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녀들의 비밀 (2)>
나는 존 킴에게 걸려온 전화를 스피커 폰으로 전환했다.
[직원과 통화를 했는데 연락이 없어서 전화 드렸습니다.]
“아. 죄송합니다. 보고를 받았는데 제가 외부 일정이 있어서 연락을 못 드렸네요. 그래서 아침부터 일찍 전화를 주셨군요.”
[여기는 LA라 저흰 퇴근 시간입니다.]
“오! 멀리서 전화를 주셨군요.”
[보고를 받았는데 전화를 안 하신 이유가 있으신가요? 아무리 바빠도 전화 한 통화는 해주실 수 있었을 것 같은데요.]
뭐지? 어디서 짜증이야? 어투는 정중한데 은근히 돌려 까는 스타일이다.
“혹시 저희 직원이 언제까지 전화 드린다고 약속한 적 있나요?”
[아니요. 그런 건 아닙니다만···.]
“그렇다면 더 이상 말이 필요할까요?”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들어보니 저희 배우인 나유정 씨에 대해서 캐스팅 제의를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혹시 배역을 알 수 있을까요?”
[검후(劍后)입니다.]
“그렇군요. 검후라···.”
마블링 코믹스의 검후
중국 태생의 검의 고수로 어릴 적 살수 집단에서 사내아이처럼 훈련을 받고 자란 전문 살수이며 스스로 최강자를 뛰어넘고 자신을 키워낸 비밀 전문 살수 집단인 ‘살각(殺閣)’을 멸문시켜버린 전설적인 검존. 그 검후가 외계에서 떨어진 운석에서 미지의 힘을
얻게 된다. 그 후로 그녀는 빌런들을 처리하기 시작하는데···.
동양적인 아름다운 외모와 탄탄한 몸매로 떠오르는 마블링 코믹스의 히어로였다.
매력적인 캐릭터였지만 이제 칼잡이는 좀 안 했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너무 이미지가 고착화 되도 문제였으니까.
[검후를 알고 계십니까?]
“존 킴 씨는 잘 모르시겠지만 제가 소설 작가 출신입니다. 마블링 코믹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지식이 있습니다. 몇몇 캐릭터는 좋아하기도 하고요.”
[아···. 그러시군요.]
“그런데 국적이 다르네요? 검후는 중국인인데 말이죠.”
[나유정 씨 말고도 다른 후보들도 있습니다. 아마 오디션을 봐야 하겠죠.]
“결국, 미국에 가서 오디션을 봐야 하는 건가요?”
[네. 당연하죠. 다들 그렇게 합니다.]
“그렇군요. 그럼 안타깝지만, 이번 출연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네? 마블링 시네마틱 무비에 출연하지 않겠다는 뜻입니까?]
“아···. 그런 의미가 아니고요. 캐스팅 때문에 미국으로 오디션을 보러 가고 싶지 않다는 게 유정 씨 의견입니다.”
[잘 이해가 안 가는군요. 할리우드 배우들도 다들 그렇게 하는데요?]
“일단 오디션을 보러 가는 게 너무 멀고요.”
솔직히 같은 오디션을 보는 배우들이 베니스 영화제 여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라도 됐나? 아니면 넷플릭 글로벌 1위를 차지한 드라마에 나와서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었나? 아마 그런 것도 아닌 거 같은데?
[너무 멀어서 못 오신다고요? 다른 것도 아니고 무려 마블링 시네마틱 무비입니다. 잘 생각해보세요.]
“많이 생각해보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배우 의견도 그렇고 일정이 밀려서 못 갈 것 같습니다.”
가만 들어보니 주연도 아닌 거 같은데 베테랑 연기자한테 다른 나라 사람들하고 경쟁 오디션을 보라고 하는 건 좀 아니지 않나? 단독 오디션도 아니고···. 물론 할리우드는 다 그런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
수화기 건너편에서는 아무런 소리가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음? 혹시 우리가 거절하는 시나리오는 생각해보지 않은 거 아냐? 아무튼, 아깝긴 하지만 유정 씨가 자존심이 상한다는데 억지로 오디션을 보게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니던가?
