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빅데이터가 선택한 남자 (1)>
넷플릭 이민영 총괄 디렉터가 오늘 오후에 만날 수 있겠냐는 문의를 해왔다. 나는 별다른 일정이 없었기 때문에 곧바로 약속 시각을 잡았다.
저녁을 먹기엔 조금 이른 시간
나와 이민영 총괄 디렉터는 고급 중식 레스토랑에서 코스 요리를 먹기로 했다.
"어서 오세요. 작가님. 아니 실장님으로 불러야 될까요?"
이민영은 30대 후반 정도의 당찬 여성이었고 긴 머리가 아주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이준형입니다. 그냥 작가라고 부르시면 될 듯합니다."
그녀는 내 대답에 눈빛을 빛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안내했다.
"여기 코스 요리가 아주 정갈하고 맛있습니다. 여긴 처음이시죠?"
"아. 네. 저는 뭐든 잘 먹습니다. 피자나 햄버거도 좋아하죠."
"호호. 하긴 아직 젊으시니까요."
우리는 서로 의례적인 덕담을 나눈 뒤 자리에 앉았다. 음식이 준비되는 동안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작가님. 요즘 드라마 너무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슬기로운 덕질생활’에 이어 ‘나만의 세계’로 연타석 홈런을 치셨네요. 대단하세요."
"아. 운이 좋았습니다."
운은 개뿔! 나는 당연히 내 능력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겸손한 말을 하며 언행을 조심했다.
"저는 그냥 플랫폼 업체에 근무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너무 체면 안 차리셔도 돼요."
"에이. 그게 가당키나 한 말씀인가요? 천하의 넷플릭인데요. 어떤 일로 보시자고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오히려 제가 잘 보여야 할 처지입니다."
"호호. 이미지가 생각한 것과 많이 다르시네요.“
"어디 가서 영업하라는 소리 많이 듣습니다."
"재미있으세요. 솔직히 두 작품을 이렇게 연달아서 흥행시키셨으면 좀 거만해지셔도 되는데······. 어쨌든 최근 이렇게 크게 두 작품을 히트시킨 경우가 별로 없다 보니 저희가 제작사가 아님에도 흥미가 생기더군요."
"아. 흥미가 있으셨군요."
"그냥 흥미 정도는 아니긴 한데 겸사겸사 뵙자고 한 겁니다."
그녀와 나는 아직 초반 탐색 중이었다. 이렇게 급하게 보자고 한 걸 보면 분명히 뭔가 할 말이 있는 게 분명한데 아직은 그냥 평범한 대회만 나누고 있었다.
"요즘 넷플릭의 기세가 장난 아니군요. 전 세계 가입자 수가 가파르게 늘어나고 있어서 그런지 수익도 높고 주가도 고공행진을 하는 것 같던데요?"
"그런 이야기는 뉴스나 미튜브 같은 곳에서 많이 나오는 이야기라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다들 저보다 더 잘 아시더군요. 그런데 그러면 뭐합니까? 회사가 점점 더 커지니 할 일은 더 많아지고 있는 거죠."
"아 하긴······. 일하시는 분들은 엄청 바쁘시겠어요."
"네. 요즘 너무 바쁘네요."
나는 그녀의 솔직, 담백함에 매료됐다. 별다른 수식어 없이 그냥 팩트만 말하는 스타일 같았다. 드디어 음식이 하나둘씩 나오며 우리는 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제 작품도 넷플릭으로 들어갔죠?"
"네. 슬기로운 덕질생활은 각국의 언어로 번역돼서 저번 주 금요일에 일괄 업로드됐습니다."
"오! 전 바빠서 아직 체크 못 했는데······. 혹시 성적이 어떤가요?"
"아직 얼마 안 돼서 유의미한 데이터는 아닙니다만······. 다른 한국 드라마보다 초반 스타트가 좋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많이들 봤으니까 어쩔 수 없지만, 해외에서 반응이 괜찮더군요."
"해외요?"
