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테리우스 제6의 멤버 (4)>
두 번째 라운드는 댄스 경연이었다.
영관 X 이든 팀과 창민 X 김훈이 팀은 댄스곡이 나올 때 꽤 멋있고 유쾌하게 미션을 소화했다. 특히 래퍼 겸 메인 댄서인 창민이의 댄스 실력은 발군이었다.
뛰어난 신체적 능력을 이용해 강력하고 절도있는 댄스를 보여줬다. 재수 좋게도 마침 알고 있는 곡이 나온 모양!
영관 X 이든 팀도 창민 X 김훈이 팀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여러 댄스 개인기를 가지고 있는 리더 박영관의 기지로 완벽히 춤을 알지 못하더라도 재치있게 잘 대응을 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드디어 1차 대결에서 사람들을 쓰러지게 만든 `온리준형`팀의 차례였다.
이미 만족할만한 장면을 뽑아서 그런지 만면에 환한 미소를 띠고 있는 전 PD가 기대에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이! 전 피디. 왜 그런 눈빛으로 나를 보는 거지? 설마 내가 더 망가져야 하는 거야? 설마.
나와 연준이는 중앙에 서서 어떤 음악이 나올지 준비하고 있었다. 장내가 조용해진 가운데 스태프가 음악을 실행시켰다.
녹화장의 스피커에서는 분위기 있는 일정한 비트의 드럼 소리에 EDM 사운드가 흘러나왔다.
`헉. 이 곡은! 씨스터즈의 `나 홀로`잖아 이 미친!`
끈적거리는 섹시한 사운드가 녹화장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우리는 순간적으로 댄스 포지션을 잡았다. 이 곡은 재미로 테리우스 애들과 함께 자주 췄던 곡이라 아주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씨스터즈는 내가 좋아하는 걸그룹이다. 텐뮤지스, BOB, 씨스터즈···. 일관성 있는 선호인데 어째 전부 다사다난했던 일을 겪은 그룹들뿐이다. (물론 잡덕답게 다른 그룹도 두루두루 좋아한다.)
나는 옆 연준이의 동작을 힐끔거리며 참고하면서, 리듬에 맞춰 팔짱을 끼고 한쪽 무릎을 들어 올렸다. 덤으로 궁둥이가 오리처럼 뒤로 쭉 빠져나와 아주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연출됐다.
"푸하하하···."
"으허허허···."
나의 근본 없는 춤에 다시 MC들과 바닥으로 철퍼덕 쓰러지고 스태프들도 한꺼번에 빵 터지고 말았다.
그래도 어느 정도 춤을 추는 연준이는 예쁘게 나오는 거 같은데 이쪽은 그야말로 눈 뜨고는 못 봐줄 참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원곡 안무와 최대한 비슷한 느낌을 주기 위해서 열심히 고개도 돌리고 팔 동작도 따라 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그야말로 총체적인 난국!
하이라이트 안무인 허리를 짚은 채 한쪽 다리 하이힐 끝으로 바닥을 향하게 해서 좌우로 스윽스윽 움직이는 섹시한 동작을 하려다 다리가 꼬여서 휘청하면서 넘어질 뻔했다.
"크하하하···."
젠장. 웃어라. 웃어. 나는 열심히 너희를 위해 장렬히 산화하마. 이 녀석들 나의 이 마음가짐을 알까?
특히 죽는다고 바닥을 뒹굴고 있는 박영관 저놈의 자식! 엄마는 왜 항상 짜장면이 싫다고 하는지 꿈에도 모를 놈이다.
갑자기 살짝 슬퍼지려는 건 왜일까?
그래도 꿋꿋하게 어설픈 안무를 다 소화했다. 마지막 뒤태를 보여주며 씰룩이는 엉덩이춤이 대미를 장식했다. 아주 임팩트가 강렬했을 것이다. 그 정도로 조져놨으니···.
"으흐흐···. 아 배 아파."
"크흠.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우리 이 매니저님 빅 재미, 큰 웃음 주셨고요. 아~ 정말 이분 없었었으면 너희들 어쩔 뻔했냐."
