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근두근 차기작 (5)>
오후에 나유정을 데리고 촬영 장소에 도착하자 이준환 감독이 우리를 격하게 반겨줬다.
"아이고! 우리 복덩이 이 작가님 오셨어요?“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첫 방송부터 시청률 20%를 넘겼으니 오죽 기쁠까?
"하하! 이게 누구십니까? 연타석 홈런의 주인공이자 JTVC의 레전드 오브 레전드 이준환 감독님 아닙니까!"
우리는 낮 뜨겁게 서로의 얼굴에 금칠을 해주었다. 마치 삼국지 관우와 장비가 오랜만에 만나 서로의 팔을 잡고 호탕하게 웃는 것처럼 말이다.
그는 캠핑용 의자를 손수 가져오더니 나를 앉게 했다.
"우리 귀한 작가님은 여기 그늘에서 편히 지켜보시면 되겠습니다."
"어이쿠.... 저만 이런 호사를 누리다니요. 정작 천재 감독님은 이 따가운 자외선 아래에서 고생하시는데요."
"첫 화 시청률 20%라 이 정도 자외선은 일광욕 수준으로 느껴집니다만?"
"그런가요? 하하하하...."
우리가 하는 말을 우연히 지나가던 한 스태프가 듣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찌푸려지는 게 보였다.
험험! 진정해야겠다. 말장난하다가 너무 들떠버렸군.
촬영팀은 어제의 시청률에 고무되었는지 하나같이 밝은 표정들이었다. 역시 드라마는 시청률이 깡패였다. 다들 자기 필모나 이력서에 히트작을 하나 딱 적어 낼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첫 화부터 떠서 그런지 현장에서의 대우도 달라졌다. 예전에는 운이 좋아서 뜬 젊은 작가 놈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오늘은 인사를 하는 그것조차 예전과 달라졌다. 모두 깍듯하다. 역시 이래서 사람은 잘나가야 하나 보다.
이 감독의 지휘 아래 촬영이 시작됐다.
나유정은 드라마 후반부 막바지 촬영을 하고 있었고, 나는 나무 그늘 의자에 앉아 나만의 ‘세계’에 대한 기사를 훑어보는 중이었다.
[‘부부의 비밀’ 속편인 ‘나만의 세계’ 흥행 돌풍]
[JTVC 나만의 세계, 시청률 21%로 역대급 스타트!]
[속편이라더니. 단순한 속편이 아니었던 나만의 세계]
[드라마 ‘나만의 세계’의 독특한 설정 그러나 전작보다 못한 진부한 스토리?]
으응? 계속되는 호의적인 기사를 보다가 방금 지나갔던 그 기사 제목에 스크롤이 탁 멈췄다.
‘아니! 이거 누구야? 데일리 연예서치 강기남 기자?’
제작발표회에서 계속 질문을 하던 까칠한 기자가 생각났다. 나는 곧바로 기사를 클릭해서 내용을 확인했다.
[부부의 비밀의 후속편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나만의 세계 1화가 20%의 시청률을 돌파하며 화제를 모으고 있다.
제작발표회에서 초반부는 단순한 속편이라고 소개했으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상당히 다른 느낌이었다.
암울한 근미래 설정이라던지 국가의 공권력이 무너져 사회 분위기가 흉흉하지만, 부자들은 여전히 잘 살고 그들이 사용하는 국내 전자회사들의 최신 신제품은 시청자들에게 신선함을 주기 충분했다.
하지만 정작 알맹이인 스토리는 전작인 `부부의 비밀`보다 더 단순한 형태로 풀어가고 있다.
제작발표회에서 전작보다 더한 막장을 보여줄 거라던 호기로움은 온데간데가 없었다. 물론 아직 1화뿐이라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빈약한······. (중략)
‘강기남 기자 이 양반이 어그로 좀 보소.’
내가 살짝 어금니를 깨물었을 때 내 옆으로 나유정이 다가왔다.
"가을인데 햇볕이 은근히 따갑네요. 에구. 힘들다. 힘들어."
"거봐요. 잠 안 자고 그러니까 피곤한 거 아닙니까?"
