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스트에 가다 (1)
나는 카이스트 이지령에게 온 문자를 곱씹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이지령입니다. 저 연예계에 관심 있고 적극적으로 해보고 싶어요. 하지만 부모님이 회사에 의문을 품고 계세요. 그래서 대표님이 직접 뵙고 함께 설득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비전을 보여줘야 한다고? 연습생 부모에게 프레젠테이션하게 생겼네. 이거야 원···.”
사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있는 그대로의 계획을 말해주면 될 것 같았다.
현재 나는 군산에 내려와 있었다. 대전에서 이지령의 부모님을 만나야 했기 때문에 겸사겸사 군산으로 내려와 장예원의 짐을 옮기는 것을 도와주고 있었다.
“웃차···. 다 했다.”
“짐이 트렁크에 다 들어가네? 이게 다야?”
“네. 이 정도밖에 없어요.”
예원이는 큰 여행 가방 하나, 그리고 커다란 백팩, 그리고 쇼핑백 두 개를 내 트렁크에 옮겨놓았다.
“아버님께 인사는 다 했고? 아까 얼굴 뵀더니 많이 좋아지신 거 같더라.”
“네. 요즘 많이 좋아지시긴 했는데 그래도 걱정돼요.”
예원이도 걱정이 많은지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아까 옆에 계시던 분이 간호해주시는 아주머니시지? 인상 좋아 보이시던데···.”
“네. 아주머니께서 잘 돌봐 주세요. 두 분이 나이도 비슷해서 말동무도 되는 거 같고···.”
“너 없으면 더 좋은 사이가 될 수 있는 거 아냐?”
“피···. 그랬으면 좋겠네요. 왜 그렇게 숫기가 없으신지···.”
“숫기가 없긴 네 눈치를 보는 거겠지.”
“아 몰라요. 얼른 서울로 가요. 대표님.”
“그래. 옆에 타라. 그런데 서울은 저녁쯤에 도착할 거야.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점심 먹고 어디 들를 곳이 있거든.”
“어디 가시는데요?”
“어. 대전 좀 들러야 해. 거기 사는 연습생이 있거든.”
“네? 연습생이요? 거기 가면 저도 볼 수 있는 거예요? 와···. 신난다. 드디어 저도 동료가 생기는 건가요?”
“잠깐만···.”
나는 이지령의 나이를 계산해보고 있었다. 작년에 18살이었으니 지금은 19살일 것이다. 장예원은 18살이니 이지령이 언니였다.
“대전에 사는 연습생은 19살이니 너보다 언니네.”
“전 언니도 좋아요.”
“그래. 안전띠 매라. 대전으로 간다.”
“가즈아!”
오랜만에 본 예원이는 표정이 많이 좋아진 것 같았다. 아무래도 근심 하나가 사라지니 예전의 부잣집 딸 같은 귀엽고 발랄한 미소를 되찾았다.
* * *
한 시간 넘게 고속도로를 달려 카이스트에 도착했다.
‘작년에 여기서 강다혜를 보러왔다가 이지령을 봤었지.’
겨울이라 교정에 있는 누런 나뭇가지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졸고 있는 장예원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헤드뱅잉을 하며 졸고 있었다.
“예원아. 일어나. 도착했다.”
“으으음. 쓰읍.”
손등으로 살짝 입을 닦더니 풀린 눈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너 어제 잠 안 잤어? 많이 피곤해 보이네?”
“아···. 죄송해요. 잠을 자긴 잤는데 항상 차에 타면 졸리더라고요.”
“아기네 아기···. 원래 아기들이 차를 타면 항상 자잖아.”
“이렇게 모델같이 큰 아기 보셨어요?”
예원이는 차에서 기지개를 쭉 켰다.
‘어우. 길다 길어. 역시 센터 포지션이 딱이야.’
“대표님. 그런데 여기 어디예요?”
“대전이야. 카이스트.”
“네? 여기에 연습생이 있어요? 아까 19살이라고 하셨잖아요.”
