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룡점정 (2)
“네? 네미시스의 여섯 번째 멤버라구요?”
나유정은 깜짝 놀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어려 보이지? 옷을 이렇게 입고 와서 그런가?
“맞아요. 지금 한가지 문제가 생겼어요. 영화에서 네미시스로 나올 라이벌 그룹이 러브원에게 많이 밀리는 감이 있어서···.”
“그래서 저보고 거기 합류해라?”
“그, 그렇죠.”
“지금 저보고 영화에 나가서 전국적···. 아니 전 세계적으로 음치인 거 자랑하라는 말이에요?”
나유정이 표독스러운 눈으로 나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크흠···. 그게 아니라···.”
“아니 그렇잖아요. 저보고 공개 처형을 당하라는 소리예요? 아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죠!”
“워워···. 그건 걱정할 게 하나도 없습니다!”
나는 당당하게 나가기로 했다.
“걱정할 게 하나도 없다고요?”
“네. 유정 씨가 카메오 비슷하게 나올 배역이 바로 음치라는 설정입니다.”
“음치?”
나유정이 내 말을 듣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일단 화는 조금 누그러진 것 같아서 배역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음···. 음치인데 네미시스의 비주얼 센터라는 설정이에요.”
“..........”
“유정 씨가 노래를 부르면 사람들은 그게 연기라고 생각하고 박수를 칠 겁니다. 정말이에요.”
작년에 블랙소울이 집에 놀러 왔을 때 술에 취해 부른 노래가 생각났다. 다들 배를 잡고 쓰러졌었는데···.
‘솔직히 억지로 음치 연기 안 해도 되니 레전드급 연기가 나올 것 같은데?’
“그래도 의심하는 사람도 있을 텐데요?”
“아뇨. 없을 거예요. ‘내 남자친구의 웨딩’에서 카메론 디아즈가 음치 여자친구 역할을 했는데 솔직히 누가 그녀를 현실 음치라고 생각합니까? 노래 부르는 모습이 유명해져서 호감도만 팍팍 올라갔다구요.”
“그, 그건 본 적 있어요. 오래된 영화였는데 엄청 귀여웠죠.”
“그리고 말이죠. 요즘 솔직히 노래 잘해봐야 뭐가 좋습니까? 노래방에 가보면 가수들 천지에요. 노래 잘해봐야 임팩트가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음치들이 주목을 받는 세상이 됐다고요. 음치를 알아내는 프로그램도 생기지 않았습니까? 그만큼 음치가 대우받는 세상이 된 거라고요.”
개소리였다. 내가 한 말이지만 나조차 무슨 말을 하는지 도저히 종잡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아씨···. 도대체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나는 초조한 표정으로 유정 씨의 표정을 힐끔거리며 살피고 있었다. 그녀는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숨을 들이마시며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어, 어디 한번 들어나 볼게요.”
‘후···. 이게 뭐라고 긴장되네?’
“네. 네미시스의 비주얼 센터 막내 정유나는 원래 배우 지망생이었는데요. 기획사 대표가 그녀의 출중한 외모를 보고 걸그룹에 집어넣습니다. 그녀는 진성 음치라 노래 파트가 거의 실종 상태로 꽃병풍 취급을 당하는 캐릭터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룹에서도 언니들 눈치를 살살 보는 게 버릇이 되었죠. 약간 예쁜 쭈구리 같은 느낌···.”
“찐따 감성이지만 걸그룹은 맞는 거죠?”
“그럼요. 라이벌 그룹인 네미시스가 설정상 걸그룹 중에 인지도 끝판왕으로 나오거든요. 차세대 1티어 선두주자죠.”
“네미시스도 막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공연도 하는 거 맞죠?”
그녀가 은근히 퍼포먼스에 대해 미련이 있는지 실제로 공연도 하는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번에 블랙소울하고 댄스 커버를 같이한 후로는 춤에 맛 들인 것 같았다.
“네. 유정 씨 캐릭터는 노래 파트는 없고 ‘컴온’, ‘렛츠고’, ‘알러뷰’, 윙크 같은 짧지만 강렬한 개인 파트가 있습니다.”
“강렬하다고요? 진짜 꽃병풍이네···.”
“솔직히 노래 부르실 건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죠. 흐음···. 그런데 배역의 이름이 정유나예요? 이름 예쁘네요.”
‘응? 그거 나유정을 거꾸로 해놓은 건데···. 큭큭.’
음치 비주얼 센터 설정도 조금 전에 생각한 거고 캐릭터 이름도 대충 지은 건데 꽤 괜찮다고 느끼는 모양이었다.
“약간 맏내(맏언니지만 막내 같은 이미지를 가진 멤버) 같은 건가···.”
“극 중에서는 진짜 막내긴 한데···. 촬영장에서는 맏내가 되는 거죠. 스물여덟 살 맏내.”
그녀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벽에 걸린 거울을 유심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갑자기 뭐 하세요?”