"흥! 무슨 말을 못 하게 하네. 그나저나 연예서치 기사 읽고 있었어요?"
"네. 스토리가 전작보다 단순하다고 비평하고 있네요."
"그건 무시하세요. 어차피 다음 주 되면 풀리잖아요. 갈수록 점점 조여오는 스토리가 강점인 작품이잖아요. 자신을 가져요. 그리고 초반부터 시청률 20% 넘었잖아요. 설마 전작인 슬덕이 잘됐다고 이 수치가 쉬운 거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에요?"
"물론 그건 아니죠."
나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나유정이 친히 말을 해주자 마음이 놓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거 감독님하고 이야기해보셨어요?"
"무슨······."
"아침에 이야기 했던 거요. 살해하려고 왔다가 저한테 살해당하는 엘리베이터 살인마요."
"아아. 아직요. 그거 조금 있다가 시간 나면 이야기해볼게요. 이 감독님이라면 아마도 흔쾌하게 허락하시지 않을까요?"
그 후로 나는 잠깐 틈이 생겼을 때 이준환 감독에게 다가가 그 소재에 관해 이야기를 꺼냈다.
"오! 아이디어 좋은데요? 나지혜 캐릭터에 강렬함을 더하는 효과도 있을 거 같고 인간성을 점점 상실하는 면도 부각시킬수 있겠네요. 일거양득입니다."
그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하더니 어디에 넣을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나는 촬영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며 SNS의 반응도 살펴보았다.
[나만의 세계 뭔가 초반 스토리는 심심한데 독특한 배경 설정이 맘에 든다. 국가 공권력이 망가진 근미래라니···. 무슨 공각기동대냐? 되게 신선하다.]
[나는 초반 엘리베이터 신보면서 깜짝 놀람. 뭐지 이거? 그냥 연예, 불륜 드라마 아니었음? 분위기 너무 다크한데······. 그래도 계속 볼 거 같다. 은근히 재밌다.]
[나만의 세계를 배경을 보면 딱히 먼 미래도 아닌 것 같다. 지금으로부터 몇 년 후? 콘셉트 전기차도 보이고 아까 플렉서블 폰은 뭐였지? 오성전자 신제품인가? 슬덕도 드라마치고 되게 못 보던 전개였는데 이것도 상당히 기대된다.]
[부익부 빈익빈이 극명하게 대두되는 사회상이라······. 뭔가 전작을 무작정 따라가지 않으면서도 뒤에 뭔가 있는 것 같다. 은근히 기대됨.]
됐다. 이 정도면 충분히 훌륭하다. 내가 무슨 예술 작품 찍는 것도 아니잖아? 재미만 있으면 되지. 암!
그렇게 생각을 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촬영이 끝나고 나는 다시 나유정을 데리고 회사로 향했다. 나유정은 아침에 내 꼬임에 빠져 걸그룹 댄스를 배우기로 한 것이다. 물론 그녀는 단서를 하나 달았다.
"7시 30분에 회사 안무 연습실에서 안무가 선생님하고 미팅이 있을 예정입니다."
"오! 준형 씨. 일 처리 빠르네요."
"무조건 오늘부터 한다고 하셔서 어쩔 수 없이 구한 겁니다. 그분이 테리우스 안무 선생님이에요."
"와! 유상훈 님?"
"응? 무슨 애들 안무 선생님 이름까지 외우고 있어요?"
"아니. 그분 유명하세요. 남자 아이돌 댄스 창작은 꽤 알아주는 분이세요."
"알아요. 어쨌든 그분 맞고요. 겨우 시간 맞췄으니 열심히 하셔야 합니다."
생각해보면 걸그룹 춤 전문가에게 배우는 게 맞는데 당장 강의가 되는 사람을 섭외하다 보니 그밖에 없었다.
"준형 씨. 그런데 약속 잊으신 거 아니죠?"
"뭐요? 같이 본방송 사수하자는 거요? 알았어요. 공약 이행 준비를 열심히 하시겠다는데 그 정도는 들어드려야죠."
