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린 그런 사이 아닙니다. (1)>
나유정의 댄스 레슨이 끝나고 집에 도착하니 밤 9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니! 유정 씨 안 씻어요? 땀을 그렇게 흘려놓고 그냥 앉아서 뭐해요?"
"가만히 있어 봐요. 배 안 고파요? 먼저 족발 보쌈 주문해놓고 씻으려고요."
"아······."
그녀는 소파에 앉아서 핸드폰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으악!"
"왜, 왜요?"
나유정이 주문을 하다 말고 머리를 감싸 쥐며 와락 소리를 질렀다.
"하아······. 단골집인 쌈할머니 보쌈이 영업을 안 하네요. 토요일인데 왜 장사를 안 하는 거야!"
"줘봐요. 뭐 잘못 보고 있는 거 아니에요? 왜 토요일에 장사를 안 하겠어요."
나는 나유정의 핸드폰을 쳐다보았다. 배달의 만족 앱에는 쌈할머니 보쌈이 정말로 "준비 중입니다"로 표시되어 있었다.
"음. 정말이네요. 가게에 무슨 일이 있나 본대요? 내가 전화 한번 해볼게요."
가게에 전화를 해봤지만, 통화가 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네요. 다른 가게에 시킵시다."
"히잉······. 거기가 제일 맛있단 말이에요. 맛집인데. 다른 곳은 다 먹어봤는데 맛없어요."
"네? 여기 리스트에 족발집이 10개 이상 뜨는데 다 먹어봤다고요? 아니 얼마나 시켜 먹었길래······."
도대체 그녀는 은둔 생활 3년 동안 어떤 생활을 했단 말인가.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신규로 오픈한 아지매 족발집에 야식을 주문했다. 여전히 시무룩한 표정의 나유정이었다.
"괜찮아요. 족발이 뭐 다 거기서 거기잖아요. 맛있을 거예요."
나유정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씻으러 욕실로 들어가고 나는 거실에서 휴식을 취했다. 얼마 후 주문한 음식이 도착했고 선반에서 접시를 꺼내 식탁에 음식을 차렸다.
"유정 씨 배고프죠? 얼른 식사하죠?"
방금 머리를 감고 잘 안 말린 상태로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나유정이 식탁에 앞에 앉았다. 그러더니 이내 젓가락으로 보쌈을 집어 입에다 넣었다.
"어때요? 괜찮아요?"
"으음. 그냥 먹을 만한데 역시 보쌈은 쌈할머니 족발 보쌈이네요."
나는 그냥 괜찮은 거 같은데 그녀는 약간 실망한 눈치였다. 족발 마니아라 그런지 기준이 높은 모양이었다.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2화 방송이 시작되는 10시 40분까지 느긋하게 기다렸다.
"와! 광고 진짜 많네. 오! 시작해요. 두근두근"
"드라마는 맨날 찍는데도 아직도 떨려요? 신기하네."
"이렇게 최종 결과물을 점검하는 건 항상 설레죠."
직접 옆에 오래 있어서 그런지 잘 느껴지지 않았지만 역시 대배우다운 자세였다.
2화는 불륜을 저지르는 한승호와 나지혜의 이야기가 나오며 김인애가 그들을 미행하는 내용이 나왔다. 지하 주차장에서 다정한 모습을 보이는 두 명의 모습을 어둠 속에서 반신반의하며 지켜보는 이수현의 연기였다.
10년간 행복한 결혼 생활을 이어오고 있던 그녀에게는 믿기 힘든 현실이었기에 최대한 스스로 자제하며 그들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사랑하는 남편을 기다리며 기대감에 찬 얼굴을 하고 있다가 순식간에 불신에 가득 찬 눈으로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을 마주
한 그녀의 섬세한 연기가 돋보였다.
"와! 수현 씨 연기 진짜 잘한다. 저 디테일한 표정 연기 좀 봐요. 대박이네."
"치······. 저게 뭐가 대수라고? 별로 어렵지 않거든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시고 드라마에 집중합시다. 집중!"
자꾸 나유정은 이수현을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다. 개인적으로는 친한데 연기력만큼은 지고 싶지 않은 모양인지 내가 칭찬을 좀 하면 민감하게 반응하곤 했다.
