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재 프로듀서와의 만남 (1)>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고 깜짝 놀란 둘 사이에 묘한 침묵이 찾아왔다.
이 어색함은 무엇이란 말인가? 괴작판독기가 프로듀서 케이라고?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프로듀서 케이
그는 이십 대 후반의 천재 프로듀서로 슈퍼노바를 있게 만든 공신 중 한 명이었다. 그가 작곡한 곡들은 대부분 메가 히트를 기록했는데 그는 그 곡만으로도 상당히 많은 돈을 벌었다고 알려졌다.
또한, 대중매체에는 잘 나오지 않지만, 가끔 한 번씩 등장할 때는 파격적인 옷차림과 센스로 대중들의 이목을 사로잡는 패셔니스타중 한 명이었다. 오늘 입고 온 옷도 뭔가 범상치 않았다.
얼굴도 연예인보다 더 잘생겨서 왜 작곡가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이었다. 물론 내가 보기엔 약간 기생오라비 같은 스타일이었지만···.
“저를 아시나요?”
솔직히 내가 방송에 몇 번 나갔지만, 밖에 나가면 다 알아보는 그런 유명인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나를 아는지 물어본 것이다.
“아, 당연히 알죠. 제가 작가님 드라마 팬입니다. 나만의 세계가 끝난 후 한정판 책도 샀는걸요?”
“감사합니다. 케이님.”
“아···. 제 얼굴을 아시는군요. 역시 방송 관계자답네요.”
“제가 또 테리우스와 나유정 씨 매니저 출신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원래 한번 본 얼굴은 잘 잊어먹지 않거든요. 예전에 방송국 대기실에서 슈퍼노바와 함께 있던 걸 본 적이 있습니다.”
“제가 대기실에 별로 찾아가 본 적이 없는데 그때 저를 봤다니 그거참 우연이군요.”
“악수나 한번 할까요?”
“그럼요. 반갑습니다. 작가님.”
“저야말로 정말 반갑습니다. 프로듀서님”
우리는 자리에 앉아 통성명을 했다. 한국인 특유의 나이 질문도 포함됐다. 그는 나보다 한 살이 적은 스물여덟 살이었다.
“와. 그럼 슈퍼노바가 7년 정도 됐으니 스물한 살 때부터 작곡을 하신 거예요?”
“아닙니다. 작곡은 어렸을 때부터 했고요. 슈퍼노바와는 2집 때 만났습니다. 뭐 현재는 보시는 바와 같고요.”
“아무튼, 대단하십니다. 이십 대 초반부터 천재 작곡가로 이름을 날리시다니···.”
“그건 제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두 편의 드라마를 전 세계적으로 성공시키신 작가님이신데요?”
“에이···. 그래도 어떻게 제가 프로듀서님하고 비교가 됩니까?”
“하하···. 요즘에 상당히 바쁘신 거 같은데요? 소속사 해체되시고 이제 어떻게 할 작정이세요? 대충 상황을 보니 유정 씨하고 작가님만 아직 거취 문제가 안정해진 것 같은데요.”
나는 그의 질문에 멈칫했다. 사실대로 말해야 하나 싶기도 하고···.
“아···. 일단 개인 사업체를 하나 차려볼까 합니다. 창작자들을 위한 공간이랄까요? 그런 업체를 구상 중입니다.”
“아···. 창업하시는구나.”
“케이님은 요즘 뭐 하세요? 요즘은 슈퍼노바 곡을 안 쓰시는 것 같던데요?”
“흠···. 음악에 이견이 있다 보니 요즘은 그냥 프리랜서로 지내고 있습니다. 뭐 거의 반백수죠.”
그래서 크리스마스이브에도 달동네에 상주하고 있었구만?
시중에 떠도는 슈퍼노바의 소속사와 불화설이 어느 정도 맞는 이야기인 듯했다.
“솔직히 저는 프로듀서님이 만든 곡을 부르는 슈퍼노바가 좋았습니다.”
내가 이 이야기를 꺼내자 케이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사실을 말한다면 이건 내 이야기가 아니라 유정 씨가 자주 구시렁거리는 레퍼토리였다. 슈퍼노바가 인기는 올라갔지만, 곡은 예전만 못한다는 의견 말이다. 나는 그냥 다 좋았던 것 같았는데···.
