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는 스타 작가님-132화 (132/263)

예정된 인연 (2)

“네?”

김호진 PD는 내 말을 이해 못 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상황이 어려운데도 원래 없었던 눈치는 생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놔···. 이 양반은 여전하구만. 이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그의 눈치 없음에 한숨이 절로 났지만, 한층 살이 빠진 것 같은 김 PD의 얼굴을 보며 내가 이해해야지 하는 마음을 먹었다.

‘이 양반은 외골수인 예술가 스타일이야. 그런 걸 바라는 게 우스운 거지. 그냥 다이렉트로 살짝 말하는 게 좋을 것 같네. 들어보니 인적 구성으로 봤을 때 내가 인수를 해도 될 회사 같기도 하고···.’

사실 오늘 여기 오기 전에 사과 스튜디오가 만든 작품들을 한번 훑어보았다. 내가 아는 작품도 있었고 망했더라도 그저 그런 평작들이 아닌 꽤 평가가 괜찮은 것들이 대다수였다. 거기에다가 내가 능력을 인정한 김호진 PD가 포진해 있다는 게 키포인트!

나는 김호진 PD의 옆으로 다가가 귓속말로 속삭였다.

‘인수요. 인수’

그는 잠시 아무 반응이 없더니 눈을 크게 뜨고 아!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김호진 PD는 내 말에 잠깐 놀래더니 뭔가를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이제야 내가 말한 내용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작가님. 이건 제가 답변 드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오늘 대표님이 돌아오시면 같이 의논해보고 연락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PD님. 잘 상의해보시고 전화 주시거나 편하시면 여기 적힌 사무실로 찾아오셔도 됩니다.”

나는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J&J 엔터테인먼트···. 준형 & 유정···.”

김호진 PD는 내 명함을 받고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아까 유정 씨랑 회사를 차렸다고 했더니 회사명을 보고 의미를 바로 알아차리는 모습이었다. 너무 알아차리기 쉽게 만든 게 아닌가 싶었다.

“흠···. PD님. 그럼 저는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네네···.”

나는 들어왔을 때 벗어놨던 코트를 집어 몸에 걸쳤다. 그러자 코트 안주머니에 있던 서류 하나가 툭하고 떨어지는 게 아닌가?

떨어진 서류 몇 장이 사무실 바닥에 흩어졌다.

“어이쿠!”

김호진 PD는 나 대신 그 서류를 황급히 집어 들었다. 이민영 총괄 디렉터가 준 제작사 리스트는 노안이 온 사람에게 보고라도 하는 듯 폰트 크기가 커서 안 보려고 해도 내용이 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김 PD는 서류의 내용을 확인했는지 표정이 사뭇 어두워지고 있었다.

“아···. 제가 칠칠치 못하게 이런 걸 흘렸네요. 죄송합니다.”

“아, 아닙니다. 작가님. 여기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제작사 리스트를 고이 접어서 품 안에 갈무리했다. 이렇게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당연히 일부러 연출한 장면이었다.

김 PD는 내가 말리는데도 굳이 지하 주차장까지 나를 따라 내려와 배웅했다.

“저에게 기회만 주어졌더라면 ‘나만의 세계’도 끝내주게 연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너무 아쉽습니다. 작가님.”

“아···. 그거요? 아직도 그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네. 아쉬워서 그 작품을 다섯 번은 본 거 같습니다.”

“그 당시는 저작권이 어떻게 될지 몰라 JTVC로 간 거라···. 뭐 사실 그런 논란이 전혀 없긴 했지만요.”

“그래서 더욱 아쉽습니다. 정말 제가 해보고 싶었던 작품이었어요.”

‘후후···. 이 양반아. 지금 과거에 연연할 때가 아니에요. 아직 작업할 작품이 줄줄이 밀려 있다니까요··. 이제 PD님은 사과 스튜디오 대표님에게 말만 잘해 주시면 됩니다.’

“PD님 이제 그만하시죠. 지나간 거 얘기해봐야 아쉬움만 남습니다. 앞으로가 중요하죠.”

나는 일부러 ‘앞으로’를 강조하고 있었다.

그는 아직도 미련이 남았는지 멍한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허 참···.’

“PD님 뮤지컬 영화 말고도 할 게 많습니다. '나만의 세계'를 뛰어넘는 작품도 대기 중이라는 사실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네? 나만의 세계를 뛰어넘는다고요?”

“뭐···. 이를테면 말이죠.”

내가 미소를 짓고 있자 김 PD는 분명 뭔가가 있다는 것을 눈치챈 얼굴이었다.

“제, 제가 대표님께 잘 말씀드려보겠습니다. 그런데 인수할 총알은 넉넉하신 거죠?”

“말해서 뭐 합니까? 회사 채무가 10억 정도라고 하셨죠?”

“아, 아마 그럴 겁니다.”

“뭐 그 정도야. 아무런 문제도 안 됩니다.”

“그렇군요.”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 * *

다음날. 김호진 PD와 정광현 사과 스튜디오 대표가 회사로 찾아왔다.

“안녕하십니까? 이 대표님. 정광현이라고 합니다.”

