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주얼 센터 (2)>
장예원은 내 얼굴을 아는지 깜짝 놀란 채 석상처럼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오랜만에 본 그녀는 확실히 약간 수척해진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확실히 비주얼 센터는 비주얼 센터였다. 원래 눈에 확 들어오는 화려한 외모였는데 그간 몸무게가 빠졌는지 청순한 분위기가 더해졌다.
걸그룹 데뷔가 무산된 뒤 소속사를 그만두고 마음고생을 한 듯 그녀의 하얀 얼굴에는 수심이 드리워져 있었다.
“여, 여기는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장예원은 일면식이 없었던 내가 집에 와있자 많이 당황한 것 같았다.
“서울에 사는 고모님께서 여기 주소를 알려주셨어요. 프로필에 적혀 있던 전화번호로는 통화가 안 되더라고요.”
“그건 제가 번호를 바꿔서···.”
나는 그녀와 잠시 시선을 마주쳤지만 머쓱한 나머지 방안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방안은 침대와 장롱 그리고 작은 TV가 있었고 벽에는 어렸을 적 아버지와 찍은 사진이 덩그러니 걸려있을 뿐이었다.
“집이 좀 휑하죠? 원래 제가 혼자 살던 곳이라 그렇습니다. 그렇게 서 계시지 말고 앉으시죠?”
침대에 누워있던 예원이의 아버지가 앉을 것을 권유했지만, 정작 앉을 곳이 없어 조심스럽게 바닥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내가 자리를 잡으니 예원이도 침대 쪽으로 걸어와 아버지 옆에 걸터앉았다.
“예원아. 너 나 때문에 회사 관두고 내려온 거야? 다시 올라갈 거라고 했잖아.”
“..........”
아버지의 말에 예원이가 당황한 듯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아버님. 예원이는 다시 올라갈 겁니다.”
장예원은 내가 하는 말에 놀라더니 내 얼굴만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예원아. 나는 괜찮으니까 서울 올라가서 너 하고 싶은 거 해”
아버지는 따뜻한 말투로 그녀의 등을 두드렸다.
“아빠가 몸이 이런데 내가 어디를 가···.”
그녀는 약간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아버지를 타박했다.
“아빠가 돼서 딸 앞길이나 막고 있고···.”
“막긴 뭘 막아.”
보다 못한 내가 대화에 잠시 끼어들었다.
“아버님. 몸이 어떻게 안 좋으신데요?”
“아···. 그게···. 제가 허리를 좀 다쳤습니다.”
“허리를 좀 다친 게 아니라 척추 골절이잖아.”
“척추 골절?”
사정을 들어보니 이랬다. 군산의 조선소에서 근무하던 예원이의 아버지는 사업장이 문을 닫으며 구조조정이 되었고 철거업체에 비정규직으로 들어가 공단의 사업장 철거 일을 하다가 높은 곳에서 떨어져 사고를 당했다고 한다.
다행히 척수의 손상은 미미해서 마비가 오는 일까지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
“여기 아버님 혼자 사셨어요? 예원이는 서울 고모 집에 맡기신 거고요?”
“네. 딸 자랑 같지만 제가 봐도 자질이 있어 보여서 다치기 전에는 힘이 닿는 대로 뒷바라지를 해주고 있었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 처음 본 오디션에서 덜컥 붙고 데뷔를 하니 마니 했었는데···. 지금은 제가 이렇게 다치는 바람에 일이 꼬였네요.”
“아니야. 꼬이긴 뭐가 꼬여. 그 전부터 문제가 많았어.”
“맞습니다. 아버님. 같이 데뷔하려던 멤버의 과거 잘못 때문에 그렇게 된 겁니다. 예원이는 회사에서도 몇 번이나 그만두는 것을 만류했을 만큼 계속 남겨두고 데뷔시키려던 아이였습니다.”
