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주얼 센터 (1)>
“배우 2팀이 담당하고 있는 한소리 씨요?”
“다행이네요. 아시는군요.”
“배우 2팀 팀장님이랑 친합니다.”
“아! 나우민 팀장 말씀하시는군요?”
팀장 이름도 잘 아는군? 한소리라···. 점점 뭔가 의심스러운데? 언제 한번 본 적이 있었던가?
어차피 차기작은 뮤지컬 영화였기에 한소리 같은 패션모델 출신의 배우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내 마음속으로 출연진들이 어느 정도 정해져 있는 상태였고 XM에서 진행할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들어줄 수 없는 처지였다. 그래도 무슨 소리를 하는지 좀 더 들어볼 필요가 있어 보였다.
“혹시 한소리 씨와 어떻게 아시는 사이신지···.”
“아···. 개인적으로 좀 친분이 있습니다.”
그렇군. 표정만 딱 봐도 알 수 있었다. 자기랑 사귀는 애인이거나 아니면 뭐 그렇고 그런···.
“저는 캐스팅 확답은 못 해 드립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정식으로 오디션 보라고 하시던가요.”
나는 굳은 얼굴로 조곤조곤 이야기했다. 그러자 이기영 대표는 내 말을 들으며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좁혔다.
“흐음···. 내 얼굴을 봐서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그건 곤란합니다. 연기력이 검증되지 않은 배우는 모두 오디션을 거쳐야 합니다. 그렇게 안 하고 배역을 줬을 때 연기가 안 되면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습니다. 작품이나 배우나 둘 다요.”
“·········.”
이기영 대표는 부드럽지만 완고한 내 어조에 약간 실망한 얼굴이었다.
사실 그 모습을 보고 실망한 건 오히려 나였다. 회사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을 때는 세간의 평가와 달리 괜찮은 사람인가 했는데 알고 보니 전 대표가 해준 이야기가 맞는 것 같았다.
오자마자 비싼 레스토랑에서 환영회를 주재하고 (어차피 비용은 회사가 내고 본인이 생색낸다) 다음날 나를 불러 애인을 내 차기작에 박을 생각이나 하고···.
이러니 로열패밀리께서 XM까지 밀려난 게 아닌가 싶다. XM 소속의 연예인들과 직원들에게 시커먼 먹구름이 다가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오늘 저녁에 시간 좀 됩니까?”
“솔직히 지금 급한 일이 있어서 나가봐야 합니다.”
요즘엔 내 간이 엄청나게 커진 것 같다. 로열패밀리에게도 말이 너무 편하게 술술 나왔다.
로열패밀리건 뭐건 하나도 무섭지가 않달까? 어차피 나는 누구에게 잘 보일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제가 소속 연예인들을 좀 불렀어요. 취임 인사나 할 겸···.”
응? 자기 취임했다고 소속된 연예인들을 부른다고?
“아···. 오해는 하지 마세요. 시간 되는 사람만 오라고 했으니까요.”
그가 내 표정을 읽었는지 급하게 해명을 하고 있었다. 나는 한마디를 해주려다가 강제성은 아니라는 이야기에 그냥 입을 다물었다. 잘나가서 귀찮은 사람들은 안 갈 거고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은 가는 거 아니겠나. 나같이 곧 그만둘 사람이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일단 알겠습니다. 저는 일이 있어서 그만···.”
나는 살짝 기분이 상해 보이는 이 대표를 뒤로하고 사무실을 빠져나와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에 타고 운전해서 바로 경부고속도로에 들어섰다. 시간을 보니 벌써 4시 군산으로 가면 6시 반쯤 될 것 같았다.
나는 차에 있는 핸즈프리 기능으로 나우민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 이 실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친히 전화를 주시고요.]
“형! 배우 2팀에 한소리라고 있잖아?”
[있지? 왜 데려다 쓰게?]
“아니···. 그게 아니라 혹시 걔가 형한테 회사에 대한 거 이것저것 물어보지 않았어?”
[응? 한소리가? 왜 무슨 일 있어?]
들어보니 한소리가 이것저것 디테일하게 물어보길래 계약도 하고 해서 교육상 자세히 대답을 해 줬다는 나우민 팀장이었다. 최근 있었던 일까지 시시콜콜 다 물어보길래 원래 그런 성격인가 보다 했다고 한다.
‘음···. 뭔가 있구만. 내부자에게서 나온 정보를 정리한 티가 난다. 한소리가 내 드라마에 출연하기 위해 뭔가를 꾸미고 있는 건가? 재벌 3세 연줄까지 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이해가 안 가네.’
나는 나우민 팀장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통화를 종료했다. 가는 길에 휴게소에 들러 정신이 좀 들게 따뜻한 커피를 한잔 주문했다. 어젯밤 로맨스 무협을 쓰느라 살짝 졸음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
“휴···. 살 것 같군.”