“아무튼, 캐스팅 제안은 감사드립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꼭 같이했으면 좋겠네요.”
[흐음···.]
“여보세요? 존 킴 씨?”
[네. 일단 알겠습니다. 대표님.]
뚜뚜..
캐스팅 디렉터는 기분이 상한 듯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존 킴 이 자식. 자기 퇴근 시간이 다 돼서 전화도 급히 끊은 거 아냐?”
똑똑···.
내가 구시렁거리고 있을 때 누군가 내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대표님. 하석우 실장입니다.”
“어서 오세요. 하 실장님.”
하 실장은 사실상 회사의 관리 이사와 같은 업무를 하며 전반적인 관리를 하고 있었다. 아직은 제대로 된 소속 연예인도 별로 없고 직원들도 없다 보니 그리 바쁜 상황은 아니었다.
소속된 연예인은 딱 3명으로 나유정, 정혜성, 윤하영뿐이었다.
“어제 아이돌 숙소로 쓰일 45평 임대 아파트 인테리어 공사를 완료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에 돈을 너무 쓰시는 거 아닌가 싶네요.”
“괜찮습니다. 우리 회사가 물주를 잘 만나서 자금이 꽤 넉넉하거든요?”
“네? 물주요? 아···. 임대료가 3년 면제였죠?”
“네. 임대료를 빼면 아직 비용으로 들어갈 만한 게 직원들 인건비와 기타 경비 밖에 없어요. 그런 건 유정 씨가 올해 찍을 광고료 수익에서 충분히 커버가 되고도 남습니다. 우리는 얼른 소속 연예인들을 키우고 사업을 진행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럼 말씀하신 연습생들은 언제 들어오는 건가요?”
“일단 지방에서 한 명이 곧 올라올 예정이고 일본에서도 한 명 들어올 겁니다.”
“다른 한 명은요?”
“다른 한 명은···. 이제 협상을 해봐야죠.”
“.........”
장예원은 이제 아버지의 상태가 많이 호전돼서 언제든 올라올 수 있는 상황이었고 일본의 정유리도 숙소로 들어와서 한국의 학교에 다니기로 했다.
정유리는 한국어, 일본어, 영어까지 유창하게 하니 한국 생활이 그리 어렵지 않을 거고···. 어차피 예원이도 같은 학교에 다닐 테니 서로 힘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유리의 어머니인 아키모토 준코는 나유정과 나를 전적으로 믿고 유리를 보내주겠다고 했다. 평소에 케이팝 아이돌에 관심이 많았던 유리는 기뻐서 펄쩍펄쩍 뛰었다고 한다. 설득하러 일본까지 날아가야 하나 싶었는데 일이 잘 풀려 다행이었다.
‘문제는 이지령이다.’
카이스트의 영재 소녀!
누구에게도 보지 못했던 강한 똥색의 아우라를 지지고 있는 첫 번째 소녀였다. 강다혜를 보러 갔다가 발굴한 원석 중의 원석.
나는 그녀가 안 하겠다고 하면 어쩌나 걱정이 됐다. 혹시나 집안에서 반대하면 어떡할까? 아니면 고급물리학을 공부하는 재미에 빠져 아인슈타인 같은 대학자가 되겠다며 춤은 그냥 취미로 춘다고 하면?
아, 안돼! 이지령! 그런 건 공부해봐야 답이 없다고! 넌 걸그룹을 위해 태어난 인재야!
최근까지는 관심이 있다는 톡이 왔었는데 막상 집에서 어떤 이야기를 할지 알 수 없었다. 잠시 들어보니 꽤 대단한 집안의 딸인 것 같던데···.
나는 머리가 복잡해 커피를 한잔 마시며 ‘세상의 멸망을 나만 아는’ 작품에 대한 스토리를 마무리하며 넷플릭 이민영 총괄 디렉터에게 메일을 보냈다.
