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는 스타 작가님-53화 (53/263)

< 자네 이 배역은 어떤가? (1)>

다음날 나는 나유정을 파주 액션 스쿨을 데려다주기 위해 운전대를 잡았다. 그 이유는 고급 자동차 브랜드인 B사를 방문하기 위함이었다.

나유정의 스케줄도 소화하면서 개인 용무도 보는 거라 일거양득이었다.

"그러니까 진즉에 차를 샀어야죠. 돈 벌어서 뭐 하려고···."

아이돌 최신곡을 들으며 리듬을 타고 있던 나유정이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어제 중고차 몰고 대전 갔다가 스스로 자책을 많이 했죠. 왜 사서 고생하는지 원."

"요즘 차는 그 뭐냐. 고속도로주행보조? 반자율주행? 그런 장치가 있어서 자기가 스스로 운전하잖아요."

"아···. 맞아요. 말 그대로 보조 장치긴 한데."

"여기에요?"

"네. 봐둔 녀석이 있어서요."

자동차 매장에 들어가서 평소 봐두었던 모델을 계약했다. 약 1억 조금 넘는 B사의 짙은 회색 CLS 스포츠세단형 모델이었다.

"더 좋은 거 사도 되잖아요. 왜 이렇게 싼 걸 사요?"

"·········."

나는 나유정을 바라보며 인상을 썼다. 옆에 있던 자동차 딜러도 쓴웃음을 짓고 있는 게 보였다.

"저는 차를 그냥 막 모는 스타일이라 이 정도면 됩니다. 그리고 유정 씨처럼 엄청난 부자도 아니고요."

"흐음. 내가 양보해준 금액이면 3대를 사고도 남을 텐데···."

"뭔 양보를 해요. 나중에 출연료 그대로 다 받았으면서?"

"그래도 나 때문에 더 받은 거 맞잖아요. 이제 보니 이 작가님 짠돌이네. 짠돌이."

"여보세요. 짠돌이 아니고요. 나중에 다 쓸데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에? 설마 독···."

"STOP! 거기까지! 이런 데서 이상한 소리 듣고 싶지 않습니다."

나유정은 자신도 모르게 급히 손으로 입을 가렸다.

아무래도 S급 연예인이 매장을 방문했다고 모두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으니까 민감한 이야기는 조심해야 했다.

"고객님. 다 끝났습니다. 오후에 오시면 선팅하고 사제 블랙박스 설치해서 바로 타고 가실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그럼 수고하시고요."

"아···. 고객님 저기 혹시 사진 한 장 찍을 수 있을까요?"

"예?"

"저요?"

"작가님하고 가능하면 유정 씨도 같이···."

"까짓거 찍죠. 뭐. 얼굴 닳는 것도 아닌데요."

나유정이 오히려 적극적으로 사진을 찍어줬다.

"유정 씨 요즘 슬덕 찍었다고 이미지 너무 바꾸는 거 아네요?"

"사람들이 자연스러운 걸 더 좋아하더라고요. 사실 이쪽이 제 성격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 원래 이런 성격인 게 맞겠지.

"주임님. 선팅은 제일 높은 급으로 공짜로 좀 해주세요. 이 사람 엄청 짠돌이라 그런 거 서비스해드리면 또 올지 몰라요. 요즘 돈을 팍팍 벌고 있거든요."

"에헤이. 자꾸 이상한 소리 한다."

"당연히 공짜로 해드려야죠. 사진도 찍어주셨는데요."

"감사합니다. 주임님."

나유정은 나를 보며 윙크했다. 얼마 안 되지만 그녀의 협상력으로 돈을 좀 아끼게 됐다.

우리는 파주로 향하고 있었다. 시트에 앉아 있던 그녀가 별안간 상체를 숙이더니 나를 향해 질문했다.

"준형 씨. '나만의 세계' 김인애 역 어떻게 됐어요? 소윤이 언니가 하는 거예요? 조연들은 그럭저럭 캐스팅이 잘 되고 있다던데 정작 제일 중요한 배역들이 삐거덕거린다면서요?"

"최소윤 씨랑은 안 하기로 했어요."

"네? 왜요?"

나는 그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해줬다. 그녀는 묵묵히 내 이야기를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수현 씨라면 괜찮을 것 같은데요? 같이 해본 적은 없지만, 연기 잘하기로 유명한 언니예요."