“지금 막내로 나와도 되는지 체크하고 있어요.”
“충분히 가능할 거 같은데요. 어차피 실제 네미시스 멤버에 미성년자가 없어요. 어려봐야 20대 초반이고···.”
“아! 생각해보니 그러네요.”
“... 그리고 유정 씨 정도면 어딜 가도 센터 자리는 떼놓은 당상이죠.”
손발이 오그라드는 내 아부가 또다시 작렬했다.
그 노력이 통했는지 그녀는 직접 말은 하지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예전 드라마 보면 30대 배우들도 교복 입고 연기하고 그랬잖아요. 맞죠?”
“크흠···. 그, 그건···. 그렇죠.”
“인터넷 찾아보니 엄청 많아요. 최근에도 있네요. 서른일곱이신 하지민 선배님도 하셨고···. 서른네 살인 백민영 선배님도 하셨고···. 찾아보니 엄청 많네요. 솔직히 저 정도는 명함도 못 내밀 정도잖아요. 서른 살이 십 대 연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이십 대가 이십 대 연기를 하는 건데···.”
휴대전화로 이것저것 열심히 찾아보던 나유정이 30대에 고등학생 연기를 한 배우들이라는 게시물을 찾아보고 키득키득 웃고 있었다.
“뭐야. 하지민 선배 진짜 뻘쭘했겠다. 20년을 타임워프 하셨네? 나처럼 20대가 20대 연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킥킥···.”
“..........”
유구무언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국내 탑 래퍼처럼 혼잣말을 줄줄 읊는 나유정을 보니 갑자기 오한이 밀려드는 것 같았다.
내가 만약 케이였다면 냉소적인 표정으로···.
‘유정아! 너 아이돌이 하고 싶어?’라는 멘트를 날렸을지 몰랐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녀를 꾀어야 하는 처지였다.
“맞아요. 30대 선배님들도 교복을 입고 연기하는데 유정 씨 정도면 솔직히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겁니다. 물론 어리게 보이도록 화장 같은 건 좀 신경을 써야···.”
“스무 살 때 영화에 나오던 것처럼 관리하고 나올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찐따스러운 연기도 잘해야 할 거예요. 관객들이 나유정이라는 걸 못 느낄 정도로 말이죠.”
“이 얼굴에 그게 가능할까요? 전 조금 걱정스럽네요.”
나유정은 손으로 꽃받침 모양을 하고 두 눈을 깜빡깜빡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걸그룹 연기를 하라고 했더니 기분이 엄청 좋은 것 같았다.
‘으윽···. 주부애다···. 주부애!’
주먹을 부르는 애교라는 뜻이다.
‘귀여워서 참긴 한다만···.’
“흐음···. 전 왠지 유정 씨가 완벽한 예쁜 쭈구리로 변신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완벽한···. 변신이요? 그런 방법이 있었어요? 저 좀 알려주세요. 한 수 배우고 싶네요.”
‘크크···. 배우긴 뭘 배우시나.’
“방법은 간단합니다. 바로 유정 씨의 평소 본 모습을 영상에 담으면 됩니다.”
“뭐라구요?”
“으, 으악···.”
그녀는 손으로 내 옆구리를 강하게 꼬집었다.
“다시 한번 말해봐요.”
“으으···. 집에서 입던 라면 국물 묻은 녹색 추리닝을 입고···. 양푼에 밥을 뚝딱 비벼 먹고···. 남자 아이돌 팬픽을 읽으며 키득거리면 됩니다.”
“이 바보 멍충이가!”
“으아악···.”
나유정의 손은 엄청나게 매웠다. 초등학교 시절 옆에 앉은 여자애한테 꼬집혀 피멍이 든 것과 비슷했다.
“지, 진짜예요. 이, 이건 유정 씨를 놀리는 게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인 조언입니다. 슬기로운 덕질생활의 나혜리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은근히 많아요.”
내가 그 말을 크게 외치자 그녀도 살짝 수긍하는지 슬그머니 내 옆구리에서 손을 뗐다.
“어흑···.”
장하다. 이준형! 곧 죽어도 바른말은 하는 사나이!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말한 갈릴레오의 강한 신념이 느껴지지 않은가.‘
“어쩌면 지금까지 유정 씨가 연기했던 어떤 역할보다 편하고 재미있을지 모릅니다.”
내 말에 나유정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프로젝트 걸그룹으로 활동하고 제자들과 같이 연기도 하고! 가재 잡고 도랑 치고! 꿩 먹고 알 먹고! 아니겠는가?
“그래도 그런 덕후스러운 모습을 계속 노출하는 건 이미지에 별로 좋지 않은 거 아닐까 싶기도 하고···.”
그녀는 솔직하게 다 까발리자는 내 말에 선뜻 동의를 못 하고 있었다.
나는 마지막 입장 정리를 해서 최후의 통첩을 날렸다.
