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는 스타 작가님-131화 (131/263)

< 예정된 인연 (1)>

“디렉터님. 여기 제일 마지막 부분에 있는 사과 스튜디오에 PD가 TVM의 그 김호진 PD 맞나요?”

“네. 맞아요. 작가님하고도 같이 하신 적 있잖아요. 슬기로운 덕질생활이었죠. 아마?”

“왜 이분이 여기에 있는 거죠? 회사 그만두셨나요?”

“작가님 모르셨어요? 전 알고 계실 거라 생각했는데···. 사실 저도 자세한 사정은 잘 모르지만, 회사를 관두고 사과 스튜디오에 들어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뭐지? 슬기로운 덕질생활을 대히트시켜서 TVM에 엄청난 수익을 안겨준 걸로 평가가 좋았었는데···.

“혹시 외부 스카웃으로 독립을 하신 건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들고 계신 제작사 리스트 최하단에 있는 거로 봐서는 그리 좋은 곳은 아닌 것 같아요. 언뜻 지나가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회사의 부대표가 자금을 횡령해서 구속되고 상황이 이상해진 것 같더라고요.”

“아···!”

이민영 총괄 디렉터가 리스트 하단에 놓은 이유가 바로 제작사의 자금 사정 때문인 듯했다.

“이곳이 자금 사정이 그렇게 안 좋은가요?”

“네. 제가 듣기론 월급도 밀려있고 그렇다고 알고 있어요.”

“흠···. 그렇군요.”

나는 갑자기 사과 스튜디오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김호진 PD 같은 사람은 외골수라 전 직장처럼 수직적이고 창의력이 무시되는 그런 곳을 찾아갔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만약 실력이 있는 회사라면 인수해서 우리 회사 6층에 입주시켜도 될지도···.’

슬기로운 덕질생활 찍을 때 본 그의 능력은 정말 대단했다. 머릿속에 찍을 장면이 딱딱 있는 것 같은 천재적인 감독이었다. 물론 내 대본이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도 많이 도움이 됐겠지만, 그는 사내 정치 같은 것을 잘 모르고 오로지 작품만 생각하는 그런 스타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현장에서 인망이 두텁고 리더로써 집단을 잘 이끌어가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야말로 필드의 사령관 같은 타입이었다.

특히나 그의 장점은 촬영을 빠르게 진행한다는 것에 있었다. 최대한 사전에 여러 가지를 고려해서 정해진 시간에 빠르게 좋은 퀄리티의 영상을 뽑아낸다는 데 있었다.

‘김호진 PD라면 믿을만하지. 내가 옆에서 본 게 있는데···. 사람이 눈치는 더럽게 없지만 말이지.’

“디렉터님. 일단 알겠습니다. 제가 이 리스트를 좀 가져가도 되겠습니까? 지금 여기서 결정하기는 좀 그렇군요.”

“네. 그러세요. 하지만 7시즌 계약은 해주셔야죠.”

“그래요. 할 겁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습니다. 철저한 준비를 통해서 제작할 것. 그리고 제가 정하는 제작사에 더 좋은 점수를 주면 좋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 정도야 뭐.”

“보여주신 리스트에 있는 제작사는 일단 퀄리티는 검증된 제작사인 거죠?”

“네. 그렇습니다. 저희 플랫폼에 올릴 작품인데 이상한 업체를 쓸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좋습니다.”

“여기 계약서입니다. 모든 면에서 정말 최고의 조건입니다.”

나는 그녀가 준 계약서의 금액을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계약서에는 100억이라는 숫자가 적혀있었다. 물론 1시즌에 해당하는 원고료를 먼저 지급하고 나머지 시즌은 제작이 들어갈 때마다 지급하는 방식이었다.

‘와우!’

저절로 감탄사가 나오는 금액이었다. 글을 써서 100억을 벌다니···. 물론 지금 당장 들어오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만은 따뜻했다.

현재 내 통장에는 거의 150억에 가까운 돈이 들어있었다. 드라마 ‘나만의 세계’가 히트하고 내 소설이 전 세계적으로 팔리면서 인세가 들어오다 보니 자산이 불어나는 속도가 엄청났다.

통장에 그런 자금을 무식하게 박아놓고만 있다니···.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제작사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비상 자금도 넉넉하게 있어야 하기 때문에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아무것도 안 하고 모아두기만 하는 형국이었다.

‘유정 씨의 자산을 불려준 아저씨라는 사람을 소개받으면 좋겠는데···.’

“작가님?”

“아! 네···.”

“갑자기 무슨 생각에 빠져계시나요? 얼른 사인하셔야죠.”

“하하하···. 제가 가끔 이렇습니다.”

나는 이민영이 내민 계약서에 사인했다. 이 정도 계약이면 나도 괜히 뺄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내 전작의 흥행과 차기 대본만으로 최고의 원고료와 드라마 촬영 조건을 제시했다. 이런 행위는 국내 어느 제작사도 제시하지 못할 수준의 과감한 결정이었다.

