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급 캐릭터의 탄생 (1)>
처음 나유정이 동영상을 올렸을 때는 그녀의 SNS를 팔로우하는 팬들만 댓글 놀이를 하며 즐거워했다.
-언니. 시청률 30% 축하해요. 그리고 댄스 커버 대박입니다!
-유정 씨. 드라마 너무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춤도 이렇게 잘 추시다니요. ㅠㅠ
-우리 언니. 못하는 게 뭐임? 블랙소울 댄스 커버라니! 넘나 소중한 거!
-옷이 좀 야시시 한 거 아니에요?
-춤도 잘 추시고 예쁘기만 하고만. 혹독한 운동으로 단련된 다부진 몸매잖아요! 저렇게 열심히 단련해본 적 없는 사람들이 꼭 그러더라.
-유정 씨가 드라마에서 경찰 역할로 나오긴 하지만 너무 과하게 운동하신 거 아님? 무슨 압축 근육도 아니고 팔 근육이 저리 갈라집니까?
-난 보기 좋은 거 같음. 너무 멋있잖아!
-게임 속에 나오는 라라 크로퍼드가 케이팝을 춘다!
-어? 인형이 움직인다.
-그런데 매니저님 어디 가심?
역시나 SNS 팔로워들은 나유정 전문가라 시청률 30% 공약이 어떤 것인지 아주 잘 아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내가 어디 갔냐는 질문이 간간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나유정의 뛰어난 춤 실력으로 내 이야기가 거의 묻힌 것이다.
‘오케이! 좋았어! 계획대로 되고 있어.’
나는 댓글 반응들을 살펴보고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다 일부 팔로워들이 해당 영상을 인터넷 커뮤니티에 옮기기 시작했다.
[제목 : 대세 배우의 흔한 걸그룹 댄스 커버 영상]
-뭐냐. 또 나유정의 ‘흔한’ 시리즈 올라온 거임?
-오! 나유정 춤 잘 추네요. 얼마나 연습했길래 이 정도까지 추는 거지? 아마추어치고는 거의 최고 수준 아님?
-에이. 그건 너무 나갔다. 그냥 좀 추는 수준이네요. 학예회는 나갈만한 수준 인 듯.
-윗분 무슨 한신예고 다니세요? 어느 학예회에서 저 정도로 잘 춘답니까?
-안녕하세요. 강남에서 댄스 학원에서 강사를 하는 댄서입니다. 제가 분석해봤을 때 나유정은 자질이 훌륭하네요. 일단 몸이 완벽하게 준비된 상태입니다. 빠르고 힘도 좋고요. 그리고 전문적인 트레이너에게 집중적으로 개인지도를 받은 것 같네요. 전반적으
로 아주 훌륭한 댄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웃기시네. 네가 댄스 강사라면 난 YN 엔터 댄스 트레이너다.
-이거 블랙소울의 춤이라 좀 쉬운 거 아님?
-어떤 새끼가 블랙소울 춤이 쉽대? 빡때가리임?
-혹시 소싯적 나유정을 잘 아는 사람? 예전에 걸그룹 데뷔 준비조 이런 거 아니었음? 보면 SJ 출신들이 이러잖아.
-절대 아님. 나유정은 아역배우 출신이고 쭉 배우 길만 걸었음. 죽은 엄마가 소속사 차려서 1인 기획사였음.
-그럼 이 춤 실력은 뭐임? 혹시 체격이 비슷한 다른 사람 아니냐?
-눈이 썩었냐? 딱 보면 모르겠어? 나유정 맞잖아. 3년간 은둔 생활 하면서 폐관 수련이라도 했나 보지.
- ㅋㅋ 의외로 드라마처럼 아이돌 덕질하면서 사는 거 아니냐? 혼자 거울 보고 춤 연습하면서······.
- 미친놈들 왜 이리 많노? 대배우한테 덕질이라니? 열심히 해도 음모론으로 몰아가네. 하여간 이 백수 같은 놈들! 아무것도 안 하는 네놈들하고 백날 비교해봐라. 너흰 절대 모를 거다.
