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원이 다른 Flex (2)>
“재미있을 것 같아요. 그 서바이벌 프로그램요.”
“그, 그냥 한 말인데···. 정말 나가실 거에요? 방송에도 많이 나와야 하고 부담이 좀 될 텐데요?”
“어차피 준형 씨도 나갈 거잖아요?”
“저도요? 왜요?“
“피···. 당연한 걸 왜 물어요? 준형 씨의 그 불가사의한 안목으로 인재를 골라야 할 거 아네요?”
“크흠···.”
설마 내 능력을 눈치챈 건가? 이 실패할 수 없는 치트키 같은 능력을 말이다.
“혹시 집에 신기를 타고 나신 분이나 무당 없어요?”
“없는데요?”
“그렇죠? 그렇겠죠. 당연히···.”
“싱겁긴···. 사람이 오늘따라 왜 그래요? 크리스마스이브라 그래요? 이브에 나랑 있는 게 좀 그래요?”
“설마요. 그건 아니죠. 영광이죠. 영광.“
“가문의 영광!”
“그럼요. 그럼요. 아무렴요.“
“어째···. 갈수록 답변에 성의가 없어지는 느낌인데요?”
“전하! 죽여주시옵소서.”
나는 대학교 때 연기해본 간신 역할을 떠올리며 대사를 읊었다.
“죽는 것 대신에 같이 방송에 출연하면 돼요. 거기 나가서 인재를 딱 딱 딱! 뽑는 겁니다. 오케이?”
나유정은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고 윙크를 날렸다.
“음···. 그리고요?”
“그리고 영화 만들어서 대박 내는 거죠.”
“대박이라···.”
“관객은 얼마가 목표에요”
“글쎄요. 솔직히 제작비가 많이 들어갈 사이즈는 아니잖아요? 300만 정도?”
“에이···. 왜 그러실까? 대충 쓰신 작품 둘 다 초대박 내신 분께서 이렇게 약한 모습을?”
“대충이라뇨? 그런 소리 했다가는 지망생들에게 맞아 죽습니다.”
“왜 이렇게 겸손하실까? 이번에도 어떻게든 대박 내실 거잖아요?”
“제가 무슨 마법사예요? 어떻게 계속 대박을 냅니까? 사람이 겸손해야죠.”
“왜 나한테는 겸손하지 못해요?”
“제가 언제 유정 씨한테 겸손하지 못했나요? 또 사람 잡으시네요. 제 말은 겸손해져야 한다는 겁니다 겸손! 그리고 말이죠. 인테리어 해놓은 거 30억 들었다고 했어요? 지금 보니 안 되겠네요. 제가 지분을 5%가 아니고 10% 드릴게요.”
“갑자기?”
5% 지분을 더 준다는 이야기에 나유정이 눈을 똘망똘망 동그랗게 뜨고 상체를 들이밀었다.
“에이···. 저리 가요. 부담스럽게 눈을 왜 그렇게 뜨고 있어요.”
“어차피 인테리어 공사하는 김에 한 거라 그럴 필요 없는 건데···.”
“양심상 찔려서 안 되겠어요. 초반부터 이렇게 팍팍 밀어주는데 그냥 입을 싹 닦고 있기 불편합니다.”
“와! 10%다! fantastic! wonderful! magnificent!
나유정은 신이 났는지 발레의 턴 동작을 선보이며 까불댔다.
“그만 좀 하세요. 정신 사납습니다.”
“감동 먹었어요? 내가 이렇게까지 해줄지 몰랐구나?”
그녀의 소녀 같은 환한 웃음에 내 볼이 타는 것처럼 뜨거워졌다.
“사무실도 완벽하게 준비했지, 차기작을 위한 프로그램도 시원시원하게 출연해준다고 하지, 예뻐 죽겠죠? 하긴 뭐 누구라도 빠져 버리는 거죠. 어떨 때는 저도 너무 놀라요. 이건 뭐 날개 없는 천사도 아니고···.”
갑자기 피가 싸늘하게 식는 느낌이 들었다.
“흠흠···. 예쁘···. 약간 좀 재수가 없긴 한데 뭐 그렇다고 해드리죠.”
“너무 감동할 필요 없어요. 제가 10배는 이득이니까요.”
그녀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회사를 상장시키면 그렇게 된다는 거죠. 만약 상장을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 기획사가 커지면 주변 시세까지 올라갈 거잖아요? 제가 알아보니 SG하고 YN 엔터도 그렇게 앉아서 돈을 벌었다고 하더라고요.”