‘뭐 아직 아시아에서는 넷플릭을 대체할 플랫폼이 없는 게 문제지. 아직은 여기가 최선이니까.’

“이제 드디어 작가님과 계약을 했군요. 휴···. 힘들었다.”

“제가 뭘 힘들게 했다고 그러세요. 애초에 제가 같이 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거야 작가님 생각이시고요. 저희 입장에서는 이게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거든요.”

“아. 그런 거예요?”

“당연하죠. 만약에 작가님 차기작 소문이 나서 D 플러스에서 접근하면 난감해지거든요. 플랫폼에 킬러 콘텐츠가 얼마나 중요한지 작가님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알죠. 하지만 이미 전작들이 넷플릭에 올라가 있으니 이왕에 같은 곳에서 시너지를 내는 게 좋긴 하죠. 어떻게 보면 제 팬덤이 만들어지는 거니까요.”

“맞습니다.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작가님.”

나는 이민영과 식사를 마저 하며 업계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확실히 글로벌한 정보들을 많이 알고 있었고 그것들은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이민영과 헤어진 뒤 김호진 PD를 만나기 위해 사과 스튜디오로 출발했다. 마침 사과 스튜디오도 우리 회사와 같이 마포구 상암동에 있었다.

[사과 스튜디오]

한 5층 건물의 2층에 자리 잡고 있는 중견 제작사였다. 웬만한 드라마는 자체와 외주 인력을 바탕으로 제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곳이라고 한다.

하지만 최근 자금 사정이 악화되어 위기를 겪고 있다고 한다. 한번 들어보고 위해 손수 이곳을 방문했다.

“어서 오세요. 작가님. 아니 이제 대표님이라고 불러드려야 하나요?”

“반갑습니다. 김 PD님. 오랜만이시네요. 이게 얼마 만이죠?”

“글쎄요. 한 6개월은 된 것 같은데요?”

“벌써 그렇게 시간이 흘렀군요.”

“자 이쪽으로 오시죠.”

김호진 PD는 나를 회의실로 안내했다. 그를 따라가며 사무실을 둘러보니 그냥 오래된 평범한 사무실 같아 보였다. 10명 안팎의 사람들이 자리에 앉아 있었고 몇 명은 바쁘게 스튜디오를 들락거리고 있었다.

“사무실이 아담하네요. PD님.”

“엄청난 빌딩에서 수많은 사람과 일을 하다가 이곳에 오니 처음에는 적응이 좀 안 됐는데 지금은 뭐 그러려니 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하는 김 PD의 얼굴에 씁쓸함이 엿보였다. 안 그래도 마른 체형에 날카로워 보이는 인상이었는데 마음고생을 했는지 체중이 더 줄어든 것 같고 피부도 푸석해 보였다.

“그만두셨으면 연락이라도 좀 하시지 그러셨어요.”

“에이···. 작가님 바쁘신데 그게 연락할 일이 되나요.”

“그런데 어쩌다 나오시게 된 거예요? 드라마 히트시키시고 회사 내에서 입지도 좋아지셨잖아요.”

“너무 잘 나가서 문제였죠.”

“너무 잘 나갔다?”

“네. 갑자기 땜빵이나 하라고 시켜놨더니 방송국의 기존 히트 기록을 모두 갈아치웠잖아요. 그래서 그런지 내부에서 시샘이 엄청났습니다. 회사에 막대한 수익을 올려줬는데도 그다지 좋은 눈으로 저를 보지 않았어요.”

“그래도 그게 그만둘 사유로는 보이지 않는데요?”

“사실은···.”

그는 담담히 그간 있었던 일들을 나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드라마 히트 후 역시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게 최선의 길임을 확고히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다음 차기작을 선정하는 문제에서 상부와 심각한 마찰을 빚었다고 했다.

“저는 제 생각이 맞다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전작이 제 생각대로 잘 풀렸기 때문이었죠.”

문제는 전작 때는 아무도 신경을 안 쓰고 그저 편성만 펑크 나지 않게 해달라는 상부의 생각으로 김호진 PD의 의견을 그냥 수용한 것뿐이었다는 것이다.

땜빵용에 저예산에 거기다 영화계 최고의 핫이슈였던 나유정이 그 드라마를 선택했다는 것까지···. 상부에서도 그냥 해볼 테면 해보라는 식으로 별다른 태클을 걸지 않았다.

하지만 차기작은 달랐다. 정식으로 편성된 것이었기 때문에 이런저런 많은 참견과 PPL 그리고 배우 선정까지 모든 게 예전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 모습에 질려버린 그는 윗선을 들이받았고 그때 마침 제안으로 들어온 중견 제작업체의 스카우트를 받아들이며 현재의 직장인 사과 스튜디오로 이적을 했다고 한다.

