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멤버 (1)
나는 조현우에게 나중에 장예원을 비롯한 다른 멤버들도 촬영할 기회를 줄 것이며, 지금 개발 중인 이 영상을 나중에 활용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말을 해줬다.
“가, 감사합니다. 대표님!”
“그래요. 거기 명함에 적힌 연락처로 전화 주세요. 아 참. 사람들이 오해할 수 있으니 막무가내로 촬영하시지 마시고 모델이 필요할 땐 우리 회사로 놀러 오세요.”
“네. 꼭 연락드릴게요.”
조현우는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상당히 업된 느낌이었다.
뭐 이 정도면 되겠지? 솔직히 아까 본 영상보다 조금만 더 좋아지면 더는 바랄 게 없을 것 같았다. 우리 덕후 조현우 선생이 풀어놓은 미끼를 물은 것 같으니 때가 되면 알아서 올라오지 않을까 싶었다.
‘한번 놀러 오면 다시 빠져나갈 수 없을 거다.’
* * *
예원이는 이지령과 금세 친해졌는지 헤어지는 걸 아쉬워하고 있었다. 둘은 서로 팔짱을 끼며 주차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예원이는 의외로 꽤 싹싹한 성격이었다.
“언니. 서울 언제 올라와요?”
“학교 일 정리되면 나도 바로 올라갈 거야. 대표님! 방이 4개라고 했죠? 저는 꼭 혼자 쓰고 싶으니 독방으로 부탁드려요!”
“안돼! 언니. 나랑 같이 큰 방 쓰자. 거기 화장실도 딸려 있어.”
“난 혼자 방 쓰는데···.”
“나랑 같이 쓰자. 응?”
“난 밤에 책 같은 거 많이 봐서 너 나랑 방 쓰면 힘들 거야.”
“괜찮아요. 전 그냥 누우면 곯아떨어지는 스타일이라···.”
이지령에게 끈질기게 달라붙는 예원이를 보고 웃음이 나왔다.
“예원아! 언니가 그렇게 좋니?”
“네! 오늘 처음 만났는데 이상하게 예전부터 알았던 것 같아요.”
와···. 예원이 사회성 장난 아니네.
“나보다 커서 누가 보면 내가 동생인 줄 알겠는데?”
이지령이 고개를 들어 예원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헤헤···. 그래도 얼굴만 보면 그렇게 안 보이잖아요.”
“얘들아. 아무튼, 방은 와서 보고 결정해 아직 4명뿐이라 각방 써도 될 거야.”
“네!”
“그리고 숙소에서는 무조건 규칙을 잘 지켜야 해. 가면 리더도 잘 뽑아야 하고···. 예원이는 알 거야. 전 소속사에서 데뷔조 엎어진 거 솔직히 리더 문제가 컸잖아. 이번에는 신경 써서 리더를 뽑아야 해. 알았지?”
“전 언니가 리더를 하면 진짜 잘할 것 같아요. 명석하게 해결책을 딱딱 내줄 것 같거든요!”
“이제 그만 서울 가셔야죠. 지금 출발해도 저녁 늦게나 도착할 거 같은데요?”
“그래. 알았어. 이제 슬슬 가봐야지.”
나와 예원이는 이지령의 배웅을 받으며 서울로 출발했다.
* * *
나는 예원이를 숙소에 데려다주었다. 숙소는 회사 근처의 45평 아파트였다. 하석우 팀장이 내가 제시한 가이드라인 대로 적합한 물건을 임차했고 구조 공사를 하지 않는 선에서 벽지와 소소한 인테리어를 하겠다는 조건으로 주인과 계약했다.
10년이 안 된 아파트에 방범 시설이 잘 갖춰진 곳이었다. 이미 인테리어와 필요한 가구와 전자제품을 다 들여놓아서 그냥 개인 짐과 몸만 들어가면 되는 완벽한 숙소였다.
아파트에 도착 후 내가 숙소의 문을 열어주니 깜짝 놀라는 모습이었다.
