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흑역사를 지워줘 (2)>
"최덕수 PD님. 안녕하세요. 저 연쇄···. 아니 쿠폰루팡입니다."
"아! 쿠폰루팡 작가님. 죄송합니다. 제가 전화기가 고장 나서 번호를 싹 다 날렸지 뭡니까? 하하하···."
웃기시네? 그냥 내가 실종상태 비슷하니 그냥 정리차 지웠겠지. 어디서 구라를 쳐?
"예. 오랜만이네요. 다름이 아니라···."
"아. 작가님. 죄송한데요. 제가 미팅 약속 때문에 시간이 없어서요. 짧게 부탁드립니다."
후···. 역시나 욕 나오게 하는 건 일가견이 있는 놈이다. 그 당시 웹툰화도 추진해준다고 살살 꼬셔서 계약했더니 성적이 안 나오자 웹툰은커녕 톡이나 전화 씹기 일쑤였고 하다못해 교정도 개떡 같이 봐서 틀리지 않은 문장도 오타로 만들어놨던 인간이었다.
무료에서 반응이 꽤 괜찮았는데 여자친구랑 헤어지면서 멘탈이 1차로 깨지고 홧김에 악플러와 댓글로 싸우다가 2차로 멘탈이 갈렸다. 그 여파였나? 유료화를 한 후 연독이 확 꺾여 성적이 신통치 않았던 작품이었다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계약을 했으면 글이 어떤지 내 상태가 괜찮은지 궁금해해야 정상 아닌가? 덕수 PD에게는 작가 케어란 딴 세상 이야기였다. 매운 독자처럼 글을 열나게 까는 게, 마치 자신의 본업이라는 투로.
"안 그래도 짧게 하겠습니다. 길게 할 말도 없고요."
"네. 말씀하세요."
"제 전작 ‘천재 프로듀서 연예계 재벌 되다’ 그거 아직도 구매하는 사람 있습니까?"
"아···. 그건 확인을 해봐야 하는데요. 아마 없지 않을까 싶은데···."
내 작품은 전혀 프로모션은 물론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으니 이건 대충 아는 모양이었다. 실제로 레테한테 최근 몇 개월 동안 정산받은 돈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군요. 그럼 이거 계약 해지일이 정확히 언제죠? 이거 작품 내리고 신규 구매 못 하게 할 수 있지 않아요? 물론 기존에 유료로 본 사람들은 어쩔 수 없지만···."
따각따각···.
최덕수 PD는 관련 내용을 PC에서 뒤져보고 있는 것 같았다.
"흠···. 계약 기간이 1개월 정도 남았네요? 혹시 이거 가지고 다른 곳으로 옮기시려고요?"
"아니요. 그냥 어디서도 더는 팔고 싶지 않습니다. 그냥 판매 중지 아니···. 계약 해지 좀 해주세요."
"하하···. 아예 내려달라고요?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예전 작품은 이제 창피하다 이건가. 갑자기 필력이라도 확 뛰셨어요? 혹시 2년간 어디서 폐관 수련이라도 하셨나···."
아니 이 사이코패스 같은 놈! 예전에도 멘탈 갈려서 힘들어하던 나를 은근히 돌려 까며 확인 사살하던 놈이었다.
성적이 좋은 작가한테는 이렇지 않다는 소문도 있긴 한데···. 어떻게 이런 인간이 편집자를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뭐···. 불가능하진 않은데요. 계약서 보시면 계약일 이전에 해지하면 위약금이 어떻다고 쓰여 있을 건데···."
에이···. 1개월 남았는데 좀 해주지.
솔직히 짜증이 났지만, 이 인간하고 더 이야기하기도 싫었고 하루빨리 이 흑역사 작품을 팔고 싶지 않았다. 내가 언제 연쇄폭참마 아니 쿠폰루팡인지 밝혀질지도 모르는 거니 더욱 빠르게 처리할 필요가 있었다.
"위약금이 얼마인데요?"
"그게···."
최덕수 PD는 잘 모르는 건지 아니면 그냥 뜸을 들이는 건지 말꼬리를 흐리고 있었다.
"뭐 어차피 수익이 쥐뿔도 없는데 그냥 계약 해지해드리죠. 뭐···."
"네? 정말입니까?"
"작가님 사정 뻔히 아는데 저희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위약금을 받겠습니까? 흐흐···."
아무리 우편으로 계약해서 얼굴도 모른다지만 이런 비아냥을 들어야 하는 건가?
하···. 참자. 이제 난 유명 작가다. 드라마로 대박이 난 사내다. 괜히 이런 거에 열 내면서 에너지를 뺏길 필요가 없지.
"저기요. 괜히 무리하실 필요 없습니다. 위약금을 내야 하는 거면 낼게요."
"오우! 노노! 괜찮아요."
"그럼 절차가 어떻게 되는 건가요?“
"계약 해지서를 작성하시면 계약 해지가 완료됩니다. 해지서는 뭐 댁으로 보내드릴까요?”
