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격랑의 XM 엔터 (2)>
[CA 미디어 그룹 산하 기획사 XM Entertainment에서 발생한 폭행 사건의 전말!]
에 폭행으로 번져진 사건이 경찰에 접수가 됐다.
어젯밤 9시경 술에 취한 두 사람은 조용히 말싸움하다가 서로 멱살을 잡았다. 대표인 이모 씨가 먼저 이건호의 안면을 때리자 격분한 이건호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빈 와인병으로 이모 씨의 머리를 가격해서 기절시킨 것으로 드러났다.
그 사고로 레스토랑에 구급차와 경찰이 출동했으며 이건호는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이모 씨는 병원으로 후송되어 안정을 취하고 있다고 전해졌다.
이건호가 휘두른 와인병이 상당히 무겁고 단단한 재질이라 이모 씨는 머리에 충격을 받고 뇌진탕 증세를 보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관계자는 레스토랑의 CCTV 영상을 확보하고 참고인 조사를 통해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XM Ent.은 충격에 휩싸인 분위기다. 직원들은 묵묵부답이며 소속 연예인들은 이번 폭행 사건으로 기획사의 이미지가 땅에 떨어져 자신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까 우려하는 분위기다.
한편, XM Ent.를 계열사로 두고 있는 CA 미디어 그룹은 미디어 부문뿐만 아니라 CA 그룹 전체에 악영향을 주지 않을지 노심초사하고 있다고 전해졌다.
기존 조작사건으로 인해 CA 그룹의 이미지가 실추되어 다른 사업군인 식품, 제약 부분과 건설, 인프라 부분까지 영향을 받은 것으로 파악된다.
다시 한번 이미지가 실추될 위기에 빠진 CA 그룹이 어떠한 결정을 내릴지 귀추가 주목된다. <중략>
* * *
나는 어머니가 차려주신 아침을 먹고 회사로 출근했다. 도착해보니 회사 분위기가 아주 뒤숭숭하니 엉망이었다. 마주치는 직원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어두워 보였다.
내 방으로 들어가다가 복도에서 지원팀 순규 씨를 만났다.
“순규 씨. 얼굴 좀 펴요. 왜 그러고 있어요?”
그녀는 나를 보고 움찔하더니 뒤를 가리키며 말을 했다.
“실장님. 지금 그런 분위기가 아니에요. 지금 난리 났다구요.”
“응? 기사 때문에 난리인 건 알겠는데 그쪽에 뭐가 있는데요? 무슨 문제 있어요?”
나는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면서 무슨 일인지 물어보았다.
“아침부터 본사에서 높으신 분들이 들이닥쳐서 이것저것 가져오라고 난리네요. 감사팀인 거 같던데요?”
“벌써 왔다고요? 아니 어떻게 이렇게 빨리 조치를 하지?”
“저도 몰라요. 아까 경비아저씨 말 들어보니까 7시 조금 넘어서 들어왔다던데요?”
7시? 지금 9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라 이미 두 시간 넘게 조사를 하는 셈이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사무실로 들어가 PC를 켰다. 연예 기사를 훑어보고 사람이 많은 커뮤니티의 반응도 읽어보았다.
사람들이 이기영 대표에 대해서는 하나같이 욕을 하고 있었고 CA 그룹까지 싸잡아서 비난하고 있었다. 그동안 수면 아래로 살짝 가라앉아있던 조작사건까지 언급되며 다시 비난의 불씨가 되살아나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호에 대한 반응은 반반이었다. 병을 휘둘러 재벌 3세의 머리를 내리쳤다는 상징성 때문인지 ‘뚝깨남’(뚝배기를 깨는 남자)으로 등극하며 각종 밈이 생성되고 있었다.
인육 살인마라는 희대의 캐릭터를 연기하고 찾아주는 사람이 없었으나 이번 사건으로 인해 대중들의 호기심을 자극해 이슈 몰이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연기하던 사이코패스 캐릭터처럼 인정사정없이 병을 휘둘러 머리를 내리쳤다는 사실에 눈살을 찌푸리며 인성이 문제라던지, 과잉 대응이라고 하는 사람도 많은 게 사실이었다.