나는 관련 반응들을 쭉 살펴보다가 마지막 부분 댓글을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이돌 덕질하면서 사는 거 아니냐는 추측에 순간적으로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와! 대박! 진짜 소름 끼치는 추리로다!"
물론 농담으로 썼겠지만 이런 정확한 추측성 댓글들 보면 네티즌 수사대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곳곳에서 난장 토론이 펼쳐진 가운데 급기야 대세 케이팝 걸그룹인 블랙소울의 혜수가 자신의 SNS에 올린 게시물에 나유정이 커버한 댄스 영상을 링크했다.
[최근 재미있게 봤던 슬기로운 덕질생활의 유정 언니가 시청률 공약으로 추신 저희 곡 댄스 커버입니다. 너무 잘 추셔서 깜짝 놀랐고요. 보고 싶어요. 언니. ㅠㅠ]
나유정 영상은 블랙소울 혜수의 게시물로 인해 성난 들불처럼 번져갔다.
급기야 나유정이 그 글에 직접 찾아가 댓글까지 손수 남기는 정성(?)을 보여줬다.
-보면 되지. 언제 한번 밥이라도······. 제일 비싼 거로 사줌.
그 글이 온라인에 싹 퍼지며 일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과연 블랙소울과 나유정이 진짜로 만날 것인지 그리고 언제 만날 것인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었으니까.
연예부 기자와 기레기들이 떡밥을 놓칠세라 경쟁적으로 기사를 쓰고 있었다.
[놀라운 수준의 댄스 실력을 선보인 갓유정!]
[시청률 공약을 이행한 나유정! 걸그룹 블랙소울과 만나나?]
[나유정과 블랙소울 혜수는 어떻게 아는 사이?]
[수준급 댄스 커버 영상을 올린 나유정 블랙소울 영입?]
[나유정을 블랙소울 제6의 멤버로!]
[이 커플(?) 왜 이러나. 매니저와 연예인이 아이돌그룹의 제6의 멤버······.]
뭐야. 이 기사 제목 쓰레기네. 아니 그리고 커플이라니? 어떤 기레기야? 인제 그만 좀 하라니까.
해도 되는 이야기가 있고 해서는 안 될 이야기가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데일리 연예서치 놈들이다.
"오보네요. 쏘리" 하면서 배를 째며 땅바닥에 드러눕는 놈들이다.
"한승호가 정권을 잡으면 1순위로 처리해야 할 놈들이야. 특급 지하감옥행 열차를 탈 놈들!"
나는 씁쓸한 기분으로 기사를 훑어보는 중이었다. 그래도 반응이 좋아서 다행이었다.
그런데 내가 간과한 게 있었다. 블랙소울은 여자 슈퍼노바로 불리는 전 세계 인기 그룹이다. 더구나 혜수의 팔로워 수는 자그마치 2천만 명이었다.
한국 연예계를 잘 모르고 블랙소울만 알던 전 세계의 많은 팬에게 혜수의 sister로 잘못 번역돼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그렇게 해프닝은 몇일간 계속 되었다.
* * *
그 주 금요일 7, 8화는 김인애 대신 나지혜가 아지트에 잠입을 시도하는 줄거리였다. 물리적 증거를 잡기 위해 미션 임파서블을 찍는 그녀였다.
이준환 감독은 숨 막히는 잠입 신을 맛깔나게 연출했다. 하지만 나지혜는 재수 없게도 지하 미로에서 덜미를 잡혀 감옥에 투옥되고 만다.
거기서 나지혜는 식인을 하는 최악의 사이코패스 이혁을 보고 기겁하게 되는데···. 하지만 운 좋게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는 그녀였다.
결국, 나지혜의 정체가 한승호에게 보고된다. 그리고 그녀를 짝사랑하던 김하진은 사라진 나지혜를 찾기 위해 사방팔방 그녀의 주위를 뒤지기 시작한다.