‘하여간 저 연기 욕심하곤?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화면에서는 나지혜가 갑자기 한승호에게 기습적으로 뽀뽀하는 장면이 나왔다. 한승호는 누가 보면 어쩌냐며 정색을 하더니 자신의 차를 몰고 밖으로 나갔다. 나지혜도 차를 몰고 뒤를 따라갔다.
두 눈의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그들을 따라가는 김인애. 이준환 감독은 시야가 눈물로 뿌옇게 흐려진 상태로 운전하는 김인애의 시선으로 화면을 연출했다.
"오! 구도 좋다. 역시 이 감독님이야."
둘이 도착한 곳은 교외의 한적한 모텔. 먼저 한승호가 모텔로 들어가더니 얼마 후 나지혜도 차에서 내려 모텔로 들어가는 모습이 포착됐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차 안에서 폭풍 오열을 하는 연기를 보여주는 이수현이었다. 그녀는 울면서 운전대에 고개를 처박았다.
두 사람의 머리채라도 잡을 작정으로 차에서 내렸지만, 갈팡질팡하는 그녀였다. 한승호를 깊게 사랑하던 마음이 쉽게 변하지 않는 것을 느낀 것이다. 그 정도로 한승호는 완벽한 남편이자 아이의 아빠였으니까.
"와! 완전 메소드 연기네요. 으으···. 소름 끼쳐."
한편, 모텔 안에서는 두 남녀의 애정 행각이 벌어지고 있었다.
"크흠...."
TV 드라마 치곤 꽤 자극적인 장면에 나도 모르게 헛기침을 하고 말았다.
"뭐에요. 민망해요? 저건 연기일 뿐이에요."
"태세 전환 뭡니까? 1화에 나오는 베드신 보고 소리 지른 게 누군데?"
"내가 하는 거랑 남이 하는 게 다르다니까요?"
"아니! 나는 둘 다 남이잖아요."
19금 장면 때문에 둘 사이에 이상한 분위기가 형성됐다. 그게 드라마 때문인지 아니면 서로를 의식해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흠흠. 성우 오빠 여자들한테 공적 되겠는데요? 이렇게 연출해놓으면 아무리 잘생겨도 정나미가 떨어지거든요."
"연기는 연기일뿐이라면서요."
"무, 물론 그렇지만 이미지에 악영향이...."
집에 돌아온 김인애는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하지만 한승호의 천연덕스러운 거짓말에 입술을 꽉 깨물고 마는데······.
급기야 김인애는 직장에 연차를 내고 나지혜를 감시하기 시작했다. 한 카페 화장실에서 둘만 있는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화려한 세면대 앞에서 김인애는 곁눈질로 나지혜를 자세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윤기 나는 머리에 마치 연예인 같은 얼굴 그리고 시원시원한 몸매. 결정적으로 눈부시도록 생동감이 넘치는 20대의 모습으로 김인애가 그토록 동경하던 풋풋한 아름다움이었다.
"와!"
나는 무의식적으로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이준환 감독의 연출은 나유정을 실제보다 200%(?) 더 돋보이게 하는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내 평소 눈이 이상하던지.
실제로 그녀는 꾸준한 운동과 식이요법으로 리즈 시절보다 더 예쁘다는 평을 듣고 있었다. 기존의 화려한 모습에 섹시함까지 갖췄다는 소리가 심심치 않게 들려왔으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나유정은 정말 예뻤다. 물론 지금은 환상이 와르르 무너지긴 했다.
김인애는 미칠듯한 질투심으로 떨리는 얼굴로 입술을 깨물고 자신의 치마의 허벅지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막 눈물이라도 쏟아질 태세였다.
그 모습을 눈치챈 나지혜가 고개를 돌려 괜찮냐고 물어본다. 상대방의 호의에도 불구하고 마치 흉신악살처럼 나지혜를 노려보는 이수현의 연기를 보고 소름이 끼치고 말았다.
"와. 이 화장실 신 레전드네요. 허참...."
김인애는 집으로 돌아와 분노를 가라앉히고 자신의 남편을 꾄 나지혜를 파멸시킬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다.