"일단 곧 계약할 것 같아요. 잠깐 만나서 면담을 하고 연기도 봤는데요. 유정 씨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할 거 같던데요."

"뭐, 뭐가요?"

"수현 씨가 진짜 PD들 말대로 연기를 너무 잘하더라고요. 저도 진짜 깜짝 놀랐어요. 순식간에 감정이입 연기를 하는데···. 허···."

"흥! 걱정 마요. 이 나유정이 어디 가서 연기로 밀리는 거 봤어요?"

"후후후···."

"그 기분 나쁜 웃음 뭐죠? 지금 비웃는 거예요?"

"유정 씨. 괜히 경쟁의식 갖지 말고 둘이서 극이나 잘 끌어갈 생각 하세요. 유정 씨보다 나이도 10살 이상 더 많은데 무슨 경쟁입니까?"

"누가 경쟁이래요? 캐릭터 자체가 다른데요? 두고 봐요. 내가 진짜 피 튀기는 액션이 뭔지 보여줄 테니까."

나는 그 말에 미소만 지은 채 대답하지 않았다.

벌써 그녀의 몸은 꾸준한 훈련으로 점점 탄탄해져 가고 있었다.

*   *   *

나는 JTVC 스튜디오에 가서 이준환 PD에게 근황 설명을 듣는 중이었다.

"일단 이수현 씨랑은 계약을 마친 상태입니다. 그리고 조연급들은 주요 역할인 남자 주인공의 친구 역할과 이현, 김하진 역할만 빼고 거의 다 캐스팅된 상태입니다. 비중이 큰 조연들은 아무래도 중요하다 보니 오디션을 볼 후보들을 추렸고요."

"그렇군요."

"비중이 적은 조연들은 캐릭터마다 저희쪽 캐스팅 디렉터가 배역에 어울리는 배우들을 뽑아서 프로필을 가져왔습니다. 한번 보세요. 최종계약은 아직 안 됐으니 맘에 안 드시면 바꿔도 됩니다."

"잠시만요."

나는 비중이 적은 조연들의 프로필을 살펴보았다. 딱히 태클을 걸 배우들은 보이지 않았다.

"별 이견이 없습니다."

"하하.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저희 캐스팅 디렉터도 진짜 능력 있는 사람이거든요."

"네. 캐릭터 분석을 잘하신 것 같네요."

"다음은 주요 조연들입니다. 의외로 남주인공 친구들 캐스팅은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바로 오디션을 볼 수 있는데요. 제 생각에는 캐스팅 디렉터가 배역에 진짜 잘 어울리는 중견급 배우들을 골라놓은 것 같습니다. 1픽을 보여드릴까요?"

"네. 빨리빨리 진도 나가시죠."

"먼저 IT 재벌이며 인간 백정 이영민 역할은 한기주 씨를 선정했습니다."

한기주라···. 괜찮네. 이미지가 완전히 어울려. 깔끔한 안경이 어울리는 지적인 배우다.

"오! 한기주 씨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조연급에서 주연급으로 올라가서 주인공도 하고 그러지 않았나요?"

"그때 그 드라마가 망해서 다시 조연급 됐죠."

"그렇군요. 그런데 이 역할을 본인이 한다고 하신 거예요? 예전 유명한 연쇄살인마급으로 흉악한 역할인데요. 이미지도 안 좋아질 테고···."

"괜찮습니다. 어차피 한기주 씨가 CF를 찍는 분도 아니죠. 대신 출연료를 좀 올려줄 생각입니다. 본인도 연기로 다시 인정을 받는다면 여기저기 괜찮은 몸값으로 출연이 가능할 테고요."

"이분이야 연기력 검증은 끝났으니 캐스팅에 이견 없습니다. 오히려 조연으로 쓰기 아까운 분이죠."

"뭐···. 워낙 드라마 속 캐릭터가 강렬하다 보니 서로 윈윈 할 수도 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까지는 약간 밍밍한 느낌이었죠."

"흐음···."

"다음은 반전의 화신인 정신과 의사 김태원 역입니다. 평소에는 부드럽고 순한 양 같은 인물이지만 사실은 사이코패스 조직을 이끄는 수장 격인 인물이죠. 그래서 가진 외모는 부드럽지만, 키도 크고 화를 냈을 때 위압감까지 줄 수 있는 배우를 찾고 있었는데

요. 마침 캐스팅 디렉터가 딱 맞는 사람을 추천해서 오늘 여기로 와보라고 했습니다."

