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급 캐릭터의 탄생 (2)>
"꺄아아아······."
드라마가 끝났지만, 아직도 나유정은 좋아 죽겠다는 듯 발을 동동거리고 있었다.
‘하여간 호들갑은······.’
급기야 나유정은 드라마에 나온 자신의 터프한 모습을 보고 짜릿함을 참지 못하겠는지 소파 위로 올라가 오두방정을 떨고 있었다.
우지직···.
갑자기 소파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더니 한가운데가 푹 꺼지며 나유정이 휘청거리는 게 아닌가!
나는 넘어지려는 그녀를 잡기 위해 곧바로 팔을 쭉 뻗었다. 내 반대 방향으로 쓰러지려던 나유정의 팔목을 잡고 내 쪽으로 강하게 끌어당겼다.
휘익······.
나는 그녀를 안전하게 잡기 위해서 자세를 취했고 나유정의 몸이 내 품에 안겨 왔다.
"괜찮아요?"
"아흐...."
"괜찮냐고요. 어디 다친 곳 없어요?"
"괘, 괜찮아요. 그런데 저 좀 그만 놓아주면 안 돼요?"
"아······."
나는 안고 있던 그녀를 황급히 놓아주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의 시간이 찾아왔다.
"히잉. 아끼는 소파가 망가졌네. 자기 좋게 내 체형에 딱 맞춰놓은 거였는데 아깝다."
"흠흠. 서식지가 여기였어요? 어쩐지 가구 중에서 소파가 제일 낡았더라. 언제 한번 가구나 같이 사러 가시죠? 집도 휑한데 제가 인테리어 멋있게 꾸며드릴게요. 광명 가구 단지 한 번도 안 가봤죠? 진짜 재밌어요. 볼 것도 많고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를 겁니다.“
"준형 씨 궁금한 게 있는데요.“
"네. 말씀해보세요."
”아까 좋았어요?"
"무, 무슨 소리예요? 좋긴 뭐가 좋아요?"
"뭐긴 뭐에요. 톱스타를 안아본 소감이죠."
나유정이 큰 눈을 깜빡이며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솔직히 아까 CF를 찍은 직후 멋지게 차려입은 모습이었다면 약간 설렐 수도 있었겠지만, 내 여동생보다 더 편하고 막 나가는(?) 스타일······. 음 이건 너무 좋게 말한 건가?
후줄근한 스타일로 노메이크업에 (물론 지금도 예쁘긴 하지만) 머리를 틀어 올린 그녀를 보고 있자니 그런 감정이 지하실로 쑥 내려갔다. 사고 후 심미안이 급격히 올라가서 그런지 몰라도 사소한 거에 상당히 민감해진 상태였으니까.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아무 생각이 안 났습니다만?"
"치. 거짓말."
"거짓말이 아니고 진짜예요. 부모님의 명예를 걸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무슨 또 부모님까지 들먹여요. 어이없네."
"그 정도로 단호하다는 말입니다."
"됐고요. 이제 단단하죠?"
"네에? 뭐가 단단합니까?“
갑자기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예전에 내 몸이 물렁물렁 하다면서요. 지금은 어떠냐고요. 열심히 운동해서 만든 탄탄한 몸인데······."
유정 씨가 빠르게 말하지 않았다면 순간적으로 오해할 뻔했다.
"아이···. 자꾸 당황스럽게 할거에요? 뭐 솔직히 좀 놀랍긴 합니다. 얼마나 열심히 운동했는지 티가 나긴 나요."
"그렇죠?"
나유정은 꽃받침 마냥 두 손 위에 얼굴을 올려놓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아우. 오늘 왜 그래요. 어디서 그런 거 배워왔어요? 예전 그 도도하고 차가웠던 유정 씨 어디 갔어요? 예? 원래 이렇게 푼수였습니까?"
"하! 푼수라뇨. 말이 심하네. 걸그룹하고 놀면서 요즘 유행하는 애교 좀 배웠어요. 하트 뿅뿅 이게 어때서요?“
그녀는 그렇게 말을 하며 손가락 하트를 나한테 들이밀었다. 허허. 왜 이러지?
