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조심 좀 합시다 (3)>
“그래. 오랜만이네?”
나는 그가 별로 반갑지 않았지만 억지로 인사를 나눴다. 그래도 뭐 어쩌겠는가? 동창인걸···. 일수 가방 어쩌고 했지만, 실제로 잘 모르는 여자들이 보면 고급스러운 명품 옷을 멋지게 빼입은 SNS 인플루언서 같은 모양새였다.
외모로 문창과 F3에 끼워줬던 녀석이었다. (물론 그중 가장 인기가 많았던 건 나였다) 하지만 약간 찢어진 눈이라 호불호가 갈리는 외모였다.
송진섭은 과뿐만 아니라 동아리까지 나와 같았다. 함께 연극을 했는데 나랑 비슷하게 재능은 없는 편이었다. 그러다가 동아리 퀸카인 전 여자친구 때문에 약간 트러블이 있었다. 나와 비밀로 사귀고 있었는데 내 여친이 싫다고 해도 계속 들이댔다.
군대도 다녀오고 시간이 지나서 술자리를 통해 화해하긴 했지만, 왠지 모르게 녀석과 나는 잘 맞지 않는 편이었다. 왜 있지 않은가 괜스레 별로인 사람 말이다.
‘다 지난 일이야.’
복잡한 생각을 지우고 진섭이의 옆을 살짝 보니 비용을 나에게 뒤집어씌우려던 효형이가 뭔가 애매해졌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늘은 진섭이 너 때문에 맘 편히 먹을 수 있겠다.”
“·········.”
이건 내 진심이었다. 이 자리에서 공짜로 편하게 먹고 친한 애들만 따로 사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자자···. 이제 고기 좀 시키고 술 한잔하자.”
동기의 지도자 격인 오수정이 동창회를 주도하면서 화제를 적절히 전환하고 있었다.
나는 술을 한잔 받고 주위를 죽 둘러보았다.
자리에는 수정이처럼 방송국 작가가 된 친구도 있는가 하면, 효형이처럼 출판사에 근무하는 회사원도 있었다. 그런데 대부분은 아직 등단을 준비하고 있는 애들이 많았다.
아무래도 J대 문창과 출신이기 때문에 신춘문예나 문예지를 통해 등단하기 위해서 노력을 하는 것이다.
그러다 맨 구석에 앉아 있던 사람의 얼굴이 눈에 확 들어왔다.
‘어? 김시후···.’
담담한 눈빛으로 술을 받고 한 모금 마시더니 테이블에 내려놓는다. 가느다란 하얀 손가락에 병약미가 느껴지는 고고한 학과 같은 모습이다. 옷까지 하얀 셔츠를 걸치고 있어서 그런지 마치 선비와 같은 모습이었다.
그는 문창과 F3 중의 마지막 한 명이었다.
시후는 문창과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내가 순문학을 포기하게 된 마지막 계기 같은 게 된 존재였다. 그의 글을 읽다 보면 진정한 천재라는 게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처음에는 라이벌 의식이 생기다가도 이내 그처럼 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반쯤은
포기상태였다.
그는 과를 졸업하자마자 모 신문사에서 주최하는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하고 주목하는 신인이 되어 주위의 부러움을 샀다. 시후는 그 정도로 동창들이 인정하는 규격 외의 존재였다. 마치 통곡의 벽 같달까?
“야! 생각해보니 우리 문창과 F3 오랜만에 다 모였네?”
“오! 그러네? 이준형, 김시후, 송진섭. 세 명 다 모인 건 오랜만인 것 같다.”
오수정이 F3 이야기를 꺼내자 다들 옛날 생각이 나는지 얼굴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네. 그때는 왜 그렇게 유치했는지···. F3가 뭐냐 F3가? 그거 드라마에서 따왔던가? 일본만화가 원작 아니야?“
“준형이가 너무 오랜만에 와서 그렇지.”
“F3는 개뿔···.”
송진섭이 고기 한 점을 입에 넣더니 툴툴거리고 있었다.
“야! 김시후. 넌 요즘 뭐 하고 지내냐? 등단하고 책 한 권 내더니 왜 소식이 없냐?”
오늘 진섭이는 타겟을 시후로 정했는지 말투부터 까칠하다.
‘하긴 미치지 않고서야 나를 어떻게 까겠어?’