"오늘요? 누군데요?"

내가 그 사람의 프로필을 보려고 테이블을 쳐다보자 이준환 PD가 손으로 그 프로필을 쓱 가렸다.

"직접 눈으로 보세요."

"허 참. 누군데 그러는지 원. 궁금하네요."

"김 대리야. 내 사무실에 있던 분 회의실로 들어오시라고 해라."

그러자 직원의 안내를 받은 건장한 남자가 회의실 문을 통해 들어왔다. 그는 편안한 복장인 흰 티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어? 김형탁 씨?"

회의실에 들어온 사람은 꽤 유명한 조연급 배우 김형탁이였다. 유명한 게임덕후로 알려져 있으며 예능에 출연해 4차원적인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 사람이었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배우 김형탁입니다."

"네. 반갑습니다. 이준형입니다."

우와···. 대박이다. 어쩜 이렇게 배역에 완벽한 배우를 골라왔지? 도대체 캐스팅 디렉터가 누구야? 일을 진짜 잘하는데?

내가 환한 얼굴로 고개를 까닥거리고 있자 옆에 있던 이준환 PD도 슬며시 미소를 짓고 있는 게 보였다. 아무래도 내가 캐스팅에 아주 만족한다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작가님이 너무 젊고 잘생기셨네요."

"감사합니다. 형탁 씨도 직접 보니 느낌이 새롭네요."

"어떤 면이요?"

그는 사람 좋은 인상으로 나에게 되물었다.

"친근한 이미지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묵직한 면도 있으시고요."

"아···. 그런데 실제로 같이 생활해보면 이상한 놈 취급하죠. 하하."

역시 인상도 좋고 성격도 좋은 것 같다. 예능 출연으로 호감도가 대폭 상승한 배우이기도 했다.

웃을 땐 따뜻하고 속없는 남자처럼 보이지만 무게를 잡고 있으면 상남자다. 체격도 건장해서 그 이미지가 극대화된다..

김인애의 순박한 의사 동료지만 진정한 악마의 모습을 감추고 있는 인물···.

싱크로율이 100%였다.

나는 웃으며 스카우터를 가동시켰다.

'크흠···. 역시···.'

그의 몸에서 연노랑 아우라가 뻗어 나오고 있었다. 역시 여러 조연을 거치며 검증된 연기력을 선보인 배우다웠다.

오케이! 충분하군.

우리는 이런저런 가벼운 이야기를 하며 탐색을 했다. 그리고 미팅이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했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형탁 씨."

"어우. 별말씀을요. 배역을 맡겨주신다면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도 이제 예능에서 쌓은 이미지를 좀 벗어야죠."

아하! 하긴 형탁 씨라면 그간 엉뚱하게 쌓아온 이미지가 있기 때문에 사이코패스 연기를 해도 크게 이미지 손상이 없을 것 같았다.

오히려 가벼운 이미지가 쇄신되고 출연료도 올라가는 계기가 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네. 긍정적으로 검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인사를 한 후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어떠십니까? 추가 후보들 프로필도 보여드릴까요?"

이준환 PD가 내 눈을 보며 질문했다.

"아뇨. 바로 계약하시죠. 아주 좋네요. 그런데 캐스팅 디렉터 누굽니까? 진짜 일 잘하네요."

"하하. 기업 비밀입니다만?"

"누가 데려간답니까? 피디님 좋은 정보는 좀 공유합시다."

"크흠. 이제 배역 3개만 결정하면 됩니다. 먼저 주연 배우인 한승호 역입니다. 이게 제일 문제인데요. 캐스팅 작업이 쉽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생각하고 있던 문제였다. 주연급인 남자배우가 사이코패스라니 그것도 국가 전복을 노리는?

아니 들어오던 CF 다 끊길 일 있나? 막대한 손해를 감수하고 흔쾌히 출연해줄 인지도 있는 배우가 몇 명이나 있겠는가?

"아까 조연분들 캐스팅한 실력이면 제가 믿고 맡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좀 더 분발해주세요.“

솔직히 나한테 하라고 해도 자신이 없다.