“일단 이건호 아버지는 아웃이구만.”
본사 고위 임원이라는 이건호 부친의 위치가 애매해진 것은 불 보듯 뻔했다. 다음번 정기인사에서 무조건 정리 대상 1순위인 것은 누가 봐도 확실했다.
‘로열패밀리가 아닌 이사들은 사실상 임금이 높은 비정규직이니까···.’
아무튼, 돌아가는 상황이 흥미진진했다. 나는 수첩에 나유정과 테리우스의 이름을 써놓고 펜으로 동그라미를 그리고 있었다.
‘흐음···. 어떡하지?’
본사에서 어떤 식으로 경영 전략을 수립하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돌아가는 판세를 생각해보니 본사에서 어떤 스탠스를 취할지 조금은 보이기 시작했다.
현재 CA 미디어 그룹은 XM을 제외하고 자체 기획사를 다 정리한 상황이었다. 연예기획사 지분 51% 이상을 사들인 후 레이블에 편입시키고 운영은 하지 않고 자율적으로 경영을 보장하는 쪽으로 선회했다.
그나마 생긴 지 오래된 XM Ent.만 운영하는 상황이었으나 전체적인 그룹 이미지에 손상이 온다면 가차 없이 공중분해 시켜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실상 CA 그룹은 미디어 쪽 매출보다 다른 분야가 훨씬 큰 대기업이었다. 그리고 각 사업부를 책임지고 경영하는 아들도 달랐다.
사업부별로 세 명의 재벌 2세가 경영권 승계 문제로 각축을 벌이고 있었고 막내에게 작게 맡긴 미디어 부문이 시간이 지나며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둔갑을 하자 다른 두 형이 눈독을 들이는 상황이었다.
‘권력 싸움이 치열하겠네.’
만약 내가 생각하고 있는 최악의 상황 즉 공중분해 해법이 나온다면 최우선순위가 나유정과 테리우스의 확보였다.
나유정은 어차피 계약이 1년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고 정산 비율도 9대 1이었으니 별다른 제약 없이 풀어줄 가능성이 있었다.
어차피 다음 계약을 CA 쪽과 한다는 보장도 없었거니와 최근 판결에서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린 경영층 때문에 소속 연예인이 제기한 전속계약 해지 소송에서 연예인의 손을 들어준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누구보다 회사에 돈을 많이 벌어다 준 것도 사실이었고···.
하지만 테리우스는 확 뜨기 시작하는 시점이었고 투자 대비 수익이 발생하는 지점에 와 있었다.
회사에서는 아직 테리우스로 많은 수익을 내지 못했다는 점과 세계적인 인지도를 쌓고 있는 게 심상치 않다는 것을 고려해서 놔줄 생각을 하지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테리우스는 계약 기간이 아직 4년이나 더 남은 상황.
‘음···. 유정 씨는 모르겠는데 테리우스는 좀 힘들지도···.’
“실장님. 본사에서 오신 분들이 실장님을 찾고 있습니다.”
갑자기 문이 열리며 김 비서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알았어요. 10분 후에 간다고 전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실장님.”
나는 수첩을 덮고 마시던 커피를 원샷했다. 그리고 휴대전화에 있던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 * *
나는 회사 복도를 걷고 있었다.
‘본사 사람들이 무슨 소리를 할까?’
문을 열고 회의실로 들어가니 양복을 입은 네 명의 남자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그들은 제출된 자료를 노트북으로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각 부서에서 제출한 보고서 파일철도 테이블 위에 가득했다.
“이준형 실장님?”
일행 중 리더로 보이는 사십 대 사내가 나를 보며 아는 척을 했다.
“네. 안녕하세요. 이준형입니다. 본사에서 나오셨죠?”