나는 약간 의외라고 생각했다. 나유정과 테리우스의 해외 인지도가 그리 크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 해외에서 슈퍼노바와 블랙소울 관련 이슈로 알음알음 알려진 게 큰 것 같아요. 주로 10~30대 초반의 해외 사용자들에게 인기가 있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습니다."
"오······. 굉장하긴 한데······. 뭐 그게 인기가 있다고 해서 저에게 추가로 떨어지는 건 없죠. 하하하! 제가 너무 속물 같았나요?"
"속물이라니요. 돈이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죠. 아마도 첫 작품이라 큰돈은 못 버셨을 거에요. 저도 업계를 잘 아니까요. 다만······. 다음 작품인 ‘나만의 세계’로 꽤 많은 원고료를 받으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속사 연예인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하셔서 승진도 하셨다고 들었고요."
아무래도 그녀는 나에 대해 광범위하게 조사를 한 것 같았다. 방영된 두 작품과 내가 다니고 있는 직장에서의 나의 포지션에 대해 조사를 끝마친 것 같았다.
"예. 그냥 어쩌다 보니······."
그녀는 내 표정을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제가 봤을 땐 이 ‘나만의 세계’가 전 세계적으로 훨씬 크게 성공할 것 같아요. 분위기도 독특하고 스토리 자체가 독특하거든요. 유니크하달까?"
"유니크요?"
"네. 저희 넷플릭을 사람들이 이야기 할 때 블록버스터나 큰 규모의 작품들을 떠올리는데요. 실제 저희가 가장 집중하고 있는 것은 바로 독창성 즉 색다른 주제를 다룬 작품들을 최우선적으로 생각하고 있거든요."
"아. 그렇군요.“
아···. 정말? 내가 보기엔 별로인 작품들이 훨씬 더 많은 것 같은데······. 이건 뭐 그냥 내 생각일 뿐이다.
"작가님이 쓰신 작품이 그런 색다른 주제를 담고 있어요. 지난 주말에 방영된 나만의 세계를 보고 완벽하게 확신했습니다. 색다른 스토리와 흡입력, 그리고 캐릭터를 창조하는 능력 등등···. ‘조선 킹텀’을 쓰신 김 작가님하고 비교해도 큰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그건 좀 과장이 심하군요. 제가 감히 어떻게······."
"과장 따위가 절대 아닙니다. 저희가 빅데이터 기술을 사용한다는 거 알고 계시죠?"
"네. 저도 콘텐츠 비즈니스에 관심이 많아서 공부를 좀 했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역시 젊으셔서 그런지 마인드가 다르시네요. 그럼 저희가 미국 드라마인 화이트 하우스 오브 카드를 빅데이터를 바탕으로 제작했다는 것도 아시겠네요?"
"네. 감독하고 배우를 골라서 어떤 작품을 제작하면 절대 망하지 않고 히트한다는 그런 분석 결과를 믿고 만든 작품이잖아요?"
"맞습니다. 우리 넥플릭 한국 사무소에서도 비슷한 일을 추진 중입니다. 최근 그 분석 결과가 뭔지 아십니까? 작가님 작품에 정주빈 씨를 주연으로 내세우면 절대 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허······. 그게 정말입니까?“
"그럼요. 정말이고 말고요."
나는 정말로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내 차차차기작으로 생각하고 있는 아포칼립스물 ‘세상의 멸망은 나만 아는’의 주연 배우로 생각하는 후보 가운데 한 명이 바로 정주빈이었기 때문이다.
정주빈.
과거 한류 4천왕의 막내로 최강의 외모와 차가운 이미지로 최고 스타 반열에 오른 배우였다. 각종 영화에 출연한 후 연기력을 인정받으며 최고의 인기를 얻었다.
그 후 결혼을 하고 행복한 생활을 하다가 비극적인 교통사고를 당해 그의 아내가 목숨을 잃고 만다. 그래서 그는 그 정신적인 후유증으로 몇 년째 칩거 중이었다.
가끔 CF만 나올 뿐 어떤 공식적인 활동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의 인기는 점점 더 올라가고 있었다. 특히나 사랑하는 여자를 잃고 아직도 슬퍼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며 그의 이미지가 끝도 없이 상승하고 있었다.