나는 남자 아이돌 노래도 다 듣긴 했는데 역시 걸그룹 노래 전문이었다. 어쨌건 반백수라고 하니 나에게는 좋은 소식이긴 한데 회사로 끌어들여 웹소설 매니지먼트를 맡기려던 구상이 빗나가고 있었다.
음식이 나오고 우리는 가벼운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알고 보니 프로듀서 케이는 꽤 수다쟁이였는데 나는 주로 장단을 맞춰주며 들어주는 편이었다. 대화의 주제는 대부분 드라마와 웹소설 이야기였다.
그는 작곡 말고 패션과 콘텐츠 감상에 취미가 있는 것 같았다. 신나게 내 드라마에 대한 평을 한 후 갑자기 뭐가 생각이 났는지 젓가락을 내려놓고 나를 쳐다봤다.
“작가님. 그동안 제가 너무 괴롭힌 것 같아 죄송하네요.”
“아닙니다. 제가 그냥 일반적인 악플러였다면 바로 차단하고 말았을 건데 케이님 댓글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그만큼 뼈를 치는 내용이었던 거죠.”
“그렇게 미화를 해주시니 제가 다 민망하네요.”
“그게 사실입니다. 괴작판독기의 명성은 어딜 가지 않으니까요.”
“그런데요. 작가님. 제가 느끼기엔 절필하셨다가 올해부터 쓰신 글의 퀄리티가 확 올라갔던데요. 드라마는 더 잘 쓰셨고요. 무슨 일이라도 겪으셨는지···.”
역시 괴작판독기는 날카로웠다. 이전 내 글보다 수준이 높아졌다는 것을 느꼈던 모양이다.
“제가 실은 죽다가 살아났습니다. 글 쓰는 것을 관두고 아이돌 매니저 일을 하면서 바쁘게 살다가 자동차 사고를 당했는데 그때부터 세상이 다르게 보이더군요.”
“아···. 그런 일이···. 역시 사람은 큰일을 당했을 때 인생이 변하는군요. 그럼 그 후로 글을 다시 쓰기 시작하신 거군요?”
“맞습니다. 그런데 또 우연히 드라마 공모전에 냈던 게 드라마화가 되고 지금 이렇게까지 된 거죠.”
“으음···.”
케이는 내 말을 들으면서 공감이 되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사실 저도···.”
케이가 하는 말에 나는 눈을 부릅떴다. 그만큼 그가 하는 말이 놀라웠기 때문이었다. 그는 실은 미국에서 클래식을 공부하던 학생이었다고 했다. 전공은 작곡, 지휘!
음악가 출신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이 음악 신동으로 조기교육을 받고 클래식의 길을 걸어오다가 우연히 대중음악을 접하고 취미로도 그만두라는 부모님과 크게 싸우고 명문 음대도 관둔 뒤 집을 뛰쳐나왔다고 한다.
그 후 밥을 굶어가며 작곡을 했는데 그렇게 한참을 고생하다가 그 당시 무명이었던 슈퍼노바와 만나 일이 잘 풀렸다고 했다.
“프로듀서님도 정말 힘드셨겠네요.”
“힘들었죠. 제가 그래서 작가님 심정을 아는 겁니다. 진짜 그 당시에 절박하고 죽겠더라고요.”
그냥 외모만 보면 돈 있는 집 철부지 막내 같아 보였는데 이런 과거가 있을 줄이야.
그나저나 프로듀서 케이가 클래식을 전공한 사람이었다니···. 그것도 꽤 전도가 유망했던 것 같았다.
“와···. 저흰 같은 처지였군요. 그런데 왜 저한테는 그렇게 따끔하게 지적을 하셨어요? 하하하···.”
“그건 정말 죄송합니다. 저는 스트레스를 독서로 푸는 스타일이거든요. 그런데 그 당시 하도 스트레스가 커서 그랬는지 저도 모르게 세세히 지적하는 스타일이 됐어요.”
세세히가 아니라 뼈를 때리고 멘탈을 부수던 스타일이었지.
“혹시 피디님 녹음실에서 가수한테도 그렇습니까?”
“예···. 뭐 약간 그런 셈이죠. 성격이 어디 가나요?”
흐음···. 왠지 그럴 거 같다. 그 날카로움이란 이루 말할 게 없겠지.