“네. CA 미디어 그룹 감사팀 오건영 팀장입니다. 이쪽으로 좀 앉으시죠?”
“작가님 잠시만 앉아 계세요. 전무님이 오실 겁니다.”
내가 의자에 앉자 오건영 팀장은 팀원들에게 잠시 쉬자고 말을 한 후 일행을 데리고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어라?’
잠시 후 날렵하게 생긴 30대 중반의 사내가 회의실로 들어왔다. 그는 명품 수트를 입고 리젠트 컷 헤어 스타일을 하고 있었다. 짧은 윗머리에 앞머리를 세운 깔끔한 스타일로 꽤 잘생긴 사내였다.
‘확실히 재벌 3세 같은 느낌이야. 피부도 좋고 확실히 격식이 느껴지는군.’
“안녕하세요. 이 작가님. 경영전략실의 이기훈 전무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전무님.”
이 사람이군. 경영전략실 이기훈 전무이···.
바로 이기영 대표의 친형이었다. 미국에서 스탠퍼드를 나온 뛰어난 인재이며 CA 미디어 그룹을 이끌 차세대 리더로 키워지고 있다는 사람이었다.
“다른 분들과 다르게 제 이름을 들어도 놀라시지 않는군요.”
사실 누군지 전혀 몰랐지만, 회의실에 들어오기 전 김인환 전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알아낸 정보였다. 후후···.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아는 게 힘인 법이다.
“속으로는 사실 많이 놀랐습니다.”
물론 뻥이다.
“하하하···. 앉으시죠.”
우리는 악수를 하고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는 오른손 검지를 들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미소짓고 있었다.
“작가님. 실물이 진짜 잘생기셨네요.”
“과찬이십니다. 제가 전무님께 드리고 싶은 말인데요.”
솔직히 재벌 집 자식이건 뭐건 내가 그 사람들 눈치 볼일이 뭐가 있겠는가? 그냥 인맥 관리상 하는 말이다.
자고로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게 최선이며 적은 만들지 않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손자병법에 나와 있다.
“그런데 어떤 일로 본사에서 이런 누추한 곳까지 오셨을까요?”
“하하···. 누추한 곳이라뇨···.”
“혹시 각종 기사들로 시끄럽던데 기사처럼 회사를 정리하려고 나오신 건 아니시죠?”
“후후···. 일단 점검하려고 나오긴 했는데 솔직히 XM에 뭐 볼 게 있겠습니까? 실장님 빼고요.”
“저 빼고···.”
나 빼고 볼 게 없다고? 허···. 갑자기 재미있어지네? 이거 상상도 못 했는데···.
“네. 제가 여기까지 와서 숨길 게 뭐가 있겠습니까?”
“전 당연히 테리우스나 나유정 씨 이야기를 꺼낼 줄 알았는데요?”
“물론 XM 소속 연예인 중에는 작가님이 언급하신 테리우스와 나유정 씨만 시장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단언컨대 작가님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두둥···. 이게 무슨 소리냐? 나랑 비교할 수 없다고?
솔직히 상상외의 전개에 뒤통수를 살짝 맞은 느낌이다.
“..........”
“하하. 많이 당황하셨나 봅니다. 솔직히 여기 온 이유가 바로 작가님 때문입니다.”
“테리우스나 나유정 씨가 아니라···.”
“맞습니다. 사실 감사팀은 작가님에게 계약을 제시하기 위해 데려온 그냥 연막작전 같은 겁니다.”
나는 미소짓고 있는 이기훈 전무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의외의 이야기였지만, 썩 기분 나쁜 소리는 아니었다.
“흐음···. 무슨 계약인데요?”
“이겁니다.”
그는 처음에 회의실에 들고 온 서류 봉투를 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그 서류 봉투를 열어 계약서를 꺼냈다.
“D-Studio 전속 작가 계약서?”