"후···. 최대한 가능한 배우들을 물색해보고 있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꼭 만족하실 배우를 섭외토록 하겠습니다."

"네. 고생 좀 해주세요."

"마지막으로 막판에 꽤 비중 있는 조연으로 떠오르는 역할입니다. 바로 사이코패스의 행동대장 이현과 나지혜를 짝사랑하는 선배인 김하진 역이죠."

"크흠···."

나는 일부러 들으라고 헛기침을 했다. 최소윤과의 악연을 한번 생각해보라는 의미였다. 분명히 이쪽에서 정보가 센 게 분명했다.

"··· 일단, 두 역은 완전히 상반됩니다. 이현 역할은 캐릭터상으로 젊은 역할인데요. 괜찮은 신인 연기자들은 무조건 거절 의사를 내비치고 있습니다."

"으음···. 쉽지 않겠죠. 캐스팅이 안 된다고 대충 캐스팅할만한 역할도 아니고요."

이해할만했다. 이현의 캐릭터는 이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최악의 캐릭터니까. 멀쑥한 외모에 최악의 사이코패스를 연기해야 하는 극악의 배역.

신인급이 이 연기를 잘했다간 그야말로 이미지를 반전시키기 힘들 정도로 강렬한 캐릭터임이 분명했다. 그러니 다들 슬슬 피하는 거겠지.

"죄송합니다. 이 배역도 열심히 물색 중입니다."

"네. 부탁드릴게요. 혹시 저번에 최소윤 씨하고 왔던 하주영 씨···. 안 되겠죠?"

허여멀건 한 헬스 근육 인조인간 하주영. 이혁 배역에 딱 어울리는 배우다.

어? 생각할수록 찰떡인데···.

"허허···. 저도 그 생각을 안 한 건 아닌데요. 그 회사에서 절대 안 하겠죠. 최소윤 씨 캐스팅도 물 건너갔는데요 뭐."

이준환 PD가 입맛을 다시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쉽네요. 외모만 보면 싱크로율 200% 인데요."

우리는 서로 눈빛을 마주치며 쓰게 웃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김하진 역은 이혁과는 반대로 하겠다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난리입니다."

"음···. 소문이 났나 보죠?"

"네. 죄송합니다. 아마도 저희 쪽에서 정보 유출이 된 것 같습니다. 태엽시계 이정진급 조연이라고 알려져 여기저기서 프로필이 계속 들어오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오디션을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젠장! 휴···.

뭐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정혜성 사범이 오디션을 뚫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꽤 괜찮게 오디션을 치르면 내 선에서 강하게 캐스팅을 밀어붙일 것이다.

"피디님 제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요. 캐스팅이 도대체 어떻게 됩니까? 정리가 안 되네요."

"아···. 좀 복잡할 수도 있겠네요. 그러니까···."

이준환 PD가 간략하게 설명해줬다.

우선 캐스팅은 캐스팅 디렉터에 의해 진행이 되는데 주연 배우는 대부분 연기력이 어느 정도 검증이 됐기 때문에 컨택이나 배우에게 의사를 물어보고 캐스팅이 진행된다. 물론 때에 따라서는 오디션을 보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조연의 경우 경력이 있는 중견급 배우나 나이 드신 분들은 그냥 미팅 한 번으로 끝나는 경우가 태반이며 신인급 조연은 오디션을 보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그리고 단역들은 배우 인력 업체를 끼고 확정된다고 했다.

"일단 배우들은 기본적으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언제 뭐가 들어올지 모르기 때문이죠. 그런데 제가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어서 느끼는 건데요···."

"예. 느끼시는 게···?"

"거의 7~8할은 운이에요."

"운요?"

"네. 스케줄이 공교롭게 그 사람만 되는 일도 있고, 배역과 이미지가 맞아서 연기력이 떨어져도 캐스팅되는 예도 있죠."

"그렇군요."

이런 식으로 돌아가는 거구나. 좋은 정보다. 나중에 독립하면 좋은 캐스팅 디렉터는 필수겠네.

"나중에 그분께 언제 한번 식사나 같이하자고 여쭤봐 주세요. 감사의 인사도 할 겸···."

"알겠습니다. 다 완료되면 그때 한번 자리를 갖도록 하겠습니다."