8화 최종 시청률은 32%를 찍고 JTVC 창사 이래 최고 드라마 시청률을 달성했다. 이제 겨우 절반이 지난 시점에서 모든 종편 드라마의 시청률 갈아치우는 신기록을 세워서 그런지 JTVC에서는 특집 프로그램과 예능에서까지 총력전으로 내 드라마를 홍보해줬
다.
‘역시 시청률이 깡패네. 가만히 있어도 온종일 여기저기서 홍보를 해주잖아? 나는 그냥 꿀만 빨면 되네?’
그리고 다음 주 금요일 오후에 CF를 찍고 퇴근하던 나유정을 회사에서 만났다.
"준형 씨. 이번 주도 같이 드라마 본방사수 해야죠? 이제 곧 하이라이트 부분 나오잖아요. 칼로 샥샥! 피가 뿜뿜!"
"차암~ 표현 한번 저렴하네요. 그리고 왜 또 접니까? 같은 멤버들하고 좀 보시지 그래요?"
"멤버요? 무슨 멤버요?"
"누구긴 누구예요. 블랙소울이지. 그저께도 같이 밥 먹었다면서요. SNS에 떡하니 자랑스럽게 사진을 올려놨던데······."
"아······. 난 또 무슨 소린가 했네. 걔네들 뉴욕 갔어요. 최근에 신곡 홍보하느라 어제까지 국내 스케줄 돌았어요. 고생이 많길래 제가 최고급으로 밥 좀 사줬어요. 아시죠? 저 돈 많은 거······."
"아. 눼눼···."
"비꼬지 말아요. 좋아하면 사줄 수도 있지."
"집에 블랙소울 애들 사진은 하나도 못 본 거 같은데······. 그리고 유정 씨가 사주긴 뭘 사 줘요. 전 세계에서 노는 애들인데 돈이 없겠어요?"
"노노! 아니에요. 물어보니까 인당 내 50분의 1도 못 벌었던데요?"
".........."
크흠. 이 아가씨 도대체 돈이 얼마나 많길래? 휴.... 말을 말자.
"얼른 가서 밥 먹고 드라마 봐요. 아 떨려. 드디어 나지혜 각성 모드네요."
나유정은 대뜸 나를 보며 얼른 자기 집으로 가자고 보채고 있었다.
"저기요. 그만 좀 보채요. 아예 집에 들어와서 살라고 하지 그래요?"
"뭐에요. 그거 좋은 아이디어인데요? 이참에 우리 집으로 들어와요. 맨날 왔다 갔다. 귀찮지 않아요? 집도 커서 휭하니 좀 그런데···."
하긴 나유정의 집이 크긴 컸다. 한강 조망권인 40평대의 최신 아파트니까.
하지만 우리가 부부도 아니고....
나는 어이가 없어서 그녀의 얼굴을 보며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유정 씨. 지금 저한테 고백하는 겁니까?"
"흥? 지금 제가 고백하는 것처럼 보여요?"
아니. 전혀 그렇게 안 보인다.
"아니요. 그냥 해본 말입니다. 혹시 가정부나 노약자 돌보미 같은 서비스를 찾는 건 아니죠?"
나유정은 내 말에 표정이 변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다, 당연히 아니죠. 그냥 집이 적적해서······."
"유정 씨. 저번에 그렇게 기사가 났는데도 그런 농담이 나옵니까?"
"제가 그런 스캔들 같은 거 신경 쓸 위치는 아니잖아요?"
"어우. 아주 잘 나셨어요. 일단 잠시만 기다려요. 사무실 좀 정리하고 나가시죠."
우리는 그렇게 마포로 이동했다.
이번에는 배달을 시키지 않고 요즘 뜨는 유명한 샌드위치 가게에서 다양한 메뉴를 사 들고 왔다. 우린 서로 배가 터지게 음식을 폭풍흡입 한 뒤 배를 두드리며 드라마를 감상했다.
드디어 9화가 시작되었다.
감옥에 갇혀 있다가 천신만고 끝에 겨우 탈출한 나지혜는 세상에서 이 조직을 지워버리기로 결심을 굳힌다.