지금 예원이의 사정을 들어보니 그만두고 집으로 내려오는 게 어쩔 수 없는 선택인 것 같았다. 집에 아무도 없는데 아버지는 크게 다쳐 거동을 못 하니 자식으로서 걱정이 되어 내려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예원아. 나는 괜찮아. 얼른 실장님 따라가서 연습해. 사람은 좋아하는 것을 하고 살아야 해. 난 우리 예원이가 실패해도 좋으니까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았으면 좋겠어. 아빠는 우리 예원이를 믿어. 최선을 다했다면 아빠는 그걸로 만족해.”
“아빠. 바보야? 어떻게···. 어떻게 그래···. 아빠는 움직이지도 못하고 이러고 있는데 내가 무슨 생각으로 그러고 있겠어. 흑···.”
예원이는 눈가가 붉어지며 목이 메어 울먹거리고 있었다.
이런 사정이었구나. 답답한 상황이긴 하네.
그래도 이런 강렬한 아우라를 지닌 사람은 찾기가 쉽지 않다. 예원이는 무조건 팀에 합류시켜야 할 인재였다. 그녀를 위해서라도 말이다.
“예원아. 우리 잠시 나가서 이야기 좀 할까? 괜찮으시죠. 아버님?”
“네. 실장님. 우리 예원이 잘 좀 설득해 주세요.”
* * *
나는 아파트 뒤에 펼쳐진 검은 바다를 보고 있었다. 아파트 뒤쪽은 공단에서 운영하는 체육시설이 있었는데, 아마도 자전거나 인라인을 타는 곳인 듯했다. 하지만 관리가 제대로 안돼다 보니 여기저기 무성한 잡초들이 자라고 있었다.
예원이는 주광색 가로등 밑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풍경은 을씨년스러웠지만 그녀로 인해 배경이 달라 보이는 것 같았다.
압도적인 비율과 단번에 시선을 주목시키는 외모.
스카우터로 확인해보니 그녀에게서 강렬한 황금빛 아우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간 억눌린 게 많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예전보다 더 강렬해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연기도 감정의 산물이 아니겠는가? 이런 극심한 심경의 변화는 연기의 폭을 넓혀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예원아. 내가 말을 놔도 될까?”
“네. 실장님. 그렇게 하는 게 저도 편해요.”
“그래.”
“드라마 잘 봤어요. 이준형 작가님.”
“아···. 그거? 운이 좋았지 뭐.”
“두 작품 다 재미있었던 건 사실이니까요. 전 슬기로운 덕질생활을 재미있게 봤어요. 확실히 실장님 경험이 들어간 게 느껴지더라구요.”
“그래. 고맙다.”
“..........”
“예원아. 그런데 아버님 돌봐줄 사람은 너밖에 없는 거니?”
나는 그녀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네. 없어요. 수술해주신 의사 선생님이 최소한 3개월은 움직이면 안 된다고 하셨어요. 아···. 1개월 지났으니 최소한 2개월은 제가 붙어있어야 해요.”
“내가 이거 물어봐도 되는지 모르겠다.”
“괜찮아요. 물어보세요.”
“아까 안방에 사진 보니까 너랑 아버지 사진만 있던데 어머니는 안 계시니?”
“네. 엄마는 저 어릴 때 집을 나가셔서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연락도 안 되고···.”
“그래 미안하다. 괜히 물어봤네.”
“아니에요.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요. 아빠가 절 얼마나 귀여워 해주셨는데요. 돌아가신 할머니도 그렇고···.”
“그렇구나! 네가 그렇게 사랑을 받고 자라서 그런지 처음 봤을 때는 부잣집 딸인 줄 알았어.”
“제가요?”
“응···.”
“헤헤···. 제가 사실 그런 이야기를 좀 들었어요. 그런데 일부러 그렇게 티 안 내려고 하는 것도 있어요.”
점점 이 애가 더 맘에 들기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인생의 어려움을 겪어서 그런지 생각이 깊고 말도 조곤조곤 잘했다. 아빠를 생각하는 마음도 그렇고···.
“예원아. 내가 곧 독립해서 회사를 차릴 예정이야. 나 믿고 다시 시작해보는 게 어때? 계약 하지 않을래?”
“네? 계약이요? XM은요?”