"그래요? 그럼 제가 다음 주쯤에 방문해서 해지서를 작성하도록 하겠습니다. 준비해주세요.“
"아니! 뭘 오기까지 합니까? 허···많이 한가하신가 보네. 뭐 일단 알겠어요. 우선 오늘 이작품 서비스 종료신청 넣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오냐! 꼭 그때 방문해서 내가 누군지 보여줄게.’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내가 굳이 스트레스받을 필요가 없는 거 아니겠는가? 아무래도 이 인간은 잘나가는 작가들에게 받은 스트레스를 이런 식으로 푸는 모양이었다.
어차피 계약 해지서를 작성할 때쯤이면 거의 계약 종료 시점이라 안 해줄 수도 없을 것이다. 내가 유명인이라는 걸 알고 해지를 안 해주면 불법이다. 레테가 그런 강짜를 부리는 하꼬방 업체는 아니기도 하고···.
"아 참! 요즘은 글 안 쓰십니까? 포기하셨어요?"
"써도 레테랑은 안 할 겁니다."
"하하···. 저희도 요즘 작가님들이 많아서요. 죄송합니다.“
"그리고 비고 사항에 위약금 없다는 거 반드시 명시해 주세요. 가서 확인할 겁니다.“
"아이고···. 알겠습니다. 대작가님."
와···. 진짜 오랜만인데도 여지없이 열 받게 하네. 이거 완전 프로수준이잖아?
이 녀석 레테 사장의 처남이라고 했던가?
인성 개차반인 녀석을 고용해주면 감사하다고 열심히 해야 할 것 아닌가? 이런 타입은 그냥 놔두면 회사를 조금씩 갉아먹을 놈이다.
"휴···. 짜증은 나지만 이 정도면 쉽게 해결된 건가?. 웬만하면 좋게 끝내려고 했는데 창피 좀 줘야겠어. 레테도 진실을 알아야지. 회사를 좀먹는 녀석이잖아?"
* * *
나는 토요일 내내 방안에 틀어박혀서 소설을 쓰고 있었다. 내 작품을 넷플릭 오리지널 시리즈로 제작하려면 열심히 써야 했다. 갑자기 창작 의욕이 솟아나고 있었다.
‘역시 글 쓰는 게 제일 재밌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저녁을 먹고도 계속 집필에 몰두했다. 1시즌을 웹소설 형식으로 뜯어고치고 정신없이 글을 쓰고 있는데 막내가 내 방문을 벌컥 열었다.
"오빠! 뭐해. 나만의 세계 12화 할 시간이야."
"응? 벌써 열 시 반이네?“
이 엄청난 집중력! 나 자신이 무서울 정도였다.
나는 커피잔을 들고 거실 소파에 앉았다. 방송 시작 전 톡이 울렸고 정혜성에게 메시지가 도착했다.
[정혜성 : 작가님. 오늘은 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나오는군요. 떨립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사범님. 제가 촬영할 때 옆에서 연기하는 것을 지켜봤잖아요. 신인인데도 정말 잘하셨어요. 감독님이 어떻게 편집하셨는지 함께 보자고요.]
[정혜성 : 정말 어린애가 된 기분입니다. 너무 두근두근하네요. 작가님. 어제 가족들하고 드라마를 함께 보는데 저희 어머니가 펑펑 우셨어요. 덩달아 저도 울고···.]
[앞으로는 꽃길만 걸으실 겁니다. 저만 믿고 따라오시면 돼요.]
[정혜성 : 감사합니다. 작가님. 이 은혜를 어떻게 갚을는지···.]
[나중에 제가 회사 차리면 거기로 오시면 됩니다. 하하하.]
[정혜성 : 사나이 의리가 있지. 무조건 거기로 갑니다.]
[네. 이제 시작하네요. 드라마에 집중하시죠.]
드라마를 보려고 했는데 나유정까지 톡을 보내고 있었다.
[나유정 : 인터뷰 마치고 집에 도착했어요. 본방사수!]
[그래요. 재미있게 감상합시다.]
[나유정 : 같이 보면 좋겠는데···.]
[왜요. 외롭습니까? 사람이 혼자 일 줄도 알아야죠. 아! 블랙소울 있잖아요. 초대해서 같이 보던가?]
[나유정 : 어이없네. 애들 미국 투어하고 있다니까 그러네.]
[나중에 같이 투어해요. 제6의 멤버로.]
[나유정 : 나 같은 늙은이가 거기 껴서 뭐해요. 테리우스에 이준형 뿌리기가 같은 거지.]
[이준형 뿌리기? 그거야말로 화룡점정이네요. 물론 외모만 보면 그렇다는 거임. 평균 외모가 확 올라가지 않습니까?]
[나유정 : 어우! 짜증 나! 드라마나 봐요. 헛소리 그만하고.]
드디어 드라마가 시작됐다.
일단 별장의 무리를 일차적으로 소탕한 나지혜와 김하진은 상처를 입은 몸으로 김인애를 구출한다. 하지만 다시 일련의 무리가 별장을 덮친다. 이 클럽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했으며 뿌리가 깊었다.
