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룡점정 (3)
“그, 그러니까 유정이 언니가 네미시스에 합류한다고요?”
멤버 전원이 멍한 표정을 짓고 가운데 은하가 정신을 번쩍 차리며 손을 들었다.
“전 찬성입니다.”
“은하 씨는 찬성이시군요.”
“네. 대표님. 아무래도 어벤져스에 대항하기 위해선 저희도 유정이 언니가 꼭 필요해요. 듣기론 춤도 잘 추신다고 하시던데요?”
“뭐 잘 춘다기보단···.”
나는 그녀 대신 손가락을 내밀며 아주 조금 춤을 춘다는 말을 했다.
“너희들은 어때?”
네미시스의 맏언니 은하가 멤버들을 둘러보며 의향을 묻고 있었다.
“저도 찬성이에요. 요즘 살짝 부담됐는데 유정이 언니가 합류하면 숨통이 트일 것 같아요.”
“저두요.”
멤버들도 은하처럼 알게 모르게 압박을 느끼고 있던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막내······. 라구요?”
“그, 그냥 설정이 그래. 노래 못하는 음치 센터거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앞장서서 설명하는 나유정이었다. 노래 좀 못하면 어때서 그러는지 모르겠다. 뭐가 창피하다고 그러는 건지···. 오히려 귀여운데 말이지.
원래 사람들의 콤플렉스는 민감하고 복잡한 법이다. 굳이 들춰봐야 좋을 게 없다고 생각했다.
“자자···. 앞으로 네미시스는 유정 씨와 같이 연습을 해야 할 겁니다.”
“넵!”
“분량은 그냥 카메오 정도라 많이 나오진 않을 거예요. 언니들 눈치를 살피는 쭈구리 캐릭터라 딱 그렇게 취급해주면 됩니다.”
“쭈, 쭈구리요?”
러브원은 내 말을 듣고 웃었고 네미시스는 당황하고 있었다.
“언니들. 전 괜찮아요. 막내잖아요. 거기다 노래도 못하니 눈치만 계속 보는 거죠.”
나유정은 벌써 막내 연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에이···. 그래도 그렇지. 언니의 위치가 있는데요.”
“유정 씨의 위치는 밑바닥입니다. 극 중에서 그렇게 대하는 게 더 웃길 테니 그걸 꼭 명심해 주세요.”
나는 추가로 멤버들에게 정유나 캐릭터에 대해 설명했다. 잠시 후 그들은 같이 댄스 연습을 시작했다. 나유정은 그간 옆에서 본 게 있어서 그런지 빠르게 댄스를 배우며 꽤 괜찮은 적응력을 선보였다.
연습실 한쪽에 앉아 러브원과 네미시스가 연습하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러브원은 진짜 현역 걸그룹이라고 해도 믿겠어.’
윤하영 센터에 양옆으로 혜수와 윤지, 양 끝으로 다솜과 지혜가 포메이션을 완성했다. 걸그룹 가창력 끝판왕이라는 윤지를 필두로 다솜, 하영, 혜수가 모두 가창력이 출중했으며 신인인 지혜는 의외로 랩이 특기라 밸런스가 완벽했다.
반면, 나유정이 센터로 가세한 네미시스는 비주얼이 쭉 올라가며 이제는 러브원의 라이벌로 손색이 없어졌다. 비록 음치 캐릭터였지만 그녀가 가운데에 서자 그룹의 무게감이 달라졌다.
‘역시 센터는 아무나 서는 게 아니야.’
은하는 센터 겸 리더로 고군분투하던 모습에서 얼굴이 상당히 편해진 느낌으로 노래와 춤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고 이선정은 윤지와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는 최강의 보컬을 선보였다. 그리고 신인 3명도 그리 처지는 실력이 아니라 신선함이 배가되었다.
‘으음···. 아주 좋아. 이게 바로 완벽한 라이벌이지!’
내 눈은 멤버들 사이에 있는 나유정에게 향해 있었다. 그녀는 우려와 달리 걸그룹으로 꽤 잘 어울렸다. 위화감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런 느낌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딱 봐도 이미 연기 모드로 스위치를 변경한 게 느껴졌다. 네미시스 멤버들이 편하게 느끼도록 벌써 음치 센터 같은 분위기로 연기를 하고 있었다.