“와! 거실이 넓어서 좋아요. 3대 기획사에서도 이 정도는 아닐 거 같은데요? 너무 무리하신 거 아닌가요?”
거실은 크게 손댄 것 없이 대형 TV와 안마의자, 소파만 들어가 있었다.
“무리는 무슨? 우리 회사 재정이 탄탄해서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런가요? 제가 계약 잘한 거 맞네요.”
“그럼! 이제 꽃길만 걷는 거지.”
“대표님. 저희 너무 띄워주지 마세요. 데뷔가 전부가 아닌 건 저도 알아요. 데뷔하고 나서가 바로 진짜 경쟁이죠. 저도 열심히 할게요. 대표님.”
“우리 예원이가 어디서 많이 듣긴 들었구나?”
그녀의 의욕 넘치는 표정을 보고 내친김에 방까지 보여줬다.
방은 인테리어 업체에 맡겨 안정감 있는 파스텔톤 벽지와 침대, 화장대, 수납 가구들을 방마다 인당으로 들여놓았다.
“와! 무슨 TV 드라마 세트 같아요. 그 왜 있잖아요. 유산상속자들에 나오는 그런 방이요.”
“에이. 그건 오버지. 그냥 깔끔한 인테리어에 유용한 수납 가구들 몇 개 들여놓은 거야.”
“전 이런 예쁜 방에서 살아본 적 없어서 그런지 꼭 공주님 방처럼 느껴져요.”
“아···. 그래?”
아무래도 좋지 못한 형편 때문인지 이 정도의 인테리어를 보고도 너무 기뻐하는 예원이었다.
‘하긴···. 아버지와 살던 아파트가 오래되기도 하고 좀 좁긴 했었지.’
그래서 이렇게 기뻐하는 게 이해가 갔다. 나도 어렸을 적 좁은 집에서 형이랑 동생과 같이 생활한 적 있었고 그게 안 맞는 사람에게는 얼마나 고역인지 알고 있었다.
“오늘 혼자 잘 수 있겠어?”
“괜찮아요. 어렸을 때부터 얼마나 혼자 잘 놀았는데요.”
“그렇구나. 조금만 참아 다른 연습생들도 곧 들어올 테니까.”
“넵. 대표님. 너무 궁금하고 기대돼요.”
“다들 너 못지않게 예쁘고 재능있는 애들이야. 진짜 기대해도 된다.”
나는 예원이에게 냉장고에 식료품들이 채워져 있고 주방에서 요리해 먹을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예원이는 그 말을 듣자마자 주방으로 달려가 싱크대, 냉장고, 식탁을 체크했다.
“와···. 진짜 넓고 좋네요. 이런 곳에서 음식을 만들고 싶었는데···. 대표님 제가 멤버들을 위해서 가끔 음식 만들어줘도 되죠?”
“당연하지. 너 그때 보니까 음식 엄청 잘하던데 나도 좀 얻어먹자.”
“대표님이라면 무조건 공짜로 드리죠. 헤헤···.”
“냉장고에서 간단한 재료들이 있던데 좀 해드려요?”
“그럴까? 출출하긴 하네.”
“잠시만요.”
예원이는 팔을 걷어붙이더니 냉장고에서 냉동 김치볶음밥을 꺼내 프라이팬에 식용유 한 스푼을 뿌린 후 밥을 볶기 시작했다. 그녀는 전혀 허둥대지 않고 물 흐르듯 프라이팬을 컨트롤 했다.
기름에 밥을 볶는 소리와 예원이의 나직한 허밍이 왠지 모르게 편안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밥이 다 되자 달걀 후라이와 참깨로 마무리했다.
“짜잔! 드셔 보세요. 대표님.”
“응?”
“냉장고에 재료가 부족해서 그냥 냉동 김치볶음밥이에요. 나중에 제대로 해드릴게요.”
“아냐 아냐. 괜찮아. 이것도 맛있는데 뭐···.”
솔직히 나는 요리를 하는 예원이를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다. 그야말로 시간 순삭!
‘본격적으로 요리 만드는 콘텐츠를 미튜브에 얼른 올려야겠어. 이건 분명 먹힌다!’