"그리고 말씀 잘하셨네요. 제 모습 어디 갔냐고요? 글쎄요. 나도 몰라요. 예전에는 감정을 숨기고 살았는데 준형 씨 드라마를 찍으면서 뭔가 바뀐 것 같아요. 이게 원래 내 모습인가 싶기도 하고···."
"난 그냥 푼수였냐고 물어본 건데···. 왜 자기 고백을 합니까? 사이코 드라마 찍어요?"
"아무튼, 그렇다고요."
"그런데 아까 사워 신하고 영화 아저씨 오마주한거 보니까 조명 때문인지 몰라도 달라진 몸이 대단해 보이긴 했어요. 나중에 반응 나오면 알겠지만 크게 화제가 될 거 같습니다."
"그 정도로 강렬했나요?"
"아무래도 우리나라에선 아예 없던 캐릭터니까요. 할리우드로 따져도 견줄 만한 캐릭터가 나즈마 써먼 정도나 있을까."
"아흐흐흐...."
다시 손으로 입을 가리고 발을 동동 구르며 좋아하고 있는 나유정을 보니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좋습니까?"
"당연히 좋죠! 여배우가 이런 캐릭터를 언제 또 해보겠어요."
"뭐. 좋다니 다행입니다만······."
나유정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검도 자세를 취하며 칼을 휘두르는 시늉을 했다. 그러더니 칼집에 칼을 꽂는 동작을 한 후 한쪽 무릎을 꿇고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각골난망(刻骨難忘)! 이 은혜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사부······. 아니 이 작가님!"
어라? 아니 이 아가씨가 혹시 무협지도 읽기 시작한 건가? 요즘 무협지의 인기가 슬슬 올라오고 있던데 말이지.
나는 나유정의 장난스러운 연기에 맞장구를 쳐주기로 했다.
"어험! 그래. 그리 알면 되었다. 내가 널 업어 키웠다는 것을 항상 명심, 또 명심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갑자기 속이 더부룩 하구나. 콜라 좀 내오도록 해라."
".........."
내 말을 듣고 고개를 처들은 나유정의 표정은 그야말로 아니꼽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툴툴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냉장고에서 시원해진 콜라 캔을 꺼내왔다.
"어허. 서비스는 좋은데 표정이 만족스럽지 않구나. 얼굴 좀 피거라."
나는 만면에 미소를 띄운 채 콜라 캔 뚜껑을 땄다.
푸시시식....
그럼 그렇지. 역시 내 예상이 적중했다. 아마도 나유정이 콜라 캔을 꺼내면서 강하게 이리저리 흔든 것 같았다. 뚜껑을 따자마자 거의 폭발하듯 콜라가 튀어 나왔다.
나는 사태를 충분히 예상하고 바로 뚜껑 입구를 나유정을 향해 겨냥했다. 곧바로 그녀의 얼굴과 상의에 콜라가 튀고 말았다.
"꺄악!"
"제자야. 마음을 곱게 써야지. 너의 얄팍한 수를 모를 줄 아느냐? 다 부처님 손바닥이니라. 나는 이만 가 볼 터이니 꼭 씻고 자도록 하거라. 그리고 조만간 가구를 사러 가자꾸나."
"아이씨······. 짜증 나!"
나는 그녀가 열폭하기 전에 얼른 사라지기로 마음먹고 핸드폰을 챙긴 후 후다닥 집을 빠져나왔다.
비록 그녀가 장난스럽게 이야기했지만 고마워하는 마음은 나에게 충분히 전해졌다. 나지혜는 누가 뭐라 해도 내가 창조한 캐릭터였으니까.
자신이 꼭 해보고 싶었던 캐릭터를 그야말로 200%로 멋지게 유형화시켜줬는데 고맙지 않겠는가?
"이런게 작가로써 보람인건가? 후후...."
갑자기 코가 간지러워 손등으로 코를 훔쳤는데 내 손에 나유정의 냄새가 아직도 살짝 남아 있는 것 같았다.
"크흠...."
* * *
다음날 일어나자마자 언론과 시청자들의 반응이 궁금해 컴퓨터를 켰다.
