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작가입니다만 (3)
JTVC 스튜디오로 가는 길이었다.
나는 멍해 보이는 하석우 실장을 리어 미러로 힐끗 쳐다보았다. 그는 괜히 대표에게 자신을 어필하려다 본전도 못 찾을뻔해서 그런지 표정이 좋지 못했다.
그나마 마지막에 대표가 열심히 하라고 어깨를 다독여줘서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영혼이 육체를 빠져나왔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으세요?"
"네, 네···. 괜찮습니다. 그런데 준형 씨에게 이렇게 운전을 시켜도 되는지 모르겠네요."
이제는 처지가 바뀐 걸 본인도 아는 모양이었다. 나는 맘만 먹으면 그와 동급으로 바로 올라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 뭐 사실 굳이 회사를 안 다녀도 되는 입장이다.
"하하. 괜찮아요. 그래도 대표님이 하 실장님 일 잘하는 건 알고 계신 거 같던데요?"
"뭐 월급 받고 먹고 살려면 열심히 해야죠."
오늘 그의 다른 모습을 본 것 같았다. 항상 날카로워 보였던 하 실장이었지만 대표에게는 순한 양에 불과했다. 약간 우습기도 했지만 씁쓸한 모습이기도 했다.
"실장님. 오늘 왜 그렇게 안절부절못하셨어요?"
옆에 앉아 있는 나유정이 의아한 얼굴을 하며 질문했다.
"티 많이 났습니까?"
"평상시 안 그러신데 오늘 유독 이상하시던데요?"
"아···. 실은···. 제가 예전 회식 때 대표님께 실수를 좀 해서요."
"어쩐지···. 주사라도 부리신 거에요?"
"예. 비슷합니다. 그래서 만회를 좀 해야 합니다···. 사실 간당간당하거든요."
그는 손날로 자기 목을 자르는 시늉을 했다.
"뭘 어떻게 했길래요?"
"별건 아니고···. 제가 술에 취해서 대표님께 낙하산이라고 농담조로 말을 했나 봅니다. 물론 기억은 안 나지만···."
"듣는 낙하산 기분 나빴겠네요."
"그전까지만 해도 진짜 잘해주셨거든요. 그 후로부터는 사사건건 힘드네요."
그런 아픔이 있었구만. 나는 하 실장과 유정 씨가 대화하는 것을 묵묵히 듣고 있었다.
"그런데···. 준형 씨. 궁금한게 있는데요."
"네. 물어보세요."
"아까는 왜 실장 자리 거부한 거에요? 준형 씨가 한 일 생각하면, 사실 더 높은 직책으로 들어가도 충분할 정돈데요···."
그는 예전과 다르게 나에게 언행이 아주 공손했다. 이래서 사람은 잘나가야 하나 보다.
"아까 저랑 대표님 이야기 하는 것 못 들으셨어요? 대표님은 단번에 눈치채시던데요."
"네? 어떤···."
"제가 분명 당분간만이라고 했죠."
"당분간이라면···. 조만간 거기로 갈 수도 있다는 뜻?"
"프로듀싱&콘텐츠 총괄 본부요? 하하하···. 제가 거길 왜 가나요. 제가 무슨 프로듀싱을 할 줄 아나요? 기껏 해봐야 거의 아무것도 없는 콘텐츠 쪽 맞게 되겠죠. 그럴 바엔 차라리 집에서 그냥 혼자 쓰고 말죠. 거기서 뭐 배울 것도 없을 텐데요?"
"그, 그건 그렇죠. 최근에 기획사로 들어가는 작가님들도 많다 보니 우리 회사도 올해부터 시작하려고 하고 있죠. 회사에서는 준형 씨 같은 유명 작가 하나 잡고 있으면 엄청난 이득이거든요. 어? 아니면 혹시 거액을 받고 이적하시려는 건가요?"
"그건 아닙니다."
" 그, 그럼?"
"저도 나중에 나가서 회사 하나 차리려고요."
".........."
내 말을 들은 하 실장이 일순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농담입니다."
나는 별 말없이 그를 보며 미소 지었다. 물론 내 시선은 운전하느라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지만, 그는 리어 미러를 통해 내 얼굴을 살피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다시 눈에 힘을 주고 다시 말을 꺼냈다.
"요즘 유능한 매니저들이 많이 부족한 것 같아요. 특히 전체를 관리할 사람은 더 없고요."
"으음···."
그는 눈을 굴리며 내가 하는 말을 곱씹고 있었다.