"피······. 자기도 어차피 같이 볼 사람도 없으면서."
"네? 아니거든요? 와! 본인이 친구 없다고 나까지 도매금으로 넘기십니까? 전 같이 볼 사람 많거든요?"
"........."
갑자기 입을 꾹 다물더니 고개를 홱 돌려버리는 그녀였다.
‘어? 왜 저러지? 내가 말을 좀 심하게 했나?’
원래 잘생긴 사람에게 못생겼다고 하면 농담이 되지만 진짜 못생긴 사람한테 못생겼다고 하는 건 상처가 되는 법이다. 또래 친구가 없는 나유정에게 무심코 한 나의 말은 기분이 나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사실 솔직히 이야기하면 저도 혼자 봤습니다."
이건 거짓말이다. 거실에서 가족하고 봤다. 하지만 혼자 본 거나 마찬가지이다. 집중하느라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오늘같이 보자고요. 맛있는 거도 시켜 먹고······."
차 밖을 쳐다보며 쿨하게 말을 하는 나유정.
"알았어요. 저녁은 거르고 야식으로 족발 보쌈 막국수 콜?"
"콜...."
막히는 길을 뚫고 회사에 도착했다. 그녀를 데리고 사무실로 올라가니 역시 보는 사람마다 축하한다며 인사를 하고 말을 걸어왔다.
매니저팀 사무실 앞에서 만난 사람은 다름 아닌 더러워서 피한다는 김상효 실장이었다.
아마 나만 있었으면 본채만 채 했을 텐데 나유정이 같이 있어서 그런지 떨떠름하게 인사를 했다. 아무래도 하석우 팀장이 승진하면 본인이 배우팀을 맡을 생각인 듯했다.
"어. 이 실장! 축하해. 시청률 죽이더라. 첫 화부터 20%를 넘다니······. 진짜 이 실장은 운이 너무 좋은 거 같아. 유정 씨도 안녕하시죠?"
휴. 오자마자 이 짜증 나는 면상을 봐야 한다니 벌써 기분을 잡쳤다. 그래도 내가 같은 실장 아니겠는가? 한마디는 해야겠다.
"김 실장님. 죄송한데요. 운이라뇨. 듣는 운 좋은 사람 기분 나쁩니다."
"아. 내가 운이라고 했나? 그건 사과하지."
"괜찮습니다. 실장님. 혹시 제가 키운 테리우스는 요즘 좀 어떤가요? 잠도 못 자고 행사만 핑핑 돌리고 있다는 소리가 들리던데요."
테리우스 애들에게 살짝 들어보니 이 인간이 여기저기 스케줄 만들어 잠잘 시간까지 부족하다고 했다.
"아, 아냐. 적당히 스케줄을 조절하고 있네. 건강도 중요하지."
"아닌 거 같던데요. 애들이 단톡방에서 상당히 시끄럽던데요. 김 실장님.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괜히 나중에 재계약 안 하고 이적한다고 하면 곤란하니까요. 아시죠?"
"이, 이적······.“
내 말을 듣더니 얼굴이 시퍼렇게 변하는 김 실장이었다. 미래의 캐시 카우가 될 테리우스가 재계약을 안 한다고? 큰일 날 일이다. 그런데 얘들 군대도 가야 하니 애매하긴 하구나.
"그럼 저희는 볼일이 있어서 이만."
뭐 이 정도면 경고가 됐겠지? 테리우스에 대한 민원을 해결하고 연습실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미 안무가 유상훈이 도착해 있었다. 이미 안면이 있던 우리는 인사를 나눴고 나유정은 편한 옷으로 갈아입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다.
안무가 유상훈.
아이돌메이커 101에서 인간적인 모습을 선보이며 인기를 끌었던 안무가였다. 170cm 정도 돼 보이는 키였지만 춤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실장님은 안 배우시고 유정 씨만 수업받으신다고요? 실장님도 공약에 같이 들어간 거 아니었나요?"
"에이. 제가 춤추는 걸 누가 보겠어요. 유정 씨가 잘 추면 저 같은 건 아무도 기억 못 할 겁니다."