그녀의 서재에 멘사에서 발행한 증명서와 각종 학위와 상장들이 무심하게 쓱 지나가며 2화가 끝이 났다.
"휴~ 끝났다. 자! 이 작가님의 총평은요?"
"음. 한 마디로 이야기하자면 수현 씨의 미친 연기와 유정 씨의 외모랄까요?"
"네? 연기도 아니고 제 외모요?"
그녀는 내 말에 눈을 가늘게 뜨고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어디 한번 지켜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감독님이 연출을 엄청 잘하신 거 같아요. 화면에 유정 씨가 너무 예쁘게 나왔어요. 남자 시청자들은 한승호가 왜 불륜을 저질렀는지 그냥 이해했을걸요?"
"네? 그냥 이해한다고요?"
그녀는 내가 자신의 연기력을 칭찬하지 않고 외모 이야기를 하자 약간은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이었다.
"제, 제가 그 정도로 예쁘게 나왔나요?“
나유정은 다소곳한 포즈로 머리를 귀 뒤로 쓸어넘기며 나를 쳐다봤다.
"음! 총평은 여기까지."
"아이! 뭐에요. 더 자세히 설명해 보라니까요?"
"됐고요.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어이구야. 벌써 12시가 다 돼가네요."
"아니! 잠깐······. 자세히 이야기를 해보시라니까요?"
나는 급히 핸드폰을 챙기고 후다닥 빠른 걸음으로 현관으로 나갔다. 허겁지겁 구두를 신고 현관문을 열고 집을 나서는데······.
꾸르륵···.
"허윽."
아랫배에서 강력한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학창시절 장염으로 오래 고생하던 나였기 때문에 버틸 수 있는지 없는지를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제길! 이건 쓰나미급이야.’
이 정도라면 괄약근으로 절대 틀어막을 수 없는 강력한 신호였다. 나는 급히 몸을 돌려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이미 뱃속이 요동치며 상황이 매우 급해지고 있었다.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려는데 나유정이 갑자기 내 앞을 가로막았다.
"큭."
"어딜 도망가려다 다시 기어들어 와요. 자세히 설명을 해보라니까요. 얼마나 예쁘게 나왔냐고요."
"자, 잠시만······. 비켜······. 헉···."
"뭐, 뭐에요. 갑자기 왜 그래요."
내가 배를 움켜쥐며 상체를 숙이자 그녀가 놀라며 나를 부축했다.
"화장실 좀 쓰, 쓸게요."
나는 그녀를 밀치고 화장실 문을 닫고 후다닥 들어가 일을 봤다. 화장실에서 천둥 치는 소리가 났다. 상당히 창피했으나 생리 현상은 어쩔 수 없는 법!
"아흐······."
정말 살 것 같았다. 이곳이 천국인가 싶었다.
갑자기 학창 시절 버스를 타고 가다가 배가 아파서 생판 모르는 곳에서 내렸던 생각이 났다. 겨우 일을 보고 집으로 가려고 주머니를 뒤져보니 지갑이 보이지 않았었지.
밖에서 나유정이 문을 두드리며 크게 웃고 있었다.
"푸하하하. 저기요. 갑자기 뭐에요. 안에 전쟁 났어요? 총 쏘는 것도 아니고···."
나는 예전에 하도 이런 경우가 많아서 무감각해진 상태였다.
그래! 마음껏 비웃어라.
웃든지 말든지 나는 아무 상관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밖이 조용해졌다.
분명 나를 실컷 놀려야 하는데 나유정이 너무 조용했다. 내가 머리를 갸웃거리자 갑자기 화장실 문을 쾅쾅 두드리는 나유정이었다.
"저, 저기요. 빨리 좀 나올래요?"
"왜요. 아직 멀었어요."
"농, 농담하지 마세요. 어, 얼른 나와요. 네? 아흐······."
응? 혹시 같이 먹은 족발에 문제가 있었나?
나유정도 터진 모양이었다.
"유정 씨. 안방에 화장실 있잖아요. 거기로 가요."
"아, 안돼요. 거기 사용 안 해요. 빠, 빨리 나와욧!"
쾅쾅쾅쾅!
그녀가 미친 듯 문을 두드렸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일찍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아! 좀 다른 데로 가지!"
