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재 프로듀서와의 만남 (2)>
“프로듀서님 혹시 뮤지컬 작곡 해보신 적 있으세요?”
“음···. 뮤지컬은 아직 못 해봤습니다. 아니 시도를 안 했다고 해야 맞겠죠.”
“그런데 괜찮으시겠어요? 아무래도 생소하지 않을까요? 대중음악을 하시던 분께서 가능하실지···.”
나는 뮤지컬에 대해 잘 모른척하며 일부러 케이의 자존심을 살살 건드렸다.
“제가 이래 봬도 클래식 영재 소리를 듣던 사람입니다. 지금 이런 대화를 할 시간이 없습니다. 영감이 떠오른 김에 뭐라도 얼른 써야 할 거 같아요. 제가 이 영화의 곡을 쓰고 프로듀싱까지 하면 안 되겠습니까?”
“흐음··· 난감하네요. 만약 그걸 하고 싶으시면 이번 뮤직넷에서 계획 중인 뮤지컬 서바이벌에 심사위원으로 출연하셔야 하거든요.”
“네? 정말요? 하아···. 미치겠네.”
역시 케이는 듣던 대로 방송 노출을 꺼리는 사람이었다.
솔직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렇게 생겨놓고 방송에 왜 안 나간다고 하는 거지?
방송에 나랑 같이 나오면 딱 원투펀치 같은데···. 마치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랜디 존슨, 커트 실링, LA 다저스의 커쇼와 현준처럼 말이다.
혹시 음악을 한다는 가족들 때문인가? 나는 은근슬쩍 케이를 떠보기로 했다.
“뮤지컬 음악에 오페라나 클래식 느낌으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면 좋지 않을까요? 클래식을 하는 사람들도 인정할 정도로요.”
“아···.”
그는 뭔가 깨달은 사람처럼 나지막한 신음성을 흘렸다.
“심사위원으로 나가시죠. 저랑 나유정 씨가 말을 많이 할 테니까 옆에서 조금만 도와주시면 됩니다.”
나는 테리우스의 블라인드 테스트 때 활약했던 그녀의 진행 솜씨를 기억하고 있었다. 나유정은 전문 MC처럼 능숙하게 테스트를 진행했으니까···.
‘혹시 이번 서바이벌 테스트에서 MC 재능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거 아냐? 유정 씨 요즘 완전 물 만났는데?’
“이, 일단 그렇게 알겠습니다. 지금 떠오르는 영감을 곡으로 만들어야 해서요.”
“네. 명곡 부탁드립니다. 하하···.”
“그럼···.”
케이는 뭐가 그렇게 급한지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급하긴 하나 보네. 하긴 케이가 신곡을 발표한 지 꽤 오래됐지?”
나도 글을 쓸 때 항상 좋은 장면이 떠오르는 게 아니었고 뭔가 생각났을 때 바로 쓰거나 차분히 정리해놓는 편이었다.
뮤지컬 영화에 쓰일 곡은 외부 작곡가들에게 받거나 아니면 쓰리콤보가 만드는 게 어떨까 싶었는데 프로듀서 케이에게 맡겨 놓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만들어지는 곡을 들어보고 판단하자.’
그 일이 있고 난 뒤 약 5일 후
나는 케이에게 전화를 받고 그의 집을 방문했다. 그의 개인 작업실은 상당히 아기자기했다. 콘텐츠 덕후답게 여러 가지 포스터와 피규어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형···. 오셨어요?”
“와! 누가 괴작판독기 아니랄까 봐. 뭐가 많다?”
“하하···. 멋있죠?”
“그래. 작업실이 아담하네?”
“그래 보여요? 제가 필수 장비로만 곡을 만드는 편이라 그렇게 어수선하진 않을 거예요.”
그간 우린 서로 존댓말을 하다가 케이가 말을 편하게 하는 게 좋다고 해서 말을 놓기로 했다. 내가 한 살이 더 많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형이 됐다.
말을 놓으니 뭔가 부쩍 더 친해진 느낌이 들었다.
“너 형제가 어떻게 돼?”
“저 누나 한 명 있어요.”
“지금도 집하고 연락 안 하는 거야? 부모님이 걱정하시지 않을까?”
“모르겠어요. 가끔 누나랑 연락하긴 하는데 부모님께서 내색을 안 하시나 봐요.”
“그래. 이 프로젝트 잘해서 집에 인정받으면 좋겠다. 그나저나 형이라고 막 부르는 거 좀 어색하지 않아?”
“난 좋은데요? 원래 형이 한 명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아. 그래? 그럼 다행이네.”
내가 워낙 인싸기도 하고 덩치도 있어서 형! 형! 하면서 따르는 동생들이 많았다. 케이가 나를 그렇게 편하게 느낀다면 꽤 좋은 현상이었다.