"흐음······. 그럼 어느 수준으로 맞춰드리면 될까요?"
"네. 두 달 안에 걸그룹 연습생 정도 수준으로 만들어주세요."
"네? 연습생 수준요? 지금 농담이시죠? 연습생들도 최소 6개월 정도는 해야······."
그는 말을 하며 나를 무슨 미친놈처럼 쳐다보고 있었다.
저 멀리서 나유정이 옷을 갈아입고 걸어오는 중이었다.
"쉿!"
나는 급히 목소리를 내리깔고 그에게 귓속말했다.
"하드 트레이닝요. 왜 있잖아요. 스파르타식. 그렇게 해주세요. 토할 때까지 하는······."
"예? 유정 씨 지금 드라마 촬영 중 아닌가요? 어떻게 그렇게 하라는 건지."
"이제 이번 주면 대부분 신이 다 마무리됩니다. 이번 주만 기초 잡아주시면서 적당히 하시고 다음 주부터는 아이돌 메이커 101? 아니 48에 나왔던 일본인 연습생들처럼 굴려주세요."
"에? 거기 그렇게 가르치다가 일본 애들 몇 명 도망가고 난리도 아니었다던데···."
"괜찮아요. 저만 믿으세요. 잘 따라갈 겁니다. 진짜예요. 유정 씨 오네요. 크흠!"
내가 황급히 대화를 끊었지만, 유상준 안무가의 얼굴은 황당함으로 물들어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 거예요."
"그냥 안부차 하는 이야기입니다. 별거 아니에요. 이제 수업받으셔야죠."
"유정 씨! 운동 열심히 하시나 봐요? 처음 뵙는데 와······. 몸을 진짜 잘 만드셨어요. 이러면 좀 이야기가 달라지는데요?"
"아하하···. 제가 촬영 때문에 운동을 진짜 열심히 했거든요."
"오! 그럼 어떤 곡을 연습하실 건가요?"
"텐뮤지스 어때요? 진짜 좋은데······."
나유정이 갑자기 끼어든 내 말에 정색하며 눈을 흘기고 있었다.
"미쳤어요?"
"아니···. 텐뮤지스가 어때서요. 레전드인데···. 아, 알았어요. 그럼 원스 어때요? 인기 최강인데요."
"그건 너무 밝아서 좀 그런데요.“
자꾸 이야기가 겉돌자 보다 못한 유상훈이 나섰다.
"유정 씨. 그러면 블랙소울 어때요? 혼자 추실 거라 약간 스웨그 있게 느낌 있게 추면 잘하지 못하더라도 그나마 티가 좀 덜 날 것 같아요."
"와! 저 준형 씨가 말한 그룹들은 별로 안 좋아하는데 블랙소울은 좋아해요."
"아시는 곡 있으세요? 아는 곡 하는 게 좋은데······."
"2집인가? ‘마지막 사랑인걸’이라는 노래를 좋아해요."
강렬한 힙합 베이스의 음악으로 전 세계적인 인기 그룹이 된 블랙소울의 가장 귀여운(?) 곡이다.
그녀는 음을 흥얼거리며 댄스 동작을 추기 시작했다.
응? 뭐야. 춤을 아나?
"어? 유정 씨 그 노래 안무 아세요?"
유상준이 놀라며 그녀에게 물어봤다.
"이 노래를 좋아해서 심심할 때 거울 보고 연습했어요."
"그럼 한번 해보세요. 그냥 자유롭게요. 기본 실력이 어떤지 볼 거라 부담 갖지 마시고요."
"웃으시면 안 돼요."
엥? 남자아이들 춤이 아니라 블랙소울 춤을 안다고? 뭐지?
노래가 울려 퍼지고 나유정이 쭈뼛거리며 어설픈 댄스 동작을 선보였다.
어설프지만 그럴싸한 나유정의 춤 솜씨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어라? 이거 뭐지?
나는 수업을 받는 그녀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얼이 빠진 가운데 수업을 마친 그녀와 2화를 같이 보기 위해 집으로 출발했다.
하지만 나는 그때 내 뒤를 따라붙는 차가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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