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강두천 (2)>
대본 리딩 후 촬영 현장의 분위기가 상당히 좋았다. 오늘 합을 맞춰보고 드라마에 대한 기대감이 더 상승했기 때문이다.
연기가 끝난 주연 여배우인 이수현과 나유정의 기 싸움이 아직 재미있게 펼쳐지고 있었다. 나쁜 쪽이 아니라 건설적인 방향의 경쟁이었다. 그들은 나에게 전투적으로 캐릭터에 대한 해석이 맞는지 물어보고 있었다.
그 뜨거운 질문들에 약간 난감했지만, 나는 그들과 차분히 의견을 나눴다. 과연 두 천재는 확실히 날카로웠다. 많은 의견이 꽤 일리가 있었다. 심지어는 내가 발견하지 못한 오류까지 찾아내서 나에게 알려준 것이다.
요즘 대본 리딩 현장은 사전에 합을 맞춰보는 중요한 자리이기도 했지만, 홍보 수단으로도 꽤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했다. 기사들로 나가는 것은 기본에 동영상으로 인터뷰를 해서 미튜브나 각종 플랫폼에 홍보 영상으로 쓰이고 있었다.
나와 이준환 감독 그리고 주요 배우들은 회의실 앞에 모여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처음에는 전체 인원을 찍더니 이제는 배우들만 찍고 커플들끼리 그리고 남자들끼리도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개인 독사진도 찍는데 나유정은 독보적인 매력을 뽐내고 있었다.
‘아니.... 몸매 좋아져서 자신감 뿜뿜(?)인 건 알겠는데 너무 신난 거 아닌가?’
무슨 개인 단독 패션 화보도 아니고 라인을 너무 과시하고 있는 나유정이었다.
‘예전 캐릭터가 오히려 나았을지도?’
그렇게 개인 촬영까지 마무리되자 한 매체의 기자가 갑자기 손을 들었다.
"작가님하고 유정 씨 두 분만 찍으시죠."
응? 이 사람. 또 무슨 기사를 써내려고 우리 둘만 찍으라고 하는 거지?
나는 살짝 걱정됐지만 빨리 오라며 독촉하는 나유정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내 배우가 오랜만에 기분 좋은 것 같은데 망칠 순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이 촬영이라는 게 나에게는 어색했지만, 그녀는 일상처럼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았다. 손가락 하트 등 다정한 포즈로 사진을 찍었다.
‘좀 적극적으로 해봐요. 빼지 좀 마시고!’
그녀가 나에게 남들에게는 안 들릴 낮은 소리로 말을 했다.
응? 무슨 소리야. 적극적으로 하고 있는데?
내가 넋 놓고 있자 그녀가 나의 어깨를 손으로 움켜쥐며 힘을 주고 있었다.
‘잠시만 자세 낮춰 봐요.’
엉겁결에 무릎을 살짝 굽히자 나유정은 한쪽 팔을 내 목에 올리고 어깨동무를 했다.
마치 친한 남자친구들이 하는 포즈였다. 갑자기 콧속으로 나유정의 향기가 훅 밀려들었다.
“어라? 작가님 표정 좀 밝게 해보세요. 방금 표정 너무 굳으셨어요.”
기자의 말에 억지로 밝은 표정을 지었지만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힘 좀 빼요.”
퍽!
나유정의 냥냥 펀치가 내 복부에 작렬했다.
그녀의 그 행동으로 주위 배우들과 기자들 심지어는 나까지 웃음이 터져 나왔다.
모 예능 방송에서도 잘했던 나다. 일단 일이라고 생각하고 나유정에게 보조를 맞추기 시작했다.
손으로 브이 자를 그리며 찍기도 하고 같이 팔짱을 끼고 등을 맞대는 쌍팔년도식 사진도 찍었다.
"오! 작가님 이제 잘하시네요. 자연스럽습니다. 무슨 배우 같은데요? 다른 포즈로 좀······."
아니 몇 장을 찍는 거야? 쩝.
그렇게 나와 나유정의 투 샷 촬영이 끝나고 자리로 들어가려고 하는 찰나였다.
이수현이 내 옆으로 다가오며 나와 기자들에게 말을 했다.
"작가님 유정 씨하고만 찍으실 거예요? 저도 좀 같이 찍어주세요."
“..........”
음. 자강두천.... 아니 여배우들의 자존심 대결인가? 사진 찍는 것까지 왜 경쟁을 하고 그러지?
“저도 유정 씨처럼 작가님의 선택을 받은 배우잖아요. 사진 정도는 괜찮으시죠?”
“아! 네. 당연하죠.”
내가 흔쾌히 승낙하자 그녀는 내 오른쪽으로 파고들더니 팔짱을 끼는 게 아닌가.
음······.
나는 그녀의 행동으로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나에게도 이런 날이 오다니. 일류 배우들과 다정하게 사진을 찍는 날이 올 거라고 전혀 생각해본 적 없었다.
“어? 작가님 웃으시네. 좋으신가 보다. 하하.”
