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달라진 대우 (1)>
놀랍게도 나만의 세계 4화가 28.4%라는 경이적인 시청률을 달성했다.
아마도 나와 나유정의 스캔들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기 때문인가 싶었다. 드라마를 모르던 사람들도 기사를 보며 호기심을 가지게 된 게 시청률 폭등의 주된 원인이었다.
그리고 '크로스 카운터' 움짤도 흔한 연예인과 매니저의 놀이라는 제목으로 큰 화제가 되어 한동안 실시간 검색어를 장악하기도 했다.
기사에 어그로가 끌려서 드라마의 시청률이 많이 올랐지만 4화를 기점으로 여론이 급반전되었다.
드라마 스케일이 단순 치정극이 아니라는 게 밝혀지며 한국적인 막장 감성과 미드의 설정이 교묘하게 잘 섞인 웰메이드 드라마라는 평가가 줄을 이었다. 더구나 초반부터 화면으로 연출하는 세기말적 감성이 묘한 몰입감을 선사하고 있다는 감상평이었다.
3, 4화는 김인애가 자료를 모으고 세부적인 계획을 세우며 나지혜를 서서히 파멸시켜가는 과정을 담고 있었다. 그녀의 담당 사건을 몰래 조작하기도 하고 용의자가 억울하게 폭력을 당했다는 거짓 신고를 부풀려 인터넷에 영상을 공개해 사회적으로 큰 곤경에 빠트렸다.
나지혜는 계속 발생하는 이상한 사건과 사고들로 패닉 상태에 빠지고 만다. 그녀는 지금까지 승승장구하던 엘리트 경찰이었기 때문에 이 상황이 낯설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추적이 거의 불가능한 흥신소를 써서 나지혜가 유부남 한승호를 유혹하려 한다는 찌라시를 경찰청에 배달을 시킨다. 물론 그 찌라시는 내부적으로 비밀에 부쳐지지만······.
경찰은 연쇄살인범을 연달아 검거하며 스타 경찰로 국민들에게 알려진 한승호의 이미지를 보호하기 위해 결국 나지혜를 업무상 과실로 1개월 정직 처분이라는 중징계를 내리게 된다.
그녀가 자신의 억울함을 한승호에게 토로하지만 일단 알았으니 잠시 자숙하라는 말을 듣고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는 그녀.
한승호도 주변의 시선 때문에 그녀를 만날 수 없게 되고 집과 가정을 오가는 예전 모습을 되찾게 된다. 하지만 김인애는 자신의 마음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걸 느끼게 된다.
그를 여전히 사랑하지만 미움과 원망이 생겨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이게 된다.
그래서 그녀는 동료이자 친구인 정신과 의사 김태원을 찾아가서 상담한다. 김인애는 상담 도중 감정에 북받쳐 눈물을 터트리고 남편인 한승호가 외도하고 있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고 만다.
하지만 김태원은 오래전부터 그녀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해서 가까워진 사이였지 진정한 동료나 친구가 아니었다. 그는 바로 괴조직의 수장이자 한승호의 오른팔이었으니까.
그는 그녀를 이해하는 듯 상담을 해주지만 그녀가 나간 후 이 사실에 대해 한승호에게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인애가 너를 의심하는 거 같으니 행동을 조심해야겠다며 충고를 했다.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가려는 김인애가 비밀을 지켜달라고 김태원에게 되돌아갔다가 그가 한승호와 통화하고 있는 내용을 우연히 듣게 된다.
그녀는 기겁하며 그때부터 한승호 주변의 모든 것들을 의심하게 되는데···
보고를 받은 한승호는 김인애에게 더 잘해주게 되고 당분간은 가정에 평화가 찾아온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겉으로 의부증이 치료되는 모습을 치열하게 연기하고 있었고 실제로는 한승호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서 주변을 살피고 있었던 것!
