거죠? 혹시 캐스팅이라도 하시려고요?”
“응. 맞아 언니. J&J에서 차기 작품을 들어가거든. 스케일이 엄청난 작품인데 준형 씨가 정주빈 씨를 1순위로 생각하고 있어.”
나유정이 옆에서 적절히 추임새를 넣고 있었다.
“아···.”
“사실입니다. 수현 씨. 조만간 캐스팅과 제작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일단 주인공으로 주빈 씨를 생각하면서 쓴 거라 캐스팅 제의를 하고 싶습니다. 혹시 수현 씨가 연결을 좀 해주실 수 있나요?”
내 말을 들은 이수현이 다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마 안 할 거예요. 원래부터 연기에 큰 욕심이 없던 사람인데 세아를 떠나보낸 뒤 더 의욕을 잃었어요. 소속사에서 대본을 놓고 가면 아예 쳐다보지도 않거든요.”
“큰일이네···.”
“하···. 차선책으로 다른 배우를 고려해야 하나? 백현 씨는 아직 북한군 장교 이미지가 남아 있는데···.”
나는 나유정과 함께 머리를 싸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진짜 주빈 씨가 딱인데···. 그 특유의 분위기 하며···.”
“그런데 그렇게 은퇴를 결심하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데 괜찮은 거예요?”
“정신적으로는 괜찮아요. 그건 제가 보증할 수 있어요.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면 세아와 아픈 추억도 이제는 많이 떨쳐낸 것 같아요. 단순히 연기하는 것에 흥미를 잃은 걸 거에요.”
“그런데 주빈 씨는 왜 계속 은둔 생활을 하는 거죠?”
“대중들의 시선에 염증을 느끼는 걸지도 몰라요. 워낙 사람들이 가만 놔두지 않잖아요.”
“하긴 성격 안 맞으면 연예인 하기 힘들죠. 더구나 낯을 가리는 성격이라면요.”
정주빈이라면 그럴 것 같았다. 뛰어난 외모로 길거리 캐스팅을 통해 데뷔한 그는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연기력을 계속 갈고닦았으며 마지막으로 출연한 영화에서는 천룡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까지 수상했다. 남녀 모두가 인정하는 완벽한 외모로 한국과 아시아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으나 공식 석상 이외에는 얼굴을 일절 비추지 않았다.
‘너무 베일에 싸여 신비로운 이미지가 있는 배우야. 그래서 딱이지.’
은둔 생활이 오래 지속되자 최근에는 그가 어디에 나타났다는 정보와 사진이 인터넷에 돌며 이른바 도시 전설쯤으로 취급되고 있었다.
“아···. 어떡하지?”
“그런데 차기작이 어떤 작품이죠? 제가 알면 안 되는 건가요?”
“아! 아닙니다. 이제 바로 공개적으로 캐스팅도 해야 하고 어차피 알려질 일이라···.”
나는 이수현에게 ‘나만 아는 세계멸망’에 대한 스토리를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이수현은 스토리를 듣더니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7시즌으로 기획된 좀비물이라는 거죠? 스케일이 커서 상당히 흥미롭네요.”
“사실 이 정도 사이즈로 제작하려면 회사의 명운을 걸어야 하는데 넷플릭이 선뜻 제작비를 내준다고 합니다.”
“잘됐네요. 주빈 씨도 너무 그렇게 집에만 있으면 안 되는데···. 하아···. 연기는 안 한다고 하고···. 이거 어쩌죠?”
이수현이 뭔가 해결책을 내놓을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지라 초조하게 그녀의 입만 바라보고 있었다.
“안 그래도 이번 주에 김치랑 반찬이랑 해서 한번 다녀오려고 했거든요.”
“오!”
왜 수현 씨가 이렇게까지 신경 쓰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마른하늘의 단비와 같은 구원의 손길이었다.
‘역시 사람은 두루두루 친해 놔야···.’
“네. 저도 이제 하던 드라마도 끝났고 잠시 쉬려고 했거든요. 그래서 겸사겸사해서 다녀오려고 했죠.”
“와! 정말요? 말 좀 잘해주시면 안 돼요? 준형 씨 작품 진짜 재밌어요. 드라마 잘 나올 것 같다가 아니라 그냥 내용 자체가 너무 재밌어요.”
“그, 그 정도니?”
끄덕끄덕···.
“부탁드립니다. 수현 씨. 저는 정말 주빈 씨와 함께하고 싶습니다. 주빈 씨도 이 드라마를 통해 다시 연기를 시작했으면 좋겠고요.”
“그럼 제가 대본을 전달해 주면 될까요?”
“네! 그러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줘도 안 볼 거 같은데···.”
“괜찮습니다. 그래도 시도는 해봐야죠.”
“확률은 낮지만 일단 시도는 해볼게요.”