그녀는 글을 읽어보고 계약서를 준비하고 조만간 찾아뵙겠다는 답신을 보내왔다.
총 7시즌으로 제작하려고 하는 ‘벙커 좀비물’의 계약이 바로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이 시리즈를 제작하기 위해 영혼을 갈아 넣고 있었다. 대본부터 최대한 빠른 장면 전환과 스피드가 느껴지도록 공들여 쓴 것이다.
‘이제 3시즌을 끝내다니···. 언제 7시즌까지 쓰지? 휴···. 역시 장편은 어려워.’
요즘은 너무 바빠서 그런지 글 쓰는 게 예전처럼 진도가 팍팍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휴···. 그래도 이게 어디야. 이 정도로 빠르게 집필하는 건 예전 같았으면 꿈도 못 꿨을 속도잖아?”
나는 앉은 자리에서 대본을 빠르게 다시 읽어보았다.
‘크···. 역시 재밌어. 내가 썼지만, 너무 잘 썼다.’
스스로 자화자찬을 하며 대본을 덮은 뒤 마스터링 작업을 하고 있는 케이의 녹음실에 놀러 갔다.
“여어! 뭐 하고 있냐?”
“응? 형 왔어요? 저 지금 곡 수정하고 있어요. 영화가 잘되려면 노래가 잘 빠져야죠.”
“그거야 네가 알아서 잘할 테니 나는 걱정 하나도 안 하고 있다. 천재 프로듀서가 괜히 천재 소리를 듣겠니?”
그는 내 근본 없는 칭찬에 기분이 좋은지 입술을 씰룩거리고 있었다.
“치···. 그렇게 입에 발린 소리만 하고 나 엄청 부려먹을 거잖아?”
“케이 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부려먹는다고 좋은 곡이 나오는 건 아니잖아요? 저는 언제나 자유롭게 스스로 원해서 할 때 최고의 아웃풋이 나온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아시겠어요?”
“어디서 주워들은 건 많은 듯···.”
“이 녀석이 어디서 까불고 있어!”
나는 가냘픈 케이의 목을 내 굵은 팔뚝으로 잡고 백초크를 걸었다.
“크엑···. 사, 살려줘···.”
“까불지 않겠다고 해라. 어서!”
“하, 하, 항복···.”
나는 케이가 손으로 탭을 치자 팔뚝에 힘을 풀고 그를 놓아주었다.
“어우···. 이런 미련곰탱이 같으니라고···. 힘은 또 더럽게 세요.”
나는 보디빌더처럼 양팔을 들어 올리며 상체에 힘을 주었다.
“으하하···. 어떠냐 이 형님의 괴력이!”
“뭐야. 형 때문에 지금 엄청 좋은 곡들의 소스가 다 날아갔잖아. 형이 초크 걸기 전까지만 해도 엄청 좋은 멜로디들이 머릿속에서 춤을 췄었는데···.”
“지, 진짜냐? 안 되는데···.”
“농담이야. 농담!”
“이게 콱!”
나는 케이와 대화를 나눈 뒤 점심을 같이 먹고 회사로 다시 돌아왔다.
“넌 나뮤스 2박 3일 합숙 방송에 안 나와?”
나는 케이에게 촬영 스케줄이 있는지 묻고 있었다.
“형은 멘토라면서 뭐 하는 게 없어? 나는 얘들 노래 녹음하기 전부터 출연해. 제작진들이 평소처럼 하라고 하던데···.”
“적당히 해라. 어차피 짧게 짧게 가는 합숙인데 배우면 뭘 얼마나 배우겠냐.”
“난 대충 못 넘어가. 못 따라오면 눈물을 쏙 빼놓을 거야.”
“적당히 하라고! 네가 그런다고 못 하던 애들이 잘하게 되는 것도 아니잖아.”
“지금 형은 뭘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못 따라오는 애들은 걸러내는 거라고···. 능력도 없는데 이쪽 분야를 기웃거려봐야 안 좋은 쪽으로나 빠진다고···.”
