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는 스타 작가님-62화 (62/263)

< 자강두천 (1)>

대본 리딩 현장으로 가는 길이었다. 나유정은 마치 대학생처럼 청바지를 걸친 캐주얼한 차림새였지만, 살짝 타이트한 티셔츠를 걸쳐서 그런지 전신의 굴곡이 완연했다.

“왜 그렇게 입었어요?”

내 말에 그녀가 살짝 미소짓는 게 느껴졌다.

"왜요? 이상해요? 대본 리딩 하러 가는 거지 무슨 시상식에 가는 것도 아니잖아요? 준형 씨처럼 그렇게 꾸미고 갈 필요 없어요."

"제 말은 그게 아니고 왜 그렇게 옷을 타이트하게...."

"준형 씨. 지금 몰래 나 훔쳐봤구나?"

"눈을 뜨고 있으니 그냥 보이는 거죠."

"이상해요? 나 요즘 이러고 다니는데? 맨얼굴에 티셔츠 한 장에 청바지 딱!"

"저기요? 무슨 맨얼굴이에요. 투명 메이크업인 거 다 알아요. 일반 남자들이나 속지 제가 속을 거 같아요? 테리우스 화장하는 거 옆에서 매일 보는데······. 그리고 제가 저번에 연하게 하고 다니는 게 제일 낫다고 알려주니 맨날 그러고 다니더만."

"아, 아니거든요? 이 정도는 맨얼굴이나 다름없거든요? 그리고 준형 씨가 제일 낫다고 해서 제가 이러고 다닌다고요? 무슨 망발이세요?"

나유정은 살짝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뭐 아니면 됐고요. 그런데 혹시······."

"혹시 뭐요?"

그녀는 기분이 상했다는 듯 차 시트에서 파묻혀 팔짱을 끼고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에요. 별거 아닙니다."

"괜찮으니까 해보시라고요."

아니! 이 아가씨야. 그만 좀 노려보라고! 근데 내가 하라면 못할 거 같지? 나는 할 말은 한다···.

"거······. 복장이 혹시 이수현 씨 견제하려고 하는 거 아닌가요? 젊음을 과시하는 뭐 그런 건가?"

"참나. 어이없네요. 아니거든요. 제가 수현이 언니를 견제해서 뭐하게요. 나랑 10살도 더 차이 나는데?"

"아니면 요즘 운동 열심히 해서 몸매 좋아졌다고 티 내는 거예요?"

‘..........’

맞는 모양이다.

나유정은 요즘 CF 촬영 아니면 거의 운동에 매진하고 있어서 그런지 예전보다 몸이 훨씬 다부지고 탄탄해졌다.

이전 영화에서 미쳐가는 배역을 연기해야 해서 상당히 마른 몸을 유지했던 그녀는 슬덕을 기점으로 마음이 편안해졌는지 살이 조금씩 오르기 시작하더니 차기작을 준비하면서 PT와 무술 훈련을 중점적으로 받자 그동안 숨겨져 있던 그녀의 본모습이 화려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아니라고는 못 하네요?"

"뭐예요. 내가 이러는 거에 불만 있어요?"

"아니요. 보기 좋아서요. 운동 열심히 한 티가 나요."

"흥!"

나유정은 콧방귀를 뀌더니 찰랑거리는 머리를 도도하게 왼쪽으로 휙 쓸어넘겼다.

"응? 안 하던 귀걸이까지?"

"옷은 평범하게 입어서 좀 해봤어요."

끄덕끄덕···.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나유정은 운동한 후 건강해지고 젊어져서 생기가 도는 느낌이었다.

* * *

차를 주차하고 나유정을 에스코트하며 스튜디오의 대회의실로 들어갔다. 현장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먼저 와 있는 상태였다. 우리는 15분이나 먼저 도착했는데 이미 조연급 이상 배우들은 한성우를 제외하고 거의 다 착석한 상태였다.