“어서 오십시오.”

김호진과 같이 온 정광현 대표는 40대 후반으로 벌써 흰머리가 가득한 인상이 좋아 보이는 남성이었다. 그는 일련의 사고에 따른 스트레스로 인해 정말 고생을 많이 한 것 같았다.

“나이에 비해 좀 늙어 보이죠? 요 몇 달간 현실이 막막해서 스트레스를 받느라 한 10년은 늙어버린 것 같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그랬다. 40대 후반이 아니라 50대 후반이라고 해도 믿을 외모였다. 좋은 말을 해주려고 해도 악담이 될까 봐 그냥 말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정광현 대표가 회사 인수에 요구하는 것은 딱 두 가지였다. 채무 변제와 고용 승계!

나는 원래 그럴 생각이었기 때문에 10억 원에 대한 채무를 이어받고 회사 주식을 100% 인수했다. 일단 급한 것만 처리하고 나머지는 장기부채로 돌려놓고 차근차근 해결해야 할 듯싶었다.

그리고 고용 승계에 관한 내용도 변호사 입회하에 서류를 작성했다. 정광현 대표는 지금껏 버텨왔던 게 너무나 힘들었는지 별다른 요구 없이 깔끔하게 회사를 넘겼다. 그리고 사인이 완료되자 후련한 표정이었다.

나는 그렇게 6층 제작 파트에 입주시킬 전문 인력 집단을 확보했다. 솔직히 손쉽게 협상이 될 거라는 생각은 안 하고 있었는데 정 대표는 오히려 부채를 떠안고 회사를 인수하며 전원 고용을 보장하는 나에게 감사의 인사를 표했다.

마지막까지 직원들의 고용을 위해 노력하는 대표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나는 정광현 대표도 계속 일을 하게 해주려고 했는데 그는 그건 아니라며 손을 흔들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 법입니다. 그리고 제가 요 몇 달간 온갖 스트레스에 시달려서 건강이 급속도로 안 좋아졌습니다. 의사가 무조건 쉬라는 걸 무시하고 일을 했더니 몸이 만신창이가 돼버렸어요.”

그가 그렇게 말을 하자 나는 더 이상 권유할 수 없었다.

알고 보니 그는 그간 벌어들인 돈으로 원룸 건물을 사서 따로 임대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마지막까지 그 건물을 팔지 못한 건 아내의 반대 때문이라고···.

“넘긴다고 했더니 아내가 좋아하네요. 드디어 지긋지긋한 사업 때려치우게 됐다고···.”

그는 씁쓸한 듯 자조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모님이 보험회사에서 잘나가는 판매왕이라 좀 쉬어도 될 거예요. 연봉이 억대라던데···.”

“아···.”

김호진 PD가 내 귀에 대고 귓속말로 정보를 전해주었다.

스카우터로 정광현 대표의 아우라를 살펴보니 그는 그냥 일반인이었다. 김호진 PD 같은 특별한 재능이 없어도 노력하면 어느 정도 성과가 나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도 20년을 제작사에 몸담은 분인데 그 노하우를 무시 못 하지.’

“정 대표님. 혹시 건강 회복하시면 저희 J&J 제작 파트의 고문이 되실 생각이 없으신가요? 아무래도 집에서 건물 관리하시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은데요?”

“음···. 고문이요? 그 정도라면···.”

그는 내 제안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우선 건강을 좀 추스른 뒤 아내와 상의해서 결정하겠다고 했다.

“김 PD님은 사과 스튜디오 이전 스케쥴을 얼른 작성해서 보고해 주세요. 일단 하루빨리 6층에 입주를 완료하고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도록 하시죠. 아 참. 그리고 사과 스튜디오 직원들에게 저 나쁜 사람 아니라고 말 좀 잘해 주시고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제가 돌아가서 직원들 사기를 쭉쭉 올려놓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은 6층에 마련된 사무실을 둘러보며 들어오기만 하면 되는 환경에 감탄했다. 그리고 촬영 부스까지 있는 것을 보고 꽤 놀라는 표정이었다.

“혹시 기획사 자체에서 영상을 제작하시려고 이런 걸 만드셨나요?”

“맞습니다. 앞으로는 방송국도 갑이 아니고 자체 채널을 만들어서 홍보하면 되니까요.”

“하긴···. 요즘은 드라마 제작보다 그런 일이 더 수요가 많더군요.”

“일단 지금 하고 계신 일을 다 끝마치시고 돌아오시면 아마 상당히 바쁘실 겁니다. 제가 이것저것 벌여 놓은 일이 많거든요.”

“맡겨만 주세요. 작가 아니 대표님.”

사과 스튜디오는 2주일 안에 이사를 끝마치기로 했다. 정광현 대표는 돌아가고 나는 김호진 PD와 내 사무실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여기 뮤지컬 드라마 대본입니다. 유출 안 되게 조심하시고요.”

“오! 드디어 회사 그만두고 일다운 일을 하겠군요.”

“제 차기작인 뮤지컬 영화의 감독이 PD님이라는 게 다행이네요. 사실 슬기로운 덕질생활도 약간 뮤지컬적인 그런 게 있지 않았습니까?”