"진짜. 저도 동감하는 게 아까 그 눈빛 보셨어요? 춤은 말도 못 하게 못 추는데 눈빛은 정말 이를 악문 모습이었습니다. 어떻게 서라도 이 자리에서 시청자들을 웃겨서 테리우스를 띄우겠다는 그 마음가짐!"
역시 김주철은 날카로웠다. 괜히 예능형 아이돌의 끝판왕이라고 하겠는가? 나의 마음가짐까지 정확하게 파악한 것이다.
그 말을 듣자 테리우스 멤버들도 정신을 차린 듯 웃던 것을 멈추고 나를 위로해주기 시작했다.
"형. 레전드다. 미쳤다. 형의 그 재능 너무 탐난다. 어떻게 거기서 그게 터지냐. 와···."
나를 토닥이고 있는 박영관의 입을 찢고 싶었다. 평소 같았으면 바로 멱살을 잡고 헤드록이 들어갔을 텐데 보는 눈이 많아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등수가 나왔습니다. 이번에도 상남자 팀이 1등, 영이야 놀자 팀이 2등입니다. 역시나 최하위는 온리준형 팀입니다. 선발되려면 분발 좀 하셔야겠습니다."
"후우.... 노력상 같은 거 없습니까? 저는 일반인입니다만?"
"괜찮습니다. 테리우스를 프로듀스! 대망의 3라운드가 남아 있기 때문이죠. 뭐죠? 치콘 씨?"
"네. 3라운드는 바로 연기 대결입니다. 요즘 연기하는 아이돌 하면 바로 테리우스죠. 제시된 영화의 대사를 외우시고 연기해주시면 제작진들이 연기 평가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연기는 그나마 자신이 약간 있었다. 대학 때 연극동아리에서 연기를 좀 배웠기 때문이다. 사실은 시나리오를 한번 써보거나 혹은 연예인급 여학생들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가입한 것이다. 우리 학교에는 유명한 연극영화과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연예인급 외모를 가지고 있는 여자는 동아리는커녕 학교도 잘 안 나왔고 오히려 나랑 비슷한 목적으로 가입한 사람들만 많았다. 물론 나중에 힘든 연습으로 대부분 그만두었다.
전 PD가 가져온 영화는 바로 김자운 감독의 `씁쓸한 인생`이었다. 할리우드 배우로 크게 성공한 이병훈과 김형철 주연의 영화였다. 연기해야 하는 부분은 거의 마지막 부분 보스를 죽여야 하는 이병훈과 김형철의 씁쓸한 대화였다.
처음으로 영관이와 이든이 출격했다. 서로를 마주 보는데 이든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는 영관이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큭큭거리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잔망스러운 박영관의 연기와 로봇과 다름없는 이든의 대사가 이어졌다.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푸훗. 목욕감이래.”
"크흡..."
박영관이 로봇의 대사에 웃음을 참으려 미친 듯이 얼굴을 씰룩이고 있었다. 정이든도 박영관의 쭈글이가 돼가는 면상을 쳐다보며 얼굴을 씰룩대고 있었다.
"탈락!"
"네. 도저히 못 봐주겠습니다. 정말 왜 이준형 작가가 이 둘에게 대사를 별로 안 줬는지 알 것 같아요."
"선배님. 얘랑 연기하면 누구라도 무조건 그렇게 됩니다. 선배님. 한 번 해보세요. 웃겨서 못한다니까요!"
"응. 됐고. 어차피 난 연기 안 하니까."
"자 다음은 1위를 달리고 있는 창민 X 김훈 조입니다. 과연 이번에도 일등을 할 것인지?"
하지만 김훈의 허접한 연기에 산통이 다 깨지고 말았다.
"컷!"
"와! 왜 드라마에서 3인방이 들러리가 됐는지 알겠다. 알겠어."
"저는 들러리 아닌데요?"
박영관이 억울한 듯 손을 들었다.
"역시 연기는 연준이하고 창민이가 잘하는구나?"