“뭐라고요? 설마···. 이 빌딩 말고 주변 땅들도 사들였어요?”
“킥킥···.”
와···. 미치겠다. 재신이 따로 없네. 일단 나한테 들러붙었으니 재신이 맞는 거 같긴 하다.
“유정 씨. 그런데요. 아까 영어 발음 진짜 좋던데요? 아메리칸 스타일···.”
“몰랐어요? 저 미국에 4년 좀 넘게 살았어요.”
“아! 맞다.”
아차···. 그녀의 과거를 떠올리게 해서는 안 된다. 안 좋은 기억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아역배우로 엄청나게 떴다가 성인이 되기까지 유학을 다녀왔다고 알려졌는데 그게 바로 미국이었나보다.
“해외 팬들한테 인사 한번 할까요? 영어도 자랑할 겸 말이죠. 요즘 넷플릭에서 인기라 팔로워도 엄청나게 증가하지 않았어요?”
“그렇죠. 몇 배가 뛰었으니···. 이제 영어 댓글도 엄청 많아요. 한번 올려볼까요?”
“그러시죠. 팬 서비스 개념으로···.”
우리는 영어 버전으로도 찍어 두 개를 동시에 SNS에 올려놓았다.
“아! 생각해보니 옥상을 안 봤어요. 거기도 엄청 공들였는데···.”
나는 그녀와 함께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은 완벽한 쉼터로 설계되어 있었다. 정원과 앉을 자리들이 마련되어 있었고 중앙에 무대 같은 게 설치된 상태였다.
“어? 저거 뭐에요?”
“아 저거요? 미니 스테이지에요. 야외에서도 공연할 수 있잖아요. 날씨 좋으면 쉬면서 여기서 연습하라고 만들어놨죠. 어때요?”
“와우! 어메이징!”
짝짝짝···.
나도 모르게 나유정을 따라 하며 안되는 영어를 구사하며 혀를 굴리고 있었다.
“밤에는 조명도 들어와요.”
“오! 정말이네. 미쳤다. 여기서 파티해도 되겠어요.”
내가 또 한 번 놀라자 나유정의 입가에 또 건방진 미소가 피어나고 있었다. 크흠···. 자중하자. 자중.
“아무튼, 고마워요. 이렇게 잘해놓았을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고마우면 밥 사시던가요?”
“갑시다. 제일 비싼 데로 갑시다. 뭐 먹고 싶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가 이미 예약을 해놓은 상태였다. 우리는 예약해둔 호텔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저녁을 먹었다. 먹고 있는 도중에 나유정은 크리스마스 특집 음악 방송을 실시간으로 보고 있었다.
“우리 애들 나왔어요?”
“네. 확실히 급이 올라간 거 같아요. 이제 메인 스테이지 후반부에 나오네요.”
“테리우스가 다른 회사로 갔는데 아쉬워서 어떡해요?”
“어쩔 수 없죠. 그 대신 새로 만들면 되죠.”
“뭘요? 남자 아이돌요?”
“당연하죠. 준형 씨가 여자 아이돌을 만드는데 나라고 못 만들까 봐 그래요?”
“음···. 뭐 누구보다 전문가니까 당연히 안목이 뛰어나시겠죠. 그렇게 집요하게 파셨는데···.”
“지금 나 디스하는거죠?”
나유정이 두 눈에 쌍심지를 켜며 눈을 부라렸다.
“아무튼, 남자 아이돌은 좀 순위가 밀리니까 유정 씨가 담당하시든지 하세요. 조언을 드리자면 지금은 쓸만한 연습생을 뽑기도 쉽지 않을 겁니다.”
“흥! 맡겨만 주시라고요. 제2의 슈퍼노바를 만들어볼 테니까요.”
“푸훗···.”
“어라? 웃어? 이게 왜 웃긴 일이에요?”
“아···. 아닙니다. 갑자기 코가 간지러워서···. 어쨌건 잘 해보세요. 저는 계획된 프로젝트 순서대로 쭉 진행할 테니까요.”
“두고 봐. 진짜 내가 코를 확 납작하게 해줄 테다.”
“부디 슈퍼노바처럼 키워주시길···.”
저녁을 즐겁게 먹은 후 막히는 길을 겨우겨우 뚫고 그녀를 바래다준 뒤 집에 도착했다.
“휴···. 길 더럽게 막히네. 크리스마스이브라 이건가?”
나는 지갑과 휴대전화를 침대 위에 던져놓고 샤워를 한 뒤 컴퓨터 앞에 앉았다.
