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근두근 차기작 (3)>
'나만의 세계' 제작발표회 현장은 스태프들과 엄청난 카메라를 가지고 온 기자들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포토라인 앞에 서서 가방을 바닥에 놓고 테이블 위에 노트북을 꺼내 인터넷을 연결하고 작성한 기사를 송고할 준비까지 다 마친 것 같았다.
사진 기자, 방송 카메라 촬영 기사들도 친분이 있는 사람들과 근황을 묻는 등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었다.
사회자는 한성우와 친분을 가지고 있다는 김주철이었다. 전직 아이돌이었지만 현재는 예능 블루칩으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연예인이었고 나와도 투데이 아이돌에서 이미 안면을 튼 바 있었다.
'하필이면 사회자가 김주철이라니.... 뭔가 불길하군.'
오늘은 그냥 말을 짧게 하고 드라마에 필요한 것만 성실히 답하기로 했다.
드디어 제작발표회가 시작됐다. 김주철은 사회를 보며 가벼운 농담으로 분위기를 밝게 만들었다. 제작발표회의 첫 순서는 배우들의 포토타임이었다. 오늘 출연할 배우는 주연인 이수현, 나유정, 한성우, 김형탁, 한기주, 정혜성이었다. 총 6명이었는데 단독 -
커플 - 단체 사진으로 이어졌다.
배우들은 수많은 카메라 앞에서 조금씩 몸을 돌려가며 멋진 포즈를 취했다.
특히 한성우와 나유정이 올라왔을 때 엄청난 플래시가 터져 나왔다.
파파파박!
와! 이런 난리가 없었다.
아까 이수현과 한성우 커플이 사진을 찍을 때보다 훨씬 더 취재 경쟁이 심했다. 한성우는 드라마 속 불륜남답게 나유정의 손을 꼭 잡고 있었고 둘은 좋은 사진을 위해 서로를 지긋이 마주 보는 포즈를 취했다.
"역시 불륜남 같죠? 여성분들은 잘생긴 남자를 조심하셔야 합니다."
"하하. 주철 씨도 한 외모 하잖아요."
한성우가 웃음을 터트리며 대답했다.
"네. 저만 예외입니다."
"혹시? 그 소문···."
"네. 됐고요. 얼른 사진 찍고 오세요."
김주철은 한성우와 친해서인지 계속 농담을 주고받으며 좌중을 웃게 했다.
"네. 이렇게 촬영 시간이 끝났고요. 이제 나만의 세계 제작발표회를 본격적으로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JTVC 금토 드라마죠? 내일 오후 10시 40분에 첫 방영이 됩니다. 오늘날 JTVC 드라마를 궤도에 올려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준환 감독님과 작가계
의 떠오르는 훈남이죠? 남자 아이돌 테리우스의 제6의 멤버이자 나유정 씨의 매니저를 겸직하고 계시는 이준형 작가님이 만들어내고 있는 드라마입니다."
어이. 형! 내 이력을 그렇게 자세히 말할 필요는 없을 텐데?
제6의 멤버라니 말도 안 된다며 손사래를 치며 아니라고 항변했다. 하지만 좌중은 웃기만 할 뿐이었다.
"업계에 천재로 소문난 이준환 감독님과 오랜만에 나타난 대박 신인 이준형 작가님이 정말 어느 때보다 드라마를 열심히 만드셨다고 합니다. 먼저 이 감독님? 이 드라마가 어떤 작품인지 설명 부탁드리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이준환 PD입니다. 이 나만의 세계라는 작품은 JTVC의 기념비와 같은 작품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복수 멜로 드라마지만 뒤로 갈수록 거대한 스릴러가 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스포일러라 방송
으로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안녕하십니까? 데일리 연예서치의 강기남 기자입니다. 전작인 부부의 비밀도 약간의 스릴러적인 내용이 포함돼있는 게 사실인데요. 후속편 개념이라고 알려진 이 드라마에 거대한 스릴러라니요? 정보 공개를 너무 안 해주시니 기사로 쓰기 어려운 감이 있습
니다만?"
나는 제일 앞에서 날카롭게 질문을 하는 강기남 기자를 쳐다보았다.
데일리 연예서치.
기획사와 연예인들의 공공의 적과 같은 인터넷 연예 전문 매체였다. 우리나라에 독보적인 파파라치 언론이라고도 불리고 있지만, 신뢰도가 의심을 받는 와중에도 굵직한 것들을 터트리며 계속해서 인지도를 쌓아가고 있는 매체였다. 물론 본인들은 탐사보도
언론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준환 PD는 처음부터 날카롭게 파고드는 기자의 질문에 헛기침을 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나는 최대한 튀지 않기 위해 입을 잠가버린 상황이었다.
발표회 전 피디님이 알아서 하라며 살짝 스포일러를 흘려도 좋다는 언질을 준 바 있었다. 부부의 비밀로 생각하고 보다가 사이코패스들이 갑자기 튀어나오면 돌았냐며 항의하는 사람이 속출할지도 모를 일이다.
시청자들의 뒤통수를 쳐도, 너무 세게 치면 안 된다. 적당히 정신만 들 정도로만 쳐야 한다.