이준환 PD가 검지로 내 얼굴을 가리키며 말을 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입꼬리에 미소가 살짝 걸린 모양이었다.
피디의 말에 다시 웃음바다가 됐다.
“작가님 유정 씨랑 찍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으신 거 같더니 수현 씨와는 좀 떨리세요?”
사진을 찍고 있는 기자 중 한 명이 또다시 농담을 건넸다.
그러자 왼쪽에 서 있던 나유정의 얼굴이 빠지직 굳는 게 실시간으로 보이고 있었다.
저기요! 내가 한 말 아니거든요?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이수현과 함께 한껏 포즈를 잡으며 사진 촬영을 마쳤다.
그리고 약 30분 동안 이어진 동영상 인터뷰 촬영이 있었다. 최근 트렌드를 반영해 스틸컷 형식으로 최대한 간략하게 찍었다.
그렇게 대본 리딩이 끝이 났다. 슬기로운 덕질생활 때에는 워낙 급하게 진행해서 그런지 다들 정신이 없었고 졸속으로 진행됐지만, 이번은 달랐다.
블록버스터급 예산이 투입돼서 그런지 JTVC에서도 적극적으로 도움을 줬다. 전문 촬영팀이 와서 찍는 걸 보니 아무래도 드라마 홍보용으로 이용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일을 마치고 회사로 돌아오는 차 안.
"집에 모셔다드려요?"
"........."
나유정이 아까부터 약간 저기압 상태였다. 그녀는 최신곡을 들으며 팔짱을 낀 상태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정 씨?"
"왜요!"
"집에 모셔다드리냐고요."
"밥이나 먹고 가요. 오전 내내 일했더니 배고프네요."
우리는 근처 식당에 내려 음식을 주문했다. 들어가는 과정에서 약간의 소란이 있었지만 내가 적절히 차단했다.
"아까 수현이 언니가 팔짱을 끼니 그냥 헤벌쭉해서······. 쯧쯧."
나유정은 이상한 얼굴을 해가며 내가 했던 표정을 과장되게 표현하고 있었다.
"웃긴 했어도 그 정도로 이상하진 않았습니다만······."
"아니긴요? 진짜 꼴불견이었어요."
"과장 좀 하지 마요."
"과장 아닌데요? 좋았어요? 언니가 팔짱 끼워줘서?"
"별다른 감정은 없습니다만?"
"흥. 남자는 다 똑같다던데요? 다 늑대라고!"
"똑같긴요? 저는 다릅니다. 유정 씨 요즘 로맨스 소설 읽는다면서요."
"네. 그런데요? 그거랑 무슨 상관이에요?"
"거기 남주인공의 비현실적인 스타일이 저랑 같은 거 모르세요?"
"비현실적인 스타일요?"
"네. 능력은 출중한데도 바람둥이가 아닌 일편단심 스타일!"
"?!"
나유정은 내 개드립에 터질 뻔하다가 입술을 꽉 깨물고 다시 질문했다.
"그 일편단심 대상이 누군데요? 있긴 있어요?"
"곧 결혼할 겁니다."
"네? 뭐라고요?"
나유정은 뜬금없는 내 발표에 매우 놀라며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깜짝 놀라기는······. 결혼을 하긴 하는데 일하고 합니다."
"아이 씨 깜짝 놀랐잖아요. 기레기도 아니고 무슨 그런 소릴 해요."
"자기가 별것도 아닌 농담에 걸려 들어놓고······. 잡생각 그만하시고요. 내일부터 촬영 들어가면 바빠질 테니 마음 단단히 먹어요."
"치.... 내가 연기를 몇 년이나 해왔는데 공자 앞에서 자꾸 문자 쓸 거예요?
"걱정되니까 그렇습니다. 쉬지도 못하고 연속으로 드라마 찍는 건데...."
"걱정은 하긴 해요?"
나유정이 말을 하며 피식 웃고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곧바로 엄근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자 곧바로 푸짐한 쌈밥이 테이블에 올라왔다.
* * *
그리고 다음 날 12시 테리우스의 미니앨범이 발매되었다. 국내 NO. 1 스트리밍 서비스는 이제 개편이 되어 시간별로 등락하는 TOP 100이 없어지고 24시간 차트로 새롭게 변경됐다.
24시간 기준 스트리밍 40 + 다운로드 60으로 계산이 되며 하루기준 1인 1표만 적용이 되고 있었고, 차트는 있고 순위 표시가 안 되게 변경되었다. 물론 더 클릭해서 들어가면 순위가 표시되는 일간, 주간, 월간 차트도 다 있긴 했다.
메인 페이지의 24시간 차트도 재생을 누르면 1위부터 나오던 게 무작위로 나오는 식으로 기본 설정이 바뀌었다. 이런 결과로 당분간은 사재기나 팬클럽의 인위적인 실시간 총공격이 힘들어진 상태였다. 당분간은 말이다.