"자 이제 대망의 연준 X 준형 조입니다."
나는 MC들의 말을 듣지도 않고 연준이의 어깨에 손을 얹고 묵직하게 이야기했다.
"장난하지마. 제대로 연기해. 알았어? 내 얼굴 보고 웃지도 말고."
"응?"
"진지하게 하라고."
내가 연준이의 뺨을 톡톡 건드니 그의 동공이 살짝 커졌다. 이건 일부러 기분 나빠지라고 하는 행동이었다.
"저기요. 연기 안하세요?"
"이제 합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나는 거만하게 서서 연준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노래와 춤에서는 흑역사를 썼지만, 이걸로 만회해보겠어. 왜 이래 나 왕년에 연극동아리 출신이야!"
"레디 액션!"
"너··· 너 정말 이럴 거냐?“
내가 조직의 보스처럼 묵직하게 말을 하자 연준이는 슬픔에 찬 눈으로 울먹거리며 대사를 했다.
"저한테 왜 그러셨어요? 말 좀 해봐요. 저한테 왜 그랬느냐고요."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오오오···.
MC와 테리우스 멤버들이 꽤 괜찮은 나의 연기에 깜짝 놀라고 있었다. 살짝 배운 연기를 여기에 써먹다니···. 참 인생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다.
"하아··· 아니 그런 헛소리 말고 진실을 말해봐요."
분노와 슬픔이 공존하는 두 가지 표정을 짓고 있는 한연준의 연기는 소름이 끼치는 것 같았다. 나도 연기를 괜찮게 하고 있지만, 이 녀석은 진짜 연기 천재였다.
잠깐 본 영화 장면을 완벽하게 자기식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장난처럼 시작된 연기였지만 주위의 모든 사람이 연준이에게 빠져들고 있었다.
"저 진짜 모르겠거든요. 나 진짜로 묻으려고 했어요? 진짜로? 8년 동안 당신에게 개처럼 충성한 나를!!!" 아무 소리나 지껄여봐요! 어서!"
연준이가 나에게 총을 들이밀었다. 하지만 괴로움에 부들부들 떨면서 다시 총을 내려놓았다.
그의 슬픔과 분노가 공존하고 있는 감정은 나에게 그대로 전달되고 있었다. 연준이 연기력 때문인지 허접하기 그지없는 나의 연기력도 약간 상승하는 느낌이었다.
"도대체 뭐가 널 이렇게 만들어놓은 거냐. 그 애 때문이냐?"
나의 마지막 대사가 끝나자 연준이가 총을 다시 들어 올려 슬픈 눈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소리는 비록 크지 않았지만 나는 총에 맞는 연기까지 사실적으로 하며 연준이의 마지막 연기를 빛내줬다.
"와! 박수!"
"대박!"
"미쳤다. 한연준!"
비록 장난으로 한 영화 패러디였지만 한연준은 짧은 순간에 완벽하게 배역에 몰입했다.
"이래서 연준이를 연기돌, 연기돌 하는구나. 허···. 난 무슨 이병훈 선배님이 오신 줄??"
연준이는 계속된 찬사에 뒤통수를 긁으며 쑥스러워했다.
"아! 그리고 연준이를 위해 연기에 밑거름이 되어주신 이준형 매니저님. 혹시 연기도 배우셨어요? 곧잘 하시네요?"
"대학 때 연극동아리를 잠깐···."
"이거 봐··· 테리우스 너희들은 진짜 이 매니저님한테 잘해야 한다. 드라마도 캐스팅해줘. 예능에 같이 나와서 분위기 살려주고 빵빵 터트려줘, 연기력을 보여줄 수 있게 불쏘시개도 되어주시고···."
어이 어이! 불쏘시개라니? 말이 지나치네. 나름 연기 준수했구만.
뭐 그래도 상관없다. 연준이는 오늘 콩트에서 연기로 레전드를 찍었으니까. 이 장면을 업계 관계자가 본다면 캐스팅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내가 노린 게 바로 그거였다.
