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는 스타 작가님-149화 (149/263)

히로인은 아니 되오 (1)

둘 사이 어색한 침묵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유정 씨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드세요.”

“아니에요. 어머니. 된장찌개 하나만 있어도 한 그릇 뚝딱 먹을 수 있어요. 잘 먹겠습니다.”

나유정은 그 말을 하고 허겁지겁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나와 형도 그녀를 지켜보다가 숟가락을 들었다.

“어머니 오늘은 해조류 반찬이 없네요?”

“해조류 반찬 좋았어요? 나중에 오면 좀 해드릴까?”

“아, 아니에요. 그냥 물어봤어요.”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로 왔어요?”

“어머님이 해주신 밥이 그리워서요. 준형 씨하고 일 관련해서 할 말도 있고요.”

“아하···. 그래요? 아무튼, 많이 드시고 준형이랑도 이야기 잘해요. 우리는 자리를 비켜드릴게. 호호···.”

이런저런 가벼운 이야기를 하며 저녁 식사를 끝마쳤다. 거실에서 차를 마시며 잠시 이야기를 하다가 식구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비켜주었다.

굳이 자리까지 비켜줄 필요 없는데···.

호로록···.

유정 씨는 차를 한 모금 음미하더니 고개를 들고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흐음···.”

“갑자기 집은 왜 찾아왔어요?”

“지금 몰라서 묻는 거예요? 오전에 가지고 갔던 대본 때문이잖아요.”

“아니···. 굳이 오늘 꼭 찾아올 필요가 있나 싶어서요. 내일도 있고···.”

“이거 스토리가 안 끝나던데 뒤에 또 있어요?”

그녀는 유심히 내 눈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하이에나처럼 말이다.

“크흠···. 뭐 있긴 있습니다.”

나유정이 오전에 들고 간 대본은 1시즌 인쇄본이었다. 2, 3시즌도 넷플릭에 보내놨는데 그건 보안상 아직 인쇄를 맡기지 않은 것이다.

“휴···. 다행이네요. 전 설마 이렇게 끝나는 줄 알고···.”

“그렇게 끝나겠습니까? 2시즌, 3시즌까지 대본으로 나온 상태입니다. 물론 인쇄본은 없지만요.”

“그, 그거 저 좀 보여주세요.”

이거였군. 오늘 직접 집으로 찾아온 이유가···.

그녀는 약간 주저하더니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다.

“죄송한데요. 아직 인쇄본이 없어서···.”

“치···. 누가 인쇄본 달래요? 그냥 파일로 줘도 괜찮아요.”

“알았어요. 이사님께는 당연히 드려야죠.”

“차기작은 언제부터 쓴 거예요?”

“그건 몇 달 전부터 쓰기 시작했어요. 달동네에서 연재하다가 드라마화를 하기 위해서 연재를 중단했습니다. 어땠어요? 괜찮았나요?”

재미있었냐는 내 말에 나유정의 눈동자가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다. 눈치가 빠른 그녀는 내가 먼저 말을 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벌써 깊게 생각해본 것 같았다.

“내용은 흥미로웠어요. 요즘 유행하고 있는 호불호 없는 좀비 스토리잖아요. 주인공이 이미 아포칼립스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게 신선하더군요.”

음···. 웹소설에서는 신선하지 않은데···. 아주 많이 나온 스토리다.

“재미가 있다니 다행이네요.”

“하지만 한가지 문제가 있어요.”

“음? 문제요? 어떤 문제죠?”

“초반 여주인공이 살짝 짜증이 나요. 웬만큼 연기를 잘하지 못하면 시청자들에게 미움을 받는 캐릭터가 될 거 같아요.”

“응? 설마 유정 씨가 그 역할을 하면 좋을 것 같다는 건가요?”

나는 진심으로 궁금했기 때문에 그녀에게 직접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주변을 자꾸 힐끔거리던 그녀의 눈동자가 나에게 딱 고정됐다. 그리고 빤히 내 얼굴을 쳐다보는 나유정.

“그걸 꼭 제 입으로 말해야겠어요? 제가 누구예요?”

“지금은 네미시스의 정유나로 보이는데요? 하하···.”