“응. 내가 곧 독립해서 회사를 차릴 건데 아이돌 그룹을 빠르면 6개월, 최소한 1년 안에 데뷔를 시키려고 해. 이미 연습생으로 봐둔 친구들도 있고···.”
“지, 진짜요?”
“응. 정말이야. 너 어디 가서 소문내면 안 된다.”
“저 입 무거워요. 실장님.”
“그런데 아이돌을 만드는 게 쉽지 않을 텐데요. 그게 그렇게 쉬웠으면 아무나 으음···.”
역시 눈치가 빠르고 현실적인 아이인 것 같다.
“사실은 나와 유정 씨가 같이 준비하고 있어.”
“정말요? 유정 님하고 같이 기획사를 차리신다고요?”
“맞아. 사실이야. 벌써 사무실로 쓸 건물까지 마련해놨거든.”
“유정 님이···.”
예원이의 표정이 살짝 몽롱해지고 있었다.
“왜 그래? 너 유정 씨 팬이니?”
장예원은 내 목소리에 놀라더니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제 롤모델이세요. 블랙소울 채널을 보니 춤도 엄청 잘 추시던데요? 아아···. 유정 님···.”
얘가 왜 이러지? 표정이 좀 이상하다.
“유정 님은 무슨! 그냥 유정이 언니라고 해. 닭살 돋는다.”
“그, 그럴 순 없어요. 리빙 레전드께 어떻게 그래요?”
“너 나유정 배우 완전 빠순이구나?”
“실장님 그거 못된 말이에요.”
“아. 그래 미안.”
“그런데···. 제가 지금 하고 싶어도 여건이 안돼서···.”
장예원은 풀이 죽은 얼굴을 하더니 고개를 떨구었다.
“이러면 어떨까?”
나는 그녀에게 대안을 제시했다.
아버지의 척추 골절로 2개월은 무조건 누군가 곁에 있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내가 회사를 준비하는 1개월 동안 예원이가 아버지 곁에 있고 나머지 1개월은 간병인을 쓰는 것이다. 그리고 그 비용은 내가 대신 내기로 하고 연습생 숙소를 운영할 예정이라 소
지품만 가지고 올라오면 될 거라고 말해줬다.
“그건 안돼요. 대표님. 나중에 정산할 때 그 비용을 꼭 반영해 주세요.”
“대, 대표님이라고?”
“왜요? 계약하기로 했으니까 대표님이죠.”
“그, 그런가? 그렇게 부르니 기분이 이상해서···.”
“대표님 그런데요. 유정 님은 부대표님이신가요? 아니면 부부 공동···.”
“떽! 헛소리!”
“아이 깜짝이야. 농담이에요. 하도 두 분이 잘 어울리셔서···.”
내가 정색을 하자 그녀는 내 얼굴을 보며 배시시 웃고 말았다.
“그래. 그렇게 웃으니까 좋네.”
“음···. 사실 제가 대표님께 고백할 게 있는데요. 전 약간 부정적인 성격이 있어요. 슬럼프가 오면 정말 밑도 끝도 없이 기분이 다운되거든요.”
“응? 혹시 조울증 같은 건가?”
“그 정도는 아닌데 감정 기복이 좀 있는 편이에요”
“에이. 그 정도는 누구든지 그렇지. 유정 씨만 봐도 두 얼···. 헙···.”
“응? 유정 님도요?”
“아, 아니···. 유정 씨도 약간 그런 이중적인 면이 있다는 거지.”
나는 무의식적으로 나유정의 예를 들면서 설명할 뻔했다.
“아아···. 다들 그렇구나.”
뭐 다들 그런 건 아니고···.
처음 봤을 때는 약간 수척하고 우울한 모습이었는데 지금 보니 다시 생기를 찾은 느낌이다. 예원이는 아기처럼 맑은 눈망울을 반짝이고 있었다.
“대표님. 들어가서 식사하시고 가세요. 제가 돈가스 덮밥 해 드릴게요. 어서요~”
그녀는 그렇게 발랄하게 돌아서서 집으로 걸어갔다. 장예원의 뒷모습을 보니 벌써 다 큰 것 같았다.