어찌 됐든 3라운드는 우리 조가 1등을 거머쥐었다. 2등은 창민 X 김훈 조, 3등은 로봇 연기를 보여준 영관 X 이든 조였다.
"자. 이렇게 테리우스를 프로듀스가 모두 끝이 났습니다. 결과는요!"
"1위는 노래와 춤에서 동시에 우승한 창민 X 김훈 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1등 상품으로 한우 갈비 세트를 수여하겠습니다."
창민이가 앞으로 나와서 한우 세트를 들고 환호했다.
"아! 제작진이 준 점수표를 보니 2, 3위가 동점입니다. 이거 큰일인데요. 이건 저희가 임의로 결정하도록 하죠."
"그럴까요?"
두 MC는 귓속말을 나누더니 서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 2등이 결정됐습니다. 2등은! 연준 X 준형 조!"
"우와···."
나는 연준이와 얼싸안았다. 허··· 이게 뭐라고 기쁜 거지? 나도 그냥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좋은 걸 어떡한단 말인가!
"저 오늘 진짜 감동했어요."
"감동요?
김주철이 갑자기 클로징 멘트를 앞두고 나를 보며 말을 하고 있었다.
"진짜 여러분은 매니저님한테 잘하고 태도도 본받아야 해요. 솔직히 매니저님 드라마 히트해서 이런 거 하지 않아도 되시는데 다 여러분들을 위해서 이렇게 살신성인을 하시는 겁니다. 제가 신인 때 우리 매니저가 이랬으면 난 진짜 평생 은인으로 모셨을 거야."
"음··· 주철 씨. 그건 좀 오버인데요."
분위기가 다큐 쪽으로 흘러갈까 봐 내가 살짝 언급을 해줬다.
"아? 제가 너무 꼰대 같았죠? 나도 곧 사십이라···."
허···. 이 양반은 곧 마흔이라는 사람이 무슨 나랑 비슷하게 생겼어. 쩝···.
우리는 그렇게 투데이 아이돌을 성공리에 촬영을 마쳤다. 스튜디오를 나갈 때 전 PD가 문 앞까지 나오며 인사를 했다.
"이 작가님 오늘 진짜 수고하셨어요. 테리우스 편 무조건 레전드 찍습니다. 하하하!"
쓰읍. 왜 갑자기 이 넓적한 면상을 한 대 치고 싶지?
"됐고요. 아무튼, 편집이나 잘해 주세요."
"혹시 나중에 게스트로 또···."
"안 해요! 안 합니다. 절대로!"
"·········."
예능 프로그램은 진짜 이번이 마지막이다. 내 다시는 나오지 않으리라. 나중에 어떤 프로그램을 나가더라도 또 노래랑 춤을 시킬 것 아닌가? 절대 안 된다.
테리우스를 1티어로 만들기 위해 잠시 외도한 것뿐이다.
나는 전 PD와 인사를 나누고 회사로 복귀했다. 테리우스는 수요일 음원이 나오고 다음 날 뮤직넷 음악방송에서 컴백을 앞두고 있다. 그래서 내일까지 세부적인 마무리를 해야 했다.
“형 오늘 고마웠어.”
역시나 생각이 제일 깊은 건 훈이었다. 훈이는 내가 성대를 잘 조치해준 덕분에 기존의 시원한 가창력을 되찾았다.
나는 훈이의 감사에 아무 말 없이 미소만 지었다.
‘후후. 고맙긴? 매니저가 당연히 그래야지. 너희들 인마. 내가 무조건 1티어로 띄운다고! 알았냐?’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제발 이번에 1위를 한번 해야 할 텐데.
그리고 다음 날, 나의 차기작 나만의 세계의 대본 리딩이 있는 날이었다. 한성우, 이수현, 나유정, 김형탁, 한기주까지.... 엄청난 거물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날이었다.
솔직히 투데이 아이돌 방송이 편집 중이라 다행이었다. 만약 방송되고 대본 리딩을 했다면 엄청 창피했을 거다.
나는 한껏 차려입고 나유정과 함께 대본 리딩 현장으로 향했다.
ⓒ 소광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