‘귀신은 속여도 내 눈은 못 속이지. 하여간 진짜 열심히 한다니까?’
만약 무대의상까지 입혀놓는다면 진짜 볼만 할 것 같았다.
“대표님. 거기서 그렇게 계속 부담 주실 건가요? 이제 나가셔서 일 보셔야죠.”
“그, 그래요. 알겠습니다. 열심히 하세요.”
생각해보니 나도 얼른 대본을 수정해야 할 것 같았다. 캐릭터가 하나 추가되었으니 관련 에피소드를 넣고 시후와 상의를 해봐야 할 것 같았다.
‘휴···. 일하자 일!’
* * *
나는 테리우스가 이적한 인피니티 드림즈에 와있었다. 역시 큰 회사가 직접 투자를 해서 그런지 건물이 아주 화려했고 시설 또한 상당한 규모를 자랑했다.
뭔가 영재 사관학교 느낌이랄까? 회사 내부에서 보이는 연습생들이 하나같이 범상치 않아 보였다.
‘후후···. 유정 씨가 왔으면 눈이 팽팽 돌아갔겠지?’
나유정은 현재 남자 아이돌을 키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지만 괜찮은 멤버가 모이지 않고 있었다. 사실 그게 당연한 게 실력 있는 연습생이 뭘 믿고 J&J에 입사를 하겠는가? 유정 씨가 아우라 스카우터가 있어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인재를 찾아내면 모를까?
“준형아!”
“오! 오랜만이야. 형.”
나를 보고 손을 번쩍 들고 쿵쾅거리며 멀리서 달려오고 있는 한 인영이 보였다. 안 본 사이에 근육이 더 증가한 것 같은 조블리 조형택 팀장이었다. 아···. 이제는 조형택 실장이었던가?
그는 인피니티 드림즈로 테리우스와 같이 이적 후 실장으로 승진을 하고 테리우스의 총괄 매니저가 되었다.
“뭐야. 형. 안 본 사이에 헐크가 됐네? 운동을 아주 열심히 하셨어요. 너무 편한 거 아냐? 이제 실장이라 이건가?”
“하하···. 이 자식은 보자마자 독설이네? 하여간 처음 봤을 때부터 건방지게 입만 살아서 말이야.”
“건방지기는? 할 말은 하는 남자였지.”
“얼씨구? 요즘 아주 잘나간다고 더 건방져지셨어요?”
우리는 시답지 않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반가움을 표현했다.
“요즘은 좀 어때? 바쁘긴 바쁘지? 테리우스가 여기로 이적하고 완전 슈퍼노바 동생 취급이잖아? 세계적으로 인지도가 너무 올라갔더라. 요즘은 아예 글로벌하게 도는 것 같던데?”
“그러게. 역시 슈퍼노바의 후광이 대단하긴 해. 같은 소속사라는 것만으로도 인기가 두 배는 올라갔어. 네 드라마로 인기가 확 올라갔었는데 거기에 더해지니 나도 감당이 안 되더라. 지금 두영이 빼고 매니저만 3명이 추가로 돌아가면서 관리해.”
“대단하네. 그런데 두영이는 어디 갔어? 아직 스케줄 중인가?”
“이제 좀 있으면 애들 데리고 회사로 올 거야. 아까 스케줄 끝났다고 전화 왔었거든.”
“자···. 이제 회의실로 들어가자. 그간 못했던 이야기 좀 해야지?”
“그래 형. 오랜만이라 진짜 반갑다. 서로 엄청 바쁘니 시간을 내기도 힘드네. 이거야 원.”
나는 회의실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회의실도 고급스러운 느낌이었다.
“빅샷이랑 CA가 돈 좀 썼나 봐? 시설이 XM하고 차원이 다르네?”
“XM에서 얼마나 허접스럽게 운영해왔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지. 교육 체계나 매니지먼트가 진짜 전문적이야. 나도 많이 배웠어.”
“크크···. 테리우스 매니저가 아니었으면 실장 못 달았겠네. 우리 조블리 팀장님이 배울 정도였다니···. 거봐 내가 뭐랬수. 테리우스 옆에 딱 붙어있으면 아무 문제 없다고 했잖아요.”
