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화 재계약 안될까요? (2)>
“근데 저희 레테엔 어쩐 일로 방문하셨을까요? 아 맞다. 루팡님 우리랑 계약돼있으시죠? 그것 때문에 오신 건가요?”
“네. 겸사겸사 왔습니다.”
“일은 다 보신 거죠?”
“방금 마치고 가려고 했는데 막 사장님이 들어오셨어요.“
“하하···. 그렇군요. 혹시 차는 드셨어요?”
“아니요.”
천광수 사장은 옆의 최덕수 PD를 살짝 째려보더니 다시 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자자. 작가님. 제 사무실로 좀 들어오세요. 오랜만에 만났는데 회포나 좀 푸시고···.”
“음···. 조금 일정이 촉박하긴 한데···.”
“에이···. 금방인데요. 조금만 시간 내주세요.”
“그럴까요?”
나는 별다른 약속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바쁜 척을 하며 못 이기는 척 사장실로 들어가 소파에 앉았다. 최덕수 PD는 굳이 안 들어와도 되는데 난감하단 듯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사장을 따라 들어왔다.
“앉으시죠. 작가님.”
“감사합니다.”
그는 나를 소파에 앉히고 차를 타기 시작했다.
천광수 사장은 무협 작가 시절에도 넓은 인맥을 자랑하던 사람이었다. 나는 비록 톡방 모임에 가진 않았지만, 천광수는 작가로 활동을 하면서 레테를 운영하며 실력이 괜찮은 작가들과 계약하기 위해 상당히 큰 노력을 기울이던 사람이었다.
실제로 달동네에서 연재하면서 이 양반에게 도움을 많이 받은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그 충고 덕분에 신박했던 루팡이가 양산형이 됐다는 둥 그런 이야기를 종종 듣긴 했다. 그런데도 그의 충고는 금전적으로 도움이 됐으니 어쨌거나 은인 중의 한 명인 건 맞았
다.
“와우. 작가님 덩치가 장난 아니신데요? 키도 크시고···.”
“사장님은 더 대단하십니다. 아직도 헬스 열심히 하세요? 어휴! 몸이 그냥 울퉁불퉁!”
“뭐. 거의 중독 수준이죠.”
“톡방에 계실 때도 매일 그렇게 운동하러 다니시더니···. 회사도 잘 운영하시고 정말 대단하십니다.”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돈을 벌어놔야 건물도 사고··· 노후 걱정 안 하고 살 거 아닙니까?
“하하하···.”
“제가 너무 속물 같았나요?”
“아닙니다. 작가, 아니 사장님은 언제나 한결같이 그런 이야기를 하셨잖아요? 하하···.”
우리는 신나게 예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대화를 나눴다. 나는 글쓰기를 중단하고 기획사에 취직했던 이야기와 드라마 공모전에 참여해서 운 좋게 드라마화가 되고 이번 작품인 나만의 세계까지 찍게 된 이야기를 간략히 말해줬다.
“어휴···. 제가 귀한 분을 모시고 시간을 너무 많이 뺏은 거 아닌가 싶네요. 혹시 무슨 일을 보고 가시는 중이셨어요?”
이제 천광수 사장이 슬슬 본론을 꺼내는 중이었다.
“아. 작품 계약 해지 때문에 들렀습니다.”
“네? 아니 작가님. 그게 무슨···.”
그는 안색이 급변하며 고개를 돌려 최덕수 PD를 째려보았다.
“제가 레테와 계약한 작품이 있었는데 그게 해지 일자가 다가와서 내려달라고 요청한 상태입니다. 지금쯤 플랫폼에서 내려갔을 텐데···.”
그 말에 천광수의 안색이 더욱 안 좋아졌다. 거의 헬스충 수준인 천광수 사장이 얼굴을 찌푸리자 사무실의 공기가 급격히 냉랭해졌다.
“최 피디. 이게 무슨 말이야?”
“네, 네. 사장님. 그, 그게 쿠폰루팡님의 작품이 11월 1일부로 종료가 됩니다. 즉 2주 정도 남은 상황인데요. 유선상으로 계약 해지를 하고 싶다길래 내, 내려드렸습니다.”
“뭐? 그걸 왜 최 피디 마음대로 내리나? 해지는 내 전결이잖아? 최 피디가 뭔데 전결권을 위반해!”
“어, 어차피 재계약 의사도 어, 없으시고··· 급히 내려달라고 그러시길래···.”
천광수 사장은 아주 무서운 눈으로 최덕수 피디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눈에서 나오는 레이저빔으로 얼굴에 구멍이라도 낼 기세였다. 마치 너 지금 이분이 누군지 알고 그런 거냐? 라고 무섭게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회사 규정은 밥 말아 드셨다?”
“죄, 죄송합니다.”
