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는 스타 작가님-94화 (94/263)

< 말조심 좀 합시다 (2)>

나는 할 말도 있고 해서 오랜만에 나유정의 스케줄을 뛰고 그게 끝나면 동창회에 참석하기로 했다.

요즘 아주 한가해져서 스스로 자청한 일이었다.

프로듀싱&콘텐츠 총괄본부라는 게 사실 가수 쪽, 아이돌을 만들기 위한 조직이라 걸그룹 데뷔가 무산된 후 테리우스 일밖에 없었고 콘텐츠 쪽이야 그냥 이름만 걸어놓은 거라 유명무실할 뿐이었다.

그나마 내가 착임해서 뭐라도 해주길 바라고 있는 눈치였지만 내가 오로지 내 일만 하고 있으니 경영층에서도 기대를 접은 상태인 것 같았다.

솔직히 내가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맨땅에 헤딩하기엔 나 스스로 독립할 마음도 컸으니까 그게 맞물려 돌아가면서 거의 태업 상태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내가 나유정과 테리우스를 굴려 엄청난 수익을 회사에 안겨주고 있으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

"요즘 할 일 없나 보죠? 어쩐 일로 매니저를 친히 하시겠다고···."

"우리 막내 매니저도 좀 쉬어야죠."

"제가 별로 바쁘지도 않은데 쉴 게 뭐가 있어요?"

하긴 요즘 나유정은 열심히 CF만 찍으면서 차기작을 검토하고 있었다. 최근 지붕이 없는 최고의 대세 스타로 등극해서 그런지 엄청난 양의 작품이 밀려들고 있었다. 언제 한번 시간 내서 작품을 골라주던지 해야 할 것 같았다.

"저기요. 안 바빠도 유정 씨 자체가 힘들어요. 다 나 같은 줄 아시나···."

"저처럼 손 안가는 연예인이 어디 있다고? 내가 뭐 사고를 쳐요. 아니면 개인 스케줄이 많아 매니저를 괴롭혀요?"

"원래 우린 개인 스케줄은 상관 안 해도 됩니다."

"뭐 어쨌든!"

나는 열을 내는 나유정을 바라보며 살짝 웃고 있었다. 그녀는 의류 광고를 찍을 예정이라 머리를 만지고 풀메이크업을 받은 상태로 블링블링하기 그지없었다.

역시 나유정은 꾸미면 최강이다. 천당과 지옥 중 천당 모드였다.

"왜 자꾸 힐끔힐끔 쳐다봐요? 뭐 문제 있어요?"

"왜 항상 똑같은 티만 입고 다녀요?"

"그, 그게 무슨···. 똑같은 티라뇨?"

"큐티···."

"아이 씨···."

나유정은 CF를 찍기 위해 스튜디오로 가고 있었기 때문에 옷을 괜찮게 차려입고 있었지만, 본인이 항상 같은 옷을 즐겨 입는 편이라 순간적으로 착각을 한 모양이었다.

언젠가 영상에서 본 적 있는 드립을 한번 쳐봤더니 역효과만 났다. 그녀가 진짜로 목이 늘어난 똑같은 티셔츠만 입는다는 걸 간과한 것이다.

‘원래는 이거 들으면 다들 빵 터지는데···.’

그녀는 붉어진 얼굴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집에서 그냥 그대로 나온 줄 알고 깜짝 놀랐잖아요!"

"큐티라고 했습니다. 큐티···. 이거 좋은 말인 거 아시죠?"

"예쁘면 예쁘다고 하던가···. 왜 꼭 그런 농담을 해요? 아재예요?"

"아재 아닙니다. 아직 이십 대에요."

"응. 두 달만 있으면 삼십 대···."

"이제 제 글에 완숙미가 느껴지겠군요."

"쳇···. 말이나 못 하면?"

잠시 차 안에 이상한 분위기가 형성됐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스피커 볼륨을 살짝 높였다. 차 안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남자 아이돌의 최신곡이 흐르고 있었다.

