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선물이다 (2)>
“어머. 안녕하세요? 드라마 잘 보고 있어요.”
“어머니. 생신 축하드립니다.”
“우와! 후광이···. 언니 실물이 정말 예쁘세요.”
“주리 씨도 한 외모 하시는데요? 연예인 하셔야겠어요.”
“호호호···. 정말요? 오빠가 그러는데 저 정도의 외모는 연예계에서 발에 차일 정도로 많다고 하던데요.”
“에이! 말도 안 돼요. 준형 씨가 속에 없는 말을 잘하잖아요. 걸러서 들어야 해요.”
“유정 씨. 여기 앉으세요.”
“아···. 감사합니다. 어머님. 이거 받으세요.”
“뭘 또 이런 걸 다···. 잘 마실게요.”
엄마가 그녀를 소파에 앉게 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뭐에 홀린 듯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여기에 오신 것인지···. 얘가 유정 씨랑 같이 온다는 말을 안 했거든요.”
“아···. 제가 언제 한번 인사를 드리고 싶었는데 마침 오늘 광명에 갔다가 어머님 생신에 늦을 거 같아서 같이 왔습니다.”
“평소에 오빠가 유정 언니 이야기를 거의 안 해서 별로 안 친한가 싶었는데 그런 건 아니었구나.”
“친하고 안 친하고 할 게 어디 있어. 직장 동료인데···.”
“떽! 너 조용히 안 해? 유정 씨 죄송해요. 제가 저렇게 말을 함부로 해요. 그래도 속마음은 또 안 그러니 오해하지 마세요.”
“알아요. 어머니. 준형 씨가 말은 저렇게 해도 은근히 신경 많이 쓰거든요. 아마도 부모님의 좋은 영향인 거 같아요.”
“좋은 영향은요···. 그냥 혼자 컸어요. 방에서 혼자 자판이나 두들기고···.”
조용히 말을 듣고 있던 동생이 내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툭 건들었다.
“오빠. 왜 그래. 자꾸 초를 칠 거야?”
"뭐 인마···."
여동생까지 나서서 나를 타박했다.
“어머님 집이 꽤 넓고 아늑하네요?”
“자식 3명이 아직 독립을 안 해서 어쩔 수 없어요. 방 4개가 아니면 불편해서 살기 힘들어요.”
“그건 부럽네요. 전 형제, 자매 많은 게 부럽더라고요.”
“그럼 저랑 언니랑 동생 하면 되죠.”
“그럴까?”
“당연하죠. 언니···. 호호호···.”
둘은 죽이 아주 잘 맞았다. 원래 주리는 나랑 같은 인싸과였다. 둘은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편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나는 조용히 나유정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나와 처음 만났을 때와는 정말 180도 달라진 상태였다. 말도 없이 냉정해 보이던 그녀가 본래 이런 사람이었다니···.
“아직 식사 전이시죠? 조금 있으면 식구들 다 올 건데 우리 같이 식사해요.”
“네! 감사합니다.”
* * *
“와하하하···. 이제 우리 둘째가 사람 노릇을 하는구나. 이 아비는 대찬성이다.”
“아니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찬성은 무슨 찬성?”
모든 가족이 식탁에 앉아 아버지의 호탕한 웃음을 듣고 있었다. 나는 한껏 오해를 하고 있는 아버지를 보며 인상을 잔뜩 썼다.
“뭐가? 너 지금 여자친구 소개해주려고 하는 거 아냐? 그것도 네 엄마 생일에 딱 맞춰서 선물처럼 데려온 거잖아.”
하으···. 왠지 불길하더라니···.
“무슨 여자친구예요. 그런 거 아니에요. 듣는 유정 씨 기분 나쁘게 왜 그러세요.”
더는 오해하면 안 될 것 같아 말조심하라고 못을 박았다. 옆을 살짝 보니 나유정이 고개를 숙이고 밥을 허겁지겁 먹느라 대화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매장에서 먹은 점심이 입에 맞지 않았는지 별로 먹지 않았던 게 기억났다. 미트볼만 몇 개 먹었었지?
‘음. 다행이군.’
하지만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찌릿!
나유정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상당히 맘에 안 든다는 그런 표정이었다.
“아···. 그런 거야? 내가 괜히 지레짐작한 거네?”
아버지는 약간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아버님. 괜찮아요. 어차피 준형 씨와는 원래 아무 상관없고요. 주리랑 언니 동생 하기로 했어요.”
“으, 으응? 그, 그래요."
앞에 주리가 혀를 쯧쯧 차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갑자기 옆에 있던 어머니가 손으로 내 뒤통수를 살짝 후려쳤다.
탁···.
"아! 왜 때려!"
"어휴···. 쯧쯧···."
어머니도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나를 쳐다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나저나 유정 씨. 어떻게 우리 집 음식이 입에 맞는지 모르겠네요."
"너무 맛있어요. 진짜 오랜만에 먹는 집밥 같은 느낌이에요. 지금 제 그릇 보이시죠? 저 정신없이 먹고 있어요."