이쯤이면 알아들었으려나? 나한테 잘 보이면 혹시 알아? 나중에 자리라도 하나 만들어 줄지?
물론 내가 나중에 회사를 차린다고 해서 XM보다 더 좋거나 힘이 있을 거란 보장은 없었다.
"뭐 나중 이야기입니다. 너무 확대해석 하지 마시고요. 될지 안 될지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요. 아셨죠?"
보이 그룹인 테리우스만 맡다가 나유정을 담당해보니 배우는 아이돌과 많이 달랐다. 특히 그녀와 촬영장을 누비며 작가로서 드라마 제작에 대해 정말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영상 제작에 관심도 갖게 되고 관련 책도 사서 많이 읽어봤다.
그러다 최근, 모든 책에서 공통으로 입을 모아 부르짖고 있는 게 바로 '콘텐츠'라는 걸 깨달았다.
최근은 TV의 힘이 많이 약화되고 미튜브, 넷플릭 등과 같은 다양한 매체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전통 미디어 강자들과 심지어 휴대폰의 강자 파인애플까지 선발 주자를 따라잡기 위해 엄청난 돈을 뿌릴 예정이라고 했다.
대본만 좋으면 제작비를 100% 대주는 시대.
이런 때에 내 능력은 최고의 위력을 발휘한다. 퀄리티있는 대본을 쓰고 그것을 제작까지 한다면?
게다가 나는 배우들의 잠재력까지 꿰뚫어본다. 그렇게 제일 적합한 배우를 찾아내 적재적소에 꽂아 넣고 작품을 히트시킨다.
나에게 아우라 스카우터가 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당연히 가능성 있는 배우들을 돌보고 관리하는 것까지 자연스레 이어진다. 이 일은 글을 쓰는 것 말고 내가 몸으로 부대끼며 경험한 것이기 때문에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다. 사람을 잘 사귀는 인싸 기질도 있고 말이다.
가수도 마찬가지다. 아우라가 있는 연습생만 찾으면 된다. 이미 여배우와 보이그룹은 해봤으니 걸그룹도 한번 해보고 싶었다. 아무래도 걸그룹은 보이그룹하고는 분명 또 다르겠지.
물론 XM Ent.의 여자 연습생들은 거의 해체상태라 애매하긴 했다. 그래도 뭐··· 경험해보면 좋을 듯 싶다. 소망이다.
그리고 웹 소설 쪽은 투베 1위를 꾸준히 해서 작품을 쌓고 OSMU(One source multi-use)를 키울 예정이다. 웹툰, 애니, 영화화까지 추진해 볼 생각이다.
나중에 그런 것을 추진하려면 현장에서 더 굴러봐야 한다. 나유정을 따라다니며 촬영장을 더 배우고 인재들을 눈여겨본다. TVM의 김호진 PD나 JTVC의 이준환 PD 같은 사람들 말이다. 물론 이준환 PD를 스카우트하는 건 힘들 것 같긴 하다.
나는 요즘 이런저런 계획을 머릿속으로 구상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김 대표의 제안을 거절한 것이다. 회사와 깊게 연결될수록 빠져나오기 힘들 테니까. 그냥 현장을 돌아다니고 다양한 경험을 쌓고 싶었다.
김 대표는 내 의중을 알아차리고 있을까? 알든 말든 나는 상관없다. 팀장 대우를 달고 내 밑으로 한 명 배정을 받은 후 느긋하게 경험을 쌓을 예정이었다.
그리고 인재를 찾는 것은 방에서 글만 써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모든 것은 일단 차기작을 성공시키고 나서 차근차근 해나갈 생각이었다.
솔직히 슬기로운 덕질생활은 영화로 따지면 독립영화 수준까지는 아니고 가장 적은 제작비를 들인 소규모 영화와 비슷한 수준으로 이번 블록버스터급 차기작과는 차원이 달랐기 때문에 옆에서 지켜보면서 몸소 배울 작정이었다.
그렇게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차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으음··· 다 왔네요."
나는 주차장에 차를 댄 후 나유정과 하석우 실장과 같이 JTVC 스튜디오로 들어갔다. 저번 회의실에서 김현도 CP와 이준환 PD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준환 PD는 내 얼굴을 보자 얼굴이 환해졌다.
'참, 나. 어디 안 간다니까 그러네.'