"네. 초반 2회? 아니 3회 초반까지만 부부의 비밀처럼 진행됩니다. 이 문제는 영국의 저작권 업체와도 간단하게 법적으로 다 해결이 된 상황입니다. 하지만 초반 내용은 전작처럼 막장스러운 설정은 아닙니다. 단순 불륜으로 극이 진행됩니다만 4회부터는 완전
한 스릴러 작품으로 진행이 됩니다. 물론 1화부터 어느 정도 그런 복선들을 다 깔아놨으니 약간 다크하고 무거운 드라마가 될 겁니다."
"다크하다?"
"네. 초반부터 19금으로 설정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미 전작에서 19금이라고 해도 작품만 좋으면 시청률에 큰 문제가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에 다소간의 베드신도 있고 후반부에는 강렬한 액션 장면까지 나올 예정입니다. 거의 영화라고 보셔도 무방할 정도의
퀄리티로 제작이 됐습니다."
이준환 PD는 넷플릭의 자금이 상당히 많이 투입된 작품임으로 질은 확실히 보증한다는 말을 했다.
하지만 대다수 기자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노트북으로 기사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부부의 비밀이라는 전작 때문인 것 같았다.
전작이 멜로 치정극인데 갑자기 후속작(?)이라고 홍보하는 작품이 스릴러라고 하니 기자들도 기사를 쓰며 잘 이해가 안 가는 모양.
"우리 잘생긴 훈남 작가님은 지금 한마디도 안 하시는 거 같은데요. 무슨 말씀이라도 해보시죠?"
분위기가 애매해지자 김주철이 나를 쳐다보며 가볍게 말을 건넸다. 그러자 이준환 PD가 마이크를 나에게 넘겼다.
'그래. 제작발표회 때 한마디도 안 하는 건 이상하지. 그냥 짧게라도 해야겠다.'
"안녕하십니까? 작가 이준형입니다. 이 드라마는 멜로와 스릴러 그리고 범죄물이 합쳐진 형태의 작품입니다. 피디님께서도 말씀해주셨지만, 드라마에 자극적인 장면들이 많이 나올 예정이고 수시로 시청자들의 뒤통수를 때릴지도 모릅니다.
"범죄 드라마? 막장 드라마요?"
"네. 스포일러라 미리 말씀드릴 순 없겠지만 전작도 막장 드라마라고 불리지 않았습니까? 그거보다 더한 막장 드라마가 될 확률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4화부터는 사건이 급하게 진행되는데요. 정신을 차리셔야 할 겁니다."
기자들은 내 말을 듣고 엄청난 속도로 타이핑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이야기를 했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은 다른 모양이었다.
막장 of 막장!
끔찍한 혼종!
제기랄! 혹시 그런 식으로 기사를 쓰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드라마의 큰 비밀을 여기서 말하기에는 사이즈가 너무 크다. 대략 중반에 커다란 반전이 있다는 정도로 작품 소개를 마쳤다.
그 뒤로는 배우들의 각오와 캐릭터에 대한 질문이 쏟아졌다.
특히, 오랜만에 주연급으로 전격 발탁된 이수현에게 질문이 먼저 갔다. 대부분 중요한 조연역에 많이 캐스팅되던 배우였는데 한성우나 나유정과 함께 주연을 맡게 되어 소감이 어떠냐는 질문이었다.
이수현은 언제나 그렇듯 준비된 배우였다. 인지도가 부족한 상태로 이런 큰 작품에 주연으로 출연하지만, 극에서 연기로 보여드리겠다는 당찬 소감을 발표했다.
어느 정도 연차가 되는 연예 기자들은 그녀의 연기력이 상당한 수준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리고 최근에 신드롬급 인기를 구가하며 각종 CF를 휩쓸고 있는 나유정에게 마이크가 가자 엄청난 플래시가 터지며 질문이 집중됐다.
그녀는 아주 능숙하게 기자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나와의 관계에 관해서 묻는 기자의 대답에 재치 있는 대답으로 아주 잘 넘어갔다.
"이준형 작가님요? 말도 마세요. 요즘 승진도 하고 좀 잘나간다고 저를 다른 매니저에게 맡겨놓고 자기 일을 보시더라고요. 왠지 괘씸하지 않습니까? 제가 회사에 돈을 제일 많이 벌어다 주는데 말이죠. 언젠가는 너무 바빠서 본인 스스로 일하고 결혼했다고 하
더라고요.“
"하하하...“
나유정의 말에 기자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우와! 매니저님 아니 작가님! 어휴 헛갈려. 젊으신 분이 구식 유머를 아무렇지 않게 쓰시는군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유정 씨를 방치하셨다는 내부 고발이 나왔습니다."
"방치했다는 건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예전에는 말도 못 하게 손이 많이 갔는데요. 요즘은 운동도 열심히 하고 알아서 잘하더군요. 자립하게 좀 도와줬달까요?"
"하하하···. 뭔가 방치 같은데요?"
이후 한성우와 조연 배우들에게까지 질문이 이어졌고 기자들의 돌발 질문에도 꽤 성실하게 답해갔다. 마지막으로 촬영장 에피소드까지 언급되며 유쾌한 분위기를 이끌어가고 있었다.