“사실 나도 잘 몰라. 너무 똑똑해서 조기입학 했나 보지. 아무튼, 대학교 2학년생인데 19살이래.”
“그 언니 천재인가 봐요. 19살에 대학교 2학년? 거기에 카이스트? 여기 과학고 다니던 사람들이 들어오는 학교 아니에요?”
“맞아. 대전과학고 출신이래. 이름은 이지령이고···.”
예원이는 뭔가 이상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왜? 동료가 너무 똑똑해서 부담스럽니?”
“아뇨. 그게 아니라 이 정도로 공부를 잘하면 그냥 연구 같은 거 시키는 게 우리나라를 위한 길 아니에요?”
“너 꼰대구나? 세계적으로 노는 케이팝 아이돌이 돼서 한국을 빛낸다는 생각은 왜 못하는 거야?”
“그게 더 꼰대 같은데요? 빛내긴 뭘 빛내요. 그냥 유명해지면 좋은 거지.”
우리는 서로 꼰대라고 지적하며 소소한 대화를 나누었다.
“넌 이 근처에서 학교 구경 좀 하고 있어라. 나는 결판을 짓고 올 테니!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전화하고. 알았지?”
“네. 알겠어요.”
나는 그녀를 뒤로하고 이지령이 알려준 건물에 들어섰다.
[제4차산업혁명연구센터]
‘뭐야 이런 걸 연구하는 곳도 있어?’
건물 3층으로 올라가 보니 여러 개의 연구실과 방이 보였다. 살짝 안을 쳐다보니 각종 설비들과 기기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나는 곧바로 휴대전화를 꺼내 이지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어. 도착했어. 근데 어디로 가야지? 나온다고? 그래. 중간에서 기다릴게.”
전화를 끊고 계단 근처에서 서성거리고 있으니 이지령이 오른쪽 통로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에 본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도도하고 차가워 보였고 애쉬 그레이 컬러의 머리카락이 어깨선 정도에 드리워져 있었다.
‘크···. 저 얼음공주 같은 모습. 여자 덕후 들을 부르는 외모야.’
그녀는 카이스트의 정형화된 패션인 회색 니트티에 한 치수는 더 커 보이는 과잠을 입고 있었음에도 뭔지 모를 시크함이 느껴졌다. 눈에 확 들어오는 이 존재감!
“결국, 여기까지 오셨네요. 오시느라 고생하셨어요.”
“인재를 모셔가려면 와야지.”
“그거야 대표님이 저를 먼저 꼬셨으니까 당연히 그래야죠.”
“어허! 꼬시다니 어감이 이상하잖아. 그런 거 아니고 춤추는 거 보고 캐스팅한 거야. 말은 똑바로 해야지.”
“전 그때 대표님이 제 전화번호를 따려고 하는 줄 알았잖아요. 킥킥···.”
농담하는 이지령을 보니 많이 심각한 상황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 없으니 일단 저를 따라오세요. 바로 아빠 연구실로 갈 거예요.”
“연구실?”
“아버지가 여기 교수시니? 유전자가 진짜 무섭긴 무섭구나.”
“네, 따라오세요. 아빠한테 말씀하실 때 뜬구름 잡는 이야기나 비논리적인 이야기는 삼가해 주세요.”
“그, 그래. 알았어. 논리 하면 나야. 걱정하지 마.”
“쉿! 이제 다 왔어요.”
그녀는 오른손 검지를 들고 조용히 하라는 소리를 했다.
도대체 어떤 분이길래 이지령도 저렇게 살짝 긴장하는 걸까? 우리는 노크를 한 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 안녕하십니까? 이동화 교수님. 이준형이라고 합니다.”
“아! 어서 오세요. 반갑습니다.”
아까 연구실 문 옆에 붙어있는 이름을 살짝 보고 들어오길 잘한 것 같았다.
내 눈앞에는 170대 후반의 키에 젊었을 적 꽤 훈남이었을 듯한 외모의 중년의 남자가 서 있었다. 아무래도 이지령은 그의 우월한 유전자를 물려받은 것 같았다. 그는 성큼성큼 나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했고 서로의 명함을 교환했다.