*   *   *

이준환 PD와 미팅을 한 후 회사로 돌아왔다. 커피 한잔을 내린 뒤 푹신한 의자에 앉았다.

"내 생각엔 캐스팅이 제일 어려운 것 같다. 진짜 빡세네."

나는 볼멘소리를 하며 수첩을 책상에 휙 하고 던져 놓았다.

정말로 사람 상대 안 하고 글만 쓰는 게 제일 쉬워 보였다.

하지만 스스로 독립할 마음이 있는데 귀찮다고 외면할 순 없었다. 그렇게 사색에 빠져있는데 김인환 대표의 호출이 왔다.

나는 웬일인지 궁금해서 대표이사의 방으로 찾아갔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부르셨어요?"

"오! 천재 작가 선생님 오셨습니까? 여기 앉으세요."

김 대표는 미소를 가득 머금고 나를 환대했다. 차를 한잔하며 잡담을 나누다가 현재 진행되고 있는 '나만의 세계' 캐스팅에 관해 이야기가 나왔다.

"부부의 비밀 후속작품 이름이 나만의 세계인가요?"

"네. 마지막 회를 보면 왜 그 제목인지 깨닫게 되는 그런 타이틀입니다."

"음···. 뭐 어쨌든 준형 씨가 쓰고 있다니. 회사 대표로써 기대가 됩니다. 분명 성공할 겁니다."

"응원 감사합니다."

"그런데요. 이 실장님. 한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응? 이 실장이라고? 뭔가 불안하다? 이럴 때만 회사 직함을 쓰네?

"네. 이야기해 보시죠. 대표님."

김인환 대표는 안 어울리게 차를 마시며 내 눈치를 슬쩍슬쩍 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말을 이어갔다.

"그 작품에 나유정 씨랑 더블로 나오는 배역이 있다던데···. 우리 신인 배우 중에 이건호라고 있는데 어떻게 안 될까?"

그는 굳어있는 내 얼굴을 살피느라 바빴다.

이건호라면 신입 매니저인 내 조수 김대성을 괴롭혔던 자식이다. CA 그룹 본사에서 힘깨나 쓴다는 고위 임원의 자제라고 했던가? 허···. 역시 세상은 좁구나. 여기서 또 만나네?

언제인가 착하기만 한 순둥이 대성이에게 조용히 물어본 적 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건호는 아주 질이 나쁜 녀석이었다.

거의 이중인격자에 가까운 지능적인 쓰레기로 여자관계도 복잡하고 윗사람에게는 겉으로만 말을 듣는 척 행동하면서 없을 땐 뒤로 엄청나게 까대는 악질 중의 악질이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는 그 사실을 떠올리며 꿈도 꾸지 말라고 대표에게 강하게 못을 박으려다 갑자기 괜찮은 생각이 번개처럼 스쳐 갔다.

"왜요? 이 실장. 이건호 연기력 괜찮다고 하던데···. 맘에 안 드시나?"

"아니요. 대표님. 일단 JTVC 측에서 조만간 김하진 역에 대해 오디션을 한다고 하니 거기 나가보라고 하세요. 제가 한번 유심히 보겠습니다."

"곧바로 확정은 안 될까?"

"지금 그 역할 때문에 난리입니다. 서로 하겠다고 프로필을 가져오는 데가 한두 곳이 아니에요."

"그, 그렇구만. 그래도 좀 신경 좀 써주게나."

김인환 대표가 이렇게 저자세로 나오는 걸 보니 분명 청탁을 받은 게 분명해 보였다.

'그게 그렇게 소원이라면 캐스팅해드리지. 그런데 김하진 역은 안돼. 사이코패스 이혁이라면 몰라도. 후후후···. '

말만 잘 봐준다고 하고 냉정하게 탈락시킨 뒤 이혁 역할로 살살 꼬드겨 보기로 했다. 왠지 배역과 실제 배우가 상당히 잘 맞을 것 같았다. 최악의 사이코패스와 쓰레기 배우라···.

그 배역으로 꾀려면 이준환 PD와도 입을 맞출 필요가 있어 보였다.

'그래. 연기만 좀 되면 내 친히 너로 확정해주마. 흐흐흐.'

김인환 대표 앞이었지만 나도 모르게 사악한 미소가 얼굴에 떠올랐다.

‘쓰레기는 나락으로....’

ⓒ 소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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