잠시 휴게소에 내려서 커피를 마시니 졸음이 달아나는 것 같았다. 다시 차에 타고 군산으로 향했다. 운전하며 나유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준형 씨?]
“쉬는 시간이에요?”
[지금 막 촬영 끝났어요. 이제 정리하고 가야죠.]
그녀는 CF를 찍는 중이었다. 요즘은 드라마를 잠시 쉬며 광고 촬영과 인터뷰 정도만 하고 있었다.
“어제 보내드린 원고 봤어요?”
[천외딸이요?]
음. 살짝 어감이 이상하다. 천외딸이라니···. '천마의 외동딸이 되었습니다'인데···.
“굳이 그걸 줄일 필요가 있어요? 어감이 좀···.”
[천외딸이 왜요? 아! 어제 보내주신 거 봤는데요. 무협을 잘 모르는 저도 재미있게 쭉 읽히네요. 그런데 어제 주신 부분이 천마 딸이 잡혀 온 남궁세가의 꽃미남에게 빠지는 내용이잖아요? 그 남주인공은 부드럽고 미소년 같은 그런 이미지고···.]
“그렇죠.”
[본문 내용에 살짝 표현되어 있긴 한데···. 그런 모습에 매력을 느끼고 빠져드는 개연성을 더 부여해야 할 것 같아요. 여자의 심리랄까? 그런 걸 더 이용하는 거죠.]
“어떻게요?”
[주인공이 사는 십만대산 마교 근거지에 남자들이 더 마초적으로 표현될 필요가 있어요. 그리고 주인공에게 죽고 못 사는 존재들로 좀 표현을 해야 할 거 같고요. 왜 있잖아요. 막 열정을 다 바치는 상남자 같은 스타일이요.]
“여자들이 좀 부담스러워서 하는 캐릭터들로 만들자는 말이군요.”
[맞아요. 십만대산의 상남자들은 주인공의 말이라면 껌뻑 죽는 사람들로 묘사를 하고요. 그 대신 남궁세가의 꽃미남 후기지수는 잡혀 온 주제에 주인공에게 튕기고 그러는 철부지로 묘사하는 거죠. 그래서 주인공이 더 신선하게 느끼는 거예요. 모두 자신을 칭찬만 했는데 이 자는 유독 자신에게 칭찬 한마디를 안 하고 냉랭하게 구는 거죠.]
“미녀에게 외모 칭찬은 금물이다. 그녀를 무시하라. 뭐 그런 건가요? 어쨌건 그런 갭을 이용하라는 거죠?”
[네. 그런 게 주목받으면 더 좋을 것 같아요. 아! 전체적으로 내용은 너무 재미있어요. 마교 흑풍단의 순정파 상남자들도 너무 웃기고요. 뭐라고 할까···. 고등학교의 열혈 야구부 같아요.]
“하하. 그래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수정해서 보내고 출판사 담당에게 보내야겠네요.”
[아! 그리고 신임 대표가 회식 초대한 거 알아요?]
“아···. 그거요? 으흠···. 가시게요?”
[아뇨. 아직 확답은 안 했지만, 굳이 거기에 갈 필요가 있나 싶은데···. 왜요? 무슨 일 있어요? 뭔가 있는 눈치 같은데요?]
역시 나유정은 귀신이다. 뉘앙스만 듣고도 뭔가 있다는 걸 간파한 모양이다.
“그게···.”
나는 어제와 오늘 있었던 일들을 말해줬다. 레스토랑에서의 실장급 이상 회식, 업무보고 때 시끄러웠던 것, 나한테만 잘해준 것, 그리고 신인 여배우인 한소리를 드라마에 꽂아달라고 한 것까지 솔직하게 털어놨다. 어차피 우리는 한배를 타기로 한 몸이었으니까.
[그런 일이 있었군요. 한소리라···. 요즘 SNS를 보면 인기가 있긴 있어요. 제2의 나유정이라나 뭐라나. 훗···. 그놈의 제2의 나유정은 왜 그리 많은지···.]
“후후···. 그렇게 유명하게 만들어 준 사람이 누굽니까?”
[저요. 제가 잘나서 그런 거죠. 예쁘고 연기도 잘하니까···.]
“후후···. 헛소리! 솔직히 말해 보세요. 본인이 그 역할을 하고 싶어서 오디션 못하게 방해한 게 누구였더라?”
[여보세요. 오디션을 했어도 결과는 똑같아요. 그 배역을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은 저밖에 없다구요. 할리우드 배우를 데려와 봐라 할 수 있나···.]
“할리우드? 어휴 됐어요.”
[준형 씨. 솔직해지면 안 돼요? 그거 저를 모델로 쓴 거잖아요.]
“·········.”
[이거 봐. 아무 말 못 하시네. 내 말이 맞죠? 맞잖아요.]
“쩝···. 됐고요. 그래서 거기 안 가시는 거죠?“
[원래는 안 가려고 했는데 준형 씨 이야기를 들어보니 왠지 재미있을 것 같아서 한번 가볼까 싶은데요?]