아닌 게 아니라 그녀는 너무 급하게 밥을 먹고 있다. 무슨 걸신들린 사람처럼 말이다.
"많이 먹어요. 드라마 보니까 액션 연기하느라 엄청 힘들 것 같던데···."
"감사합니다."
"이거 먹어봐요. 해조류 무침인데 변비에도 좋고 몸에 엄청 좋아요."
크···. 드디어 나왔다!
우리 엄마 특기인 건강식품 예찬이다. 이번엔 해조류인가? 또 어디 아침 방송에 나온 거겠지? 식탁 위는 다시마 육회, 다시마튀각, 파래 전, 톳무침 등 각종 해조류 반찬이 즐비했다. 와···. 이건 무슨 무인도에 갇힌 로빈슨 크루소 반찬 같은데?
"와! 어머니 저 이런 거 너무 좋아해요. 와! 이거 다시마랑 육회랑 같이 먹으니까 너무 괜찮은데요?“
헉! 저게 맛있다고? 미맹인가?
"호호···. 맛있죠? 많이 먹어요. 자 여기···."
어머니는 마치 어린아이에게 밥을 먹이듯 계속해서 나유정의 등을 쓰다듬으며 밥에 반찬을 올려주었다. 그녀는 거부도 하지 않고 꾸역꾸역 음식을 다 받아먹고 있었다.
‘배가 고팠나 보네. 어우 많이도 먹는구나.’
꾸역꾸역 밥을 먹는 그녀가 갑자기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눈을 보니 그녀의 눈에 물기가 살짝 맺힌 거 같았다.
’응? 울어?”
돌아가신 엄마라도 생각나는 건가? 잠깐이라 아무도 몰랐지만, 나는 그녀의 심경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외로운 사람이었다. 아마도 이런 대접을 받은 지 오래됐으리라.
나유정은 이를 꽉 깨물며 고개를 숙인 채 눈을 깜빡거렸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형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준호 씨는 준형 씨랑 안 닮으신 거 같아요."
"아···. 저는 어머니를 닮고 준형이랑 주리는 아버지를 닮았죠."
처음에 나유정을 보고 깜짝 놀랐던 형이 아버지 옆에서 묵묵히 밥을 먹고 있다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녀는 이내 다시 평정심을 찾은 듯싶었다.
"어? 그러네요. 신기하다. 전 외동딸이라 이런 거 보면 신기하더라고요."
"우리 형이 엄마를 닮아서 머리가 엄청 좋아요. 강남에서 성형외과 의사로 근무하고 있거든요."
"와! 의사요? 대박! 공부 엄청 많이 하셨겠네요."
"아···. 네. 뭐···. 서울대···. 크흠!"
로봇 같은 형도 나유정이 칭찬을 하자 얼굴에 약간 홍조가 돌았다. 평소에 학벌 자랑하는 걸 본 적이 없었는데 말이지.
"성형외과 의사시면 수술도 많이 하시겠네요. 저 혹시 견적 나오나요?"
나유정은 환하게 웃으며 형을 쳐다봤다. 에헤이···. 입가에 고추장 묻었네.
"흐음···. 유정 씨는 굳이 성형 수술이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보톡스 정도 가끔 해주시면 좋죠. 피부가 깨끗하셔서 레이저도 필요 없으실 것 같고···. 피부 관리는 주기적으로 받으시는 거죠?"
"네, 네···."
역시 로봇이다. 그냥 필요 없다고 깔끔하게 말하면 되지. 뭘 또 그런 걸 물어봐? 가볍게 물어본 질문인데 진지하게 대답을 하자 오히려 나유정이 당황하고 있었다.
"형. 농담으로 물어본 건데 진짜 상담을 하면 어떡하냐."
"아! 오늘도 고객님들 진단을 좀 많이 했더니 나도 모르게 그만···. 죄송합니다. 유정 씨."
"아니에요. 나중에 할 일 생기면 준호 씨 병원으로 갈게요."
"환영합니다."
의외로 나유정은 어려워하지 않고 우리 가족들과 식사를 아주 잘 끝마쳤다.
"자 다들 이제 거실로 가세요. 준형아. 주리야. 너흰 여기 와서 과일 좀 깎고 커피 좀 내려라."
어머니는 식탁의 그릇들을 싱크대로 가져가 설거지를 하려고 했다.
"어머니. 맛있는 음식을 해주셨는데 설거지는 제가 할게요."
"아휴. 손님인데 어떻게 그래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거실에 가서 TV나 봐요."
둘이 싱크대 앞에서 실랑이하고 있자 장난기가 발동했다.
"엄마. 유정 씨한테 한번 맡겨봐요. 설거지 프로 선수예요. 생일 선물로 해준다고 하는데 너무 빼도 좀 모양이 이상하죠."
"마, 맞아요. 프로예요. 오늘은 어머니 생신이신데 좀 쉬세요."
"아···. 안 되는데···. 손님인데···."