눈치를 보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그만 네미시스의 정유나를 떠올려 버린 것이다. 최근 나유정이 연기한 정유나가 상당히 화제가 되었고 많은 프로그램에서 언급이 되고 있었다. 약이 든 음료수를 마시고 땀을 줄줄 흘리고 있는 짤은 이미 인터넷에서 엄청나게 돌아다니고 있었으니까···.

“하아···. 영화 개봉 끝난 지 벌써 이틀이나 됐어요. 그 이야긴 그만하죠?”

”아.. 미안합니다.“

”그건 됐고요. 그 역할을 제가 하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요?”

“음···. 여주인공요? 그, 글쎄요?”

‘나만 아는 세계멸망’에 나오는 초반 여주인공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대전지부 법의학부 법의검사과 소속의 한수지다. 그녀는 CSI와 크리미널 마인드의 열혈팬으로 대전의 유명병원 원장인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법의학자가 되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부임했다. 머리가 좋고 의욕은 있으나 과보호 속에서 자라서 그런지 공부 말고는 별다르게 잘하는 게 없는 작은 아씨 같은 캐릭터였다.

부임한 초반부터 공주처럼 좌충우돌 주변에 민폐를 끼치고 다니는 그런 존재였다. 물론 나중에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지만 말이다.

“그 역할 제가 잘할 수 있을 거 같아요.”

“그다지 매력적인 캐릭터는 아니잖아요? 굳이 하고 싶은 이유가 있을까요?”

아직 유정 씨가 1시즌 대본밖에 안 봤기 때문에 둘러댈 수 있는 말이었다. 정말 1시즌에는 얄미울 정도로 짜증 나는 캐릭터니까. 한수지 때문에 정말 여럿 죽을 고비를 넘기게 된다.

“이거 이제 초반 아닌가요? 뒤에 뭔가 있을 수밖에 없는 히로인인데···.”

으음···. 제길···. 벌써 느끼고 있는 건가? 나유정! 정말 촉이 뛰어나구나.

나는 솔직히 살짝 놀라고 말았다. 뭔지 모르겠지만 심상치 않다고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그것만 가지고는 출연하시겠다는 이유를 잘 모르겠는데요?”

그녀는 내 오리발에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1시즌 대본만 본다면 별로 매력적인 캐릭터는 아니에요. 그런데 그거 아세요? 이 작품이요. 딱 제 취향이에요.”

“예?”

“저 좀비 영화를 너무 좋아하거든요? 좀비 관련된 웬만한 영화나 드라마는 전부 다 봤어요.”

“어···. 음···.”

아뿔싸, 피 튀기는 장면 좋아하는 거 보고 알아봤어야 했는데···.

“뭔가 비밀을 숨기고 있는 주인공이 철저히 준비한 벙커가 특히 인상적이었어요. 2시즌에는 여기에서 뭔가 일이 터질 것 같은데요? 맞죠?”

허 참. 역시 대배우라 이건가? 감이 참 대단하시구만!

“맞습니다. 2시즌이 바로 킬링 포인트에요. 그곳이 좀비 웨이브를 막을 슈퍼 쉘터거든요.”

“슈퍼 쉘터?”

“네. 그런 게 있습니다. 나중에 대본 보시면 알아요.”

“아, 알았어요. 꼭 보여주세요.”

그녀는 뭔가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유정 씨는 저번에 피 튀기는 액션도 엄청 좋아하더니 이번에는 좀비입니까? 취향 왜 그래요?”

“그런 작품만 쓰시는 작가님 취향은 어떻고요? 본인이 할 말은 아닌 거 같은데요?”

“전 원래 이런 거 전문으로 쓰는 사람이었습니다. 케이가 잘 알죠.”

“저 최근에 조선 킹덤 계속 봤어요. 너무 재밌어가지고···. 그래서 이런 드라마에 꼭 출연해보고 싶었어요. 암울하기 그지없는 아포칼립스 분위기요. 희망이라곤 한 톨도 없는···. 헤헤···.”

응? 희망이 없는 건 아닌데···. 일단 주인공 자체가 세상의 멸망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항상 꿈에서 그 사실을 반복해서 보는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래 버틸 수 있는 자급자족 공간을 무지막지한 돈을 때려 박아 만든 편집증적인 캐릭터였다.