“바로 곡 들어보실래요?”
그는 매우 흥분한 듯 내가 앉지도 않았는데 호들갑을 떨었다.
“나 옷부터 좀 벗자. 뭐가 그렇게 급하냐.”
나는 느긋하게 외투를 벗어 옷걸이에 걸고 소파에 앉았다. 그 모습을 본 케이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기가 만든 곡을 재생시켰다.
곡의 첫 부분에서는 맑은소리가 들려왔다. 새소리, 물소리인가? 그런 싱그러운 소리가 들리면서 곡이 고조되더니 시원한 드럼 비트가 터져 나오면서 일렉트릭 댄스곡이 시작됐다.
‘오오! 깔끔해.’
빠르지 않은 미디움 템포의 댄스곡이었다. 딱 봐도 소녀가 수줍게 짝사랑을 하는 모습을 담은 그런 싱그러운 느낌을 물씬 풍겼다.
나는 그 곡을 들으면서 가사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 곡은 프로듀서에게 연정을 품은 주인공의 마음을 나타내는 곡으로 쓰면 되겠다. 흙수저 걸그룹인 러브원이 떡상하기 직전에 쓰는 타이틀곡이지.’
브릿지 부분도 자연스럽고 귀에 착 감기는 맛이 있어서 상당히 마음에 드는 곡이었다. 전반적으로 팀의 하모니가 상당히 중요한 노래인 것 같았다.
그리고 마지막 피치가 높아지며 메인보컬의 영역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와! 상당히 음역대가 높고 어려운데?’
사운드를 뚫으려면 보컬에 힘이 상당히 필요할 듯싶었다.
나는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거리고 있다가 반복되는 마지막 부분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브레이크 후에 메인보컬의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줘야 하는 하이라이트 부분이 숨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애틋한 마음을 시원하게 터트리는 그런 모습이 연상되고 있었다.
“곡 진짜 좋다. 그런데 부르기는 상당히 어렵겠는데?”
“어차피 서바이벌해서 실력 있는 애로 뽑을 거 아니에요?”
“어···. 뭐···. 그렇긴 한데···. 뭐랄까 쉬운 것 같지만 춤추면서 이렇게 라이브를 할 수 있을지가 걱정이야. 메인보컬의 역량이 확 드러나는 그런 곡인 거 같다.”
그는 내 듣는 귀에 놀라는 표정을 하더니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형. 역시 테리우스 전 매니저답네요. 듣는 귀가 보통이 아니신데요?”
“인마. 내가 노래를 얼마나 들었는데? 2년간은 거의 하루에 2시간씩은 들었다고···.”
“형!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거 영화잖아요. 이걸 라이브로 실제 부를 일이 얼마나 있겠냐고요.”
“그건 모르지.”
“흠. 어쨌건 걸그룹 노래는 오랜만에 만드는 건데 확실히 좀 곡이 간질간질하죠? 저는 남자 아이돌 노래가 더 맞는 거 같아요. 솔직히···.”
“이 걸그룹 곡도 진짜 좋은데 무슨 소리야. 요즘은 너무 유럽이나 미국 쪽을 겨냥해서 만드는 것 같던데 난 오히려 영화에서는 이런 게 어울린다고 봐.”
“캬~ 형은 진짜 글도 잘 쓰고 귀도 트였네. 트였어.”
“내가 예전부터 귀 하나는 타고났지. 아 그렇다고 오해는 하지 마. 내 말은 내 귀가 완벽한 대중성을 가지고 있다는 거야. 그야말로 평균 중의 평균! 테리우스 애들한테 한번 물어봐 왜 내가 XM에서는 뜨는 곡 감별사, AI라고 불렸는지···.”
“네···. 일단 알겠고요. 다음 곡 들려드릴게요.”
다음 곡은 서정적인 팝 발라드곡이었다. 잔잔한 신디사이저 선율과 전자 드럼 소리가 어울리며 몽환적이고 슬픈 느낌을 주고 있었다.
‘이건···. 주인공이 식물인간 상태가 됐을 때 어두운 의식 속에서 애처롭게 울며 과거를 후회하고 다시 한번 깨어나길 바라는 장면에서 나오는 곡이구나.’
점점 음이 높아지고 빨라지면서 격렬한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 하이라이트 부분의 멜로디가 귀에 착 감겨왔다.
슬픈 발라드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제격인 곡으로 첫 번째 곡 못지않은 히트를 기록할 명곡이었다.
이 곡을 듣다가 불현듯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분명 주인공은 흙수저 걸그룹 러브원의 센터다.
하지만 이 곡은 센터가 부르기에는 곡의 난이도가 무척이나 높은 곡이었다. 첫 번째 곡에서 춤을 추면서 고음을 내질러야 하는 메인보컬 파트와 비교해봐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난이도였다.