“저를 무조건 믿으세요. 이번 영화는 우리 회사의 첫 번째 프로젝트입니다. 회사의 주춧돌이 될 작업입니다. 무조건 성공시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이사님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유정 씨가 이 역할만 제대로 한다면 영화가 대박 나지 않겠습니까? 분명 우리 회사를 주식시장에 상장시키기 위한 첫 번째 발판이 될 겁니다. 유정 씨에게 드린 10% 지분이 얼마의 가치가 될 것 같습니까?”
“..........”
나는 다시 눈빛에 힘을 담아 정중하고 논리적으로 말을 했다.
“화룡점정이라고 아십니까? 용을 그린 다음에 마지막으로 눈동자를 찍어 생명력을 불어넣는 작업으로 무슨 일을 하는 데 가장 중요한 부분을 완성함을 이르는 말입니다. 유정 씨의 그 연기야말로 [프로듀서님 저 회귀했어요]의 화룡점정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무슨 약 파는 사기꾼도 아니고 하아···. 힘들다. 이 정도 해서 안 통하면 접어야지 뭐.
나유정은 뭔가 곰곰이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팔짱을 끼었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가 마음속으로 갈팡질팡하는 것 같았다.
나는 책상에 있던 휴대전화를 들어 음악 하나를 재생시켰다. 섹시한 EDM 사운드가 사무실에 울려 퍼졌다. 내가 정이든과 DJ. Nec에게 특별히 부탁한 곡으로 과거 내 최애 그룹이었던 텐뮤지스 스타일의 댄스곡을 최신 북유럽 사운드를 접목해 탄생시킨 곡이었다.
정이든의 중독성 있는 멜로디 라인과 EDM 전문가 DJ. Nec이 힘을 합쳐 만든 곡인 “내 안의 나”라는 곡이었다. 물론 제목은 지금 방금 붙인 거지만···.
“노래 잘 빠졌죠? 라이벌 그룹인 네미시스를 위해 특별히 쓰리콤보가 다시 뭉쳤습니다. 네미시스는 이 곡을 타이틀곡으로 발매하고 음악방송을 돌게 될 겁니다.”
“으, 음악방송···.”
“어때요? 흥미가 생기죠? 슈퍼노바랑 테리우스가 언제 컴백하더라? 아무래도 네미시스 활동이랑 겹칠 것 같기도 하고···.”
“고, 곡이 정말 좋네요. 그 네미시스라는 그룹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명곡이에요. 제 매력을 뽐낼 수 있는 어른스러운 곡이기도 하고···.”
나유정은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고 있었다. 뭐···.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이미 내가 한 제안을 거부하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 * *
영화 크랭크인 며칠 전 러브원과 네미시스가 땀을 흘리며 합동 연습을 하고 있었다.
내가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멤버들이 잠시 음악을 멈추고 우리를 주시했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안녕하세요. 여러분!”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다솜이 내 얼굴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가 한가지 공지를 드리러 왔습니다.”
“공지요?”
나는 슬쩍 뜸을 들이며 연습실 주위를 슬쩍 훑어보다가 러브원과 네미시스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흐음···. 네미시스 여러분들 연습은 좀 할 만하신가요?”
“네. 러브원에게 밀리지 않도록 열심히 연습하고 있습니다.”
은하는 러브원에게 크게 밀린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가졌는지 최근에 무리해서 연습을 하는 것 같았다. 뭔가 초조한 표정이 느껴진달까?
역시 그녀는 강한 승부욕의 소유자였다.
“제가 한 가지 소식을 들고 왔습니다. 네미시스에 새로운 멤버를 넣고 싶습니다.”
“네? 새로운 멤버요?”
웅성웅성···.
나의 말에 장내가 살짝 시끄러워졌다.
“쉿···.”
나는 검지를 입술에 대고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원래 예전부터 같은 멤버수의 라이벌 그룹은 많지 않았습니다. 멤버가 3명이면 경쟁사는 4명, 5명이면 6명! 이런 식으로 한 명씩 더 넣는 게 일반적이었습니다.”
“그, 그건 예전 90년대 후반···.”
“쉿! 지금도 통하는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하죠.”
밑도 끝도 없는 내 말에 당황하는 네미시스 멤버들이었다.
“그, 그래서 그 추가되는 멤버가 누군데요? 예전에 탈락했던 참가자인가요?”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럼 누군데요?”
“지금 밖에서 여러분들을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습니다.”
“???”
나는 놀란 표정의 멤버들을 뒤로하고 문밖에 기다리고 있다는 멤버를 소리쳐 불렀다.
“들어오세요”
연습실 문으로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정유나 역할을 할 나유정이었다. 그녀는 파릇파릇한 대학생 같은 복장에 동안 메이크업을 하고 연습실 안으로 사뿐사뿐 걸어 들어왔다.
멤버들은 이게 무슨 일인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으며 나유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사하세요.”
“안녕하십니까? 네미시스의 막내 정유나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나유정의 충격적인 인사말에 러브원과 네미시스 멤버들은 입만 쩍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