효형이에게 이따금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는 내가 3년간 동창회에 얼굴을 비추지 않자 술자리에서 내 이야기를 가끔 했다고 한다. 웹소설로 안되더니 이제는 매니저까지 한다면서 술안주 삼아 농담을 했다고···.
하여간 웃긴 놈이다. 글재주도 없으면서 문창과에는 어떻게 들어왔는지 미스터리며 어디 이름 모를 지방지 공모전으로 등단을 했다는데 그 글을 찾을 수가 없다. 솔직히 찾기도 귀찮다.
공모전으로 등단한 작가라며 SNS에 멋진 사진을 올리는 게 직업인 녀석이다. 나는 SNS를 하지 않기 때문에 자세히는 몰랐지만, 안테나인 효형이가 이것저것 자세히 열려주는 편이었다.
“뭐하냐고···.”
진섭이의 질문에 모두의 눈이 시후에게 집중되자 그는 고개를 들고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차기작 준비해.”
“첫 작품 낸 지 일 년 넘지 않았어?”
“넘었지. 아직 준비 중이야.”
“상금 받은 거랑 첫 작품 팔린 거 인세 다 떨어졌겠다. 첫 작품이 한 5천 부 정도 나갔니?
송진섭은 김시후를 쳐다보며 비릿하게 웃고 있었다.
“신경 안 써도 된다. 잘 먹고 산다.”
“장편소설 출간한 것은 천만 원도 안 들어왔을 테고···. 아! 당선 상금이 3천만 원이었지? 뭐 그 정도면 그래도 괜찮네. 등단 못 한 애들도 많은데···.”
‘와! 이 자식이 뭘 잘못 처먹은 건가? 신호도 없이 갑자기 광역 딜을 넣네?’
그를 보는 동기들의 눈빛이 좋지 않았다. 시후같이 젊은 나이에 신춘문예로 등단하는 작가들은 천재라고 봐야 한다. 솔직히 시후 작품 둘 다 읽어봤다. 여전히 질투 날만큼 잘 썼다. 하지만 다른 동기들은 그렇지 않았다. 다들 직업을 갖고 등단을 준비하고 있는
친구들이 많았다.
역시 진섭이 같은 관종은 타고 나는 법!
그는 서울에 빌딩을 가지고 있는 아버지를 둔 녀석이라 그런지 예전부터 남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그냥 뇌를 거치지 않고 직설적으로 내뱉는 스타일이었다. 그야말로 글쟁이 같지 않은 녀석이었다.
“아니 솔직히 말이야. 요즘 신춘문예 노잼 작품들을 누가 읽기나 하냐? 등단은 그냥 출판 자격증이지 뭐. 아! 맞다. 요즘은 출판사 문예지 공모전 상금이 더 많잖아. 1억인가? 거기는 당선되면 출판사에서 밀어라도 주지. 신춘문예는 뭐냐? 거기로 등단한 작가
들이 살아남는 수가 50%도 안 된다며?”
“그야···. 우리나라 사람들이 책을 안 보니까. 솔직히 소설가, 시인들이 다 투잡이잖아. 돈 버는 극소수를 빼고···.”
살짝 짜증 났지만, 우리는 송진섭이 투여한 떡밥을 덥석 물고 말았다. 모두 작가들이 처한 현실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자리로 흘러갔다. 아닌 게 아니라 요즘 출판업계는 실로 처참하다. 몇 명의 최상위 유명 작가나 돈을 좀 벌까?
내 케이스가 오히려 특이한 거다.
“진섭이 너도 어디 신문 공모전으로 등단하지 않았냐?”
“어? 어···. 맞아. 그, 그런데 별로 안 유명해서···.
그는 뭔가 찔리는 듯 말을 슬쩍 돌리고 있었다.
“그나저나 준형아 난 네가 그렇게 잘될지 몰랐다. 드라마 시청률 40%? 책도 지금 50만 부 정도 팔리지 않았어?”
“글쎄? 운이 좋았지 뭐···.”
나는 그냥 겸손하게 대답했다. 등단하려고 준비하는 작가 지망생들이 많은데 내가 여기서 자랑질을 해봐야 이미지만 마이너스였다. 안 그래도 뭐 하나 깔 거 없나 눈에 불을 켜고 있는데, 등단이라는 정식 코스도 밟지 않은 나는 잘못하면 거하게 씹힐 가능성이
켰다. 문창과 출신인 내가 그 질투심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솔직히 운이 좋은 것도 사실이지 않은가? 물론 운이 좋다고 다들 기회를 잡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실력이 있어야 들어온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이다.