드디어 시후의 뮤지컬 영화 시나리오 퇴고가 끝났고 나는 상쾌한 기분으로 시후가 보내준 파일을 점검하고 있었다.
'와···. 문장력 진짜···. 역시 신춘문예 시나리오 부문 당선자라 다르긴 다르구나.'
시후의 필력에 감탄하며 워드 프로그램을 끄고 웹소설 연재 플랫폼별로 한 번씩 현황을 살펴보았다.
장기간 알박기를 시전하고 있던 ‘데일리노블’은 이제 거의 후반부가 끝나가고 있었고 천마의 외동딸이 되었습니다는 곧 로맨스가 강세인 플랫폼 ‘시리얼’에 넣을 예정이었다. ‘달동네’는 그나마 내 작품 중에서 가장 히트했던 양산형 헌터물이 아직까지 조금씩 팔리고 있는 상황!
“응?”
달동네 쪽지함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나는 커서를 옮겨 쪽지함을 클릭했다.
“으헉···. 뭐, 뭐야···.”
쪽지함에는 엄청난 수의 쪽지가 쌓여있었다. 쭉 훑어보니 한 명이 보낸 쪽지였다.
'괴작판독기 이 녀석···.”
폭탄 쪽지를 보낸 주인공은 바로 괴작판독기였다.
[‘세상의 멸망을 나만 아는’은 왜 1권으로 연중임? 얼른 다시 연재하기 바람!]
[어라? 1권은 왜 내리는 거임?]
[진짜로 연중? 이보쇼. 작가 양반 내가 연중하지 말라고 후원까지 그리했는데 무시하시네?]
[어이! 쿠폰 루팡 아니 연쇄폭참마! 죽고 싶어? 왜 연재를 안 하는 거야?]
[이 자식···. 내가 네 양산형 헌터물에 따끔하게 일침 좀 해줄까? 얼른 연재 안 해? 저번 연예계물처럼 아주 작살을 내줄까?]
온라인에서 괴작판독기가 미쳐 날뛰고 있었다. 아래서부터 쪽지를 읽고 있는데 분노 수위가 점점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나는 혹시 모를 더 큰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괴작판독기에게 받은 후원금을 전부 골드로 쏴줬다.
“후···. 많이도 쐈네. 이제 아무 말 안 하겠지? 진짜 내 헌터물에 등장해서 난도질하려나?”
괴작판독기는 진짜로 조심해야 했다. 고인물 중의 고인물이며 웹소설 비평계의 독보적인 감별사 같은 녀석이었으니까.
“응? 뭐야. 온라인 중이네?”
골드를 돌려줬더니 쪽지가 바로 도착했다.
[야! 연쇄폭참마! 왜 후원금 다 돌려주냐? 요즘 잘 먹고 잘사나 보지?]
[괴작판독기님. 흥분하지 마세요. 달동네에서 무료로 연재하던 거 연중 하는 건 합법적인 국룰입니다. 차분해지셔야 합니다.]
나는 치솟는 화를 억누르며 친절하게 답변했다.
[내가 재밌다고 했잖아. 조그만 참고 더 올려보라니까?]
[관심 감사합니다. 다 이유가 있어서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게 뭔데? 알려주면 그만 괴롭힌다.]
[제 글을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 사정이 있답니다. 판독기님 혹시 제가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요?]
[물어봐.]
[왜 제 연예계물에 그렇게 신랄한 혹평의 난도질을 하셨나요? 안 그래도 멘탈이 갈려서 죽을 것 같은 상황이었는데요. 사실상 절필하게 된 결정타 중의 하나였습니다.]
괴작판독기와 쪽지로 대화를 나누다 보니 옛날 생각에 나도 모르게 흥분하고 말았다. 무의식중에 괴작판독기에게 쌓인 게 많은 모양이었다.
[그건 네 작품이 하도 업계의 디테일을 무시하니까 그렇게 댓글을 쓴 거 아니냐. 아직도 모르겠어?]
사실 지금이야 연예계에 대해 잘 알지만, 그 당시에는 몰랐던 게 맞았다. 여자친구랑 헤어져 정신적으로 무너졌는데 그런 걸 조사할 여력이 없었으니까.
부들부들···.
[네가 연예계에 대해서 뭘 안다고 지껄여? 크리스마스이브에 달동네에서 쪽지 하는 거 보니 이거 모태솔로고만? 하하하. 이 어리석은 녀석. 내가 오늘 누구랑 있었는지 모르지? 대한민국에서 제일 예쁜 여자야. 부럽지?]라고 쪽지를 쓰려다 심호흡을 하고 내용을 지워버렸다.