* * *
다음 날 아침 회사에 가보니 유정 씨가 사무실에 출근해 있었다.
“어? 유정 씨. 어쩐 일로 아침부터 출근한 거예요?”
“내일 방송 촬영 있잖아요. 사무실도 정리 좀 할 겸 일찍 와봤어요.”
“음? 내일은 녹음실에서 케이가 서바이벌 참가자들이 노래 부르는 거 체크하는 날 아닌가요?”
“맞는데요. 제가 서프라이즈로 애들 놀라게 해주려고요.”
“아아···.”
“에헴! 명색이 회사의 임원인데 제가 마중을 나가야죠.”
“아예 대표를 하시지 그러세요. 그나저나 ‘나뮤스’ 합숙 어땠어요? 전화 한 통을 안 하시던데···.”
“치···. 본인은 했나? 꼭 제가 전화를 일부러 안 한 것처럼 이야기하시네요?”
“합숙이기도 하고 2박 3일 동안 24시간 촬영한다는데 전화하기가 좀 그래서···.”
“저도 그러긴 했어요. 그런데 사실 너무 바빠서 못한 게 맞죠.”
“얼마나 재미있었길래···.”
“말도 마세요. 정말 애들의 눈빛이 반짝거리더라고요. 그 열정, 의지! 하···. 저 요즘 쉬느라 대본은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작품이 막 하고 싶은 거 있죠.”
나유정은 젊은 참가자들에게 에너지를 듬뿍 받고 왔는지 생기가 과도하게 흘러넘치고 있었다.
“에너지가 폭발한다! 띠리링! 의지력이 급격히 상승하였습니다. 마블링 시네마틱 무비 오디션에 참여하시겠습니까?”
“놉!”
“그건 또 싫으시군요.”
“달아오른 저의 의지에 찬물을 끼얹지 마세요.”
나유정은 싸늘히 식은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유정 씨. 딱 좋아요. 지금 그 표정으로 차분하게 방송에 나가는 겁니다. 아까는 너무 흥분하셨어요.”
“뭐래? 아무튼, 내일 촬영팀하고 서바이벌 참가자들 올 텐데 만반의 준비를 다 해주세요. 이준형 대표님.”
“저는 이미 준비가 다 돼 있습니다. 촬영이 원활하게 되도록 협조해드리겠습니다. 이사님.”
“좋아요.”
“아···. 온 김에 오늘 ‘천외딸’ 쓴 거 읽고 가세요.”
“으흠···. 그렇구나. 스토리가 꽉 막혔군요? 역시 천외딸은 내가 읽어줘야 제대로 된 게 나오죠.”
“뭘 얼마나 하셨다고···.”
“다 제가 이야기 한 거 쓰셨잖아요. 인정 좀 하시죠?”
“허 참. 아예 혼자 다 쓰셨다고 하시지.”
“그 정도는 아니고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거죠.”
“일단 알겠고요. 읽어보고 이상한 점 체크해봐 주세요. 스토리는 절대 건들지 말고 감정 부분만!”
“쳇! 스토리는 뭐 새로운 것도 없던데···. 로맨스 무협은 말이죠. 감정선이 생명이라고요!”
“하아···. 그냥 딴 거 쓸걸···.”
“늦었어요. 일단 보고 줄 테니 작업이나 하고 있어요.”
몇 시간이 흘렀을까? 우리는 점심을 짜장면을 시켜서 배부르게 먹었다. 그녀는 촬영이 있다며 수정한 원고를 나에게 던지고 사무실을 나갔다.
그녀는 붉은색 펜으로 맘에 안 드는 표현을 죽죽 그어놨는데 내가 봤을 땐 별로 이상하지도 않은 부분에 손을 많이 댄 것 같았다.
“괜히 말했나? 오늘따라 밑줄을 왜 이렇게 그어 놓은 거야?”
나는 투덜거리며 여자의 심리를 이해해 보려고 노력을 하고 있었다.
‘아···. 우리 케이는 뭐 하는지 놀러 가볼까?’
