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K ME (4)
최소윤과 계약을 하기 위한 자리가 마련되었다.
굳이 나까지 올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주연 배우가 요청했다고 하니 가보는 수밖에···.
이번에는 고급 한정식 집이었다. 이준환 PD와 만나서 방으로 들어가 보니 3명이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최소윤과 매니저로 보이는 아저씨, 그리고 차갑게 보이는 얼굴의 모델 같은 미남이었다.
저 매니저는 저번에도 최소윤을 데리고 왔다고 하는 거 같은데 오늘은 계약하기 위해서 자리에 함께 배석한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김지운 실장입니다. 소윤 씨 매니저입니다. 저번에 인사를 드리려고 했는데 사적인 자리라고 하시길래 못했습니다."
"네. 안녕하세요? 이준형입니다. 반갑습니다."
"어서 오세요. 작가님."
최소윤은 환한 미소로 우리를 맞이했다.
모두 자리에 앉고 이준환 PD가 앞에 앉은 청년을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이분은 누구신지요?"
"아···. 우리 회사의 신인 배우예요. 모델이었는데 배우로 전향했어요."
최소윤이 소개를 했지만 나는 응? 이게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녕하십니까? 하주영입니다."
나는 왠지 모르게 살짝 짜증이 났지만 그래도 그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얼굴은 밀랍인형처럼 창백할 정도로 깨끗하게 잘생긴 남자였다.
모델 출신이라 그런지 키도 나보다 약간 컸다. 헬스를 열심히 했는지 어깨도 떡 벌어진 게 체격도 꽤 괜찮았다.
"예. 그러시군요. 그런데 이분은 어쩐 일로···."
내가 의아함을 표현하자 옆에 앉아 있던 김지운 실장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했다.
"좋은 배우가 있어서 데리고 왔습니다. 계약하기에 앞서 소개해드리려고요."
나도 모르게 미간에 주름이 잡히고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 계약하기에 앞서라고? 뭔가 뼈가 있는 말이었다. 진정하자. 일단 한번 들어보자. 들어보고 판단해도 늦지 않는다.
"김 실장님. 이게 갑자기 무슨 상황인지요?"
도리어 옆에 이준환 PD가 살짝 역정을 내고 있었다. 나는 급히 손을 들어 이 양반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들어보자고 이 피디의 귀에 속삭였다.
"예. 더 말씀해보세요. 정확하고 짧게 말씀하십시오. 괜히 귀찮게 빙빙 말 돌리지 마시고요."
내가 무게를 잡자 김지운 실장이 움찔하면서 이빨을 꽉 깨물고 천천히 설명했다.
"네. 분위기를 보니 길게 끌 필요가 없겠군요. 우리 회사에서 이 친구를 한번 밀어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번 작품에 배역 하나를 꼭 했으면 하는 마음에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응? 소개가 아니고 약간 협박으로 들리는데?
"아. 혹시 원하는 배역이 있으신지요?"
나는 화를 가라앉히며 묵직하게 말을 했다. 호구로 보이면 안 되니까. 잔뜩 무게를 잡았다.
"대본을 보다 보니 나지혜를 짝사랑하는 김하진이라는 캐릭터가 눈에 띄더군요. 그 배역에 한번 도전시켜보고 싶습니다. 가능하실지요?"
젠장! 김하진이라고? 이 귀신같은 놈들. 이 배역이 내가 숨겨놓은 히어로라는 걸 어떻게 알았지? 그 배역은 이미 임자가 있단 말이다.
김하진 역은 파주 액션 스쿨의 무술 사범인 정혜성을 캐스팅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오디션은 거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연기력과 무술 실력이라면 무조건 1순위로 캐스팅될 수밖에 없으리라.
만약 이상한 짓거리를 해서 훼방을 놓는다면 나에게 있는 캐스팅 권한 카드를 한 장 써서라도 무조건 끼워 넣고야 말겠다는 각오였다.
정혜성은 그만큼 배역에 찰떡같이 어울리는 배우였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이 허여멀건 한 얼굴에 헬스로 펌핑된 몸을 가지고 있는 인조인간 같은 놈이 그 배역을 노리고 있다고?
혹시 이거 이 캐릭터에 대해 정보가 흘러나간 거 아냐?
나는 제작진인 이준환 PD의 얼굴을 강하게 째려봤다.
하지만 그는 전혀 모르는 사실이며 도리어 자기도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응? 당신은 아니야? 그럼 누구야? 이 배역은 후반부에 시청자들을 펑펑 울리게 할 아주 중요한 역할이라고!
후반부 대본이 유출됐으면 JTVC 스튜디오밖에 없다. 난 대본을 나유정과 정혜성 사범에게만 줬다.
나의 눈이 더 험악해지자 이 PD는 자신은 아니라고 고개를 강하게 가로저었다.
그러면서도 눈알을 굴리는 게 누가 그랬는지 곰곰이 생각해보고 있는 것 같았다.