순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장르문학이나 웹소설은 아예 관심 밖이다. 더러는 욕하는 사람도 있긴 하다. 하지만 대다수는 무관심하다.
심지어 이렇게 인터넷으로 100원짜리 글을 올려서 판매하는 플랫폼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도 존재했다. 언젠가 교수님들 앞에서 장르 소설 이야기를 했다가 돌려 까기를 당하고 동기들에게 은근히 따돌림을 받는 사람까지 봤다.
나도 은근한 따돌림을 당할까 봐 웹소설을 쓰면서도 절대로 그 사실을 발설하지 않았다. 그냥 환상 문학을 쓰고 있다고 둘러댔다. 내가 환상 문학 공모전 출신이기도 하고 말이다.
다들 말은 안 하지만 나같이 장르 쪽을 하는 사람도 있긴 있을 건데···. 내가 전업 작가를 한다고 하니 졸업할 때나 돼서 사람들이 알게 된 거다.
나처럼 웹소설을 쓰면서 드라마로 갔다가 책으로 대박을 내는 경우는 아예 없는 케이스였다. 그것도 매니저 생활을 하다가 말이다.
“그래. 넌 운이 좋았다. 나만의 세계? 난 어떻게 그게 그렇게 인기를 얻었는지는 모르겠더라고···.”
“크흠···. 너도 봤냐?”
살짝 욕이 올라오는데 참았다. 왜 동기들이 그냥 참고 있겠는가? 관종에겐 먹이를 주면 안 된다.
“어···. 2화까지 봤나? 그냥 그냥 평범하던데···. 왜들 난리인지 모르겠어.”
“그러게. 나도 모르겠다. (네 뇌 구조 인마!)”
“야! 송진섭. 어떻게 넌 다 보지도 않고 그렇게 말하냐? 왜들 난리인지 모르겠지? SNS로 여자만 꼬시려고 하니까 드라마도 볼 시간이 없는 거지.”
오수정이 나 대신 반격했다. 뭐 안 그래도 되는데···. 타격이 1도 없거든.
“꼬시긴? 그냥 나 좋다고 하는 데 별수 있냐? 그리고 솔직히 드라마 1, 2화만 보면 각이 나오잖아? 아! 맞다. 슬기로운 덕질생활인가? 그건 좀 재밌더만.”
“어휴···. 저 철없는 놈.”
수정이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는 그녀의 귀에 대고 귓속말을 건넸다.
‘수정아. 내버려 둬라. 지금까지 저 컨셉으로 살아왔는데 바뀌겠니?’
‘저 자식 그냥 동문회 모임에서 축출해버릴까?’
‘왜 그래. 최고의 물주를 버릴 거야? 하는 거 보면 좀 귀엽잖아. 다들 그런 맛에 상대해주기도 하고···.’’
‘그래도 그렇지. 어우. 짜증 나.’
“진섭이 넌 요즘에 뭐하냐? 건물 청소··· 아니 관리하는 거 말고 따로 하는 거 있어?”
“나? 나도 준형이 너 성공하는 거 보니까 그거나 해볼까 싶더라. 그래서 한번 알아보려고···.”
“오호··· 너도?”
“응. 들어보니까 상위 작가들이 글로만 먹고 사는 게 아니고 드라마나 영화 판권도 짭짤하다네? 이 기회에 작품을 쓰는 게 아니라 아예 제작까지 알아볼까 생각 중이야.”
허허···. 그게 쉽다면 다 데뷔했지. 인마. 이 자식은 남한테는 까다로운데 자기한테는 관대하단 말이야?
“조심해라. 괜히 사기당해서 돈 날린다.“
“조심은? 내가 인맥이 좀 있잖아.”
한마디 해줄까 하다가 참았다. 진섭이는 관종에 마이웨이를 달리는 녀석이라 괜히 길게 응대해줘 봐야 더 신날 뿐이다.
“인맥은 개뿔? 관계자랑 어디 홍대 클럽에서 만났냐?“
오수정이 도저히 못 참겠는지 미간을 찌푸린 상태로 진섭으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 그, 그걸 네가 어떻게?”