천광수 사장은 최 피디를 무섭게 노려보다가 다시 나를 보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아이고···. 작가님. 드라마도 연속으로 대히트를 시키시고 돈방석에 앉으셨다는 소문이 자자하시던데요. 저희랑 했던 작품은 그대로 유지해서 더 굴려보시는 건 어떠실까요? 저희가 최대한 서포트 해드려서 매출로 만족하실 수 있도록 케어 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사장님. 이건 도저히 눈 뜨고 볼 수 없는 작품이라서 내려달라고 한 거예요. 마치 저에게 있어서 흑역사와 같달까요? 그리고 벌써 해지서에 사인을 하고 일어나던 참입니다.”
“하아···. 이런···. 제가 좀 일찍 왔어야 했는데···.”
“사장님 대화 즐거웠습니다. 저 다른 약속이 있어서요. 이제 좀 가봐야 하겠네요.”
내가 자리를 뜨려고 하자 갑자기 손을 뻗어 나를 제지하는 최덕수 피디였다.
“죄, 죄송합니다. 작가님. 제가 몰라뵙고···.”
“제가 밝히지 않았는데 PD님이 어떻게 아시겠어요. 죄송할 것 없습니다.”
“혹시 예전 작품이 흑역사 같으시다면 지금 연재하시는 신작을 저희와 계약하는 게 어떨까요. 파격적인 조건으로 대우해드리겠습니다.”
천광수 사장도 옆에서 나에게 좋은 조건을 제시하며 계약을 종용했다.
“음···. 제가 당장 연재할 게 하나가 있는데요.”
“오! 그거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저희가 계약하겠습니다. 작가님.”
“아. 죄송해요. 사장님. 제가 지금까지 레테랑 같이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죠?”
“그런데 전 레테랑은 좀 안 맞는 것 같습니다. 저는 약간 멘탈 관리가 필요한 사람인데요. 레테는 그런 부분에 있어서 아쉽더라고요.”
“그, 그럴 리가요···. 항상 신경을 쓰도록 주기적으로 편집자들 교육까지 하는데요?”
“흠. 글쎄요. 전 그런 걸 한 번도 느껴보질 못해서요. 멘탈 관리뿐만 아니라 어떤 피드백이나 정산서도 받아보지 못했거든요? 그래서 죄송하지만, 계약한다 해도 더 관리가 세심한 곳에서 해보고 싶습니다.”
천광수 사장은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최덕수 PD를 노려보더니 참담한 심정인지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작가님. 제가 저희 회사랑 계약하자고 해놓고 너무 신경을 못 써드린 것 같습니다.”
그는 정말로 창피한 모양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사업가 출신이 아니라 작가 출신이었고 자신이 작가인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항상 작가들에게 좋은 대우를 해주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으로 유명했다. 그랬기 때문에 레테가 1티어 매
니지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리라.
하지만 잘 나가는 조직에도 미꾸라지는 있는 법. 물을 흐리는 인간이 하나씩 있기 마련이고 재수 없게도 내가 거기에 걸려버린 것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시절이 바로 연예계물을 말아먹고 멘탈이 털렸을 때였으니 최덕수 피디가 아니었다면 그 당시 멘탈을 수습하고 양산형 작가로 활동을 더 오래 했을 수도 있었던 아찔한 상황이었다.
“인생이 새옹지마네요.”
“네?”
“아닙니다. 그냥 혼자 한 말이에요. 사장님.”
“하여튼 예전에 도움을 많이 받아서 같이 하고 싶지만, 스타일이 좀 맞지 않는다는 점 양해 부탁드릴게요. 사장님. 그리고 계약을 깔끔하게 해지해주셔서 감사드리고요. 일체의 해지 위약금도 없다고 명시를 해주셨어요. 이것도 감사드립니다.”
"아···. 네···."
천광수 사장은 나에게는 꾸벅 웃으며 인사를 하고 있었지만 내 옆의 최덕수 피디를 죽일듯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허허···. 최 피디 넌 이제 죽었다. 육체적인 교육을 받고 이제 정신 좀 차릴려나? 하꼬 작가한테 개지랄하는 버릇 좀 고쳐야 하는데···.’
조직을 천천히 갉아먹는 좀벌레 같은 인간이다. 없어져 주는 게 회사에 이득이다. 하지만 처남이라 그런지 완전하게 실업자를 만들진 않을 것이다. 그래도 그는 이제 눈치를 많이 보면서 살아야 할 거다.
나는 천광수 사장과 기분 좋게 악수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중에 제가 작품을 쓰면 그건 꼭 레테와 계약 하는 것을 검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정말 감사하죠. 작가님. 요즘 작가는 많은데 실력 있는 작가는 드물어서 계약하기가 힘들어졌어요.”
“하하. 네. 그럼 이만 전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인사를 하고 아래로 내려갔으나 천광수 사장이 문 앞까지 따라 나왔다. 물론 최덕수 PD와 함께 말이다.
나는 도로를 건너 앞 공터에 주차된 내 애마에 올라탔다.
어떠한가? 최 피디! 부자들에게는 별것 아니라지만 여기 1억이 넘는 차가 있다!
그는 내 차를 보고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흐흐···. 이러려고 세차하고 광까지 냈다네.’