그야말로 많은 사람이 좋아해야 하며 진짜 좋은 곡으로 승부해야 하는 상황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나는 테리우스의 신곡에 대한 반응은 과연 어떨지 궁금했다.
‘반응이 좋았으면 좋겠다. 곡은 확실하니까.’
목요일은 테리우스의 케이블의 뮤직넷 음악방송 출연이 있을 예정이었다. 드라마 출연 전에는 테리우스가 팬덤이 큰 편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끌어모은 상태였기 때문에 정오가 되면 최종 몇 위로 진입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현재 미니앨범 판매현황을 보고받으니 심상치 않은 수준이었다. 대략 35만 장은 넘을 것 같다는 마케팅팀의 보고가 있었다.
이 정도면 남자 아이돌 초동 20위권에는 무난히 진입하지 않을까 한다. 아직 집계가 다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 봐야 확실한 결과가 나온다.
나는 초반 촬영분이 거의 없는 나유정을 대성이에게 맡겨놓고 사무실에서 일을 보며 순위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12시 24시간 차트 순위가 최종 결정되었다.
"으앗! 24위! 나이스!"
뮤직넷에서 리허설을 하고 있는 녀석들도 환호성을 지르지 않았을까? 지금껏 최고 순위가 98위인가 그랬을 거다. 그것도 하루 TOP 100 찍고 바로 광탈했었다.
그날 초동 판매량도 집계가 완료됐는데 무려 38만 장으로 역대 아이돌 초동 판매랑 19위에 랭크됐다. 상위권 기록들이 몇 개의 그룹에 한정되어 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확실히 이번에 1티어에 진입했다는 게 느껴지는 판매량이었다.
"와······. 대박. 확실히 드라마 영향이 크긴 크구나."
내 공로가 컸다는 사실에 너무 뿌듯했다. 기존 초동이 5만 장 정도 나갔던 걸 생각하면 정말 대단한 발전이었다. 38만 장이라니······. 물론 전 세계 보이그룹을 평정하고 있는 슈퍼노바의 경우 2백만 장 이상을 팔기 때문에 갭 차이는 엄청나게 컸다.
‘거기까지 가려면 훨씬 더 걸리겠지. 아직 갈 길이 멀다.’
아마도 24시간 차트도 더 올라갈 가능성이 컸다. 음악방송에 계속 얼굴을 비칠 테고 여기저기 방송에 출연해서 곡을 계속 알릴 예정이었다.
10위권에는 무난히 들어가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상을 하고 있었다.
부우우웅~
박영관에게 전화가 왔다.
"어. 여보세요. 영관이냐?"
"형! 우리 24위야 24위! 대박! 지금 이든이 울고 있어."
"그래. 나도 봤다. 축하한다. 이제 꽃길만 걷자."
"으헝헝······. 우리 이제 뜨는 거야?"
"드라마 나와서 뜨긴 벌써 떴지. 그게 앨범으로 연결되는지가 관건이었고. 오늘 24위 찍었으니 방송 돌면 더 올라가겠다. 그리고 그게 문제가 아니야. 초동 38만 장 찍었다. 대박 났어."
"엉엉. 형 고마워. 말은 안 했지만 진짜 형밖에 없는 거 알지? 나 너무 기뻐서 눈물 나온다."
"그래. 그래. 계속 그렇게 열심히 해. 그럼 너도 나처럼 차도 사고 그럴 테니까 알았냐?"
"알았어. 형. 내가 애들 단속 잘할게. 진짜로."
"너나 잘해 인마. 나는 네가 제일 걱정이야. 이제 전화 끊어. 아! 내가 토요일에 MBS 갈 때 따라가 줄게. 나도 한번 공중파 가서 거들먹거려 보자."
"어. 알았어. 애들한테 말해 놓을게. 이 실장님 얼른 퇴근하세요. 굽신굽신~"
금요일은 투데이 아이돌 녹화분이 방송되는 날이었다. 일부러 사무실에서 일찍 퇴근한 나는 집에서 핸드폰을 방해금지로 돌려놓고 JTVC를 내방 컴퓨터로 시청 중이었다.
과연 월요일에 녹화했던 게 어떤 식으로 편집되었을지 궁금했다.
방송을 보는 내 표정은 내가 나오는 부분을 기점으로 딱딱하게 굳어갔다.
크흑······. 내가 이렇게 주책을 떨었다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제발 이 방송을 지인들이 보지 말아야 할 텐데······.
정말 기도하고 싶은 심정이다.
방송이 끝나고 저녁 식사 때 가족들은 아직 모르는 눈치였다. 투데이 아이돌은 일반인에게는 그리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 아니었으니까.
나는 일단 한숨을 돌린 후 방에 들어가 미튜브를 클릭했다.
"헉!"
실시간 인기 동영상으로 밑에서부터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투데이 아이돌 핫클립이 눈에 띄었다.
"아! 안돼······."
나는 핸드폰을 침대에 던져놓은 뒤 그냥 눈을 감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냥 모든 것을 잊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테리우스를 데리고 뮤직 코어 방송이 있는 MBS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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