"자! 마지막으로 시청률 공약 한번 가겠습니다. 전작 부부의 비밀이 28%라는 경이적인 시청률을 기록했었습니다. 그래서 말이죠. 만약 시청률이 30%를 넘어간다면? 이라는 공약을 걸겠습니다."
조연 배우들부터 공약이 나왔다. 팬들과 프리허그나 같이 드라마를 시청하겠다는 공약이 나왔고 이수현은 스태프들에게 소고기를 쏘겠다는 공약을 했다. 급기야 한성우는 여장을 하고 명동을 누비겠다는 모든 것을 내려놓는 공약을 걸었다.
마지막으로 김주철은 신드롬급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나유정에게 어떤 공약을 걸겠냐라는 질문을 던졌다.
"글쎄요. 어떤 걸 할까요? 막상 별로 생각을 안 해봐서요. 그냥 주철 씨가 공약 하나 걸어주세요."
"예? 유정 씨 정말입니까? 후회 안 하시는 거죠? 전 정말 한다면 합니다."
어라?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다.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졌다.
"물론이죠. 하나 추천해주세요."
김주철은 잠시 머리를 굴리는 듯하더니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보며 사악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서,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제가 미션으로 드릴 공약은요."
모든 사람의 이목이 김주철의 입에 집중됐다.
"걸그룹 노래와 댄스를 완벽하게 연습해서 SNS에 올려라 입니다. 공약 변경 절대 없고요. 노래는 알아서 선택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추가하자면 저기 작가님하고 같이 듀엣으로 하셔야 합니다.“
응? 이게 무슨 개소리지?
나유정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노, 노래만 빼주시면 안 될까요?"
"안됩니다. 유정 씨. 추천해준 사람 성의를 생각해보세요."
"저기요? 저는 왜 거기 들어가는지···."
나는 어이가 없어서 손을 들고 건의했다.
"저랑 같이 방송하셨으면서 그러세요. 테리우스랑 나오셨을 때는 그냥 몸을 막 던지시더니 유정 씨하고는 그렇게 못하겠다는 건가요?"
"아···. 그때는···. 그게···. 음."
내가 말을 잇지 못하자 김주철은 신이 난 모양이었다.
"조언을 드리자면 이런 자리에서는 그냥 한다고 지르시는 겁니다. 엄청 높은 시청률 30%입니다. 30%! 제작발표회 때부터 불가능하다고 하면 될 것도 안 되거든요."
'와! 주철이 형 사악하네.'
그는 정말 완벽히 우리를 코너로 몰고 가고 있었다.
"아, 알겠습니다. 30% 가면 그리 하겠습니다."
어쩔 수 없었다. 이미 나유정이 김주철에게 공약을 대신 걸라고 하는 바람에 이렇게 되긴 했지만, 까놓고 말해서 30%가 뉘 집 개 이름인가?
초반부터 엄청난 화제였던 부부의 비밀조차 30%를 넘지 못했는데 그것보다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의 나만의 세계가 30%를 넘는다? 솔직히 가능성이 희박한 것도 사실이었다.
"노, 노래만···."
나는 말을 계속하는 나유정을 제지했다.
화살은 이미 시위를 떠났다.
'조용히 해요. 이제 와서 아무 소용 없어요.'
"자! 이 작가님이 공약을 받아들이셨네요. 만약 30%가 넘는다면 꼭 해야 합니다. 여기 오신 기자님들이 나중에 꼭 팩트 체크 해주셔야 합니다. 부탁드릴게요."
"와하하하···."
"저희가 기사를 잘 써드리겠습니다. 30%가 넘어서 두 분의 걸그룹 댄스를 보고 싶은데요? 저번에 작가님 영상이 월드 베스트 영상에 들지 않았습니까? 흐흐···."
아아···. 흑역사다. 흑역사. 왜 안 나오나 했다.
가문의 수치. 아버지는 그 영상 때문에 나를 호적에서 판다는 둥 자꾸 농담을 하셨다.
음. 어쩔 수 없나? 욕심 안내고 딱 29%만 나오면 좋겠다.
그렇게 나만의 세계 제작발표회가 끝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미디어의 엄청난 홍보 속에 방영된 '나만의 세계'는 드라마가 끝난 후 21%라는 미친 시청률을 달성했다.
"크···. 뽕이 차오른다."
첫 화부터 너무나 엄청난 시청률에 기뻐서 졸도할 것 같다가도 뒷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묵직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뭐 유정 씨만 열심히 연습시켜서 동영상으로 찍어 올리지 뭐. 거의 걸그룹에 필적할 정도로 완벽하게 훈련시키면 사람들이 놀라 자빠져서 나를 잊어버릴지도 모르는 거 아니겠어?'
솔직히 내가 연예인도 아닌 대중들이 나에게 관심이 있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톡을 열고 나유정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유정 씨. 시청률 보셨죠? 내일부터 회사로 출근해서 안무 좀 배웁시다. OK?]
하지만 그녀에게선 어떤 답변도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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