이 인물 자체만으로 희망이라고 볼 수 있는데···.

유정 씨는 내 작품을 너무 딥다크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 작품은 그 정도로 어두운 작품은 아닙니다. 약간 호쾌한 면이 있는 그런 작품이에요.”

“뭐···. 다 좋아요. 배역이 크든 작든 전 여기 출연하겠어요.”

허···. 이거야 원···. 그래도 여주인공을 고집하지 않는다는 거에 위안으로 삼아야 하나?

그녀는 내 얼굴이 굳어지는 걸 봤는지 고개를 갸웃하며 의문을 표하고 있었다.

“준형 씨. 저 나유정이에요. 제가 배역과 상관없이 출연하겠다는데 뭐가 불만인 거죠? 이해가 안 가네요.”

“후···. 그게 말이죠.”

나는 그녀에게 속마음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지금까지 나의 작품들은 나유정의 미친 캐리로 크게 성공한 면이 있었다. 세간의 평가도 그렇고···.

물론 드라마 ‘나만의 세계’로 어느 정도 인정을 받긴 했다. 하지만 나는 나유정의 후광을 등에 업고 간 면이 있었다. 그래서 이번 작품만은 온전히 내 힘으로 성공을 해보겠다는 욕심이 있었다.

내 이야기를 들은 나유정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를 보고 빙긋 웃는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준형 씨가 부담을 느끼는 것도 알겠어요. 그런데···.”

“그런데?”

“오랜만에 들어본 이상한 소리네요. 그러니까 나유정 코인을 탔다는 거잖아요? 그리고 이번에 그걸 한번 불식시켜보겠다고 하는 거고요?”

“뭐···. 그런 거죠. 대충은···.”

“하···. 제가 이준형 코인을 탔다는 생각은 안 하세요? 슬기로운 덕질생활, 나만의 세계, 그리고 이번 영화까지···. 아···. 이번 영화는 아닌가? 아무튼···.”

“..........”

“준형 씨가 뭔가 착각하는 거 같은데요. 제가 근 일 년 동안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는지 생각해본 적 있어요? 저요. 무슨 잘나가는 중소기업처럼 벌었어요.”

“그거야 제가 아니라도 시간을 좀 들이면 충분히 가능···.”

“1년도 안 돼서 빌딩 몇 개를 살 정도예요. 이게 시간을 좀 들이면 가능하다고요? 그래요. 한 십 년은 벌어야겠죠. 그게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극단적인 거 같은데요?”

“솔직히 슬기로운 덕질 생활때는 약간 반신반의하는 면도 있었어요. 우연히 터졌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긴 했죠. 하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어요. 준형 씨의 다른 글을 읽어보고 실력이 있는 작가라는 걸 알게 된 거죠. 제가 캐스팅에 매달릴 정도로요.”

“음···. 그거 정말입니까?”

“이그···. 속고만 살았나. 정말이라니까요?”

그녀는 정말 나를 이렇게 생각하는 걸까? 갑자기 나유정을 써도 되겠다는 생각이 살짝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내가 잠시 침묵을 하고 있자 그녀는 내 얼굴을 말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알았으면 다음 시즌 대본 좀···.”

“줄게요.”

“응? 준다고요? 언제?”

“잠깐 기다려요. 깜빡하고 원본 파일을 클라우드에 안 넣었어요. 컴퓨터 켜고 메일로 보내줄게요.”

“히히···.”

“재밌나 보네.”

“재밌다니까 그래요. 그러니까 나 좀 캐스팅해줘요. 대배우가 배역이 작든 크든 출연하겠다는데 뭐하러 귀찮게 오디션 같은 걸 하려고 해요? 누구보다 말이 잘 통하는 유능한 파트너가 있는데?”

“유능이요?”

“유능하죠. 말도 못 하게 유능할걸요?”

나는 그 말을 들으며 피식 웃고 말았다.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 거짓은 없었다. 나에게 보내는 무한한 신뢰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후···. 내 팔자야.”

“헤헤···.”