'혹시 김현도 CP 아냐? 아니면 대표이사거나?'
"하아···."
나도 모르게 한숨이 세어 나왔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빠르게 스카우터로 그의 능력을 점검해봤다.
후.... 역시나 박영관급(?)의 아우라밖에 느껴지질 않는다. 오케이. 넌 아웃.
"그 배역하고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 데려왔습니다. 피디님, 작가님."
내가 능력 측정 때문에 가만히 있자 김지운 실장이 작심한 듯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을 했다.
"글쎄요. 잘 어울리는지는 잘 모르겠는데요?"
나의 말에 장내가 싸하게 얼어붙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하주영이라는 배우를 아래위로 쓱 훑어보았다.
"기회를 주신다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작가님."
그가 굵직한 목소리로 대답을 하는데 왠지 모르게 정이 안 가는 인상이다. 젠장. 모르겠다. 내 기분이 별로라 그렇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다.
"크흠···."
"솔직히 저희가 끼워팔기 같은 걸 하려는 게 아닙니다. 우리 주영이도 그 배역을 맡는다면 정말 잘할 수 있을 겁니다."
뭐가 끼워팔기가 아니야. 100% 끼워 팔 기잖아. 어디서 말 같지도 않은 소릴 하고 앉아 있어?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안 했냐?
"일단 오디션을 봐야 합니다. 그 배역은 조연이지만 상당히 중요한 배역입니다. 거의 주인공급에 가까워요. 그냥 덥석 허락할 만한 사이즈가 아니에요."
"정말 이렇게 나오실 겁니까?"
응? 뭐라는 거야? 내가 잘못 들었나?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뭘요?"
"아니 저희 측에서 먼저 적극적으로 캐스팅에 응해드리고 여기 소윤 씨 출연료도 높게 받지 않겠다는데 이런 배역 하나 정도는 흔쾌히 줄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잠시만요. 소윤 씨. 소윤 씨도 이거 동의한 내용입니까?"
묵묵히 옆에서 듣고만 있던 최소윤이 내 질문에 반응하며 그제야 말을 하기 시작했다.
"저는 일단 회사의 의견에 따르고 있습니다. 회사 의견이 제 의견이에요."
허···. 같이 짜고 나왔구만. 혹시 둘이 무슨 사이라도 되나? 아. 이런 섣부른 추측은 나를 더욱 불리하게 만들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했다.
나는 그냥 강하게 나가기로 했다. 내가 뭐 이 작품만 있는 것도 아니고 이것도 나유정 때문에 가벼운 마음으로 쓴 거다. 물론 그렇다고 하찮게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그러시구나. 흐음. 저희가 꼭 소윤 씨를 써야 하는 건 아닙니다."
내 직접적인 발언에 순간적으로 미간이 팍하고 일그러지는 최소윤이였다.
그러자 옆에 있던 김지운 실장이 팔짱을 끼며 상체를 뒤로 젖히는 게 아닌가? 뭔가 수가 있다는 포즈 같았다.
"흐흠···. 그거 아십니까? 송지현 씨 어제 다른 작품 계약했답니다."
응? 이건 또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란 말인가? 송지현이? 내가 고개를 돌려 이준환 PD를 보자 그가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이더니 귓속말로 나에게 정보를 알려주었다.
'최소윤 씨하고 계약이 임박했다는 소문이 암암리에 돈 모양입니다. 송지현 씨가 맘이 상해서 다른 작품을 계약했다고 하네요.'
'아니 누가 그런 소문을 내요?'
'글쎄요. 저희가 그거까지야 잘 모르니까요.'
원래 캐스팅이라는 게 어디로 튈지 모르는 거다. 1차 -> 2차 -> 3차 -> 4차···. 이런 식으로 계속 선호 배우가 내려가면서 최종 확정으로는 아예 생각지도 못했던 배우가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귓속말 대화를 끝내고 맞은 편에 김지운 실장의 얼굴을 보니 어떠냐? 웬만하면 우리 배우 쓰시지? 라는 표정이다.
옆에 최소윤도 저번과는 다르게 자신이 유리해지자 안면을 싹 바꾸는 모습이다.
처음에는 그냥 약간 화가 났을 뿐이었는데 이런 모습을 보니 가슴속 깊은 곳에서 분노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이준환 PD도 약간 당황한 상태로 기분이 언짢아 보였다.
나는 말려들어서는 안 되겠다는 심정으로 시원한 물 한 잔을 들이켰다.
"크··· 어우 차가워라. 송지현 씨는 원래 캐스팅을 안 하려고 했습니다. 대안이 두 명이나 더 있습니다."
"아아··· 혹시 강다혜 씨하고 이수현 씨요? 저희도 다른 여배우들 스케줄은 다 알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계약을 할 수 있는 주연급 배우라고 해봐야 두 명이 다일 텐데요."