놀랍게도 그것은 상장 후 주가가 계속 상승 중인 D-Studio의 전속 작가 계약서였다. D-Studio는 넷플릭과 견고한 협업을 바탕으로 수십 편의 드라마 계약을 체결했으며 시가총액만 거의 3조에 다다르고 있는 거대 제작사였다.
D-Studio는 현재 여러 개의 제작사를 자회사로 두고 있었는데 유명 스타 작가들이 그 회사에 대거 포진해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작가님은 다른 분들과 다르게 D-Studio 전속 작가로 계약하는 겁니다.”
“D-Studio 전속 작가라···. 왜죠?”
그는 내 얼굴을 보고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걸 몰라서 물으시는 건 아니시겠죠? 작가님의 역량을 객관적으로 파악해보고 제시하는 겁니다. 계약서 첫 페이지를 한번 보시죠.”
응? 이게 말로만 듣던 백지수표?
“원하시는 금액을 적으시면 됩니다.”
그는 손가락으로 내가 들고 있는 수표를 가리키고 있었다.
계약서에 첨부된 백지수표를 보니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D-Studio 같은 빵빵한 제작사의 지원을 등에 업고 창작에만 몰두하면 되니 얼마나 편하겠는가.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보며 미소를 짓고 있는 이기훈 전무의 눈을 보니 갑자기 피가 싸늘하게 식는 느낌이 들었다.
‘이기훈 전무 당신···. 웃고 있는 눈이 아니구만?’
나는 들고 있던 계약서를 조용히 도로 덮었다.
그리고 미소가 사라진 이기훈 전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 전무님. 저는 아직 계약할 생각이 없습니다.”
내 말을 들은 이기훈 전무의 잘 다듬어진 눈썹이 꿈틀거렸다.
ⓒ 소광생
< 새로운 시작 >
“왜죠?”
“어딘가 얽매이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그 말은 어떤 곳과도 계약을 하지 않고 프리랜서로 활동하시겠다는 의미입니까?”
“기본적으로는 그렇습니다.”
“흠···.”
“전무님. 지금 제가 느끼기엔 XM은 아예 머릿속에 없으신 거 같은데 정말 공중분해가 되는 걸까요?”
“공중분해라기보다는 그냥 부서들이 나뉘어서 소속만 바뀌는 겁니다. 배우 쪽은 다른 매니지먼트에 매각하고 다른 지원부서들은 인원을 쪼개서 계열사에 편입시켜야죠.”
“혼란스러우시겠군요.”
“집안 어르신들이나 대형기획사 그리고 대중들의 시선이 너무 안 좋아요. 방송이나 플랫폼을 가진 사업자가 기획사까지 한다고 하니 여기저기 말들이 많아요. 다른 방법이 있는데 리스크가 크다고 생각하는 거죠.”
“다른 방법이라 하시면 지분투자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이기훈 전무는 내가 하는 말에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 작가님. 글만 쓰시는 줄 알았더니 돌아가는 걸 좀 아시는군요?”
“제가 물론 작가로 유명하지만, 명색이 XM 프로듀싱&콘텐츠 총괄본부 실장입니다.”
“얽매여 집필활동은 하기 싫으시고 작품은 계속 쓰실 거 같은 데다가 자금도 넉넉하시고···. 혹시 말인데요. 창업이라도 생각하고 계시는 겁니까?”
이기훈 전무의 얼굴은 아직 평온해 보였다. 그는 시선은 나에게 고정한 채 상체를 의자 쪽으로 기울였다.
“실장님께서 윗선에서 XM을 날리실 생각을 하고 있다고 말씀 주셨으니 저도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 가지 콘텐츠를 제작하는 회사를 차려볼까 생각 중입니다.”
말을 할까 말까 하다가 어차피 모두가 알게 될 거 같아 미리 언질을 주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그냥 이것저것 다요. 웹소설이나 웹툰, 드라마나 영화 기회가 되면 경험을 살려 아이돌도 한번 만들어보고요···.”
“흠···. 쉽지 않을 텐데요. 위험하기도 하고···.”