어제 방송됐던 나만의 세계에 대해 난리가 난 상황이었다.
[파죽지세! 나만의 세계 시청률 34% 돌파!]
[역대급 캐릭터의 탄생? 나유정의 피 튀기는 액션. 그리고 그걸 가능하게 만든 스토리의 힘]
지난주 방영된 JTVC 금, 토 드라마 나만의 세계가 종편의 역대 드라마 시청률을 가볍게 뛰어넘으며 질주를 계속하고 있다.
중반의 충격적인 반전도 모자라 이번엔 영화 아저씨의 실감 나는 액션까지 선보이고 있다. 그 액션 연기를 보여주고 있는 주인공은 다름 아닌 나유정이다.
그녀는 전작에서 아이돌 덕질에 빠진 개성 있는 캐릭터를 실감 나게 연기하며 찬사를 받았다. 그 당시 나유정 연기 경력에서 역대급 캐릭터가 나왔다고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역대급 캐릭터를 새롭게 갱신하며 시청자들에게 엄청난 몰입감을 선사하고 있다.
특히 여성 팬들은 나유정이 어떤 액션 연기를 펼칠지 강하게 기대를 하는 것 같다. 드라마 말미에 칼을 쥐고 적들의 아지트로 쳐들어가는 그녀의 모습에 장엄한 비장미까지 느껴진다며 열광해 마지않고 있다.
비평가들은 2000년대 이후 최고의 여성 캐릭터가 나온 것 같다며 조심스러운 예측을 하고 있다. <중략>
그리고 이런 비현실적인 캐릭터에 생동감을 불어 넣은 건 스토리라고 단언할 수 있다. 불륜 드라마에 뜬금없이 여자 검도 세계챔피언이라는 설정을 왜 욱여넣은 것인지 이제야 밝혀졌다.
이준형 작가는 나지혜라는 캐릭터에 시련을 주어 그 캐릭터가 펼치는 분노의 핏빛 액션에 힘을 실어줬다. 겨우 두 번째 작품을 쓰는 작가지만 대가들의 작품과 비교해봐도 전혀 손색이 없다는 중론이다. <중략>
오호! 기자가 내 드라마 팬인가?
기사에 가장 멋있었던 나유정의 사진을 같이 첨부하고 있었다. 방송이 끝난 후 JTVC 스튜디오에서 배포한 스틸 샷이었는데 칼을 들고 얼굴에 피가 튄 비장미가 감도는 사진이었다.
킬빌하고 비슷한 캐릭터이긴 한데 액션은 상당히 달랐다. 보면 살짝 헛웃음이 나오는 킬빌의 액션과 달리 실전으로 가득 찬 영화 아저씨 스타일이다. 정혜성 사범과 정두형 무술감독이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었다. 그들은 정말로 실전형 액션을 보여주기 위해 고
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그리고 나는 헌터물의 탱커, 딜러 개념을 드라마에 그대로 가져왔다.
여자라는 신체적 불리함을 보완하기 위해 합기도 고수라는 탱커역의 김하진이라는 캐릭터를 창조한 것이다. 덩치가 큰 김하진이 앞에서 몸빵을 하고 치명적인 공격은 딜러인 나지혜가 한다.
다음 화에서 둘의 콤비네이션으로 사이코패스들의 아지트인 별장을 초토화할 예정이었다.
나는 기사를 읽다가 거실로 나왔다.
"준형이 일어났니? 얼른 와서 아침 먹어라."
부엌에서 엄마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머리를 긁적이며 식탁에 가 보니 나를 제외한 가족들 전부가 밥을 먹고 있었다. 나는 사과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달콤한 과즙이 정신을 맑게 해줬다.
"둘째야. 어제 유정 씨랑 신혼 놀이 하고 왔니?"
숟가락을 들고 있는 아버지가 고개를 들어 음흉하게 씩 웃고 있었다.
"켁.... 그, 그게 무슨 헛소리에요. 신혼 놀이는 무슨! 그냥 드라마 모니터링 했어요.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지 마요. 큰일 납니다."