‘참자. 참어. 참을 인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는데···.’
[그래서 그 연예계물 내렸습니다. 제가 잘못 쓴 게 맞습니다.]
내가 보낸 쪽지에 더 이상 답장이 오지 않았다. 화를 가라앉히고 컴퓨터를 끄려는데 다시 쪽지가 도착했다.
[쿠폰 루팡님. 성격 많이 좋아지셨네요. 저도 존댓말을 쓰겠습니다. 재미있게 보는데 연중을 하는 바람에 너무 화가 나서 잠시 이성을 잃었습니다.]
‘어라? 갑자기 태도 전환 뭔데?’
괴작판독기는 웹소설 감평계의 최강자였다. 좋은 감평은 작가를 올바른 길로 가게 할 수 있는 스승이요 나침반이었다. 그 정도로 그의 감평은 명쾌하고 정확했다. 나조차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입었을 정도였으니까.
갑자기 좋은 생각이 번쩍 떠올랐다.
만약 그가 내 사단으로 들어와 웹소설 매니지먼트의 수장이 된다면 그거야말로 믿고 맡길 수 있는 든든한 오른팔이 아닐까? 마치 현명한 솔로몬왕을 참모로 두는 셈이었다.
[괴작판독기님 혹시 어디 사시는 분이신지요? 항상 좋은 충고 감사했습니다. 너무 인상적이셔서 제가 한번 얼굴을 좀 뵙고 싶습니다.]
[저 판교에 살고 있습니다만 얼굴을 보기는 좀 그런데요? 죄송하지만 정중히 사양합니다.]
[저랑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사시는군요. 저는 분당입니다만···. 아쉽네요. 한번 만나보고 싶었는데···.]
[죄송합니다. 제가 뵐 수 없는 사정이 있습니다.]
[정말 아쉽습니다. 세상의 멸망은 나만 아는 2, 3권이 있는데 보여드리지 못하겠군요.]
잠시 침묵이 찾아왔다.
[오, 오늘 보시죠. 어디로 갈까요?]
[벌써 12시가 다 됐는데요?]
[허···. 그럼 판교에 있는 한성루에서 내일 12시에 뵙죠. 제가 호실을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때 뵙죠.]
오케이! 괴작판독기는 역시 미끼를 물었다.
‘휴···. 2, 3권을 써놨길래 다행이지.’
다음날 나는 11시쯤 나갈 채비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차에 시동을 걸고 액셀을 밟아 판교로 향했다. 평소에 궁금했던 괴작판독기의 얼굴을 보게 된다니 살짝 기대되었다. 그는 정말 뭐 하는 사람일까? 말투를 보면 나이가 그리 많아 보이진 않았다. 내 또래 정도?
한성루의 앞에 차를 주차하고 정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크리스마스라 사람이 없을 줄 알았더니 가족들끼리 식사를 하러 나온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다.
“예약되어있습니다. 204호실이 어디죠?”
나는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204호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한 사내가 자리에서 느릿하게 일어났다.
그는 빵모자 같은 걸 쓰고 있었는데 엉거주춤하게 일어나다가 내 떡대를 보고 흠칫 놀라는 거 같았다.
학창시절 일진들도 안 건들던 나였다.
나는 괴작판독기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리고 테이블 앞에서 악수하기 위해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는 약 170대 중반의 키였고 몸은 날씬한 편이었다. 옷은 꽤 고급스럽지만 약간은 퇴폐적인 스타일에 귀걸이를 주렁주렁 달고 있었고 모자를 썼지만 머리가 찰랑거리고 있었다.
“괴작판독기님?”
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의 필명을 불렀다.
“연, 연쇄폭참마님?”
그는 확실히 나의 포스에 주눅이 들었는지 아직까지 구부정하게 서 있었다.
응? 뭐지? 얼굴이 왜 여자같이 곱상하게 생겼어? 어라? 잠시만···. 왜 어디서 본 것 같지?
“어! 혹시 나유정 매니저?”
그가 나를 보고 먼저 손가락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어? 프, 프로듀서 케이?”
나는 예전에 방송국 대기실에서 그를 본 적이 있었다.
괴작판독기는 바로 슈퍼노바의 명곡을 다수 작곡한 천재 작곡가 케이였던 것이다.
어라? 왜 당신이 여기서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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