“반갑습니다. 서울에서 여기까지 오셨으니 차도 한잔하시면서 천천히 이야기해보는 게 좋겠군요.”
“네. 그러시죠.”
이동화 교수는 이지적인 분위기였고 태도도 정중했다. 그는 나를 연구실의 내부 회의실로 안내했다. 내가 자리에 앉자 이 교수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훑어보았다.
이지령이 따뜻한 차를 내오자 날씨 이야기 등 사소한 잡담이 오갔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드디어 본론이 시작됐다.
“준형 씨. 제 딸을 캐스팅하고 싶으시다고요? 우리 애의 어떤 재능을 보셨길래 그러시는 거죠?”
나는 이런 경험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마치 대학교에 면접을 보러온 고3 수험생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네. 지령이를 본 것은 작년 카이스트 축제에서였습니다. 무대에서 춤을 출 때 아우라가 빛나더군요. 제가 그때 지령이의 특별함을 느꼈습니다.”
“아우라요? 그 아우라가 뭐죠?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저는 그런 모호한 표현 말고 명확한 것을 좋아합니다.”
하···. 대충 좀 알아듣지. 내가 이래서 이과를 싫어한다니까? 나만 볼 수 있는 아우라를 어떻게 명확하게 설명하냐고!
“연예계에서는 그런 것을 일종의 감이라고 합니다. 어쩔 수 없이 애매모호 할 수밖에 없는데요. 일종의 통찰이라서 그렇습니다. 사람을 봤을 때 3초 만에 판단을 내린다고 하지 않나요? 그 사람의 특징 그러니까 외모와 목소리, 눈빛, 태도, 그리고 저 같은 경우에는 연기와 춤과 노래 등을 종합적으로 보고 판단을 내립니다. 그리고 그 예감이 빗나간 적 없었고요.”
“흐음···. 이해하기 어렵지만, 어쨌거나 우리 애가 재능이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당연하죠. 그렇지 않았으면 여기 올 일이 없었을 겁니다. 저도 그렇게 한가한 사람은 아니거든요.”
“..........”
“그리고 지령이도 이 분야에 관심이···.”
“아···. 됐습니다. 그 이야기는 얘한테 벌써 들었어요.”
이동화 교수는 손을 들고 내 말을 제지했다.
“그렇군요.”
“우리 지령이는 어렸을 때 똑똑하기로 유명했습니다. 미국에서 월반하고 영재 교육을 받았는데 거기서 나이 많은 학생들과 경쟁하며 심한 학업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공부를 거부하게 되더군요. 그래서 한국으로 다시 들어와 1년 정도만 조기입학을 했고 지금까지 평범하게 학교에 다녔습니다. 사실 제가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 중에 그런 불행한 삶을 산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전 우리 애가 평범하게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습니다.”
“음···. 지령이에게도 그런 아픔이 있었군요. 괜찮습니다. 저는 그런 아픔이 있는 친구들을 좋아합니다. 개인적으로 그런 아픔을 솔직히 드러내고 또래에 공감을 얻으며 대중들을 위로해 줄 수 있는 그런 아이돌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건 좋은 이야기군요. 그런데 연예계라니···. 정말 생각해보지도 못한 문제라서···.”
“따님은 재능이 있습니다. 제 눈을 믿으셔도 됩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전 그런 건 이해가 안 갑니다.”
“그렇다면 제가 성공시킨 것들을 데이터 삼아 판단하시면 안 될까요?”
나를 바라보고 있던 이 교수는 갑자기 고개를 갸웃하더니 노트북으로 뭔가를 검색했다. 그러자 화이트보드를 비추고 있는 빔프로젝터에서 포탈에 올라가 있는 내 사진과 이력이 떴다.
“미안해요. 제가 시간이 없어서 준형 씨에 대해 많이 찾아보질 못했어요.”
“..........”