내가 문을 열고 나오자 그녀는 마치 드리프트를 하듯 나를 지나쳐 문으로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나는 팔로 그녀를 못 들어가게 막았다.
"왜, 왜 그래요. 하악...."
꾸르륵···.
그녀의 배에서 요동치는 소리가 똑똑히 들려왔다.
"방향제 같은 거 없어요? 지금 들어가면 안 됩니다."
"지, 집어치워요. 지금 그게 문제에요? 아악······."
그녀는 나를 확 밀치고 급히 안으로 들어갔다.
"으······. 냄시. 뭘 먹은 거야!"
"뭐긴 뭐에요. 댁이랑 같은 거 먹었구만."
화장실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왔지만, 자세한 이야기는 이만 생략하는 게 좋을 것 같다.
"허윽."
나는 2차로 쓰나미가 몰려오는 걸 느꼈다.
쾅쾅!
"아직 멀었죠?"
"네. 아직이요."
"큭, 그, 그럼 저 안방 화장실 좀 쓸게요."
"아! 안돼욧!"
안되긴 뭐가 안 되나. 터지게 생겼는데.
나는 후다닥 안방 화장실로 달려갔다. 하지만 그곳에 도착한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뜨어...."
안방 화장실은 화장실이라기보다는 아이돌 굿즈들을 저장하고 있는 공간이었다. 특히 포스터와 각종 쿠션들······. 일을 보려다간 슈퍼노바의 김우주와 눈싸움을 하게 생겼다.
충격이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앉으려는데 나유정이 부리나케 달려와 문을 벌컥 열었다.
"아니! 여기 안 쓴다니까요. 얼른 나와요. 거실 화장실 써요. 얼른요!"
"자, 잠깐! 여기 뭐예요? 무슨 힐링의 방입니까? 굿즈들이 한가득이네. 한가득!"
그런 식으로 우리는 3~4번을 반복하며 모든 것을 쏟고 말았다. 우리는 그렇게 온몸에 힘이 빠져 소파에 널브러져 있었다.
"유정 씨 뭐해요?"
힘겹게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니 그녀도 소파에 쓰러져 핸드폰으로 뭔가를 쓰고 있었다.
"짜증 나서 아지매 족발집 혹평 리뷰를 쓰고 있어요. 점심부터 아무것도 못 먹고 처음 먹은 게 이거라 분명해요. 범인은 족발입니다."
나는 어이가 없었지만, 피식 웃고 말았다. 그 정도로 힘이 빠졌기 때문이다.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였다.
나는 조용히 집을 나섰다. 생쇼를 하느라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 서두르기로 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와 꿀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점심 때쯤 돼서 여동생이 나를 흔들어 깨웠다.
"오빠야! 일어나 봐라. 큰일 났다."
"으으음... 뭔데···. 휴일인데 왜 그래."
"오빠. 유정이 언니랑 스캔들 기사 났더라."
나는 그 소리를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주리가 들고 있던 스마트폰을 빼앗아 기사를 읽어봤다.
[대세 배우 나유정 매니저 겸 작가인 이준형 씨와 열애 중?]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나유정이 한 남자와 같이 있는 모습이 포착됐다. 그 행운의 남자는 바로 그녀의 매니저인 이준형 작가였다.
그들은 어제저녁 9시경 마포의 나유정 씨의 집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아무리 그가 나유정 씨의 매니저이긴 하지만 늦은 시간까지 같이 있었다는 것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드는게 사실이다.
예전에도 비슷한 스캔들을 일으켰던 이들은 이준형 작가가 드라마를 히트시키고도 아직 연예인과 매니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항간에는 톱스타와 스타 작가 커플이 탄생하는 게 아닌가 조심스럽게 추측하고 있다. (중략)
"뭐야? 데일리 연예서치? 어디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열애라니?“
"오빠. 그냥 사귀면 안 돼? 나 유정이 언니 좋더라."
"넌 또 뭐야. 저리가! 짜증나니까."
"킥킥. 이거 또 이슈되서 시청률에 도움 되겠다."
띠링~
나유정도 지금 일어났는지 기사 봤냐며 톡을 보내왔다. 그래도 해명이라며 막무가내로 SNS에 올리는 버릇은 이제 고친 것 같아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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