“요즘에는 글로벌 플랫폼들이 치열하게 경쟁 중이라 제작비가 넘쳐흘러 좋은 콘텐츠만 있다면 어렵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글로벌 OTT(Over The Top Service)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스트리밍 플랫폼.”
“예를 들자면 그렇다는 겁니다.”
“그런 업체들 너무 믿지 마세요. 잘못하면 콘텐츠 공급자로 전락할 수도 있어요. 다른 곳에 팔지도 못하는 하청처럼 말이죠.”
“물론 완벽하게 믿으면 안 되죠. 독점되고 나면 어떻게 입장 바꿀지 모르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죠. 그게 딜레마죠.”
딜레마는 지상파나 케이블 방송사지 내가 고민할 문제는 아니다.
“최근 돌아가는 걸 보니 해외 OTT 업체들 독과점 행태를 견제하려고 지상파 방송 3사, JTVC, 본사가 손잡고 IPTV 월정액 VOD 서비스도 단일화한다고 발표했던데요?”
“하···. 이거 참···. 우리 작가님이 공부 많이 하셨네.”
“아까 말씀하셨다시피 저는 XM의···.”
갑자기 이기훈 전무가 오른손을 들고 내 말을 잘랐다.
“다시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작가님. 그런데 말이죠···.”
“네. 말씀하세요. 전무님.”
그는 테이블 위로 두 손을 모으고 자세를 바로잡더니 나를 쳐다봤다.
“작가님께 그런 소리를 들으니 작가님이 더 탐이 나는데요?”
“탐이 나신다니요?”
“솔직히 작가 중에 이런 경영 마인드가 갖춰진 인재를 찾기 힘들거든요.”
“그거 잠시 줘보실래요?”
그는 내가 들고 있던 백지수표를 달라고 손짓했다. 나는 무덤덤하게 들고 있던 것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러더니 수표를 쓱쓱 찢기 시작했다.
잠깐? 이건 스토리 흐름상 내가 해야 맞는 퍼포먼스 아닌가?
“왜 그러시는 거죠?”
“어차피 이건 무용지물이 된 것 같아서요.”
“그렇긴 하군요.”
“그럼 이렇게 하는 게 어떨까요? 작가님이 저의 곁에서 동료가 돼주는 겁니다.”
“동료가 돼라···.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 같군요.”
음···. 애니메이션을 너무 본 거 아닌가?
“어디서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말 그대로입니다. 저랑 같이 미디어 제국을 이끌어 가자는 거죠. 제가 옆에 한자리를 약속드리겠습니다.”
“..........”
음···. 이건 솔깃하긴 하다. 하지만 이런 걸 곧이곧대로 믿으면 바보다. 전 대표하는 짓만 봐도 사람이 언제 바뀔지 모르는 일이니까.
“전무님. 사실 전 지금껏 번 돈으로 놀고먹어도 되는 사람입니다. 이번에 쓴 책이 Burn’s & Eight Noble 출판사에서 영미권으로 출시되면 더 그렇고요. 솔직히 욕심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냥 자유롭게 콘텐츠를 제작해보고 싶다는 게 제 바람입니다.”
내 말을 들은 이기훈 전무는 말문이 막히는지 침묵하고 있었다.
최대한 기분 상하지 않고 조곤조곤 말을 했으니 알아들을 것 같은데?
“후···. 야심이 크시군요.”
“아닙니다. 그냥 철없는 한량이죠.”
이기훈은 대화가 이렇게 길어질 줄 몰랐는지 목에 맨 넥타이를 조금 푸는 시늉을 했다.
“아뇨. 제 눈에는 그렇게 안 보입니다. 작가님은 이미 저랑 같은 선에서 생각하고 계신 것 같아요.”
“그건 오해입니다. 그냥 콘텐츠에 관심이 많은 덕후일뿐이죠.”
“후후···. 콘텐츠 확보가 앞으로 가장 중요하다는 걸 알고 계시는 분 같은데요. 아닌가요?”