"유정 씨?"

"왜요!"

"제가 글을 하나 쓰려는데···. 혹시 좀 봐줄 수 있어요?"

"응?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나유정은 내가 글을 쓴다는 소리에 깜짝 놀라며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아니···. 별건 아니고···. 요즘 심심해서 시간이나 보낼 겸 글을 하나 시작했어요. 아직 어디에 올린 곳은 없고 한 10편 정도 썼나?"

"으음···. 글도 잘 쓰시는 분이 왜 저 같은 초보 독자의 도움이 필요한 거죠?"

그녀는 잘 이해가 안 간다면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지만 두 눈은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그게 로맨스 쪽이라 그래요. 제가 남자다 보니 여자들의 심리를 자세히 모르잖아요. 그래서 유정 씨가 봐주면 좋을 거 같아서요."

"지금까지 여성 캐릭터 잘 쓰지 않았어요?

"뭐···. 못 쓰는 건 아닌데요. 이번에는 좀 달라요. 주인공이 여자거든요."

"아니···. 이해가 잘 안 가네요. 나만의 세계도 여자가 주인공이었는데···."

"그건 그냥 드라마니까 상관없고 지금 제가 말하는 건 장르인 로맨스 소설이요."

"아아.. 웹소설이구나? 그럼 이해가 가네요. 카오스나 나이스의 로맨스 소설 같은 거 말이죠?"

"맞아요. 심리 묘사가 특히 중요한 장르죠. 혹시 보셨나요?"

"많이는 못 보고 몇 개 본 적 있어요. XX 황후같이 유명한 거요."

"그래요? 다행이네요. 그럼 글을 봐주기에 충분합니다."

"제목이 뭔데요?"

"그게 흠흠···. '천마의 외동딸이 되었습니다.'라고···.“

그녀의 얼굴이 잠시 살짝 일그러졌다.

"천마요? 그거 혹시 무협지에 나오는 캐릭터 아닌가요?"

"오! 천마도 아세요? 대단하시네."

"헤헤···. 플랫폼에 들어가 보면 제목으로 엄청 많이 뜨길래 뭔가 해서 좀 본 적이 있어요. 나쁜 놈인데 절대자 같은 사람이던데···."

"맞아요. 이야···. 이야기하기 편하겠는데요?"

"줄거리가 어떻게 되는데요?"

"간단히 설명하자면 외모가 별로였던 흙수저 걸그룹 출신의 메인 보컬이 무협 작가였던 돌아가신 아버지의 소설 속으로 빙의하는 거예요. 그 빙의하는 대상이 바로 천마의 딸이죠."

"흠···. 분명히 빙의한 대상이 엄청 예쁘겠죠?"

"당연한 걸 왜 물어요. 천하제일미(天下第一美)에요. 그냥 한 번만 봐도 뿅···. 가버리는 그런 압도적인 외모죠."

"어휴···. 유명 작가가 뿅~ 이 뭐에요. 뿅이···. 창피하네요."

"아무튼···. 주인공은 태어났을 때부터 천마신교의 교주인 천마가 벌모세수(伐毛洗髓)를 하고 각종 희귀한 영약을 다 때려 박아서 키워낸 역대 최강의 소녀죠.

그런데 천마인 아버지가 자신의 딸은 마인(魔人)이 되는 걸 바라지 않다 보니 마교의 신공절학들을 가르치지 않고 건강을 지키기 위해 정파인 현문(玄門)의 내공만 알려줍니다.

매일 천마신교의 상남자들만 상대하다가 정사 대전에서 잡혀 온 SSS급 후기지수인 남궁세가의 꽃미남과 눈이 맞은 거죠.

아버지인 천마가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안된다. 남궁세가를 풀 한 포기 남기지 않고 멸문시키겠다며 협박을 하자···. 둘이 사랑의 도주를 하는 그런···. 스토리랄까요? 사실 뒤에 더 복잡한 내용이 있지만 다 확정된 건 아닙니다."