“굳이 그런 사람들하고 어울릴 필요 없어요. 귀찮기만 할 건데···.”
[준형 씨. 제가 준형 씨 앞이라 그러는 거지 사람들이 저를 얼마나 어려워하는지 모르는구나?]
그건 예전 나유정 때나 그런 건데···. 지금은 대중 친화적인 이미지로 바뀌었고···.
[아니에요. 제가 거기 침투해서 정보를 좀 캐올게요. 이중간첩 같은 거예요. 신임 대표가 사람 모아놓고 하는 이야기도 좀 들어보고···. 아! 나중에 들려드리게 녹음도 할까요? 히히···.]
“아이! 그러실 필요 없다니까요?”
[괜찮아요. 재미있을 거 같아요.]
“그럼 조용히 갔다 오던가요.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대성이한테 전화하시고···.”
하긴···. 정말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나유정에게 수작을 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 한소리도 거기 가겠구나.’
[지금 어디 가고 있어요?]
“저 지금 지방 출장 가요. 갔다 와서 알려드릴게요.”
[운전 조심해요.]
* * *
나는 드디어 장예원 고모가 보내준 주소에 도착했다. 그곳은 공단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낡은 아파트들이 즐비한 동네였다.
“502동 603호··· 여긴가?”
아파트가 한 30년은 된 느낌이다. 중앙난방식인지 커다란 굴뚝같은 게 보였다. 부잣집 딸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주변을 살펴보니 아파트 뒤로 탁한 색의 바다가 펼쳐졌다.
지금쯤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이기 때문에 일단 아파트 주차장에서 잠시 기다렸다. 한 15분쯤 기다렸을까? 더는 기다리지 못하고 차에서 내려 근처 슈퍼에 들렀다.
“저기 주스 세트 주세요.”
“네 만오천 원입니다.”
계산을 하고 있는데 가게 아저씨가 말을 걸어왔다.
“여기 사시는 분 아니시죠?”
“아···. 네. 그렇습니다.”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한데···. 밖에 외제차가 있어서 누군가 했네. 이 동네에는 무슨 일로 오셨어요?”
나는 굳이 자세한 얘기까지는 할 생각이 없어서 밖을 쳐다보며 대충 둘러댔다.
“여긴 좀 동네가 한산하네요?”
“한산하긴요. 거의 죽어가죠. 건물들도 죄다 오래되고, 칙칙하죠? 요즘 공단에 있는 대기업들이 다 철수하고 경기도 최악입니다.”
아! 이 지역 조선소와 자동차 조립 공장이 문을 닫으면서 고용위기지역이 되었다는 기사를 본 적 있는 것 같았다. 주변 상가들이 많이 폐업했는지 분위기가 착 가라앉아 있는 느낌이었다.
“수고하세요.”
나는 주스 선물세트를 들고 장예원의 집으로 찾아갔다. 복도식 현관문 옆에 있는 초인종을 눌렀다. 몇 번을 눌렀는데도 반응이 없었다.
‘음···. 집에 아무도 없는 건가? 큰일이네. 내가 너무 무작정 왔나?’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는데 집 안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문 열려 있어요. ···.문 열려 있다고요···.]
현관문 손잡이를 돌려보니 말대로 문이 잠겨 있지 않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저기요? 계신가요?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세요. 보험사에서 오셨나요?]
나는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갔다.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고 낡은 가구들과 휑한 집안이 보였다.
“여기 안방입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나는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안방은 반쯤 열린 상태였는데 조심스레 문을 밀고 안방을 들여다보았다.
안방에는 40대쯤으로 보이는 사내가 배에 복대 같은 걸 차고 침대에 누워있었다.
“안녕하세요. XM에서 나온 이준형이라고 합니다.”
“예? XM요? 보험사가 아니고요?”
그는 깜짝 놀라더니 누운 상태로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을 쳐다봤다.
“네. 예원이 전 소속사 직원입니다.”
“아···. 거기 직원이시라고요? 예원이 학교에서 아직 안 왔는데 무슨 일이신지···.”
“네. 그게 말이죠···”
내가 자초지종을 설명하려고 하는 그 순간 현관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빠! 나왔어. 오늘 내가 아빠가 좋아하는 돈가스 덮밥 해주려고 장 봐왔어. 잠시만 기다려봐. 저녁 해줄게.”
아마도 장예원인 것 같았다. 그녀가 안방으로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왜 대답이···.”
그녀가 안방 문을 통해 모습을 드러냈고 나와 예원이 아버지의 시선이 그녀에게 꽂혔다.
“누···. 누구세요? 어?”
“예원아 너 이 분 아시니? 너 뵈러 오신 거 같은데?”
“안녕하세요. 예원 씨. 이준형 실장입니다. 저 혹시 아시나요?”
그녀는 크게 놀랐는지 손을 들어 입을 가리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시, 실장님이 어,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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