이준환 PD가 우리를 보고 먼저 아는 척을 했다. 그와 간단한 인사를 나누며 다른 배우들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이미 안면이 있는 김형탁과 안부를 주고받았으며, 일찍 와서 대본을 보고 있던 정혜성에게 잘하라는 당부의 말을 남겼다.

그는 이런 자리가 너무 어색한지 긴장한 듯 머리만 벅벅 긁고 있었다.

“혜성 씨. 긴장 안 해도 돼요. 평상시대로만 하면 아무 문제 없습니다.”

그는 내 말에 왠지 약간은 편해진 듯한 인상이었다.

IT 재벌이자 사이코패스인 이영민 역할의 한기주와는 처음 보는 자리였다.

"안녕하십니까? 작가님. 한기주입니다. 좋은 작품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같이 일하게 돼서 영광입니다."

한기주.

확실히 목소리도 좋고 뮤지컬을 해서 그런지 발성이 남달랐다. 그는 노래를 부를 때 벨팅 창법을 이용해서 시원한 소리를 잘 내는 배우로 알려져 있었다. 내가 혹시 배역에 대한 부담이 없냐고 하자 그는 대본을 보고 꼭 한번 해보고 싶었던 연기였다고 했다.

다행이었다.

상당히 냉혹한 배역이라 배우로서는 리스크가 상당히 컸다. 하지만 이 이영민이라는 사이코패스는 남주인공 한승호의 훈련 덕분에 범죄자만 처단하는 인간 백정으로 극단적 비호감으로 추락하는 그런 위험은 적다고 할 수 있었다.

문제는 사이코패스 행동대장인 이혁 역할의 이건호였다. 악질 중의 악질, 최악의 무개념으로 나중에 폭주하여 남주인공의 일을 그르치는 역할이라 좀 걱정이 되긴 했다.

‘본인이 한다고 했으니 극복해야 할 문제지. 그게 극복이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보고 어색하고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그를 향해 어깨를 한번 툭툭 쳐줬다.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회의실 앞에 자리 잡은 단아하고, 세련되게 차려입은 이수현이 보였다. 그녀는 환히 웃으며 우리를 반겨줬다.

"안녕하세요. 수현 씨. 이렇게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네. 작가님 안녕하셨어요? 유정 씨도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수현 씨."

나는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는데 나유정은 왠지 살짝 거리를 두는 모습이었다.

"이 작품 못할 줄 알았는데 결국 배역을 하게 됐네요. 감사합니다. 작가님."

"뭘요. 엄청 잘하실 것 같은데요? 전 수현 씨만 믿고 있습니다."

옆에서 나유정의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저 어때요? 작가님 말씀 듣고 체중 좀 늘렸는데요. 주변 사람들이 다들 훨씬 보기 좋다고 하더군요. 진즉에 이렇게 했으면 어땠을까 싶네요."

"말해서 뭐하겠습니까. 이제 배역에 딱 어울립니다."

나는 엄지를 척하니 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제는 억지로 다이어트를 해서 젊어 보이려고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부드러운 이미지가 연출되고 있었다.

이제 대부분의 배우가 착석을 했고 미리 홍보해서 대본 리딩 장면을 취재하려는 기자들이 와 있는 상태였다.

별안간 뒤쪽 문이 벌컥 열리면서 키 큰 남자가 회의실로 들어왔다.

"어엇?"

웅성웅성···.

등장한 인물은 바로 10년간 드라마에 출연하지 않고 있던 한성우였다.

기자들은 의외의 배우가 등장하자 허겁지겁 사진을 찍기 위해서 셔터를 눌러대고 난리가 났다. 한성우와는 계약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정보 공개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은 제작사가 극적인 마케팅에 이용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 같았다.

한성우라니! 이 얼마나 파격적인 캐스팅이란 말인가!

이준환 피디는 한성우를 불러 앞쪽으로 앉게 했다.