"야 인마. 같은 집에서 밥 먹고 늦게까지 TV보고 그러면 신혼 놀이지. 안 그러냐? 너 그냥 거기 들어가서 살아라. 나 연예인 며느리 좀 보자. 친구들한테 자랑 좀 하게."
"아오.... 기각입니다. 기각."
"아니 왜? 너 혹시 성 정체성에 이상이 있거나 그런 건 아니지?"
"저기요. 저 엄청 건강하거든요?"
"그런데 왜 그래? 혹시 유정 씨에게 빚이 좀 많니?"
"빚이요? 아뇨. 돈 엄청 많아요. 평범하게 쓰면 죽을 때까지 써도 못쓴대요."
"그래? 그런데 넌 왜 그래? 아무 느낌이 없어? 저번에 스캔들도 났잖아."
".........."
약간 이상한 여자예요······. 이거 솔직히 말할 수도 없고 참 답답하다.
"우리 아들이 키도 크고 잘 생겨서 어디 가서 꿀리는 외모도 아니고···."
"어, 엄마까지 왜 그래."
"잘 좀 해봐."
"아이 씨! 아무 사이도 아니라니까!"
나는 숟가락을 탁 소리가 나게 식탁에 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앉아라. 농담이다."
형이 담담한 음성으로 내 팔을 잡고 나를 다시 자리에 앉혔다.
"드라마 진짜 재밌더라. 우리 병원 직원들도 네 드라마 이야기 맨날 하더라.“
평소에도 항상 묵직한 형이 이런 소리를 하니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 그래?"
"오빠. 진짜야. 내 친구들도 그 드라마 얘기 진짜 많이 해. 대박이더라. 근데 그거 쓴 작가가 친오빠라고 말해도 돼?"
"어. 당연히 해도 되지. 뭘 그런 걸 숨기냐? 엄마랑 아빠는 벌써 친구들한테 다 까발렸잖아."
"하긴! 헤헤헤. 알았어.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 다닐게"
여동생 주리가 웃고 있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누군가에게 자랑스러운 존재가 된다는 건 언제나 기쁜 일이었다.
그렇게 가족들과 주말을 보내고 회사에 출근했다.
나는 오랜만에 나우민, 조형택 팀장과 옥상에서 노가리를 풀고 있었다.
"이준형 실장 드라마 대박 축하해. 나 드라마 보다가 지렸다. 너무 재밌더라."
"넌 그런 재능 놔두고 왜 매니저를 지원했냐? 진짜 미스테리네. 미스테리. 뭐 지금은 회사에서도 나보다 높은 실장이라 할 말은 없지만······."
"형님들. 제가 잘나서 그러는 걸 어떡합니까?"
"암! 우리 준형이가 잘나긴 잘났지. 내가 그래서 처음 보자마자 잘해줬잖아.“
나우민 팀장이 나와 어깨동무를 하며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에이~ 그건 같은 동네라 그런 거 아니었어요?"
"노노노~ 한눈에 딱 들어오더라고. 이건 정말이다."
"어이 나 팀장. 속보이게 아부 좀 그만해라."
"아부 아냐 인마. 내가 준형이한테 무슨 아부를 하냐."
"준형이를 알아본 건 나지. 생과 사를 같이 넘나든 사이 아니겠냐. 나와 준형이는 피만 나누지 않았지 형제나 마찬가지야. 암 그렇고말고.“
형택이 형은 팔짱을 낀 상태로 이두박근을 움찔거리며 말을 하고 있었다.
"조블리 팀장. 구라 좀 그만 치시지? 테리우스 애들 새벽 출근 맨날 시킨 거 모를 줄 알아?"
"무, 무슨 소리야. 이 자식이 사람 모함하네."
"아이고 형님들. 그만 좀 하세요. 제가 조만간 거하게 한 번 쏠게요."
"역시! 우리 이 실장님만 믿습니다!"
그들은 엄지를 내밀며 나를 추켜세우고 있었고 그렇게 시답지 않은 농담을 하며 옥상에서 시시덕거리고 있는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자 : 이민영 넷플릭 코리아 총괄 디렉터 ]
응? 이민영 총괄 디렉터네? 벌써 몸이 달았나? 나 차기작 아직 할 생각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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