나는 나유정을 쳐다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녀도 피식 웃으며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수현 씨 혹시 주빈 씨 집이 어딘가요? 예전 기사를 보니 강남 삼성동 어디라고 하는 것 같던데요?”
“아···. 거긴 신혼집이라 얼마 전에 팔았어요. 그거 정리하고 지금은 강원도에 가 있어요.”
“네? 강원도요? 강원도 어디요?”
“정선이요. 거기가 주빈 씨 고향이거든요.”
“아···. 그렇구나. 그럼 서울에서 상당히 머네요?”
“한적한 곳에서 살고 싶은가 봐요. 인적이 드문···.”
흐음···. 이거야 원. 멀리도 가셨네. 왠지 느낌이 싸한데 이거···.
뭔가 느낌이 심상치 않아서 정주빈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현 씨. 혹시 제가 정선 가실 때 운전해드릴까요?”
“운전이요?”
이수현은 독립해서 1인 기획사를 차려서 배우 활동을 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해왔던 여자 매니저와 함께 스케줄을 다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네. 저도 요즘 바쁘게 일만 해서 머리 좀 식힐 겸···. 아 저를 매니저라고 소개하면 되겠네요. 어차피 제 전직이 매니저 아닙니까? 하하!”
“그럼 나도 갈래요.”
갑자기 나유정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서 눈을 부릅떴다.
‘하지 마요.’
‘왜요! 나도 갈래요.’
‘내가 지금 놀러 가는 거 같아요?’
‘..........’
우리는 입 모양과 표정으로 대화하고 있었다.
“음···. 운전을 해주시면 고맙긴 한데요.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네네. 뭐든 다 들어 드립니다. 말씀만 하시죠.”
“저도 그 대본 좀 볼 수 있을까요?”
“대본요?”
갑자기 대본을 요구하는 이수현의 요청에 놀라고 말았다.
“사실···. 수현 씨 나잇대의 배역은 조연밖에 없어서요. 주고 싶어도 마땅한 역할이 없···.”
“괜찮아요. 제가 읽어 보고 혹시 괜찮은 역할이 있으면 말씀드릴게요. 제가 언제 주연, 조연 가리는 거 보셨어요? 전 작품이나 배역에 꽂히면 주저 없이 그냥 하는 편이에요.”
“아···. 그러셨죠.”
내가 깜빡했다. 그녀는 배역을 가리지 않는 것으로 정평이 난 배우였다. 그렇게나 많은 역할을 했기 때문에 연기를 그렇게 잘하는 걸지도 몰랐다.
“대본 좀 받을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보내드릴 테니 한번 읽어 보세요.”
그렇게 이수현을 통해 정주빈과 만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일단 되든 안 되든 직접 부닥쳐 볼 생각이었다. 만약 그가 나같이 모르는 사람을 경계하면 죽도 밥도 안 되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이틀이 흐르고 금요일이 되었다. 나는 차를 몰아 강남 이수현의 집에 들러 김치와 반찬들을 트렁크에 실었다. 양이 상당히 많았다.
‘휴···. 유정 씨 떼어 놓고 오느라 힘들었다.’
나유정이 계속 강원도까지 따라간다고 해서 말리느라 힘들어 죽는 줄 알았다.
‘나도 매니저라고 속이고 따라가는 건데···.’
“자! 이제 출발하실까요?”
왠지 주말부부를 하는 누나를 데리고 매형을 보러 가면 이런 모습일까 하는 뜬금없는 생각을 하며 차에 시동을 걸었다.
* * *
오랜만에 서울을 벗어나니 기분이 상쾌했다. 예전에는 테리우스를 데리고 다니면서 전국을 누볐는데···. 하지만 그런 감상도 잠깐 이수현의 폭풍 질문이 한 시간째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군인 부부는 아직 캐스팅 미정이란 말씀이시죠?”
“네. 남편 역은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있긴 있는데 부인 역은 아직입니다.”
“남편 역은 혹시 누구···.”
“저희 소속 배우인 정혜성 씨요. 물론 아직 이야기는 안 했습니다.”
“아! 그럼 제가 군인 부부의 아내 역할을 해도 될까요? 작중에서도 연상연하 커플로 나오니 딱 맞네요. 호호···.”
이수현은 조연인데도 불구하고 굳이 내 작품에 출연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어차피 2시즌까지만 나오니 나유정과 겹치지도 않아서 ‘나만의 세계’ 2시즌이라는 말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연상연하 군인 부부는 2시즌의 슈퍼 쉘터 공성전에서 엄청난 활약을 펼치는 캐릭터로 극 초반 상당히 중요했다.
특히 임신 초기지만 적극적으로 좀비들을 도륙하는 강한 여성으로 나오는데 실로 매력적인 캐릭터라고 할 수 있었다.
“음···. 그런데 수현 씨는 이제 드라마에서 주연급을 맡아도 부족함이 없는데요. 배역이 조연인데 굳이 출연하실 필요가 있나 싶네요.”