그와 이야기를 해보니 점점 웹소설 매니지먼트에 관해서는 저 멀리 뒤편으로 사라지고 그에게 뮤지컬 영화의 곡을 맡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한상훈 이사의 말에 따르면 뮤지컬 작곡은 여러 가지 배경을 가진 작곡가들이 활동한다지만 그래도 클래식 쪽에서 넘어온 사람이 많다고 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으니 다시 내게 궁금한 게 생겼는지 질문을 해대는 케이였다.
“작가님은 차기작 안 쓰세요? 아! 맞다. 무슨 뮤지컬 서바이벌을 한다고 하던데 그게 작가님 작품이라면서요? 이번엔 영화입니까?”
“네. 맞습니다. 뮤지컬 드라마로 할까 영화로 할까 고민하다가 내용을 압축해서 영화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없었던 시도인 거 같아서요. 물론 배우는 서바이벌로 뽑고요···.”
“와···. 그거 잘될 것 같은데요? 약간 아이돌 메이커 비슷하잖아요. 만들어질 때부터 이미 뜰 수밖에 없는 팬덤을 구축하니까요.”
“네. 그걸 노렸습니다. 하하. 좀 얄팍하죠?”
“저번에 드라마 끝나고 책 판매하는 거 보고 진짜 깜짝 놀랐어요. 이분은 정말 사업적인 감각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찬이십니다. 그나저나 어제 겨우 시나리오가 마무리됐네요.”
나는 케이의 시선을 의식하며 일부러 휴대전화를 집었다가 테이블에 떡하니 올려놓았다. 그의 시선이 내 휴대전화에 꽂혔다.
“크흠···. 호, 혹시 그 시나리오가 파일로 있는 건가요?”
“네. 클라우드로 관리되고 있습니다.”
“오···. 실례지만 혹시 제가 좀 볼 수 있을까요?”
헤비하게 콘텐츠를 소비하는 프로듀서 케이가 마른침을 삼기며 내게 물어왔다.
“그게 극비라···. 외부인에게는 공개가 좀···. 내부인이면 모를까···.”
“내부인요? 내부인이라 하면···.”
“제가 만들 콘텐츠 제작 회사죠. 아주 자유롭고, 창작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곳이죠.”
“뭐 하는 곳이길래 그러죠?”
나는 차분히 J&J에 대해 설명을 해줬다. 각종 다양한 콘텐츠를 만들어 내려는 곳이라고 말이다. 그런데도 케이는 뭔가 꺼림칙한지 얼굴이 펴질 줄 몰랐다.
“어때요? 혹시 함께하실 생각이 없으신가요?”
그는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프로듀서님이 크게 흥미가 없으신가 보군요.”
“..........”
나는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휴대전화를 집어 안주머니에 넣었다. 그의 시선은 내 손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여기에 세상에 멸망을 나만 아는 2, 3권도 같이 들어있는데···.”
그 말을 들은 케이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어라? 이래도 안 낚여? 안 되겠구만.
“아! 한가지 빼먹은 게 있네요. ‘세상의 멸망을 나만 아는’을 달동네에서 내린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그게 뭔가요?”
“넷플릭과 계약 직전이기 때문입니다.”
“네? 넷플릭이요?”
“네···. 뭐 아직 비밀이긴 합니다만···. 저랑 같이 드라마를 하자고 넷플릭에서 찾아왔더군요. 그래서 그냥 심심풀이로 쓰던 것을 보여줬더니 계약하자고 난리네요. 요즘에도 일주일에 두 번씩은 전화가 옵니다. 언제 계약하냐고요···.”
“크흠.. 아, 아까 그 계약요 조, 좀 더 자세히 조건을 설명해보시죠.”
크흐흐.. 역시!
“그러니까 말 그대로 자유로운 창작집단입니다. 케이님은 전속작곡가로 계약하시지만 얼마든지 제 동의하에 다른 사람들과 작업을 할 수 있고요. 하기 싫은 일은 안 하셔도 됩니다.”
내가 그 말을 하자 그의 표정이 약간 펴지는 것 같았다. 이전 회사와 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하면서 관계가 틀어진 모양이었다.
“상당히 자유롭군요. 역시 대표님이 작가라 그런가? 다른 회사와 마인드 자체가 다르시군요.”
“연예인과 작가 같은 크리에이터들은 억지로 시켜야 좋은 결과물이 나올 수가 없잖아요? 이미 마포 합정동에 사무실도 차려놓고 공간을 정말 멋지게 꾸몄습니다. 사진 한번 보여드릴까요?”