조연으로 출연하는 중견 배우들도 놀란 눈치였고 특히나 이수현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한성우를 쳐다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한성우는 특유의 부드럽고 젠틀한 미소로 주위 사람들에게 인사를 했다.

사람들이 다 모이자 이준환 PD가 일어나서 시작을 알리는 연설을 했다.

"극적으로 출연이 결정된 한성우 씨를 보고 다들 놀라셨을 것 같은데요. 앞으로 이 작품을 제작하면서······."

대체로 연출을 맡은 감독과 작가 그리고 주요 배우들이 인사를 하고 대본 리딩이 시작되곤 했다. 이준환 PD의 차례가 끝나고 내 소개가 이어졌다.

"안녕하십니까? 작가 이준형입니다. 이렇게 훌륭하신 배우들과 함께 작업하게 돼서 영광입니다. 대본은 이미 완성된 상태기 때문에 여러분들을 쪽대본으로 괴롭히지 않을 것입니다."

"하하하······."

"아무쪼록 사고 없이 즐겁게 작업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와! 잘생겼다. 짧아서 좋다."

그 후로 한성우부터 시작해서 이수현, 나유정 등 주연들과 주요 조연배우까지 소개가 이어졌다. 나는 그 모습을 아우라 스카우터를 켜고 지켜보고 있었다. 대회의실에 가득 찬 황금빛에 도저히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였지만, 나는 마치 신의 축복을 받는 것 같은 신성한 느낌이 들었다.

‘우와. 미쳤다. 이 캐스팅! 무조건 시청률 1위 간다. 캐스팅이 이런데 사람들이 안 보고 배겨?’

나는 눈을 살짝 감으며 테이블 아래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바로 대본 리딩이 시작되었다. 대본 리딩은 회의실 같은 곳에 모여 대본 3~4화 정도를 맞춰보는데 자리에 앉은 상태로 실제로 연기하는 것처럼 대사를 읽었다.

먼저 한승호와 김인애의 행복한 가정생활과 성공적인 그들의 커리어가 잔잔히 나오고 한승호의 친구들도 소개가 되는 화였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유정이 등장하며 약간의 떡밥이 나왔다.

한승호 역의 한성우도 짧은 시간임에도 대본은 잘 숙지했는지 매끄러운 대본 리딩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대본을 보지 않고 배우들만 뚫어지게 바라보며 연기를 체크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고 뭔지 모를 위화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음! 뭐지? 어?’

이수현!

그 위화감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이수현이였다. 다른 배우들은 대본을 보면서 연기를 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대사가 머릿속에 들어있는지 테이블에 손을 올려놓은 채 상대 배우를 쳐다보고 실전처럼 연기하고 있었다.

`헉! 뭐야. 벌써 다 대본을 통째로 외운 거야?`

테이블 위의 대본을 보니 얼마나 대본을 들여다봤는지 퉁퉁 부풀어 있는 상태였고 포스트잇으로 덕지덕지 누더기가 된 상태였다.

`와! 이래서 피디들이 이수현, 이수현 하는구나.`

아직은 나만 그 모습을 알아챈 것 같았다.

2화에서는 뭔가 불길함을 느낀 김인애가 야근하는 남편을 놀라게 해주기 위해 남편이 근무하는 경찰청을 방문하면서 시작됐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나유정의 역할인 나지혜가 등장한다. 나지혜는 부모를 여읜 흙수저 고아로 할머니의 손에서 어렵게 크다가 친척 집을 전전하면서도 어렵게 경찰이 되어 승승장구하는 독하고 유능한 여자였다.

2화 마지막 부분에 남편을 미행하며 그의 배신을 알아챈 김인해의 미칠듯한 오열!

놀랍게도 이수현은 2화도 전부 외워서 하고 있었다. 그제야 한성우와 나유정도 그녀가 대본을 보지 않고 연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이수현이 보란 듯이 외워왔다는 걸 자랑하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다들 파악이 늦었던 것이다.