"뭐. 사실 작가님 작품의 데이터가 부족해서 제 주관적인 판단이 약간 개입되긴 했습니다."
"아.... 어쩐지...."
"그래도 이건 상당히 정확한 분석임을 자부합니다. 전 분석에 빅데이터를 씁니다만 절대 맹신하지는 않습니다. 어차피 계속 분석을 해보면 모든 것은 결국 인간으로 귀결됩니다. 어떤 사람과 어떤 배우가 모여 그 콘텐츠를 만들었는지가 핵심이죠. 그리고 전 작가님에게 그런 확신을 가지게 됐습니다."
"음······."
나는 이렇게 강하게 말하는 이민영 총괄 디렉터를 보고 감탄하고 있었다.
"혹시 조선 킹덤도 이런 식으로 만드신 건가요? 이렇게 발로 뛰면서 말이죠."
"맞아요. 저희 크리에이티브팀이 어떤 작품을 제작할지 결정합니다. 그 후에 직접 작가님을 찾아뵙고 어떤 내용으로 쓰고 싶은지 조사해보고 그 후 작가님이 집필한 시나리오를 보고 결정하는 겁니다.“
"아.... 신기하네요."
"요즘은 소설이나 웹툰을 보다가도 내용이 좋으면 원작의 지적재산권을 확보한 뒤 제작사를 알아보거나 연결해주고 있어요."
"그런 식으로 진행이 되는군요."
"네. 이제는 이 작가님 차례에요. ‘조선 깅텀’같은 전 세계에 통할 대박 작품을 정주빈 씨하고 같이 만드셔야죠."
".........."
솔직히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많이 흥분 됐지만 지금 일을 진행해봐야 원고료나 판권 수익 정도밖에 못 올린다. 내년이나 되어야 독립해서 콘텐츠 제작사를 차린 후 오롯이 수익을 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원고료와 발생 수익 10%를 동시에 꿀꺽하는 거다.
넷플릭은 제작비를 대주고 어느 정도 독립성을 보장해주는 대신 9 : 1이라는 짠물 수익 배분 정책을 고수하고 있었다.
‘짜더라도 10% 수익이 어디냐. 시나리오만 통과되면 리스크도 별로 없으니 좋은 거지.’
내 제작사는 초반에는 이렇게 경험을 쌓게 하는 게 좋을 거다. 더 큰 돈을 만질 수 있는 영화 같은 건 나중에 도전할 생각이었다.
"왜요. 작가님. 혹시 써두신 시나리오 없으세요? 제가 작가님들 인터뷰를 많이 해보니 다들 감춰놓은 게 한둘씩은 있더군요."
"예. 저도 있긴 있습니다."
"오~ 진짜 궁금하군요."
이민영 총괄 디렉터의 표정이 갑자기 밝아졌다.
"있긴 있는데 당장 할 건 아닙니다."
"그럼 혹시 언제쯤······."
"내년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
그녀는 살짝 김이 빠지는지 아쉬워하는 모습이었다.
"디렉터님. 내년에 하면 되잖아요? 급하신 건 알겠는데요. 일에는 절차가 있는 법입니다. 제가 아직 완벽하게 준비가 안 됐어요."
"저희가 급한지 안 급한지 어떻게 아세요?"
"저 절대 글만 쓰는 사람 아닙니다. 기획사 프로듀싱&콘텐츠 총괄본부 실장이에요. 폭스사를 인수한 디플러스가 OTT로 맹추격 중이잖아요. 거기다 전미 방송국 연합이라는 아군까지 얻은 거로 알고 있습니다. 더구나 미튜브도 오리지날을 끼고 성장세가 장난 아니라고 들었고요. 그래서 넷플릭이 정체된 서구권 대신 아시아 시장을 노리고 한국 제작사, 방송국과의 협업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것도 알고 있고요."
역시 사람은 공부해야 하는 것 같다. 독립하려고 공부를 좀 해놨더니 이런 곳에서 써먹는구나.