고1이지만 키가 거의 170cm에 달하고 비율이 좋다 보니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역시 센터 감이네.’
나는 그녀를 따라서 집으로 들어갔다.
“대표님. 잠시만 거실에 앉아 계세요. 저녁해 드릴게요. 아빠! 배고프지? 잠시만 기다려. 내가 밥해줄게.”
[그래···.]
그녀는 사 온 식자재를 싱크대에 올려놓고 아주 능숙한 손길로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안방에 예원이 아버지가 라디오를 틀어놨는지 조용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삭삭···. 탁탁탁···. 치익···.
그녀는 허둥대지 않고 재료들을 다루고 있었다. 시간 분배를 하며 밥을 올리고 돈가스를 튀기며 채소를 썰고 샐러드를 만드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어라?
싸구려 싱크대가 배경이였지만 그녀가 요리를 하고 있으니 갑자기 어두운 주방이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마치 집에서 주부 9단이 요리를 하는 것 같은 자연스러움. 능숙한 칼 솜씨. 숟가락으로 돈가스 소스의 맛을 살짝 보며 입맛을 다시고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
그리고 안방에서 흘러나오는 잔잔한 음악 소리
나는 그녀가 집중해서 음식을 하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움직임은 마치 정밀하게 계산된 것처럼 물샐틈없었으나 별생각 없이 본다면 아주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어라? 뭐지. 이 기시감은?
아! 맞다!
“영화! 유리 카모네 식당···. 아니 그린 포레스트!”
“네? 대표님? 저한테 하신 소리예요?”
요리하고 있던 예원이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아···. 아냐. 그냥 혼자 생각하던 게 있어서···. 하던 거 계속해.”
내가 손을 흔들자 그녀는 다시 콧노래를 부르며 요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 느낌은 케이블 채널에서 우연히 봤던 일본의 힐링 음식 영화인 그린 포레스트와 비슷했다.
도시에서 내려온 주인공이 한적한 숲속에서 자급자족하며 정성껏 작물을 기르고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가족과의 추억을 떠올리는 슬로우 라이프를 영상으로 담은 힐링 영화였다.
별 내용도 없는데 일하고 요리하고 먹는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다가 두 시간이 훌쩍 가버린 영화였다.
‘딱! 그 느낌이야. 요리하고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면 그냥 시간 순삭···.’
청량한 느낌의 주인공이 능숙하게 요리를 하고 간을 보는 모습이 그 영화의 주인공과 딱 겹쳐 보였다.
나는 문득 이 소녀가 미튜브 ASMR 계의 떠오르는 신성이 될 것 같은 묘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힐링 영화까지···.
내 머릿속에서는 갑자기 떠오른 이 아이디어가 폭풍우처럼 휘몰아치고 있었다.
‘하아···. 이놈의 영감은 시도 때도 없이···.’
“대표님. 저녁 다 됐어요. 이리 와서 드셔보세요. 전 아빠한테 가볼게요. 식사하시는 거 도와드려야 되거든요.”
“그, 그래···.”
나는 그녀가 내온 음식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하얀 쌀밥에 깔끔하게 튀겨낸 돈가스를 칼로 썰어 위에 얹고 소스를 뿌린 덮밥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숟가락을 들어 돈가스와 밥을 퍼서 맛을 음미했다.
‘마, 맛있어. 미친···.’
장예원의 요리 실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이게 정녕 고1의 음식 솜씨란 말인가?
서울에 사는 고모가 분식집을 한다고 했었지? 거기 주방에서 아르바이트라도 한 건가?
와···.
나도 모르게 숟가락으로 허겁지겁 밥을 퍼먹고 있었다.
지이잉···. 지이잉···.
갑자기 주머니 속의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나유정에게 온 전화였다. 시계를 보니 벌써 8시 반을 넘어 9시가 돼가고 있었다.
“유정 씨?”
[준형 씨. 대박! 대박 사건이요.]
“음? 갑자기 왜 그래요? 왜 그렇게 흥분했어요? 어디 불이라도 났어요?”
[불이 아니라 싸움이요.]
“싸움이요? 그게 갑자기 무슨···.”
ⓒ 소광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