김지운 실장이 약간 비릿하게 웃으면서 아주 여유롭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최소윤하고 계약을 해야 할 거라는 그런 자신감이구만.
와! 그런데 왜 이렇게 짜증 나지? 그냥 한 방 먹여주고 싶네. 지금부터 이렇게 자기들 마음대로 주무르려고 하는데 정작 계약을 하고 촬영이 시작되면 또 하나하나 트집을 잡을 게 아닌가?
처음부터 끌려다니면 절대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 바닥 좁다. 호구로 소문나면 절대 안 된다.
드르륵···.
나는 자리에서 곧바로 일어났다.
"죄송한데요. 이런 식은 곤란합니다. 역할이 하고 싶으시면 오디션에 응모하시면 됩니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이런 방법으로 영업하세요?"
"·········."
모든 사람이 황당한 표정으로 내 얼굴만 보고 있는 상황.
"자, 작가님. 진정하세요."
이준환 PD도 극으로 치닫는 것을 경계하는 모양새였다. 실질적으로 대안이 딱히 없었으니 당연해 보였다.
"됐고요. 기분 나빠서 못 해 먹겠네. 무슨 협박하는 것도 아니고 말야. 어차피 계약도 안 된 건데 다 무르시죠?"
상황이 파국으로 치닫는 중이었다.
"소윤 씨. 후회 없으십니까? 이 배역 안 해도 되는 거예요?"
"·········."
그녀는 무심하게 내 눈을 바라볼 뿐이었다. 뻔히 우리 쪽 카드가 보이는데 굳이 한 수 접고 들어갈 필요가 없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전에 했었던 이야기들은 다 없었던 거로 하시죠."
"만약 다음번에 저희 부르시면 출연료 올라가는 거 아시죠?"
내가 몸을 돌려 나가려고 하자 김지운 실장이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을 했다.
이 아저씨는 끝까지 나의 심기를 거스르고 있었다.
"저기요. 제가 출연료 알려드릴게요. 출연료는 0원입니다. 아시겠어요? 다시는 보지 맙시다."
나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꼬르륵···
아 씨! 밥은 먹고 싸울 걸 그랬나. 괜히 처음부터 본론만 짧게 말하라고 했잖아?
이어 이준환 PD가 뒤따라 나왔다.
"작가님. 잠시만요."
"왜요? 피디님도 그쪽 편이세요?"
"아뇨? 저도 지금 상당히 짜증 난 상태입니다만?"
"아···. 그러시군요."
"대안은 있으시고요?"
대안은 뭐 크흠···. 생각해봐야지.
이수현을 캐스팅하고 그녀의 대사를 좀 더 다듬어서 임팩트가 약한 그녀를 좀 더 부각시키는 수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수현은 아마도 그런 과한 연기까지 충분히 소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째 사람 생각이 어제와 오늘이 이렇게 다를까? 흥행과 인지도를 들먹이며 속물적으로 생각한 내가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최후의 카드도 있다.
만약 강다혜를 만나 그녀 안에서 잠자고 있는 아우라를 보게 된다면, 회초리를 들더라도 그녀의 연기를 고쳐서 찍고야 말겠다는 오기가 생겼다.
허헛··· 연기를 왜 그따위로 하냐며 회초리로 강다혜를 때찌 하는 상상을 하니 갑자기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정신 차리자. 이준형. 지금 그런 농담할 분위기가 아니잖아.
"대안 있습니다. 제가 조금만 신경 더 쓰면 최소한 최소윤보다는 나을 겁니다."
"아, 알겠습니다. 처음부터 호구 잡힐 일은 없어야죠. 전 작가님만 믿겠습니다."
갑자기 나만 믿는다니 부담이 살짝 오고 있다. 하지만 차분히 생각해보면 꼭 나머지 두 명의 배우가 아니더라도 다른 좋은 대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아. 피디님. 혹시 이수현 씨하고 강다혜 씨 스케줄 좀 아세요?"
"왜요? 만나보시게요?"
"아뇨. 그냥요. 직접 만나기는 뭐하고···."
"네? 안 만나는데 뭐하러 스케줄을···."
"허 참··· 그냥 그런 게 있습니다. 혹시 아시면 톡으로 좀 넣어주세요."
"뭐 그러시죠."
이 피디는 나만 믿는다는 말을 몇 번씩 하고 회사로 돌아갔다. 나는 그가 떠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손바닥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안 되겠다. 내가 두 눈으로 두 명의 아우라를 체크하는 수밖에 없겠어. 매니저 출신이니 발로 뛰어야지.'
괜히 만나자고 하면 이야기가 또 복잡해질 수 있다 보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최소윤 씨. 안 그래도 당신 연기력이 맘에 안 들었는데 잘 됐소이다. 그래도 연기력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니 다른 좋은 작품 만나시길···.'
띠링···.
떠난 지 몇 분이나 됐다고 이준환 PD에게 벌써 톡이 왔다.
[후보 배우들 공식 일정입니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