"네. 맞아요. 아시아에서는 한류가 최고의 콘텐츠죠. 한국 콘텐츠 업계를 선점하는 자가 아시아를 선점하는 겁니다. 그런 면에서는 지금까지는 저희 넷플릭이 디플러스보다 한 수 위입니다."
"JTVC랑 CA 그룹하고 계약을 체결했다고 해서 안심하지 마세요. 다른 방송국의 저력을 무시하면 곤란합니다. 아시죠? 한국 방송업계가 엄청난 경쟁을 거치면서 살아남았잖아요? 다른 나라와 비교해봐도 정말 치열하게 경쟁해서 경쟁력을 갖췄습니다. 애초부터 수출을 목표로 드라마를 만들었으니까요."
"당연히 잘 알고 있습니다. 저도 한국인인데요. 다만 국내 지상파 방송국은 자체 OTT를 하려고 하니까요. 저희랑 협상이 잘 안 되죠. 수익 배분도 받아들이지 않고요."
"음. 우리나라 업체들도 각개 전투 좀 그만해야 되는데 말이죠."
"어쨌거나 방송국이 망하진 않겠죠. 작가님 작품에 나오는 부익부 빈익빈 같은 현상이 일어나겠지만······."
농담처럼 그녀가 쉽게 말을 하고 있었지만 정말 깊이 고민해야 할 문제였다.
"작가님.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시는 거 아닌가요? 어차피 작가님은 갑이에요. 플랫폼들이 피 터지게 싸우는 동안은 제작자들은 그걸 누리시면 됩니다. 너무 쉽죠?"
이 사람은 정확히 자신들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 갑자기 그녀가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싸우는 동안이라······.’
거대 플랫폼끼리 피 터지게 싸우고 나중에 이긴 사람이 다 먹는다는 건가? 솔직히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인터넷의 자정작용을 믿는 사람이다. 그렇게 크리에이터들에게 피해가 갈 확률은 낮아 보였다. 각국 정부와 사용자들이 그것을 막으려고 할 게 뻔했다.
역시 나는 콘텐츠나 제작해야 할 듯 싶었다. 그게 바로 내가 제일 잘하고 좋아하는 분야니까.
글로벌 플랫폼들이 서로 크로스 카운터 펀치를 날리든 이단옆차기를 하든 재밌는 거 잘 만들어내는 사람이 장땡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냥 팝콘이나 먹으며 싸움 구경이나 할 생각이다.
"총괄 디렉터님. 올해는 제가 좀 곤란하네요."
나는 일단 1차로 오늘은 거절할 생각이었다. 독립하려는 내 속마음을 미리 알려줄 필요는 없어 보였다. 내년이 되면 플랫폼 간 경쟁이 더 치열해져서 더 높은 몸값을 받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난 어찌 됐든 빅데이터가 선택한 남자 아니던가?
하하! 생각할수록 멋진데?
갑자기 웃음이 실실 나오는데 앞에 넷플릭 담당자가 떡하니 버티고 있으니 어쩔 수 없이 표정 관리를 해야 했다.
이민영은 내가 1차로 거절하자 뭔가 다급해진 표정이었다.
"작가님 혹시 독립하실 생각 없으세요? 제가 보기엔 충분히 하셔도 될 거 같은데요. 작가만 하셨던 분도 아니고 오늘 대화를 나눠보니 미래 비전도 충분하신 거 같으신데 저희가 원고료를 최고 수준으로 맞춰드릴 수도 있습니다."
"네에?"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경악하고 말았다. 독립? 최고 수준의 원고료? 이거 혹시 빅데이터로 내 속마음이라도 들여다본 거 아냐? 최고 수준 원고료 어쩌고 하는 걸 보니 꽤 급하긴 급한 모양이다.
어찌 됐건 플랫폼의 기능이 비슷해진다면 결국 사활을 가르는 건 킬러 콘텐츠일 게 분명했다.
"총괄 디렉터님 생각은 한번 해볼 테니까 얼굴 좀 푸세요. 미간에 주름 생기면 큰일 납니다."
"아! 네. 죄, 죄송합니다."
"연락처 주시면 거기로 제가 대본 하나 보내드릴게요. 이미 생각해 놓은 게 있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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