아침에 분명히 녹음실에서 인사를 했는데 조용히 혼자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슬렁거리며 녹음실로 걸어갔다. 그러다 녹음실 옆 여자 화장실에서 패딩 점퍼를 입은 여자가 걸어 나오더니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응? 누구지?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지금은 뒷모습이라 어디서 봤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나는 생각이 나지 않아 그냥 단념하고 문을 열고 녹음실로 들어갔다. 케이는 새로운 노래를 듣고 있는 것 같았다.
“어? 형 왔어요?”
“어. 작업하냐? 밥은 먹었고?”
“응···. 지금까지 녹음했어. 이제 먹어야지.”
“뭐 녹음했는데?”
“어···. 내 곡 말고 이번에 추가 곡으로 들어온 곡들 있지? 그거”
“그거 네가 그냥 해도 되는 거야? 작곡가들 안 불러?”
“내가 프로듀서인데 뭐? 내 맘이지. 그리고 가이드 보컬 녹음이라 상관없어.”
“응? 가이드 보컬?”
“어. 왜? 아···. 저번에 아르바이트하는 곳에 찾아간다 어쩐다 했잖아? 그때 못 본 거야?”
“그 애가 왔다 갔어? 난 그때 못 보고 허탕 쳤는···. 어?”
갑자기 내 머릿속에서 아까 화장실에서 나오던 여자와 라이브 카페에서 스쳐 지나갔던 소녀의 모습이 오버랩됐다.
엉망이 됐던 퍼즐이 그제야 딱 맞아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호, 혹시 그 리리라는 애 언제 나갔어?”
“글쎄 얼마 안 됐는데? 10분?”
“이런!”
나는 바로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갔다.
“준형이 형! 이 대표!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뒤에서 케이가 내 이름을 불렀지만 나는 아까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던 그녀의 모습을 정신없이 쫓고 있었다.
“어, 없다. 젠장!”
나는 엘리베이터를 눌러 곧장 1층으로 내려가 빌딩 밖으로 나가보았다. 한 겨울철이었지만 대로변이라 그래도 사람이 꽤 많아서 검은색 패딩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젠장 안 되겠다. 스카우트 온!’
나는 바로 스카우터를 가동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살펴보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아래로 내려가는 길에 버스 정류장이 있다는 생각이 스쳐 갔다.
나는 그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상당히 빠르게 뛰어갔더니 저 멀리서 버스 정류장에서 붉은빛이 도는 진한 주황색 아우라가 번쩍이고 있었다.
‘저, 저기다! 찾았어!’
그녀를 찾았다는 안도감 때문이었을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리리는 그런 엄청나게 두꺼운 화장을 하며 가발까지 쓰고 노래를 부르고 다녔을까?’
버스 정류장에 도착해보니 리리는 방금 도착한 버스를 타려는 중이었고 귀에 무선 이어폰을 착용하고 있었다.
“헉헉. 자, 잠시만요!”
나는 거친 숨을 내쉬며 숨을 가다듬었다. 그러자 그녀도 내 인기척을 눈치챘는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어우! 깜짝이야!’
그때 라이브 카페에서 본 그 소녀의 얼굴이었다. 노메이크업에 눈썹을 밀어서 그런지 약간 무섭기도 하고 슬픈 표정 같기도 했다.
“무슨 일이시죠?”
그녀는 웬 덩치 큰 남자가 두꺼운 옷도 안 입고 헉헉거리며 자신을 부르자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저랑 이야기 좀 하시죠. 리리 씨.”
“리리라뇨?”
무슨 소린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후후···. 어디서 연기질이야?’
두 번은 안 속았다.
나는 지금 두 눈에 스카우터를 가동 중이었고 눈앞에서 예전에 봤던 강렬한 아우라에 눈뽕을 공격을 당하고 있었으니까.
“그쪽 리리 씨 맞잖아요. 홍대 송포유에서 아르바이트하는···.”
“..........”
그녀는 정곡을 찌르는 내 말에 잠시 말문이 막히는 표정을 짓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