“어쩐지···. 괜히 허파에 바람들어서 아버지가 남겨주신 건물 날려 먹지 마라. 내가 방송국에서 별의별 소리를 다 듣는다. 정식으로 작품이 있는 곳인지 잘 봐야 해.”
“이, 있을걸?”
나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그를 응시했다.
“진섭아. 너 시나리오 쓴 거 있으면 가져와 봐.”
“응? 왜? 네가 소개해주게?”
“어. 괜찮다 싶으면 연결해줄게. 내가 넷플릭 코리아 총괄 디렉터님을 좀 알거든. 그 양반이 괜찮은 제작사 리스트도 다 가지고 있으니 믿을 만할 거야.”
“네, 넷플릭? 방송국도 아니고?”
“송진섭. 넌 넷플릭도 안보니? 준형이 작품 두 개 다 넷플릭에 올라갔잖아.”
“그, 그래? 요즘엔 통 바빠서 못 봤거든.”
“흐음···. 글 쓰느라 그랬구나? 보내줘 봐. 내가 한번 봐줄게. 일단 수준 미달이면 안 되거든? 그럼 내가 애써 연결해줄 필요가 없지. 있으면 오늘 보내 줄래? 내가 도와줄게.”
“아, 아니야. 아직 다 완성 안 됐어. 나, 나중에···.”
흐흐···. 나중은 무슨 나중? 써 놓은 게 있을 리가 없지. 지방 신문 어디 공모전도 그냥 대충 표절작 넣어서 통과시켰겠지 뭐.
우리 과에 어떻게 들어왔는지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진섭이 아니겠는가? 대학 시절 말하는 게 좀 재수 없어도 웃기기도 하고 밥도 잘 사주는지라 그냥 무시했는데 등단 작가라고 허풍을 치는 걸 보니 기가 찬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조용하던 놈들이 들고일어나 자기 작품 한번 봐달라고 난리다. 이 자식들···. 신춘문예나 문예지 공모전이나 열심히 준비하지. 하여간 다들 음흉하다니까? 이렇게들 꿍쳐놓은 것들이 많아요.
우리 동기들은 이런 거에 민감하다. 돈? 물론 있으면 편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존심으로 버티는 게 작가들이다. 특히 순문학 하는 사람들의 이상을 무시하면 절대 안 된다.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글을 쓰고 싶어서 작가를 하는 사람 많이 봤다.
친구들이 돈 많은 진섭이를 그냥 웃으면서 재밌네? 하며 봐주는 것도 자신보다 못하다는 심리가 기저에 깔려 있는 거다. 그러다 가끔 밥이라도 사주면 좋은 거고···.
하지만 글은 다르다. 글에 있어서만큼은 질투 같은 뱀심도 심하다. 어차피 신춘문예는 작가 가족들이나 업계관계자들이 보는 그들만의 레이스가 되었고, 문예지 공모전도 상금 빼곤 큰돈을 벌기 힘들다. 그리고 출판 시 인세라고 해봐야 고작 10%니 오히려 2차
저작권이 수익이 큰 경우도 있었다.
실제로 그걸로 먹고사는 선배들도 있고 말이다. 영상은 글과 같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장르문학처럼 철저히 무관심의 영역도 아니었다.
누누이 말했다시피 나는 종합콘텐츠 제작회사 창업을 목표로 하고 있다. 회사가 작으면 모르겠지만 커지기 시작하면 나 혼자로는 감당이 안 된다. 작가들도 여러 명 있어야 하고 웹툰 작가와 배우들을 관리하는 매니지먼트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제작사까지
···. 아 참 아이돌을 빼먹었군. 하하···.
나는 슬쩍 눈을 돌려 김시후를 바라보았다.
그는 내가 한 말에 별로 관심이 없나 보다. 역시 꽉 막힌 순수한 글쟁이 같은 녀석이다. 글만 쓰지 말고 세상 돌아가는 것도 보라고 이 친구야. 그리고 내가 너한테 관심 있는 거 알지? 솔직히 시후는 아우라 스카우터로 볼 필요도 없는 녀석이다.
한국과 일본에만 유일하게 있다는 신춘문예라는 공모전을 통해 걸러진 최상위 글쟁이 아니던가?
‘음?’
시후가 술 한잔을 단번에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밖에서 담배라도 피려는 걸까? 나도 급히 일어서서 그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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