“그래 이 녀석아. 잘 키운 남자 아이돌 하나 대박 낸 걸그룹 셋 안 부럽다.”
“그래도 긴장 좀 하셔야 할걸?. 내가 걸그룹을 제대로 육성해서 테리우스의 인기를 위협해주겠어.”
“너 어디 아프니? 그게 무슨 망상이냐?”
“형. 날 뭐로 보는 거임?”
“너? 건방진 신임 매니저지. 내 조수고···.”
“어허···. 그건 예전 이야기지. 지금은 어엿한 한 회사의 대표입니다만?”
“어이구. 잘 나셨어요. 나 여기서 잘리면 구제 좀 해주라.”
“에헴. 그러게 평소에 잘하셔야죠. 조블리 선생님.”
“.........”
조형택 실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차를 내왔다.
“이 대표님. 저 좀 잘 봐주십시오. 차나 한잔 드릴까요?”
“어우···. 좋죠.”
그는 내 뒤로 와서 차를 내려놓았다.
“어쩐 일이래. 우리 조 실장님 확실히 많이 바뀌었네요.”
“케에엑···.”
갑자기 알통이 가득한 우람한 팔뚝이 내 목을 조여왔다.
“사, 사람 살류···. 켁켁···.”
“대표고 나발이고 오늘 온 김에 어깨에 든 뽕 좀 내려놓고 가라.”
“큭···. 내가 그, 그런 게 어디 있어?”
“어허···.”
“아, 알았어요. 행님. 살려주십시오.”
나는 알통에 탭을 쳤고 그러자 갑자기 목에 가해지는 압박이 씻은 듯 사라졌다.
“어후···. 몬스터야 뭐야. 이 인간 내가 나중에 몬스터 좀비로 캐스팅해야겠어. 인간이야 괴물이야?”
“뭐 인마? 몬스터? 오늘 무규칙 격투기 5분 3라운드로 한번 뛰어볼까?”
그렇게 나와 조블리 실장이 유치하게 놀고 있으니 드디어 테리우스가 도착했다. 문이 열리고 막내였던 두영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 김두영. 이제 좀 매니저티가 난다?”
“헤헤···. 아무럼요.”
오랜만에 본 그의 표정은 상당히 좋았다.
“어? 이게 누구셔? 세계적인 작가님 아니신가?”
“형! 오랜만이야!”
“이 대표님!”
테리우스는 내 얼굴을 보고 엄청 반가워했다.
“이야···. 너희들 이제 때깔이 다르네? 왜 이렇게 멋있어졌냐? 확실히 인피니티 드림즈가 다르긴 하구나.”
“요즘 우리 장난 아니잖아. 몇 달 전의 우리가 아니야.”
오랜만에 리더 박영관의 허세를 들으니 입가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그러게. 진짜 너희 멋있어졌더라. 영관이만 빼고···.”
“아! 형! 왜? 나도 좀 괜찮아졌잖아.”
“영관이는 초심을 아주 잘 지키고 있어. 반면에 다른 녀석들은 초심을 잃고 아주 좋아졌어.”
“띠링! 레벨이 급상승하였습니다!”
뒤에서 휴대전화를 들고 있던 한연준이 조용히 외쳤다.
‘하여간 저 녀석···. 아직도 웹소설 중독은 여전한가 보군.’
“지금 세계적으로 노는 테리우스의 리더를 물로 보는 거임?”
“박 병풍!”
“이 씨···. 이리와! 오랜만에 같이 죽자.”
박영관이 내 멱살을 잡았고 나는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났다. 항상 이러고 놀았었는데···.
이제 이 녀석들은 점점 슈퍼스타의 길을 걷고 있었다. 나는 멱살이 잡힌 채로 고개를 들어 녀석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영관이, 연준이, 훈이, 창민이, 이든이···.’
뭔가 뿌듯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했다.
“형 그런데 웬일이야? 실장님이 그러는 데 무슨 중요한 이야기를 한다고 하던데?”
“그래. 중요하게 할 이야기가 있어서 불렀다. 인마 영관아 이제 멱살 좀 놔봐라.”