“보여 주신다면야···.”
나는 휴대전화로 찍었던 사무실과 스튜디오, 작가 작업실, 녹음실, 옥상 정원 등을 보여주었다.
그는 내가 놀랐던 것처럼 눈이 휘둥그레지며 깜짝 놀란 것 같았다.
“와! 이런 곳에서 일하면 진짜 좋겠네요. 인테리어에 돈 많이 들었겠는데요?”
“하하···. 뭐 이 정도쯤이야···.”
비록 내 돈을 들이지 않았지만, 유정 씨가 지분을 받았으니 내 돈이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나는 뻔뻔하게 뭐 이 정도는 별것 아니라는 듯 행동했다.
“역시 위대한 창작은 자유로운 문화에서 나오는 거 아니겠습니까?
“무, 물론이죠.”
거의 넘어온 것 같은데 뭔가 2% 부족한 것 같았다. 상대는 먹고 놀아도 아무 상관없는 부자 프로듀서 케이였으니까.
나는 고민하는 그를 보고 그가 좋아하는 게 뭘까 생각을 했다.
‘아! 맞다. 그게 있었지.’
“케이님. 그거 말고도 웹소설이나 웹툰 작가도 매니지먼트를 하면서 유망주를 키울 작정인데요. 정확한 감평으로 자질이 뛰어난 인재를 직접 키울 수도 있습니다. 제가 보기엔 프로듀서님 경력이면 누구나가 수긍을 하지 않을까 하는데요. 장르 계에서 괴작판
독기라는 이름을 누가 무시할 수 있겠···.”
“하겠습니다.”
“네?”
“그 계약이요. 조금 관심이 생기네요. 녹음실과 소설 쪽 감평을 맡으면 되는 거죠? 그건 작가님 작품도 포함입니까?”
“아···. 물론 제 작품도 포함입니다. 계약하시면 차기작 시나리오와 달동네에서 내렸던 작품도 전부 보시고 감평하실 수 있을 겁니다.”
“합시다. 뭐 까짓거···.”
흐흐···. 걸려들었으···. 뭐 일단 오늘은 아무것도 가져온 게 없었으니 일단 구두로 계약을 할까?
“정식 계약은 회사 등록한 후 하시면 될 거 같고요. 일단 오늘은 차기작 시나리오를 넘겨드릴 테니 감평을 한번 해보세요.”
“조, 좋습니다.”
그가 마른 침을 꿀꺽 삼키는게 느껴졌다.
우리는 점심을 마저 해치운 뒤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와···. 여기서 천재 프로듀서를 얻게 되다니···.
정말 내 심정은 제갈량을 얻은 유비의 심정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는 작곡이면 작곡! 감평이면 감평! 모두 최정상급 인재였기 때문이다.
“댓글 악연이 결국 이렇게 잘 풀리다니···. 참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세상의 인연이란 게 정말 신기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천외딸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로맨스는 처음 쓰는 거라 막막하긴 했는데 최근 나의 풋풋한 감정을 떠올리면서 글을 써나갔다. 막히는 구간에서는 유정 씨의 의견을 참고했다.
‘흠···. 의외로 재밌단 말이야?’
그렇게 한참을 몰두하고 오랜만에 연쇄폭참마의 실력을 뽐내며 분량을 팍팍 생산해내고 있었다.
지이잉···. 지이잉···.
갑자기 휴대전화가 울리는 바람에 집중력이 깨졌다. 시간을 보니 벌써 자정에 가까워진 시각···.
발신자는 케이였다.
“여보세요?”
“작가님?”
“네. 말씀하세요. 피디님.”
“저, 방금 작가님 차기작을 천천히 다 읽어봤습니다.”
“후후···. 어땠나요?”
“스, 스토리는 새로울 게 없는 회귀물인데 이걸 뮤지컬 영화로 잘만 만들면 대박 날 것 같습니다.”
“네? 그게 무슨···.”
“제가 이 시나리오를 읽고 갑자기 죽어있던 영감이 살아났어요. 지금 제 머릿속에서 음들이 미친 듯 날아다니고 있다고요!”
케이는 지금 흥분상태로 나에게 말을 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소리 없이 웃고 있었다.
‘크크···. 이거야. 제대로 걸려들었군.’
ⓒ 소광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