한성우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리기 시작했고, 나유정은 한쪽 입꼬리를 살짝 들어 올리더니 급기야 자신도 대본을 덮어버리는 게 아닌가?

지금 유심히 보니 나유정의 대본도 이수현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누더기다.

‘뭐야? 설마······. 유정 씨도?’

무슨 이런 황당한 일이 있단 말인가? 주연 배우 두 명이 벌써 대본을 다 외웠다고? 이런 일이 전례가 있을까 싶다.

3화부터는 복수의 칼을 가는 김인애와 영문도 모른 채 일방적으로 당하는 나지혜의 모습이 그려졌다. 3화부터는 나지혜의 대사도 상당히 많아지는데 그런 것은 아랑곳도 하지 않으며 외운 것으로 연기를 하는 나유정이었다.

꼭 승부 같았다. 누가 실수하는지 내기라도 하는 듯한 경쟁이었다. 이런 불꽃튀는 경쟁으로 연기가 이상해질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것은 나의 오산이었다.

`자강두천인가?`

자강두천. 자존심 강한 두 천재의 대결이라는 우스갯소리로 쓰이는 인터넷 용어였다.

하지만 이수현과 나유정의 연기대결은 진짜 천재들의 대결로 보는 사람을 극도로 긴장시키고 있었다. 마치 아슬아슬한 낭떠러지를 걷는 기분이었다. 원래 극의 분위기가 다크한 면이 강했기 때문에 충분히 만족스러운 연기였다.

4화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제는 대본 리딩에 참여하는 사람이 이수현과 나유정이 대본을 보지 않고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모두 눈치챈 상황이었다.

사람들은 그 모습에 압도되어 왠지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리고 손에 땀을 쥐고 있었다.

한승호와 친구들은 괴단체의 비호를 받은 채 별장에서 모임을 한다. 김형탁과 한기주 역시 노련한 연기자들답게 뛰어난 연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김인애의 마지막 졸도 신을 끝으로 3시간에 걸친 논스톱 대본 리딩이 끝이 났다.

"수고하셨습니다."

참가자들의 박수가 이어졌다.

‘와! 진짜 오줌보 터지는 줄 알았네. 아무도 쉬자는 이야기를 못 할 정도로 배역에 빠져들다니···.’

원래 대본 리딩은 가볍게 하는 거로 알고 있었는데 오늘만큼은 달랐다.

이수현과 나유정의 자강두천 때문인지 분위가 과열되어 쉬지 않고 달려버린 것이다.

잠시 휴식시간이 끝나고 사진 촬영이 있을 예정이었다.

이수현이 나유정에게 다가왔다.

"유정 씨 준비 많이 했나 봐요."

"언니도 열심히 하셨네요? 아! 언니라고 해도 되죠?"

"그럼요. 저야 환영이죠."

“언니도 말 놓으세요. 전 이제 그게 편하네요.”

“그럴까?”

두 명의 배우가 대화하는데 왠지 모르게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것은 유치하고 단순한 기 싸움이 아니었다.

정말로 두 연기 천재 간의 자존심 대결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숨이 턱턱 막혔다. 이준환 PD도 내 옆으로 와서 옆구리를 툭툭 건들었다.

"장난 아니죠? 제가 말씀드렸잖습니까. 이건 실패할 수가 없는 캐스팅이라니까요?"

"으음······. 정말 이 정도로 준비해올 줄은 몰랐네요."

"원래 이러나요?"

"전혀요. 말 그대로 대본 리딩 아니겠습니까?"

"허 참······. 소름 돋네요."

"나중에 촬영할 때는 더 대단할 겁니다. 지금은 살짝 힘을 뺀 거예요. 말 그대로 리딩이니까요."

이런 게 대본 리딩이라고? 나는 그냥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만 나올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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