"흠···. 그래도 무협 소설을 한 권 정도 읽어봐서 그런지 대충 무슨 소린지는 알겠어요. 그럼 로맨스 무협이네요?"

"로맨스 무협이라···. 네. 뭐 그렇게 보면 되겠습니다."

"제가 할 일은 그 여자 주인공의 생각이나 심리 상태가 자연스러운지 체크해드리면 되는 거죠?"

"역시 대세 배우다운 판단력입니다. 정확합니다."

"후후후···."

"뭡니까? 그 웃음은···."

"20%..."

나유정의 짧은 대답에 내 눈썹이 꿈틀거렸다.

'갈(喝)! 아니 주인공 심리를 한번 봐주는데 수익의 20%를 요구한다고?'

"5%"

내가 과감히 5%를 배팅했다.

"15%"

"10%"

"콜..."

결국 10%의 수익을 떼주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에이~ 그냥 한번 보는 건데 무슨 10%를 받아요. 농담이죠. 그냥 공짜로 해드릴게요.“

"정말이요?"

"공짜로 해드리는 대신 조건이 있어요."

"뭔데요? 별거 아니면 들어드리고···."

"제 이름도 올려주세요. 공동집필로요."

"그건 곤란합니다. 어차피 저도 제 이름 안 밝히고 필명으로 연재하는 건데요."

"아···. 그래요? 좋다 말았네요."

내가 단호하게 대답하자 그녀는 약간 실망한 눈치였다.

"작품은 언제 줄 건데요? 왠지 흥미가 가는데요?"

"오늘 스케줄 끝나면 볼 수 있게 메일로 보내드릴게요. 초반부만 썼거든요."

로맨스 쪽은 남자 작가가 썼다고 하면 색안경을 끼고 보는 사람들이 일부 있어서 크게 곤욕을 치르곤 했는데 나유정이 봐준다면 해피하게 풀어갈 수 있었다. 사실 망나니 천마 딸의 모델이 나유정이기 때문이었다.

[천마의 외동딸이 되었습니다. 작가 XXX]

내가 웹소설 작가라고 해놓고 작품을 공개하고 있지 않으니 여기저기서 내 필명을 물어보는 편이다.

데일리노블의 괴작들은 습작으로 돌려놓았고 달동네의 흑역사인 연예계물은 다 내린 상태로 연쇄폭참마라는 필명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래도 장르가 로맨스 아니던가?

아무리 연재하는 플랫폼이 다르더라도 새로운 필명을 파는 게 좋을 듯싶었다.

‘흐음.. 그런데 필명을 뭘로 하지? 아무래도 중성적인게 좋겠지?’

연두폭참마(연두색 추리닝 + 연쇄폭참마)?

‘에이.. 이건 아니다. 뭘로 하지?’

그렇게 탄생한 필명이 바로 ‘쭌쩡’이었다. 이준형의 준, 나유정의 정을 귀엽게 합쳤달까?

"CF 촬영은 오후 5시쯤 끝나는 거죠? 차 몰고 집에 가실 수 있겠어요? 제가 저녁에 동창회가 있어서요."

"마침 저도 블랙소울 애들하고 약속 있거든요? 시청률 40% 넘겨서 공약 이행해야 해서 춤 맞춰보기로 했어요. 저녁도 먹고···."

"그럼 식사는 어디서?"

"강남이죠."

"으음···."

"왜요? 혹시 동창회 강남에서 해요?

"음···. 다 왔네요. 이제 힘내서 일합시다."

"저기요?"

*  *  *

나유정의 CF 촬영이 시작됐다. 꽤 고급 의류 회사 브랜드 광고라 모델료를 엄청나게 받았다. 그녀는 CF 촬영의 달인(?)답게 멋진 포즈로 촬영하기 시작했다.