고가의 만년필 도청기를 구매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결국, 외곽의 별장에서 정기적인 모임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멀리서 그 모습을 관찰하는 그녀였다. 놀랍게도 모델이나 연예인으로 보이는 여자들도 별장에 드나들었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결국 만년필에 내장된 메모리를 확보하게 되고 충격적인 내용을 듣게 된다.
* * *
화면이 바뀌며 어두컴컴한 밀실에서 회의를 나누고 있는 3명이 화면에 나타났다.
깍지를 끼고 테이블 위에 손을 올리고 있는 한승호가 이영민을 쳐다보았다.
"영민아. 내가 대선 후보로 나가는 걸 반대하는 당내 의원들의 정보는 착실히 모으고 있는 거지?"
"약 80% 정도 모인 것 같아. 리더를 대선후보로 반대하는 의원치고 털어서 먼지 안 나는 놈들이 없더군. 재산을 불법적인 방법으로 불린 놈들이 제일 많았고, 괴상한 성적 취향으로 성추행이나 성폭행과 연관된 녀석들도 많았다. 심지어 살인자도 있었다. 나머지 20%도 곧 다 조사할 예정이다."
마치 기계와 같은 차가운 말투로 브리핑을 하는 이영민의 목소리. 김인애는 평소에도 한승호의 친구인 IT 재벌 이영민을 멀리했다. 그는 꼭 감정이 없는 사람 같았기 때문이다.
"재계는?"
"그쪽은 나하고 태원이의 클럽 조직원들이 같이 털고 있어. 재계 쪽이 정계보다 더 힘들더군. 그 녀석들도 사적인 조직들이 꽤 훌륭해. 음지에 뿌리내린 지 오래된 썩은 물들 말이야. 물론 우리 쪽 사람들이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있긴 하지."
그의 표정에서 왠지 모를 섬뜩함이 느껴졌다.
"그래. 영민아 고생이 많다. 수고 좀 더 해주고···."
"쳇! 죽어도 싼 놈들."
옆에서 묵묵히 브리핑을 듣고 있던 김태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나라를 제대로 바꿀 수 있는 건 위로부터의 조용한 혁명뿐이야. 협조하지 않는다면 털어주는 수밖에···. "
한승호의 평소 자상하고 젠틀한 말투가 아니라 180도 다른 마치 얼음장 같은 목소리였다.
"암···. 그럼 그럼 그렇고말고. 우리가 이 나라를 접수하기 위해 20년 동안 그렇게 착실히 준비해오고 있는 거 아니겠어? 그런데 리더! 옆방에 여자애들 계속 대기 중인데···. 난 가봐도 될까?"
"김태원. 정말 안전한 애들인가?"
"다 연예계에서 발을 담그고 있는 가난한 약쟁이들이야. 돈 많은 영민이가 시원하게 쏴줘서 엄청 고마워한다고.···."
"그렇군. 알았다. 난 네 녀석이 항상 걱정이다. 클럽원들 간수 잘하도록."
"킥킥. Don't worry~"
김태원은 경박했으나 한승호는 최대한 말을 아끼는 편이었다.
"아! 그리고 영민아. 우리 클럽 애들이 네가 빅데이터에서 추려준 악질 새끼들 다 잡아서 지하 감옥에 처넣었어. 알아서 골라서 재미있게 놀아라. 낄낄낄···"
"그래. 수고했다. 저기 문 옆에 상자 보면 현금이 들어 있으니 애들 나눠줘."
이영민이 문 앞의 사과 상자를 손으로 가리켰다.
"좋아. 좋아. 일도 잘 풀리고···. 재미도 보겠고···. 너무 좋구만. 킥킥···. 아··· 리더. 인애 씨 좀 잘 좀 해줘. 자꾸 의심하는 거 같잖아. 대선 후보가 되려면 아직 장인어른 힘이 필요한 거 아냐?"
"···..그건 내가 알아서 한다. 혹시 모르니까 직장에서 잘 지켜봐."
"낄낄낄···. 오케이."