“검색해보니 이준형씨의 사진과 간단한 약력이 나오는군요.”
“....저 때 사진은 살이 좀 쪘을 때 찍은 겁니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드라마는 넷플릭에서 1위를 하셨군요?”
“네···. 작품이 두 개인데 모두 1위를 했습니다.”
“흠···. 이건 대단하군요. 한국을 제외하고도 수십 개 나라에서도 1위네요? 명함을 보니까 J&J 엔터테인먼트라는 회사도 설립하셨던데 비전이 뭔가요?
이동화 교수는 나에 대해 꼬치꼬치 묻기 시작했다. 그의 샤프함에 약간 위축되었지만, 나는 지금까지 내가 공부한 플랫폼 전쟁과 콘텐츠 공급자와의 관계에 대해 설명하고 내가 어떤 식으로 사업을 진행할 것인지, 추구하는 아이돌은 어떤 형태인지, 그리고 이지령이 속하게 될 아이돌 그룹이 어떻게 인지도를 높이게 될 것인지까지 심도 있게 설명했다.
말을 열심히 하다가 잠시 옆을 보니 이지령이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노트북으로 내가 하는 말을 요약해서 받아 적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허···. 지금 뭐 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돈 빌리러 온 사람도 아니고···.’
이 교수는 팔짱을 풀면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보니까 철학도 있는 것 같고 웹소설, 드라마, 아이돌, TV쇼, 영화, 넷플릭 등···. 다양한 콘텐츠를 섭렵하고 있군요. 더군다나 웹소설이나 드라마 같은 경우 흥행 실적이 인상적입니다.”
“..........”
어이! 지령이 아버님. 난 당신 딸을 스카웃하러 온 거라고! 다른 부모 같으면 회사의 연습생은 몇 명인지? 숙소에 방은 몇 개인지? 연습은 얼마나 하는지? 데뷔는 언제 가능한지? 그런 것을 물어본다고! 뭐가 인상적이란 말이야?
내가 그렇게 구시렁거리고 있는 동안 그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뒤를 돌아 창밖을 바라보며 말을 하기 시작했다.
“준형 씨는 본능적인 건지 아니면 공부를 따로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강점을 이용해 결과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탁월한 것 같습니다.”
“과찬이십니다.”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미래 4차산업혁명의 트렌드를 잘 따라가고 있어요. 특히 콘텐츠 분야에서 말이죠.”
“..........”
“아까 여기 들어올 때 건물에 명패 보셨나요?”
“제4차산업혁명연구센터?”
“맞습니다. 여기서 연구하는 게 그런 것들입니다. AI, 블록체인, 정밀의학, 가상현실, 나노기술 그런 것들이죠. 그런데 준형 씨 이야기를 듣다 보니 제가 간과했던 것을 깨닫게 된 것 같습니다.”
“네. 교수님 말씀처럼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바로 콘텐츠입니다. 플랫폼은 변하더라도 콘텐츠는 영원하죠. 그리고 콘텐츠는 글로벌 플랫폼과 만나 더 강력해지고 있습니다.”
“새로운 플랫폼인 미튜브나 넷플릭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스타작가라는 강점을 활용해 나름의 콘텐츠 왕국을 세우겠다는 전략을 세운 걸 보면 시대의 흐름을 잘 읽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주먹구구식 경영자는 아니군요.”
“그런 비전이 없었다면 그냥 작가만 하고 있는 게 맞죠.”
내가 그 말을 하자 이동화 교수는 내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교수님. 왜 그렇게 보시는 거죠?”
“저도 그 감이라는 통찰을 해보고 싶지만 잘 안되는군요.”
“당연하죠. 아무나 세계 일류 콘텐츠를 만들 순 없으니까요. 테리우스 매니저일 때도 그랬지만 믿고 맡겨주세요. 저는 잘 해낼 수 있습니다.
“그렇군요. 지령이도 원하는 일이고 준형 씨가 지금까지 한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겠네요.”
‘어? 설마···.’
“우리 지령이 잘 부탁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