“그런 거 전혀 신경 안 써요. 전 하고 싶은 배역은 크든 작든 해보자는 생각을 하고 있거든요.”
“그렇군요.”
“작가님 작품 너무 재밌어요. 전 배우의 작품이 영원히 남는 유산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무엇보다도 재미있고 훌륭한 작품에 출연하는 게 목표에요.”
아···. 영원한 유산이라···. 우문현답이네.
“그래요. 수현 씨. 일단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강원도 정선으로 향하고 있었다. 운전한 지 3시간째···. 허리도 아프고 해서 잠시 작은 간이 휴게소에 내려서 나는 커피와 음료수를 사 오고 이수현은 화장실에 다녀왔다.
“사람이 별로 없네요.”
나는 차로 걸어오는 이수현에게 시원한 아메리카노를 건넸다.
“잘 마실게요.”
우리는 다시 차에 타서 목적지로 출발했다.
“와! 도대체 집을 어디에 마련한 거래요? 3시간을 달려왔는데도 아직이에요?”
“그, 그게···. 어디 산 근처라던데···. 진짜 산속인가?”
“산속이요? 왜요? 진짜로 은둔 생활이라도 한답니까?”
“그, 글쎄요? 이사한 곳은 저도 이번에 처음 가보는 거라···.”
차를 몰고 20분을 더 들어가서 드디어 정주빈의 집에 도착했다. 그의 집은 정선의 깊은 산속 초입, 풍수지리적으로 아주 좋은 배산임수 지형에 자리 잡고 있었고 주변의 커다란 나무들로 인해 사람들에게 쉽게 노출되지 않는 그런 절묘한 곳이었다.
‘으···. 진짜 더럽게 머네···.’
차에서 내려서 주변을 살펴보니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잡지에 나올 그런 멋진 집을 생각했지만 마치 일부러 자연 친화적으로 집을 지은 것처럼 단출한 한옥 느낌이 나는 그런 집이었다.
“이, 이게 뭐죠?”
“자, 잠시만 기다리세요. 대문 비밀번호가 뭐였더라?”
이수현은 휴대전화를 꺼내 뭔가를 확인하고 있었다.
“헐···. 초인종이 없군요.”
“그 대신 여기에 커다란 택배함이 있죠.”
그녀는 손을 들어 택배함을 툭툭 치고 있었다.
“여기까지 택배를 배달해 준답니까? 이런 곳은 운송료를 더 줘야 할 거 같은데요?”
“후후···. 큐팡은 다 해줄걸요?”
그녀는 비밀번호를 찾았는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나도 커다란 플라스틱 김치통과 묵직한 상자를 들고 대문을 통과했다. 놀랍게도 담벼락 안의 공간은 상당히 널찍했다.
평상 위에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누렁이가 짖지도 않고 우리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아주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어라? 못 보던 녀석인데···. 네 주인은 어디 갔니?”
이수현이 말을 했지만, 누렁이는 그녀를 본척만척하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뒤뜰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수현 씨 왔어요?”
웃통을 벗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수염 난 사내가 어깨에 수건을 걸치고 손을 흔들며 이쪽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헉! 누구지?’
“주빈 씨! 선크림도 안 바르고 뭐 하는 거예요? 왜 이렇게 탔어요?”
어? 뭐라고? 저 사람이 정주빈?
충격적이었다. 최강의 꽃미남은 어디 가고 ‘나는 자연인이다’에나 출연할 듯한 비주얼의 사내가 정주빈이라니! 덥수룩한 수염에 살짝 그을린 피부! 어디서 사우나라도 하고 왔는지 땀에 젖은 몸 하며···.
“장작 좀 패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분은 누구신지?”
그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가벼운 눈인사를 건넸다.
“저, 저는···.”
나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새, 새로운 매니저예요. 인사해요. 이준형 씨에요.”
“아! 매니저시구나. 안녕하세요. 정주빈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이, 이준형입니다.”
꾀죄죄한 몰골이었지만 가까이서 보니 역시 정주빈은 정주빈이었다. 미남 추노꾼 같은 거친 모습이었다. 그에게 이런 면이 있었다니!
세련된 별장에서 사별한 아내의 사진을 바라보며 그리워하는 외로운 미남자를 상상하고 있었는데 그런 생각이 바사삭 부서지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펴보았다. 너무 자연 친화적이고 황량한 광경이었다.
‘크헉···. 뭐야? 환경이 진짜 나는 자연인이다. 포스인데? 가만? 이거 대본을 보게 하기가 어렵지 만약 읽어 본다면?’
‘나만 아는 세계멸망’에 나오는 주인공은 인류의 멸망을 철저하게 준비해온 서바이벌 마스터였다. 갑자기 5%의 캐스팅 가능성이 30%까지 증가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된 이상 정주빈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캐스팅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