김형탁의 소름 끼치는 사이코패스 연기였다. 김인애 앞에서는 순박하던 사람이 180도 바뀌어 배트맨에 나오는 조커 연기를 하고 있었다.
김형탁의 연기력도 보통이 아니었다. 나는 그의 연기를 보고 소름이 끼쳤다. 분명 시청자들은 충격에 빠졌으리라.
이 별장 회동에서부터 극의 분위기가 갑자기 미드처럼 급반전된다. 이것을 위해 극 중에서 세기말적 시대적 배경과 잔인한 강력 사건들을 계속 비춘 것이다.
사전에 왜 그런 장면들이 들어가는지 의문을 품고 있던 사람들은 이 4화를 보고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김인애는 집에서 녹음된 음성 파일을 들으며 이게 도대체 무슨 황당한 소리인지 이해하지 못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사건의 전말을 대략적으로 파악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가 나오자 그녀는 충격을 받고 휘청거리다가 졸도를 하는 모습을 아주 실감 나게 연기했다.
이수현의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과 섬세한 감정 연기는 그야말로 미친 수준이었다.
"와···. 긴박한 음향이 깔리니 쪼는 맛이 확 살아나네."
화면은 옆방에서 재미를 보기 위해 셔츠를 벗는 김태원의 모습이 스쳐 갔다. 그리고 지하실의 시체 안치소와 같은 공간에 입이 테이프로 봉인된 남자가 강철 테이블 위에 묶여 있었다.
그의 눈은 공포에 질려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공간 안쪽에서 개인용 보호장구를 모두 착용하고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감정이 없는 것 같은 '인간 백정' 이영민의 모습이 화면에 클로즈업됐다. 오직 그의 입꼬리만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영민은 남자를 운반해온 젊은 클럽원에게 말을 건넸다.
"해보고 싶나?"
"넵!"
"너 이름이 뭐지?"
"이혁이라고 합니다."
"그래. 너는 오늘 내 보조 역할을 한다. 안쪽에 가면 개인 보호구가 있으니 착용해."
"감사합니다.“
이혁이 고글, 헬멧, 비닐 방호복을 차려입고 나오자 이영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해체를 시작한다."
음산해 보이는 별장의 전경이 화면을 가득 메웠다. 그와 동시에 별장에 있는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준환 감독은 드론으로 이 미스테리한 집단의 회색 요새를 무미건조하게 멀리서 보여주고 있었다.
"우와! 완전 영화네. 퀄리티가 엄청나. 역시 돈을 아낌없이 써야 해."
이 감독은 내 각본에 따라 잔인한 장면은 보여주지 않고 소름이 끼치는 분위기를 아주 실감 나게 연출했다.
나만의 세계 4화가 방영된 후 시청자들은 뒤통수가 얼얼한지 제각기 감상평을 마구 쏟아내기 시작했다.
-부부의 비밀 2탄 아니었어요? 전 도저히 못 보겠네요. 하차합니다.
-와! 이건 미드 수준 아니냐? 스케일 무엇? 이런 어두운 드라마를 메인 시간에 한 적 있었나? 우리나라도 이제 수준이 한 단계 올라가는구나. 허구한 날 로맨스나 막장, 판타지만 보다가 이런 거 보니까 진짜 신선하다!
-별장 신 보다가 지릴뻔함. 이수현에 빙의되는 줄 알았다. 나도 졸도할 뻔! 이래서 자꾸 강력 사건을 비췄구나. 하아. 무릎을 '탁' 치고 갑니다.
-잔인한 장면은 없었지만, 별장 분위기가 너무 무서웠어요. 특히 IT 재벌로 나오는 한기주 개무서움.
-그런데 한기주 조수로 나오는 녀석 목소리 되게 좋던데?
-난 형탁이 형 때문에 소름 돋음. 우리 겜돌이 순진한 형이 사이코라니! 사이코라니!
-세 명의 친구가 다 사이코패스인가? 진짜 미친놈들이네 20년 동안 준비를 하다니···. 친구는 아니고 동료겠군. 사이코패스끼리 동료가 가능한가? 뭐지?