'와···. 진짜 프로는 프로네. 저렇게 옷을 바꿔가며 찍는 데 지치지도 않나? 아! 혹시 여자는 남자랑 다르나? 옷을 많이 입어보면 즐거울지도···.'

나유정을 보면서도 머리는 신규 작품에 대한 스토리를 계속해서 생각하고 있었고 그렇게 촬영 현장을 지켜보며 오후를 보냈다.

"유정 씨. 저 이제 가볼게요. 운전 조심하시고···. 블랙소울하고 재밌는 시간 보내시고요."

"걱정하지 마세요. 술 안 마실 거에요."

그녀는 촬영으로 힘들 텐데도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뭐가 그리 신이 나는지 원···. 요즘 운동을 열심히 해서 그런지 에너지가 남아도는 모양이었다.

"굿! 좋습니다. 그럼 이만···."

나는 스튜디오 밖으로 나가 휴대전화로 모임 장소를 찾아보았다. 동창회 장소가 강남 스튜디오 근처였고 도보로 15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가까운 거리였다.

[화산회관(華山會館)]

강남에 있는 고깃집으로 소고기가 유명한 집이었다.

‘식당 주인이 무협지 마니아인가? 화산회관이라니? 흐흐···.’

도보로 15분이었는데 근처에서 살짝 헤매는 바람에 약 5분 정도 약속 시각에 늦게 되었다.

예약된 방으로 가보니 약 열 명의 동창들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다들 그리운 놈들이었다.

"준형아! 여기야. 이쪽으로 와.“

장군 스타일의 오수정이 손을 번쩍 들고 흔들더니 자기 옆 방석을 팡팡 내리쳤다.

"늦어서 미안···. 가게를 못 찾아서 근처에서 좀 헤맸어.“

"뭘···. 얼마 늦지도 않았는데···.“

"땡큐!"

나는 수정이 옆에 앉았고 그녀는 대인배답게 털털한 웃음으로 늦은 나를 눈감아 줬다.

"에이! 그건 아니지···. 오수정 장군! 너무 준형이만 편애하는 거 아닙니까? 준형아 너 인마 늦었으니 오늘 고깃값 다 내야 한다. 너 요즘 대박 났잖아."

오수정의 맞은편에 앉은 빈대 서효형이 느끼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바가지를 씌우려고 하고 있었다.

‘저저···. 빈대 쉑···. 그래 내가 쏘지 뭐. 안 그래도 낼 생각이었다.’

어차피 그리운 놈들이고 돈 많이 번 내가 한 번쯤은 이렇게 질러 보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 기분이다. 오늘은 내가 쏜다.!“

"이야!“

"올레!!"

"멋지다. 이준형!“

"오장군! 그러면 오늘 메뉴는 제일 비싼 소고기 콜?. 오랜만에 목에 낀 묵은 때 좀 벗겨내자“

"오늘 이준형의 통장 잔고를 바닥내자.“

그렇게 난리 부르스를 추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며 그 녀석이 등장했다.

몸을 명품 옷으로 도배하고 나타난 녀석의 이름은 송진섭이었다. 진섭이는 옆구리에 명품 일수 가방을 끼고 있었다.

"얘들아. 안녕? 내가 좀 늦었지? 차 좀 주차하느라···. 늦은 사람이 쏘는 거지? 오늘은 내가 낼게."

‘음···. 저 녀석도 온다고 했나?’

내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대학 시절 내 전 여자친구를 사이에 두고 경쟁했던 놈이었다. 물론 내가 이겼지만···.

그는 부모를 잘 만나서 호의호식하는 인간이었다.

"오! 이게 누구야? 준형이 오랜만이네? 매니저 한다고 소식 끊기고 3년만인가?“

그 녀석은 오자마자 내 맞은편에 앉으며 나에게 말을 건넸다.

덜그럭..

그는 손에 쥐고 있던 외제차 키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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