우리가 도착했다는 걸 누군가 보고했는지 JTVC 스튜디오 대표이사가 잠시 내려와서 우리와 인사를 하고 덕담 몇 마디를 주고받았다. 같이 잘해 보자는 이야기를 나누고 금세 일정 때문에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휴. 이제 본격적으로 계약을 진행하시죠. 저번에 이야기했던 것과 약간 다른 게 저희가 유정 씨 출연료를 깎지 않았습니다. 물론 작가님 원고료는 회당 7천 그대로고요."
나유정은 그 소리를 듣고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돈이 도대체 얼마나 많은 것인지···. 쩝···.
"JTVC가 부부의 비밀 대박 내고 돈을 많이 버셨나 봅니다?"
내가 김현도 CP를 쳐다보며 웃자 그도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협상할 때와는 완전 딴판이었다.
"벌긴 벌었는데 이 작품을 저희 돈으로만 찍을 수 없죠. 넷플릭에 투자받기로 했습니다. 50% 정도 제작비를 지원받기로 했습니다. 그 자금으로 드라마의 퀄리티를 확 끌어올릴 생각입니다."
"와우! 그거 잘됐네요. 최근 '좀비 킹덤'하고 '사랑의 불시착륙' 같은 식이군요."
"맞습니다. 애매하게 안가고 돈을 들여 모험을 걸어볼 생각입니다. 이번 부부의 비밀로 벌어들인 수익 상당 부분이 이 작품에 투입될 예정입니다."
"오··· 대단합니다."
상당히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나야 원고료로 끝나지만, 만약 터지기만 한다면 내 명성은 엄청나게 높아질 수밖에 없다.
차기작을 쓰고 영상을 제작하는데도 엄청나게 수월할 것이다.
"작가님. 마지막까지 땀을 쥐는 스토리 너무 좋았습니다. 대본 받고 그거 보느라 밤을 꼴딱 새웠어요. 작가님이 따로 혼자만 보라고 보내주신 마지막 반전 에피소드를 읽고 전율했습니다. 이 정도로 잘 써주셨는데 제가 기필코 이 작품을 성공시키고 말겠습니다. 믿어보세요."
긴 머리를 찰랑거리며 눈빛을 빛내는 이 마른 사내···
나는 손을 들어 아우라 스카우터를 가동시켰다.
오오···.
그의 몸 밖으로 보라색 아우라가 엄청난 기세로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역시 아우라는 고정된 게 아냐. 의지가 강하면 더욱 강렬해진다.'
"믿습니다. PD님. 분명 성공할 겁니다."
"감사합니다. 작가님."
"아! 그리고 일단 대본을 배우들한테 돌렸습니다. 물론 아무한테나 준건 아니고 한류스타나 연기력이 검증된 분들에게만 돌렸습니다. 아마 다음 주쯤이면 대략 윤곽이 나올 겁니다. 지원자가 많다면 오디션도 봐야 할지 모르겠네요."
"피디님 죄송한데요. 그런 게 있으면 저를 꼭 불러주시기 바랍니다."
"아··· 물론이죠. 작가님이 창조한 캐릭터인데요. 저희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다 상의를 하고 결정할 겁니다."
"음··· 그런데요. 제가 2~3명 정도 추천할 수 있을까요? 물론 제 독단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PD님이 동의하셔야 출연 가능한 거로 하면···."
"그런 건 당연히 가능하죠. 제가 영 아니다 싶으면 물릴 수도 있는 거겠죠?"
"뭐··· 기본적으로 협의가 중요하긴 한데요··· 진짜 제가 꽂히는 배우가 있을 수 있거든요? 두세 명쯤은 제가 좀 우길 수도 있습니다."
"하하··· 이거야 원. 나유정 씨와 테리우스를 캐스팅한 안목이라면 살짝 기대되긴 합니다."
'음··· 건어물녀하고 흙수저 아이돌은 진짜 실제 모델들인데··· 이 양반도 오해하고 있네.'
하지만 오해하는 게 더 좋았다. 나를 감이 좋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캐스팅할 때 내 의견이 많이 반영될 수 있는 법!
그렇게 JTVC 스튜디오와 계약을 끝마쳤다. 나유정 계약의 세부적인 사항은 하석우 실장이 정리해서 보고를 마무리할 예정이었다. 집에 가는 길에 그를 회사에 내려주고 나유정의 아파트로 향했다.
"집에서 쉬실 건가요? 오늘 파주 안가잖아요."