"괜찮다니까 그릇도 몇 개 없고만?“
농담이었다. 6명이 밥을 먹었으니 설거지할 게 꽤 많았다.
"그, 그럴까?"
"그러세요. 어머니 같아서 제가 진짜 해드리고 싶어요. 이런 것도 추억이죠."
"그래요. 알았어요. 그럼···."
나유정은 팔을 걷어붙이더니 설거지를 빠르게 하기 시작했다.
"오빠. 뭐야. 왜 언니 일을 시켜? 저래도 돼?"
"놔둬. 엄마랑 살던 옛날 생각나나 보지."
주리는 내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거실로 쟁반을 들고 나갔다.
와장창···.
갑자기 싱크대에서 뭔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무슨 일인지 그녀에게 달려갔다.
"괜찮아요? 뭐 깨졌어요?"
"네. 괜찮아요. 그런데···. 보, 보울이···."
바닥을 보니 샐러드를 담던 넓적한 접시가 박살이 나 있었다.
"어?"
엄마가 이탈리아 여행을 갔다가 사 온 아끼던 연두색 그라데이션이 들어간 보울이었다. 소리를 듣고 달려온 엄마가 나유정에게 괜찮냐고 물어본 뒤 이상이 없자 깨진 접시를 바라보았다.
바로 흙빛으로 변하려고 하는 찰나, 엄마의 얼굴은 기적적으로 환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내가 깼으면 분명 등짝 스매싱 각이었는데···.
"안 다쳤으면 다행이에요. 그거 봐요. 익숙하지 않은 남의 집에서는 굳이 그런 거 안 해도 된다니까?"
"어서 거실로 가서 과일이나 들여요."
"네, 네. 죄송합니다."
"나머지는 내가 할게.“
형이 무슨 일인지 보러왔다가 자기가 마무리한다고 했다.
"준호야. 넌 내일도 수술 있잖아. 괜히 손이라도 다치면 어쩌려고? 준형이 너도 유정 씨 데리고 거실에서 과일 먹어."
"알았어."
그 순간 아버지가 화장실에서 문을 열고 나오셨다.
"에이! 짜증 나. 저놈의 변기는 왜 이렇게 물이 시원치 않은지···.“
"여보! 이리 좀 와봐요."
"응? 왜? 나 불렀어?"
결국, 설거지 담당으로 아버지가 결정되었다. 아버지가 구시렁거리며 설거지를 하는 동안 우리는 거실에 모여 과일과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었다. 엄마 생일 축하는 설거지가 끝나야 시작할 것 같았다.
"준형아 드라마 10시 40분에 하지? 엄청 기대된다."
"네. 저녁을 늦게 먹어서 그런지 한 시간 정도 있으면 하겠네요."
"유정 씨. 오늘 자고 가실 거죠?"
"엄마? 뭔 소리야. 집에 가야지. 내가 좀 있다 데려다줄 거야."
"얘가 지금 무슨 소리니? 드라마 끝나면 거의 열두 시인데 언제 갔다 오려고? 그냥 주리 방에서 자고 가면 되지."
"언니. 제 방 안 좁아요. 저랑 오늘 같이 자요."
"그럴까?"
커, 커헉···.
별 부담 없이 받아들이는 나유정을 보고 기겁하고 말았다. 나는 그녀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왜 그래요?. 내가 데려다준다니까요?'
'좀 가만있어요. 어떤 엄마가 아들이 오밤중에 여자 데려다주는 걸 좋아하겠어요.'
'????'
그냥 일인데···. 이게 무슨 귀신 신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소리였다.
내 의견은 깨끗이 무시된 채, 세 여자는 거실에 앉아서 계속 수다를 떨었다. 나유정은 나랑 있을 때는 말이 많이 없었는데 지금은 거의 무슨 방언 터지듯 말을 하고 있었다. 과연 그녀의 진화가 어디까지 진행될 것인지 점점 궁금해지고 있었다.
나는 소파에 앉아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ASMR처럼 듣고 있었다. 그런데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나유정이 자꾸 이야기를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며 배를 움켜쥐기 시작했다.
"어, 어머니, 저 화장실 좀요···."
"어머 어머···. 아까 먹은 해조류가 직방인가 보네. 바로 신호가 왔네? 거봐요. 내가 뭐랬어. 특효약이라니까?“
엄마. 그렇게 좋아하실 게 아닌 거 같거든요?
나유정은 배를 움켜쥐더니 살짝 찌푸린 얼굴로 화장실로 어기적어기적 걸어갔다.
'어이구. 그냥 꾸역꾸역 주는 대로 먹더니 기어이 탈이 나는구만? 나는 남의 집에서 큰일 보는 게 좀 그렇던데···.‘
악연이었다.
아무리 우리가 더럽게 볼 장 다 본 사이긴 했지만, 이거 너무하는 거 아니냐고···.
그녀는 접시도 깨고 가족들의 연예인에 대한 환상도 깨부수고 있었다.
내 시선은 화장실 문을 닫고 후다닥 들어가는 그녀를 따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뭔지는 모르지만, 더 심각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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