“그런데 그거 정말이죠?”

“뭐가요?”

“배역이 크든 작든 하겠다는 말···.”

“그래도 너무 비중이 없으면 좀 그런데···.”

그녀는 내 입장을 충분히 공감했는지 주연 배역에 대해 강요하지 않았다. 그래도 서운하긴 한 모양이었다.

약간 실망하는 듯한 그녀를 보고 있으니 갑자기 딱 맞는 배역 하나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아차 그 배역이 있었구나···.’

“흐음···. 잠시만 기다려요.”

나는 방으로 들어가 전체 시즌에 관한 파일을 그녀의 이메일 주소로 보냈다.

“보냈어요. 나중에 정식으로 인쇄된 대본으로 드릴게요. 뒷부분은 퇴고가 완벽히 안 됐으니 그냥 내용만 대충 보세요.”

그녀는 기쁜 얼굴로 소파에 앉더니 휴대전화를 꺼내 글을 내려받고 텍스트 뷰어로 글을 읽기 시작했다.

“집에 안 가시게요?”

“귀찮은데 여기서 자고 가려고요.”

“네?”

“주리야!”

“언니! 왜?”

“새 칫솔 있지?”

벌컥···.

동생의 방문이 열리며 주리가 머리를 빼꼼 내밀었다.

“언니 자고 가려고? 칫솔이야 많지.”

“그래. 오늘 하루 정도는 자고 가도 되겠지?”

“당연하지. 그런데 언니 칫솔값은 내셔야죠?”

“칫솔값?”

“오랜만에 공대 핵인싸녀 미튜브 출연 어때요?”

“좋아.”

“콜!”

갑자기 자고 간다는 것도 모자라 미튜브 출연이라니? 나는 어이가 없었지만 둘이 좋다고 시시덕거리고 있으니 그냥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둘은 더 밤이 늦기 전에 요 앞의 중앙 공원에 가서 산책한다고 했다. 밤에도 야경을 보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연예인 아니겠는가? 하는 수 없이 나도 둘을 따라나섰고 아닌 밤중에 공원 투어를 하고 말았다.

팔짱을 끼고 깔깔대며 걷는 두 사람을 뒤에서 바라보는 이 심정이란···.

‘젠장 나도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야경을 감상하면서 공원을 걷다가 뒤를 힐끔 보는 나유정이었다. 그러더니 작은 목소리로 주리에게 속삭였다.

“별로 도움은 안 되는데 뒤에서 저렇게 버티고 있으니 든든하다. 그렇지?”

“저 인간. 덩치가 저래서.. 학교 다닐 때도 일진들도 못 건드렸어요.”

어이어이···. 다 들리거든요? 도움이 안 되긴 뭐가 안됩니까? 쩝···.

우리는 그렇게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왔다. 집에 돌아와 보니 아버지도 약주를 한잔 걸치시고 들어와 계셨다.

“아버님. 안녕하셨어요?”

“아이고···. 이게 누구야. 우리 며느···. 으악···.”

어머니께 등짝 스매싱을 당한 아버지가 끔찍한 비명을 지르셨다. 아무래도 내가 이렇게 된 것은 가정환경 때문이 아닌가 싶은데···.

“이이가 술 한잔 걸치고 들어와서 그래요. 그러니 이해 좀 해요.”

“킥킥···. 괜찮아요. 어머니.”

나유정은 이제 주리의 방으로 들어갔고 나도 내 방으로 들어가 휴식을 취하다 잠을 자려고 침대에 누웠다.

‘하.. 은근히 피곤하네.’

갑자기 오늘 계산해 본 영화 수익이 생각났다.

‘투자자 수익 134억···. 회사 수익을 배당받으면 플러스알파···. 으흐흐···.’

물론 당장 배당을 받을 생각은 없었다. 유보금으로 남겨서 차기작 제작에 써야 할 듯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도 모르게 스르륵 잠이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똑똑···.

갑자기 누군가 내 방문을 두드렸다. 소리에 깬 나는 피곤한 눈을 비비며 시계를 보았다. 새벽 4시가 좀 넘은 시간.

‘으음···. 누구야. 새벽 4시인데 귀, 귀신은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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