-그냥 분위기가 특이한 막장 멜로 스릴러인 줄 알았는데···. 갑자기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된 국가 전복 스토리라니··· 어이가 없어서 하차하려다가 계속 본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거냐. 작가 놈 미친 거 아님?
-작가가 천재 같다. 이걸 부부의 비밀하고 엮는다고? 돈 거 아님?
-국가를 접수하기 위해 사회 지도층으로 올라간 사이코패스들이냐? 근데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위로부터의 조용한 혁명이라니? 허허허···. 지도층의 약점을 쥐고 절대왕정이라도 만들 셈인가?
-클럽원 이라는 건 행동대원들을 말하는 거 같다. 같이 미친놈들이지. 이거 영화 파이트 클럽 분위기 아님?
-마지막에 굴뚝에 연기 뭐냐? 설마 시체 태우는 거냐? 덜덜덜··· 괜히 19금이 아니구만.
-미친 작가의 시나리오를 찰떡같이 연기하는 배우들이나 영화처럼 뽑아내는 감독이나. 다들 미쳤다.
워낙 암시와 복선을 깔아둬서 그런지 시청자들이 느끼는 충격은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인 것 같았다. 일부 이런 스토리를 못 보는 사람들은 이탈했지만, 입소문을 타고 화제가 되고 있어서 시청률도 얼마나 더 올라갈지 기대를 갖게 했다.
같이 보던 가족들도 침묵에 빠졌다. 스케일에 압도된 것이다.
오랜만에 일찍 퇴근해서 TV를 보던 형이 입을 열었다.
"놀랍다. 준형아. 정말 드라마 잘 만들었네. 진짜 무슨 미드 보는 줄 알았다."
부모님과 여동생도 나를 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러닝셔츠만 입고 컴퓨터 앞에서 웹소설이나 쓰던 이미지와 아이돌 뒤치다꺼리하는 모습을 보다가 이런 대작 느낌이 나는 드라마의 각본을 썼다고 하니 내가 달라 보이는 모양이었다.
다음날 내 핸드폰은 불이 나고 있었다.
"어. 그래 수정이냐? 웬일이야. 응? 드라마 잘 봤다고? 그래 고맙다. 동창회? 언제라고? 그래그래 알았어. 그때 보자."
TVM 작가인 오수정을 비롯한 평소에 연락이 없던 대학교 동창들에게서도 전화가 걸려왔다. 아무래도 전작은 매니저를 하면서 우연히 터트린 행운쯤으로 여기다가 '나만의 세계'를 보고 태세전환을 하는 것 같았다.
'슬기로운 덕질생활'을 같이한 TVM 김호진 PD에게도 전화가 왔다.
[작가님. 이런 스토리 있으셨으면 저희랑 같이하시지. 하아. 제 입장이 난처합니다.]
"죄송해요. 이건 부부의 비밀하고 살짝 얽혔어요. 나중에 작품 쓰면 같이 하시죠."
[꼭 부탁드립니다. 작가님.]
회사 주차장에 도착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건물로 들어가니 마주치면서 인사를 하는 사람마다 나를 보는 눈빛이 달라졌음을 느꼈다.
‘역시 사람은 실력으로 인정을 받아야······.’
회사 사람들의 그런 시선에 나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살짝 들어갔다.
사무실 앞에서 하석우 실장을 만났다.
"오! 우리 대작가님 오셨네요. 주말에 드라마 잘 봤습니다. 아주 난리가 났더군요. 차나 한잔하실까요?
"안녕하세요. 하 실장님. 일찍 출근하셨네요."
우리가 복도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 사무실 직원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쏟아졌다.
으음···. 이런 게 인기 연예인들이 느끼는 감정인가? 딱 오늘 하루만 즐기자. 그리고 정신 차려야지.
앞으로는 피를 튀기는 살벌한 액션 장면이 가득한 나유정의 [영화 아저씨 파트2]가 나올 예정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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