“네. 그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저를 높게 평가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웹소설을 쓰고 아이돌 매니저를 하던 사람이었으니까요···.”
벌써부터 나를 주목하면 곤란했다.
‘이 전무님아! 견제 좀 그만하고 같이 갑시다.’
“작가님. 혹시 최근 전략기획실에서 사업구조를 재편하고 있는 걸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갑자기 작가님 의견이 궁금하네요.”
“그냥 개인적인 의견을 물어보시는 건가요?”
“네. 뭐 아무 말씀이나 하셔도 됩니다.”
“일단 글로벌 OTT 서비스를 내놓고 넷플릭하고 경쟁할 건 아니신 거 같으니···.”
“당연히 경쟁하기 힘들고 경쟁할 필요도 없습니다. 지상파랑 손잡는 거나 자체 OTT는 말 그대로 마지막 제3의 대안입니다.”
“그렇군요. 그럼 본사에서 가려는 방향이 영상과 음악 콘텐츠 확보 아닌가요? 아! 그리고 콘텐츠와 연계한 소셜커머스까지···.”
“더, 더 해보세요.”
“영상 부문은 멀티플렉스 영화관이나 드라마 제작사인 D-Studio 등으로 이미 생태계를 공고히 구축했고 음악은 지분투자로 기획사들을 산하 레이블에 포함시키면서 특히 케이팝 아이돌에 대해 투자를 열심히 하고 있죠.”
“..........”
“그런데 문제는 국내에도 경쟁자가 많다는 거겠죠. 당장 영상 부문은 각 방송사도 D-Studio 같은 독립 스튜디오를 줄줄이 세우고 있고 음악 부문에서는 기존 케이팝 아이돌을 앞세운 3대 기획사가 자체적으로 콘텐츠를 제작하기 시작했죠. 어차피 미튜브에 올
리면 수백, 수천만 명이 시청하며 구독료와 광고수익을 올리는데 기존 방송국에 굳이 잘 보여야 할 이유가 없는 거죠. 뭐 거의 완전한 경쟁 시장이랄까?”
이기훈 전무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지고 로봇과 같이 입꼬리만 올리고 있었다.
“그 콘텐츠 확보 전쟁 속에서 케이팝 아이돌의 전 세계적인 파급력이 굉장하지 않습니까? 당연히 본사도 세계적인 케이팝 스타를 보유해야 할 거 같은데···. 그런데 아이돌은 연기자와 다르게 최소 몇 년간 트레이닝이 필요하니 보니까 자체적으로 따라가기 쉽
지 않죠. 그래서 빅샷하고 지분 투자해서 뭐하나 만들지 않았나요?”
“만들었습니다. 제가 주도했었죠.”
“아. 전무님 주축으로 진행된 사업이군요. 그런데 슈퍼노바가 군대에 가야 하니···. 다른 글로벌 슈퍼스타를 키우긴 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은 거겠죠?”
“그만하면 됐습니다. 확실히 테리우스 매니저 경험도 있으니 잘 아시는군요.”
그는 내 말을 듣더니 흥미를 느끼는 것 같았다.
“오랜만이네요. 이런 이야기를 전략팀 직원들이 아닌 사람과 하다니···.”
“전무님. 뭐 하나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네. 물어보세요.”
“테리우스는 놓아주실 생각이 없으시겠죠?”
“네. 테리우스는 인피니티 드림즈(Infinite dreams)로 갑니다.”
칼처럼 끊어버리는 이기훈이었다. 정말 XM엔 나와 테리우스만 건지면 된다는 생각으로 온 거 같았다.
그런데 인피니티 드림즈라···.
아까 내가 이야기한 본사와 빅샷이 출자해서 만든 곳이다. 새로운 글로벌 스타를 만들기 위함이지만 아직은 부족한 그곳.
“그렇군요.”
“슈퍼노바의 공백과 새로운 글로벌 스타가 탄생할 때까지 지분투자사와 파트너사의 가장 앞에 설 센터 그룹이 필요합니다. 저는 그걸 테리우스라고 보고 있습니다.”