증거확보는커녕 몸을 건사하기도 바쁜 나지혜와 김하진은 겨우겨우 사선을 뚫고 별장을 탈출하게 된다. 지하에 감금돼있던 김인애의 상태는 의외로 상당히 양호했다. 아마도 한승호의 부인이며 아직 쓸모가 있는 인물이라 대우가 괜찮았던 모양이다.
반면에 가슴 윗부분에 기다란 자상을 입고 옆구리에 칼을 찔려 피를 많이 흘린 나지혜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한다. 병원에 갈 수 없는 김하진은 정신을 잃은 나지혜를 치료하기 시작하는데···.
김인애는 자신이 꼭 해야 할 일이 있다며 이들을 떠나고 만다. 나지혜에 정신이 팔려 그녀를 잡지도 못하는 김하진이었다.
상처 부위를 치료하려면 상의를 벗겨야 하는데 주저주저하며 당황스러운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오빠. 근데 김하진 너무 귀엽다. 심각한 상황인데 당황하는 연기 되게 자연스러운데?"
"정혜성 씨 연기 잘해. 소질도 있고 내가 괜히 캐스팅한 게 아니야.“
"뭐야. 글도 잘 쓰고 캐스팅까지? 드라마 업계는 오빠가 다 해 먹냐?“
나는 주리의 타박에 반응하지 않고 가볍게 웃기만 했다.
사실인 걸 어떡해?
화면에서는 순정남 정혜성 사범의 매력이 팡팡 터지고 있었다. 그는 나유정의 상의를 벗긴 상태에서 속옷만 입고 있는 그녀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가슴 위 상처를 치료하다가 얼굴이 붉어지고···. 옆구리 찔린 상처를 보고 깜짝 놀란다. 그야말로 걱정돼서 안절부절 미치겠다는 표정이었다. 나지혜를 향한 애틋한 김하진의 일편단심이 드러나고 있었다.
정신을 잃었던 나지혜가 드디어 눈을 떴다. 그녀가 처음 본 장면은 밤새도록 옆에서 잠도 안 자고 자신을 간호하던 김하진의 모습이었다.
"지혜야. 깼니? 몸은 좀 어때?“
달달한 김하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침 햇살이 그의 얼굴을 은은하게 비추자 왠지 모를 성스러운 느낌이 화면 가득 느껴졌다.
"괘, 괜찮아요.“
나지혜는 상의가 벗겨진 상태라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자신의 몸을 가렸다.
"미안. 상처는 다 치료했어.“
초췌한 모습으로 웃고 있는 김하진의 얼굴을 보고 뭔가 마음의 벽 한쪽이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을 받고 뜨거운 눈물이 왈칵 차오르는 그녀였다.
"바보예요? 나 같은 년이 뭐가 좋다고···.“
김하진은 나유정 옆에 누우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다 좋아. 처음 봤을 때부터···."
"흐윽···."
참았던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응? 나지혜가 김하진이랑 연결되는 거야?"
드라마를 보고 있던 주리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비밀이다. 다음 주에 확인해봐.“
"뭐야. 좀 알려줘!“
미안하지만 김하진은 죽는다. 처절하고 고결하게···. 한 여자만 사랑한 그가 죽을 때 시청자들은 눈물을 흘리겠지. 하아···. 가슴이 미어진다.
‘마더 테레사님이 돌아가실 때 그런 기분이야. 비록 호구남이었지만 여성 시청자들에게 엄청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될 거야. 태엽 시계 이정진처럼···.’
이제 나만의 세계도 최종장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최종 4화만 남은 상황!
여자 둘을 잡기 위한 클럽의 치열한 노력과 도망을 치며 조직원들을 하나하나 소탕하는 나유정, 그리고 그 악마 집단의 비밀을 밝히기 위한 김인애의 머리싸움이 치열하게 펼쳐질 것이다.
그리고 최종 보스인 3명의 친구의 운명은···.
잠시 드라마 생각으로 가득 차 있던 나는 방으로 돌아와 글을 쓰려고 했지만, 내용이 잘 써지지 않았다.
그냥 오늘은 침대에 누워서 미튜브나 볼 작정이었다. 앱을 클릭해보니 테리우스와 나유정에 대한 추천 영상이 주르륵 떴다. 내가 한 번씩 검색을 해보니 인공지능이 알아서 영상을 찾아줬다.
특히 테리우스의 영상이 상당히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음···. 뭐지?’
많은 세계인이 테리우스의 뮤직비디오나 방송 출연 영상을 보고 리액션 영상을 많이 올리는 것 같았다.
확실히 테리우스의 인기가 많아진 것 같았다.
리액션 영상을 잘 안 올린다는 소극적인 일본인들까지 테리우스의 영상을 이렇게나 많이 올릴 줄이야.
아무래도 테리우스 녀석들 일본어는 무조건 속성으로 가르쳐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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