“아···. 그런 의미였냐?”
“그래. 이제 알았수? 아···. 연기는 유정 씨하고 심사위원 중 한 명인 연기 강사가 가르치고 노래는 심사위원에 있던 유명한 보컬 트레이너가 봐준다고 하던데?”
“아···. 내가 연기시켰던 그 사람?”
“응. 맞아.”
흠···. 방송이 끝나면 정식으로 그 연기 강사에게 캐스팅 제의를 해봐야 할 것 같았다. 악역에 딱 맞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나저나 노래는 다 만들었니?”
“어···. 이제 마무리 중이야. 형 아는 작곡가가 소개해준 가이드 좋더라. 딱 내가 원하는 그런 스타일이었어.”
“그래? 노래 한번 틀어봐라. 잘 나왔나 보자.”
“오케이. 들어봐”
그는 마우스를 클릭해서 첫 번째 곡을 들려주었다. 그 곡은 흙수저 걸그룹 러브원이 떡상하기 바로 전에 부르는 미디움 템포의 타이틀곡이었다.
사운드를 뚫고 들려오는 청량한 보컬의 목소리···.
확실히 수십 번의 수정을 거친 곡은 점차 완성도가 올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 곡인 슬픈 발라드 곡이 흘러나왔다. 서정적인 보컬이 시작됐지만 중간부터는 약간 끈적이는 R&B 감성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와! 좋다. 느낌이 훨씬 좋다.”
“그렇지?”
나는 케이를 보며 엄지척을 날려주었다.
그는 세 번째, 네 번째 곡을 연달아 들려주었다.
클라이맥스에서 빵빵 터지는 화려한 기교와 고음을 들으니 소름이 쫙 끼쳤다.
“잠시만.. 뭐야 이거?”
“왜?”
“야. 이거 가이드 보컬 한 명이지?”
“어. 노래 잘하지?”
“너무 잘하는데? 테크닉 뭐야? 4명의 다른 사람이 부르는 것 같은데? 톤은 확실히 알겠는데 어떻게 한 사람이 이렇게 부르냐? 이거 가능한 거야?”
“좀 드물긴 하지. 희한하게 곡에 맞춰서 노래하더라. 노래에 재능도 있지만, 연습도 엄청나게 많이 한 것 같아.”
“혹시 이 가이드 보컬 몇 살이야?”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일만 했지 그런 건 안 물어본다고···.”
“그럼 몇 살로 보였는데?”
“글쎄? 20대 초반? 중반? 잘 모르겠어. 화장을 너무 두껍게 했더라고···. 왜 관심 있어?”
“어···. 노래 실력이 심상치 않아서···.”
“보면 그런 말이 쏙 들어갈 텐데···.”
“왜 이상하냐?”
“흠···. 그건 봐야 이해가 가. 한번 볼 거야? 가이드 보컬 수정한다고 불러볼까? 일당은 줘야 할 건데?”
“그 정도는 기꺼이 내지.”
“그래. 알았어. 전화 한번 해보지 뭐.”
케이는 휴대전화를 꺼내 가이드 보컬에게 전화를 했다.
“음···. 오늘은 힘들다고 하는데? 저녁에 무슨 라이브 카페 같은 데서 공연을 하나 봐. 노래 부르는 아르바이트 같은 거?”
“그래? 어디인지 한번 알아봐라.”
나는 케이의 어깨를 토닥이며 한 번 더 부탁했다. 그는 전화를 한 번 더 하더니 그녀가 아르바이트하는 장소를 나에게 알려주었다.
“가보게?”
“어. 이 정도 재능이면 음원형 가수로 키워봐도 되지 않겠냐?”
“흐음···. 뭐 노래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
“오케이! 작업마저 해라. 나는 이제 글 좀 쓰러 가야겠다.”
나는 녹음실을 나와서 내 작업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컴퓨터를 다시 켜도 글을 쓰려고 하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자 : 김담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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