‘와···. 이거 아이윤이라도 캐스팅해야 하는 건가? 미치겠네? 이걸 어쩌지?’
“노래 좋죠? 응? 표정이 왜 그래요? 뭐 이상해요?”
케이는 내가 얼굴을 찌푸리고 있자 곡이 맘에 안 드는 거로 착각을 했는지 약간 당황한 얼굴이었다.
“아, 아니야. 그게 아니라 곡이 센터가 부르기엔 너무 어려운 게 아닌가 싶어서 그래.”
“아···. 난 또···. 난 곡이 마음에 안 드는 줄 알았어요.”
“안 들다니! 천만에! 곡 너무 좋다. 솔직히 영화에 쓰기 아까울 정도야.”
“뭘요. 전 세계적으로 히트시키면 되잖아요.”
“컥···. 전 세계적으로···.”
나는 케이가 주는 부담에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서바이벌 오디션에서 좋은 인재가 나오겠죠. 뭐. 혹시 알아요? 적합한 인재가 딱하고 나타날지? 이거 기성 가수들도 참여 가능한 거 아니었어요?”
“맞아. 그렇긴 해. 꼭 그런 인재들이 많이 왔으면 좋겠다.”
“자···. 다음 곡은요. 제가 아주 심혈을 기울인 작품입니다.”
나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케이가 들려준 노래를 감상했다. 첫 소절은 일반적인 댄스팝 장르의 대중적인 선율이었다. 하지만 중반부로 접어들면서 파워풀한 비트가 나오기 시작했다.
왠지 모르게 머릿속에 각인이 되는 멜로디로 후반부에 들어서는 웅장한 오케스트라가 소리가 펼쳐졌다. 또한, 심금을 울리는 바이올린 협주곡 느낌이 나는 새로운 후크를 도입해 뭔가 애절하면서도 강한 느낌을 주는 오묘한 곡이었다.
“우와! 이거 무슨 클래식 느낌이다. 케이야.”
“맞아요. 중반부에서 그런 느낌이 나오다가 후크 부분에서 바이올린 같은 현악기들을 많이 썼어요. 중간중간에 일렉기타 사운드로 포인트도 줬고요.”
“역시 클래식 영재 출신답구나.”
“하하···.”
“부모님이 들으면 진짜 좋아하시겠다.”
그는 내 말을 듣고 소리 없이 미소를 지었다.
이 곡은 주인공이 회귀해서 자신을 빼돌리려는 매니저의 음모를 들춰내고 걸그룹 서바이벌에 출전해 우승 후보로 떠오를 때 부르는 러브원의 타이틀곡으로 쓰일 예정이었다.
나는 이 곡을 떠올리며 역경을 뚫고 앞으로 나아가는 힘찬 모습과 소녀들의 우정을 가사로 그려낼 생각이었다.
‘이 정도면 무조건 타이틀곡 맞지.’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갑자기 케이가 팔짱을 끼며 한소리를 했다.
“안무도 최고 난이도로 짜서 부르게 할거에요. 영화긴 하지만 진짜로 1위 곡으로 만들 겁니다.”
크···. 딱 나와 같은 생각이었다. 비록 시한부 그룹이겠지만 영원한 명곡으로 남기고 싶은 생각이었으니까.
나는 그런 케이의 모습을 보고 피식 웃고 말았다. 서바이벌에서 뽑힌 멤버들은 케이의 프로듀싱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고생길이 훤히 보였던 것이다.
“케이야. 애들 너무 빡세게 굴리지 마라. 너 혹시 슈퍼노바랑 할 때도 그랬냐?”
“아, 아니에요. 음악적 견해가 달라서 그랬다니까요. 슈퍼노바랑 사이가 나쁘거나 그런 건 아니에요. 회사랑 좀 그래서 그렇지.”
“그래. 알았어. 그냥 농담이다. 농담.”
“자. 이제 제가 작곡한 4곡 가운데 정말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만든 역작입니다.”
“뭔데 그렇게 거창해?”
“영화 마지막 부분에 사용될 곡이에요. 왜 시나리오에 보면 보육원 성가대와 같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있잖아요.”
“아···. 그거?”
사실 나는 그 장면을 쓰면서 오래된 영화인 시스터 액트의 마지막 엔딩송을 떠올렸었다. 이 곡은 러브원이 결승전에서 모든 라이벌들을 물리칠 때 사용될 아주 중요한 곡이었다.
과연 케이가 만든 곡은 어떨지 궁금했다.
나는 조용히 귓속으로 파고드는 음악을 듣고 있었다. 초반이 지나고 중간에 템포가 빨라지며 음의 변조가 일어나는 순간 마치 심장이 멎는 느낌이 들었다.
“아···.”
ⓒ 소광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