“네. 공연하는 장면이나 콘서트 같은 촬영이 상당히 많았죠.”

그런 장면을 멋지게 연출하는 그의 실력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내가 넷플릭의 제작사 리스트에서 그의 이름을 보고 놀란 게 바로 이런 장면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슬기로운 덕질생활이 바로 뮤지컬 영화의 전초전이었다는 것을 지금에야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아마 김호진 PD도 그런 것을 느끼고 있지 않을까?

“부담되지 않으십니까? 영화 첫 데뷔인데요?”

“그 차기작이 슬기로운 덕질생활 정도의 대본이면 솔직히 부담되지 않을 것 같네요.”

“하하···. 그래도 드라마와 영화라 서로 비교하기 쉽지 않은데요. 그냥 뮤지컬 영화 ‘맘마미아’를 상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아···. 그런 이미지군요.”

“이미 메인 곡들은 준비가 다 된 상황이고 추가 곡들은 여러 작곡가에게 의뢰를 넣은 상황입니다.”

“이제 곧 있으면 서바이벌에서 괜찮은 배우들이 선정될 거니까 저만 잘하면 되겠군요.”

“네. PD님은 드라마 촬영 때처럼만 해주시면 됩니다. 그때 정말 인상적이었거든요.”

“알겠습니다. 아! 그런데 저는 여기에서 직책이 뭔가요?”

“일단 외부에서는 PD(프로듀서)라고 하면 될 것 같고요. 회사에서는 실장급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매니지먼트 쪽에 제일 높으신 분이 실장이거든요. 예전에 XM에서 매니지먼트 쪽 담당하셨던 하석우 실장님이 총괄이세요.”

“네. 그런 게 뭐 중요하겠습니까! 전 제대로 된 작품을 빨리하고 싶어요. 몸이 근질거려 죽겠습니다.”

김호진 PD는 이제야 작품 활동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들뜬 표정이었다. 이 양반은 역시 예술을 해야 하는 사람인 것 같았다.

“그거 잘 읽어보세요.”

나는 손가락으로 그가 들고 있던 대본을 가리켰다.

그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대본을 옆구리에 단단히 고정시켰다.

“혹시 이거 보다가 또 예전처럼 날밤 새우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저번처럼 그렇게 된다면 대박 나는 건가요?”

“그렇죠. 제감을 한번 믿어보십시오. 대표님. 제가 이래 봬도 슬기로운 덕질생활을 발굴한 PD 아니겠습니까?”

“생각해보니 그러네요. 하하···.”

나는 김호진 PD에게 케이가 작곡한 메인 테마곡의 사운드 클라우드 주소까지 공유해 주었다. 아무래도 영화의 분위기를 알아야 할 것 같아서였다.

김호진 PD가 사무실을 떠나고 나는 홀로 진행되고 있는 계획을 정리하고 있었다.

1. 2월 중순까지 J&J 스튜디오(전 사과 스튜디오)가 6층 제작 파트에 입주한다.

2. 그와 동시에 장혜원, 정유리, 김담희 3명의 NGG 연습생들은 숙소로 입소(?)시킨 후 맞춤형 트레이닝을 시작한다. 추가로 이지령의 부모님을 만나서 연예계 진출을 허락받는다.

3. 3월까지 진행되는 뮤직넷 쇼에서 선발된 인원을 바탕으로 1개월 안에 촬영을 끝마친다. (블랙소울 혜수의 컴백 일정 때문)

4. 그 후 영화 홍보 및 다음 드라마 촬영 준비

'휴.···. 좀 정리가 되는구나.'

나는 수첩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나 안마의자에 누웠다.

위이잉···.

안마의자의 모터가 돌아가며 딱딱하게 뭉친 내 목과 어깨 근육을 풀어주었다.

이제야 비로소 회사가 회사답게 굴러갈 것 같았다. 사과 스튜디오의 채무 변제 금액이 좀 컸지만 온전한 제작팀을 고스란히 얻어서 차기 영화와 드라마에서 자체적으로 이익을 낼 수 있으니 투자금을 회수하는 것은 일도 아닐 거라 생각했다.

‘10억?’

그깟 거 영화 한편으로 그냥 다 회수해버리겠어!

그나저나 유정 씨는 바쁜 건지 아니면 재미있어서 그러는 건지 연락 한 통이 없었다.

‘음.. 왜 이렇게 허한 느낌이 들지?’

나는 손을 들어 가슴 중앙을 꾹 눌러보았다.

아무래도 내일 저녁이면 본선 진출자들의 합숙이 끝나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유정 씨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안마의자에서 잠깐 잠이 들었다가 악몽을 꾸었다.

대전 방문했다가 이지령의 부모에게 봉변을 당하는 꿈이었는데 너무 생생해서 식은땀이 날 정도였다.

만약 이지령의 부모가 딸의 데뷔를 반대한다면 연습생이 다시 3명이 돼버리니 5명으로 드라마를 찍으며 화려하게 아이돌 데뷔를 치르려는 나의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 것이다.

제발! 내일 아무 일이 없게 그녀를 데려올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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