“어···. 알았어.”
“너희 내가 영화 찍는 거 알지?”
“그거 배우 뽑는다고 예능도 했잖아. 나 거기 형 나온 거 봤어.”
“그래. 거기서 배우들을 다 섭외했지.”
“멤버만 봐도 대박 아닌가? 무조건 흥행할 것 같던데?”
“그래 연준아 땡큐다. 이번에 꼭 흥행을 해야 해. 회사의 첫 프로젝트거든.”
“그렇지. 첫 단추를 잘 끼워야···.”
“그런데 우리는 왜···.”
“다름이 아니라 그 영화에 프로듀서로 나올 ‘유준’이라는 배역이 아직 캐스팅 안 된 상태야.”
“에? 저, 정말? 호, 혹시 나를···.”
깜짝 놀란 박영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에게 얼굴을 디밀었다.
나는 접근해오는 박영관의 얼굴을 손을 들어 옆으로 밀어냈다.
“어···. 넌 아니야.”
“아니! 왜? 내가 어때서?”
“스스로 더 잘 알 텐데? 네가 나온 슬기로운 덕질생활을 보긴 봤니?”
“이, 인정 못 해.”
“영관이는 그냥 리더 역할 좀 잘해라. 예능에서 개그 좀 잘 주워 먹고···.”
“그럼 혹시 연준이 캐스팅하러 온 거야?”
이창민이 나를 쳐다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자기는 아니라고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원래 내가 연준이랑 특별히 친하기도 하고 연기하면 테리우스에 한연준이라는 이미지가 강했으니까. 하지만 오늘 내가 역할로 점찍은 사람은 바로···.
“아니···. 연준이는 이미지가 안 맞아. 뭐 시키려면 시킬 순 있겠지만···.”
“.........”
내 말에 이창민의 눈이 커지기 시작했다.
“호, 혹시···.”
“그래. 너야. 정식으로 제안할게. 할래?”
창민이는 솔직히 생각을 못 했는지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내, 내가 할 수 있을까?”
“왜? 자신 없어?”
내 도발에 그의 눈빛이 달라지며 입꼬리가 쓱 올라가기 시작했다.
“자신이야 항상 있었지.”
‘크크···. 그래야지. 역시 이창민답다.’
만능 스포츠맨이자 팀 내 리드보컬이자 메인 댄서와 랩을 담당하고 있는 진정한 멀티형 인재 이창민. 연기력조차 한연준에 밀릴 뿐이지 아주 뛰어났다.
솔직히 나이에 비해 약간 노안(?) 이미지가 있어서 보이그룹 출신 천재 프로듀서를 시키기에 가장 적격인 멤버였다. 최근엔 이미지 때문에 머리도 약간 길러서 내가 생각하는 이미지에 가장 근접해 있었다.
프로듀서 이미지라면 정이든이 하는 게 제일 어울리긴 했지만 이든이는 연기력이 꽝이라 애초부터 고려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그 역할을 하려면 지금까지 네 건강한 이미지에서 약간 탈피할 필요가 있어.”
“대본을 주면 읽어보고 거기에 맞춰볼게.”
역시 자신감 하면 이창민!
“어떻게 테리우스가 쉬는 시간을 딱 맞췄냐?”
조형택 실장이 내 등을 두드리며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내가 내 새끼들 챙겨야지. 다른 녀석들한테 100% 맡겨 놓을 줄 알았어요?”
“하하···. 녀석···. 하여간 의리 하면 또 이준형이지.”
“당연하지. 아···. 그리고 창민이 말고 너희들도 카메오로 나올 거니까 같이 준비 좀 해라. 알았냐?”
“여윽시 이준형!”
“형! 맡겨만 줘봐. 끝내주는 연기를 보여줄게.”
“응···. 영관아 넌 기대 안 하니까 애쓸 필요 없어요.”
“이 인간이 잘 나가다가···. 나 막 감동해서 울뻔했는데 눈물이 쏙 들어갔다.”
영관이도 말만 그렇게 하지 나를 보는 눈빛에 애정이 담겨있었다.
그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비록 회사는 달라졌지만 내가 그들을 버리지 않을 거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