나름 업계에서도 자율성을 보장하며 창작 활동을 하는 곳이라 그런지 소문도 좋았고 자기 뜻을 펼쳐 보이기에 가장 적절한 곳이라 판단하여 입사했지만 바로 2주 만에 회사의 부대표인 재무 이사가 자금을 횡령하면서 회사의 기둥뿌리를 흔들어버렸다고 한다.

재무 이사는 회사 자금을 개인적으로 횡령해서 투자하고 대부분의 돈을 날린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횡령죄로 고소를 당하고 입건되어 3년 형을 판결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미 자금을 상당 부분 날려버린 사과 스튜디오는 현재 직원들 월급이 밀려가며 근근이 버티는 중이라고 했다.

드라마 제작사인데 외부에서 의뢰받은 미튜브 촬영과 편집으로 어렵게 연명을 하고 있었는데 회사의 핵심 인력은 설립 초기 당시부터 끈끈한 정이 있어서 그런지 아직은 어려움을 참아가며 극복을 해보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솔직히 힘들어요. 그 재무 이사란 놈이 날린 돈이 20억이 넘어갑니다. 대형 제작사에서는 특별 손실처리를 하고 버틸 재간이 있겠지만 우리는 달라요. 그야말로 기둥뿌리가 뽑힌 셈입니다.”

“그렇군요. 어렵겠네요.”

“네. 맞아요. 힘듭니다. 오죽했으면 미튜브 편집 아르바이트까지 시키고 있습니다.”

안타깝기 그지없는 현실이었다.

“그런데 대표님은 어디 가셨나요?”

“여기저기 일감 구하러 다니시느라 정신없으시죠.”

“그래도 책임감이 있으시네요.”

“이곳이 그래도 이렇게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이탈자가 많지 않은 것은 그런 면이 커요. 대표가 워낙 가족같이 경영을 잘했더라고요. 제작에 철학도 있으세요. 제가 대표님 말에 넘어가서 오늘 이렇게 힘들게 지내고 있지만요. 하하.”

김호진 PD는 솔직히 약간은 후회를 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제가 너무 이상적으로만 생각했나 봐요. 세상 물정을 너무 몰랐던 거죠.”

그래. 솔직히 그런 면이 있긴 했다. 나는 예술하는 사람이라는 그런 생각이 슬기로운 덕질생활을 찍을 때도 은연중에 드러났다.

“뭐 그렇게 성장하는 거죠.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작가님의 작품 ‘나만의 세계’를 보며 많이 반성했습니다.”

“네? 그게 무슨···.”

갑자기 뜬금없는 반성의 시간을 고백하는 김호진 PD였다.

“얼마든지 상업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잡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달까요? 그전에는 둘을 같이 놓고 생각하는 능력이 부족했습니다. 작가님은 매니저 활동도 겸업하시면서 그런 작품을 썼는데 저는 예술을 한답시고 아집에 빠져 있었던 거에요.”

음···. 그 정도는 아닌데?

나는 김 PD가 충분히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회의실에 잠시 침묵이 찾아왔다. 먼저 어색함을 깬 것은 나였다.

“김 PD님! 제가 피디님 좋아하는 거 아시죠?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요.”

그는 내가 하는 말에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네네···.”

“제가 최근에 유정 씨와 함께 기획사를 하나 차렸습니다.”

“아! 정말인가요?”

“네. 아직 언론에는 크게 소개가 안 되었는데요. 지금 뮤직넷하고 방송을 촬영하고 있어서 곧 소문이 날 겁니다.”

“아···. 저도 알고 있습니다. 작가님하고 유정 씨하고 같이 차기작 뮤지컬 영화를 찍는다고 방송에서 서바이벌 같은 걸 한다고 하던데···.”

“맞습니다. PD님. 알고 계시는군요?”

“네. 그건 뉴스에 많이 나온 이야기라서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요. PD님. 그거 아십니까?”

“어, 어떤 거요?”

나는 그를 향해 상체를 기울이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직 그 영화를 찍을 업체가 정해지지 않았어요.”

“네? 그, 그게 정말입니까?”

“사실입니다.”

“혹시 저희가 그 작품을 제작해봐도 될까요? 기필코 슬기로운 덕질생활처럼 대박을 내겠습니다.”

김 PD의 이빨을 꽉 깨문 표정을 보니 갑자기 그의 아우라가 보고 싶어졌다. 분명히 보라색 아우라가 쭉쭉 뻗어 나오겠지?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요? 그게 뭐죠?”

“제가 차린 기획사가 제작도 같이할 예정입니다. 물론 아직 제작 파트는 없지만요. 이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시죠?”

나는 김호진 PD에게 한쪽 눈을 찡긋하며 윙크를 날려 보냈다.

‘이렇게까지 얘기했는데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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