"안 그래도 오늘 몸이 좀 안 좋아요. 요새 정 사범님이 너무 힘들게 가르치셔서··· 끙···"
나유정이 몸을 시트에 뉘이며 앓는 소리를 했다.
"열심히 하세요. 일생일대의 명작을 한번 만들어 봐야죠."
"그래서 죽어라 훈련하잖아요. 걱정 마세요. 아 참··· 그건 그렇고 준형 씨 진짜 회사 하나 차리실 거에요?"
"으음··· 그럴 수도··· 아닐 수도···"
내가 애매하게 말을 하자 나유정이 실눈을 뜨고 팔짱을 끼며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얼마면 돼요?"
"네?"
"얼마면 되느냐고요. 그 회사 지분요. 49% 정도 사려면 한 50억쯤이면 되요?"
"쿨럭···"
"나 우습게 보지 마요. 사주팔자에 재물복이 엄청나게 강하다고 나온 여자예요. 감도 엄청나게 좋답니다."
"·········. 절 뭘 믿고···"
"글쎄요. 준형 씨는 뭔가 달라요."
"뭐가요?"
"몰라요. 그냥 느껴져요."
"헐···. 다 왔어요. 얼른 내리세요."
"내가 투자한다고 할 때 잘 생각해봐요."
"아직 일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후려쳐서 싸게 먹으려고 하는 거 못된 심보입니다."
"치··· 메롱!"
그녀는 차 문을 열고 지하주차장의 아파트 입구로 들어가며 몸을 돌린 후 엄지손가락을 펴서 땅에 처박았다.
"뭐래··· 쩝···"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막내 주리에게 전화가 왔다.
핸즈프리로 전화를 받았다. 마침 차가 횡단보도 앞 붉은 신호등에 딱 걸린 상태였다.
"여~ 동생. 어쩐 일이신가? 전화를 다 주시고···"
[오빠 도대체 밖에서 뭐하고 돌아다녀?]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알아듣게 설명해봐."
[잠시만··· 내가 링크 보내줄 테니 한번 봐봐. 지금 핫스타그램에 올라온 사진이야.]
주리는 나에게 곧바로 게시물을 보내줬다.
=========
[제목 : 파주시 간장게장 집에서 발견한 나유정과 덕질생활 작가 사진]
사진
우연히 찾아간 집에서 나의 최애인 유정이 언니의 알콩달콩한 사진을 발견했다. 옆에 있는 키 큰 훈남이 누구냐고 사장님께 여쭤봤더니 슬기로운 덕질생활 작가란다 흐엑··· 작가가 남자일 줄이야.
댓글 567개
=========
[봤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작가라니? 진짜야?]
"·········."
식당 사장님께 말씀드리기도 전에 사진이 퍼진 것 같았다. 설마 바로 인화를 해서 걸어놨을 줄이야! 실행력 무엇?
[지금 이거 때문에 SNS 난리잖아. 기사도 하나둘씩 뜨고 있어.]
"지, 집에 가서 설명할게···"
[해명 잘해라. 어떻게 가족한테까지 숨기냐? 어이없네. 어쩐지 안보던 드라마를 본다 싶더라니···]
나는 급히 전화를 종료하고 포털 사이트 연예면을 클릭했다.
"윽···. 젠장···"
[나유정! 드디어 연애하나? 훈남과 파주시 데이트···]
[나유정의 연인은 슬기로운 덕질생활의 훈남 작가?]
나는 황급히 차를 돌려 나유정의 집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에 내리자마자 그녀의 집으로 튀어 들어갔다. 그녀는 역시나 건어물녀 차림으로 소파에 앉아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며 스마트폰을 흔들었다.
"기사 봤어요? 내가 아니라고 SNS로 해명했어요."
"예? 설마··· 어, 어디 줘봐요."
나는 대답도 듣지 않고 나유정의 스마트폰을 뺏어 들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유정이에요. 기사에 나온 것처럼 슬기로운 덕질생활 작가님하고 저는 절대 사귀는 사이가 아니랍니다. 아! 참고로 슬기로운 덕질생활을 집필하신 작가님은 제 매니저랍니다. 열애 NO! 훈남 NO! 시어머니 YES! 취미로 글을 쓰시는 분입니다.]
"허··· 미친···"
나유정의 해명으로 연예 기사란이 다시 한번 불타올랐다.
[나유정 매니저는 유명 스타 작가?]
[유명 여배우 매니저의 이중생활]
[슬기로운 덕질생활의 작가는 나유정과 테리우스의 매니저··· 취미로 글 쓰는 사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