정말 오지게 유치했지만 나름 한 방 먹여주기 위해 기획한 거라 자비란 없었다. 내가 이렇게 버릇을 고쳐놔야 하꼬 작가에게 지랄하는 버릇도 없어지고 괜찮게 운영해오던 레테의 명성에도 흠집이 안 생길 거 아닌가?
‘좋게좋게 생각하자. 최덕수 저놈은 진즉에 혼 좀 났어야 해.’
“사장님. 언제 식사 한번 하시죠. 예전 단톡방 멤버들 다 같이 모여서 말이죠.”
“좋죠! 불러만 주세요. 작가님.”
“그럼 저는 이만···.”
그렇게 나는 애마에 시동을 걸어서 차를 출발시켰다. 묵직하면서 기분 좋은 배기음이 귓가를 강타했다.
크···. 이 묵직한 소리···. 좋구만.
아니···. 솔직히 말하면 일이 잘 해결돼서 기분이 좋은 거다. 사이드미러로 힐끔 쳐다보니 천광수 사장이 최덕수 피디에게 삿대질하며 소리를 치고 있는 게 보였다.
"너 이 자식. 내 사무실로 올라와!"
최덕수 피디는 공손히 양손을 모으고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저 인간 평소에도 매형한테 꼼짝 못 한다지? 쯧쯧···. 평소에 잘해야지!’
좀 바뀌는 게 있으면 좋겠지만 사람이 바뀌는 게 쉬운 게 아니란 걸 잘 알고 있다. 나는 악셀을 밟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까 사무실에서 그림 그리던 그 작가 포텐이 대단하던데···. 흐음···."
* * *
[나만의 세계 드디어 이번 주 최종화가···]
[JTVC 금토 드라마 나만의 세계 시청률 40% 넘을까?]
주말이 다가오자 드라마에 관한 기사들이 하나둘씩 늘어나고 있었다. 대중들의 관심사는 마의 40% 벽을 넘을 것이냐 하는 기대였다. 후반부로 접어들자 시청률 상승세가 꺾이기 시작해서 거의 완만하게 소폭 상상하는 것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준환 PD는 시청률 40%가 꼭 넘을 거라며 토요일 오후에 강남에 고깃집을 빌려 자축 종방연을 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과연 바람대로 될 것인지 많은 업계관계자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드디어 금요일 15화가 방영되었다.
공권력으로는 도저히 대응이 어려운 집단임을 깨달은 김인애는 극단적인 방법을 쓰려고 한다. 사회 유력인사들은 이영민의 협박에 굴복하여 모든 일들을 무마시키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근무하는 대형병원 겸 생명공학 연구소에서 실험하던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카오스사 빌딩에서 터트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선 모든 조직원 아니 최소한 수뇌부들이라도 빌딩에 모이게 하는 게 중요했고 그 미끼가 되기로 한 것은 다름 아닌 나지혜였다.
김인애는 자신의 연구소에서 실험하던 불완전한 약물인 흥분제를 그녀에게 건넨다. 심각한 후유증이 있지만, 고통에도 둔감해지며 일시적으로 신체 능력을 대폭 상승시켜주는 마약 성분의 약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슈퍼 솔저를 양산하기 위해 실험했었던 비
밀스러운 약이었다.
나지혜는 정확한 설명을 듣고도 그 약을 자신의 몸에 투약한다. 김하진이 죽고 이미 이성이 날아간 상태였기 때문에 그녀에게 미래란 없는 단어나 마찬가지였다. 오직 생각하고 있는 단어는 복수뿐.
두 명의 여인은 각기 중무장을 한 채 거대한 회색빛 빌딩을 어둠 속에서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비장하기 그지없었다.
* * *
그리고 다음 날 오후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종방연이 진행됐다. 수 많은 기자들과 팬들이 종방연이 진행되는 강남의 한 고깃집으로 몰려들었다. 엄청난 시청률로 대박이 난 작품이었기 때문에 현장의 분위기는 매우 좋았고 한 명도 빠짐없이 종방연에 참석했다.
그렇게 종방연을 마치고 16화인 최종화를 보기 위해 나유정과 함께 한성우의 집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한성우가 주요 배우들을 집으로 초대한 것이다.
“성우 씨 집에 놀러 가본 적 있어요?”
“아뇨? 거길 왜 가나요?”
“아니. 예전에 친하다고 하길래 혹시나 해서요. 파티 자주 하신다는데?”
“전 안 갔어요.”
“아.. 집순..”
“이해한다는 그 표정 뭐죠? 기분 나쁘네요.”
내가 입을 다물자 그녀는 다른 주제로 화제를 돌렸다.
우리는 한성우가 구매했다는 50억짜리 고급빌라에 접근했다.
차가 도착하자마자 차량번호를 미리 입력했는지 자동으로 차단기가 스르륵 올라갔다.
‘음.. 그 유명한 성우 씨의 집이 여기인가?’
우리는 그렇게 마지막 방송을 함께 보며 조촐한 파티를 하기로 했다.
ⓒ 소광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