지하 감옥에서 말단 조직원을 한 명 죽이고 몰래 가져온 밀수 총기를 가슴에 품고, 전당포에 맡겨놨던 진검을 훔쳤다. 그리고 모든 전자기기를 버리고 감시를 피해 농가 주택으로 숨어드는데···.
화면에는 마치 여전사의 눈빛과 몸을 하고 있는 나유정의 섬뜩한 연기가 펼쳐지고 있었다.
그녀는 찬물로 샤워를 하고, 깨진 거울을 보며 분노를 곱씹었다. 그리고 차마 머리를 자르지 못하는 자신을 저주하며 주변 물건을 다 때려 부쉈다.
‘음······. 샤워 장면은 무조건 이슈 클립으로 뜨겠다.’
갑자기 추가한 장면이었지만 뇌리에 강렬히 남는 신이었다. 나는 연기에 집중하지 못하고 입술을 오물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사이코패스 집단을 쓸어버리기 위해 무장을 한 후 어둠 속에서 별장을 노려보는 나유정. 하지만 별안간 김하진이 나타나고 그녀와 실랑이를 벌인다. 나지혜의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하는 김하진.
사실 사이코패스 조직은 탈출한 나지혜를 찾지 못하자 그녀 주변 사람들을 전부 다 통째로 감시하는 중이었다. 결국, 김하진을 따라다니던 3명의 조직원이 그들 앞에 나타나게 되는데···.
나지혜는 그들과 마주치자마자 옆에 차고 있던 칼을 번개처럼 뽑으며 제일 앞에 있는 사내의 목을 치더니 오른쪽에 서 있는 사내의 심장에 칼을 찔러 넣었다.
목이 반쯤 잘린 남자가 분수처럼 터지는 피를 손으로 막으며 그 자리에서 천천히 허물어지는데······.
마지막 남은 조직원이 급하게 품속에서 총을 꺼내려고 했으나 칼을 심장에서 빼낸 나지혜가 일 검으로 그의 팔을 무자비하게 날려버린다.
뎅겅.... 푸학....
역시 여자부 검도 세계챔피언다운 솜씨였다. 이미 죽이기로 마음먹은 그녀에게 자비란 없었다.
3명의 조직원을 인정사정없는 3연 격으로 썩은 집단 베어 넘기듯 처리해버리는 나지혜였다.
‘특수효과 오지네. 상당히 잔인하군.’
아닌 게 아니라 정말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액션 장면이었다. 이 모든 움직임은 정혜성 사범의 작품이었다.
"지혜야! 이, 이게 무슨 짓이야. 진정해. 진정하라고!"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첫 번째 조직원에게 다가가 심장에 칼을 쑤셔 박는 그녀를 제지하려고 하지만 그녀는 그를 돌아보며 차가운 말을 건넸다.
"이 녀석들은 살아있을 가치가 없는 쓰레기 같은 놈들이에요. 나를 진짜 먹으려고 했다고요. 산채로! 이 개새끼들 제가 싹 다 죽여버릴 거에요. 으드드득"
피를 뚝뚝 흘리고 있는 칼을 꽉 쥐고 있는 가녀린 손이 화면에 잡히더니 카메라가 천천히 돌며 피가 튄 나지혜의 얼굴이 서서히 클로즈업되고 있었다. 카메라에 잡힌 그녀의 눈은 번들거리는 광기로 물들어 있었다. 그녀의 감쳐둔 흉성이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그녀는 칼을 쥐고 어둠을 헤치며 별장으로 빠르게 뛰어갔다.
‘흐어.... 카, 카리스마...’
내가 만들었지만, 너무 강렬하고 매력적인 캐릭터였다.
그걸 온전히 사실적으로 연기하는 나유정은 또 어떻고?
‘하아. 이건 대박이다.’
옆을 힐끔 보니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좋아죽는 나유정의 모습이 보였다.
드디어 진땀 나는 드라마가 끝나고 갑자기 [아저씨 파트2]가 된 나만의 세계에 대한 감상평이 SNS와 커뮤니티에 폭발적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 소광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