본사는 지분투자사 말고도 지분투자를 하지 않은 기획사와 파트너십을 체결해서 우호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아무래도 인지도와 방송 플랫폼 노출이 목마른 중소 기획사들이 이런 관계를 선호했다.
“테리우스가 그 정도로 컸다고 보시는군요. 왠지 뿌듯하네요. 씁쓸하기도 하고···.”
씁쓸하다고 말한 것은 테리우스를 놔줄 생각이 1도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정 씨하고 믿을 만한 사람들을 데리고 나가야 할 거 같은데···.
“테리우스보다는 작가님을 모셔가는 게 일 순위였습니다. 테리우스야 어차피 계약관계가 확실하고 최상의 케어를 할 준비가 완벽하기 때문에 법적으로 소송을 걸어봐야 시간만 날리게 될 겁니다.”
소송 이야기를 꺼낸 걸 보면 이기훈 전무도 내가 대략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살짝 눈치챈 것 같았다.
“대충 서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았을 거 같은데 솔직하게 터놓고 이야기할까요?”
“그러시죠. 작가님. 저도 시간이 없습니다.”
“테리우스는 인피니티 드림즈에서 최고의 관리를 해준다고 하시니 어쩔 수 없는 것 같고요. 실은 나유정 씨와 제가 콘텐츠 제작사를 하나 차리기로 했습니다. XM이 정리되면 원하는 직원들 몇 명 데리고 나가려고요.”
“직원들도 데려가 주시면 좋죠. 계열사에 어떻게 배속시킬지 머리가 아팠는데···. 아 참 결혼은 언제 하시죠?”
“네? 결혼이요??”
아니 이게 무슨 삼각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지?
“아···. 유정 씨하고 사귀는 사이 아니셨어요?”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몇 번 정도 기사를 본 것 같아서요.”
“.... 크흠. 이거야 원. 기레기들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오해하고 있군요. 그런데 유정 씨는 왜 놓아주시는 거죠? 아직 계약이 1년 남아있는데···.”
“어차피 유정 씨야 좀 쉬시고 버티다가 계약 종료되면 다른 곳으로 이적할 수 있으니 저희가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겠죠.”
“아! 그렇군요.”
솔직히 이건 다행이었다.
“그건 그렇고···. 혹시 그 제작사 지분을 저희가 투자해도 되겠습니까?”
“죄송합니다. 저희가 돈이 급하지 않다 보니···. 그리고 본사는 51% 이상이 아니면 지분투자 안 하지 않나요?”
“일단은 그렇죠.”
“그럼 다른 회사들처럼 파트너십을 체결하는 게 어떻습니까? 서로 윈윈하는 거죠. 플랫폼이 필요하면 저희가 빌리고 콘텐츠가 필요하면 저희가 협조하고요. 그런 사이 어떠십니까? 저도 본사와 척지기 싫거든요. 그래도 한동안 몸을 담았던 회사인데요···.”
“흠···.”
이기훈 전무은 뜻대로 안 풀리는지 고개를 살살 돌리며 목을 풀고 있었다.
“테리우스는 제 새끼들이나 다름없습니다. 회사가 갈라져도 계속 드라마에 출연시킬 겁니다. 특히 연준이나 창민이는 주연급 인재죠.”
“주연급···.”
이기훈 전무도 내 드라마의 파급력에 대해 알고 있다. 사실상 테리우스가 이 정도로 뜬 것은 내 드라마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계속 내가 서포트를 해주면 그들의 전략이 훨씬 수월해질 테니까 말이다.
“좋습니다. 저희야 작가님과 유정 씨의 회사에 지분투자를 하고 싶지만 두 분 다 돈이 필요 없으신 분이라 그게 힘들겠군요. 그렇다면 파트너십을 체결하는 거로 잠정 결정하시죠. 원하던 바는 아니지만, 차선책 정도의 결과는 되는군요.”
그렇겠지. 아직 내가 본색을 드러내지 않았으니까.
난 콘텐츠의 힘을 믿는다. 그것도 킬러 콘텐츠 말이다. 킬러 콘텐츠는 플랫폼을 바꾸게 할 수도 있는 무시무시한 무기니까.
“아···. 전무님. 혹시 예능 프로그램 하나 만드실 생각 없으세요?”
“갑자기요?”
이기훈 전무는 계약서를 챙겨 들고 일어서려다 의아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네. 제가 차기작으로 검토 중인 게 있습니다.”
“차기작이 설마 예능입니까?”
“그럴 리가요. 영화입니다. 뮤지컬 영화요.”
“뮤지컬 영화요? 레미제라블이나 맘마미아 같은?”
“맞습니다. 걸그룹을 주제로 스토리를 썼거든요. 거기 출연하는 배우들을 뮤지컬 배우 서바이벌로 뽑는 거죠. 신인, 기성 아이돌 등등 차별이 없고 순수 능력으로만···. 물론 걸그룹이 주인공이라 나이 제한은 있을 겁니다. 15세~25세 정도로···.”
“합시다.”
“네?”
“하자구요. 그거···. 뮤지컬 배우 서바이벌···. 작가님 작품 출연을 전제로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거죠.”
“전 국민이라···. 뭐 그렇게 하는 거죠.”
“안 그래도 요즘 화제가 되는 서바이벌이 없었는데 잘됐군요. 아이돌 메이커를 다시 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니 중간에 써먹을 소재로 딱 맞네요.”
“만약 소속사가 없는 신인이면 저희 쪽에서 계약할 겁니다. 이준형 컴퍼니로요.”
“이준형 컴퍼니?”
“물론 그냥 가칭입니다.”
유정 씨가 쭌&쩡으로 하자고 하는 걸 겨우 말린 상태다. 아직 이름을 뭐로 할지 정해지진 않았다.
“그렇게 하세요. 있는 것도 정리하는 마당에 저희가 그것까지 다 하긴 뭐하고···. 아! 영화니까 저희 배급사를 통해서 개봉하도록 하시죠.”
“그건 당연한 이야기죠.”
“뭐 이 정도면 대충 협의가 끝났네요. 앞으로 잘해봅시다. 작가님. 아니···. 대표님이라고 불러드려야 하나요?”
“편한 대로 불러주세요.”
우리는 서로 시선을 마주치며 악수를 했다.
“작가님. 세부적인 논의는 실무자를 보내서 결정하도록 하시죠. 정비가 되면 연락주세요. 저는 XM을 정리한다고 발표해야 하니까요.”
우리는 그렇게 구두로 협의를 간단하게 진행했다. 나는 회의실을 나와 사무실 의자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잠깐! 인피니티 드림즈를 이기훈 전무가 추진했다고 했지? 혹시 이거 XM 공중분해도 이기훈 전무 작품 아냐? 경쟁자인 동생 물 먹이고 자연스럽게 후계자를 굳힌?
내 머릿속에서 또 쓸데없이 시나리오가 돌아가고 있었다.
‘후···. 이게 뭐라고 힘드네. 어쨌건 80% 정도 내가 원하는 대로 됐군.’
나는 다시 수첩을 펼쳐 뮤지컬 서바이벌이라고 써 놓고 동그라미를 쳐대고 있었다.
‘뭐 간단하게 해서 뽑지 뭐.’
나는 협의도 잘되고 해서 쉽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빗나가도 한참 빗나간 것이었다.
며칠 후
[단독! 뮤직넷 신규 서바이벌 진행! 이번에는 뮤지컬이다!]
[뽑힌 멤버는 걸그룹 역할로 뮤지컬 영화에 출연! 영화 원작은 나만의 세계의 이준형 작가로 밝혀져!]
순식간에 XM Ent. 폭행 이슈가 파묻히며 엄청난 이슈를 몰고 왔다.
< 새로운 시작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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