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작가입니다만 (1)
다음날 파주 액션스쿨을 가기 전 회사에 들렀다.
하석우 실장에게 어제 있었던 협상의 결과를 들려주기 위해서였다.
그는 자신이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나유정 옆에 앉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중지로 동그란 안경을 살짝 들어 올리더니 헛기침을 한번 했다.
"크흠···"
뭐 좀 불편하다는 뜻이겠지. 그러던지 말든지.
"어제 작가님하고 JTVC 스튜디오 제작진들하고 미팅은 잘하셨어요?"
"네. 실장님. 무난하게 잘 끝났어요. 그쪽에서도 제작할 생각이 있었던 거 같아요."
"당연히 그렇겠죠. 차기작 시청률이 그 모양인데요."
아닌 게 아니라 '부부의 비밀' 후속 드라마는 '부부의 비밀'의 시청률을 이어받지 못하고 추락을 거듭하고 있었다.
톡···
나는 실수로 하 실장이 우려낸 녹차를 강화유리 테이블에 세게 내려놓았다. 하 실장이 다시 나를 바라보며 눈을 살짝 좁혔다.
뭐 그럴 수도 있지. 왜 이렇게 노려보시나. 그런 눈을 해도 하나도 안 무서운데...
나는 보란 듯 허리를 의자에 기대고 상체를 뒤로 기울였다.
"그럼 언제쯤 제작이 된다고 하던가요? 제가 갔어야 하는데···"
"괜찮았어요. JTVC 스튜디오 측에서 작가님께 내일 오후에 계약하자고 했답니다. 계약이 끝나면 아마도 곧 제작 발표를 하고 캐스팅도 할 것 같아요. 물론 저는 일단 출연을 확정 지었습니다. 실장님은 저랑 내일 같이 사인하러 가시면 될 것 같아요."
"오! 그거 잘됐네요. 이거 얼른 윗선 보고 해야겠군요. 혹시 배역은 어떤···"
"부부의 비밀에서 한초연 역할 있죠? 속편에서는 그 한초연 역할과 비슷한 나지혜 역에 캐스팅됐어요. 주인공 남편과 바람이 나는 역할이죠. 불륜녀요."
"쓰읍···"
하석우 실장은 뭔가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입을 다물고 생각을 정리하는 모습이었다.
"왜요? 무슨 문제라도···"
"처음에는 부부의 비밀과 비슷하게 가나 보네요. 슬기로운 덕질생활로 이미지 변신에 성공해서 CF 대박이 났는데 다시 그런 배역을 맡다니··· 참 유정 씨는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뭔가 유감이라는 듯 절제된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그녀가 최고 인기 배우라 언행에 신경 쓰는 것 같았다.
"대본이 진짜 좋았어요. 평소에 꼭 해보고 싶었던 캐릭터였기도 했고···."
"그런데 또 배역이 나 씨네요? 뭐 그건 그렇고 캐스팅 확정이라면 혹시 출연료 이야기도 하셨나요?"
"네. 회당 6천이요."
"어···. 이거 참 곤란하네요. 전작에서 유정 씨가 7천 받으셨죠. 이번엔 최소한 8천, 9천까지도 바라볼 수 있었을 텐데요."
"아! 제 출연료에서 빼서 작가님 더 드리라고 했거든요. 아예 그 자리에서 배역을 확정하려고 그렇게 했어요. 진짜 뺏기기 싫었거든요."
그녀가 내 얼굴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나한테는 그냥 배려하는 것처럼 말하더니 사실은 배역을 뺏기기 싫어서 그런 거였어?
"왜 유정 씨 출연료를 빼서 원고료를 더 줍니까? 이건 제작사에 항의를 좀 해야겠는데요?"
하 실장의 언성이 약간, 아주 약간 높아졌다.
"아니에요. 제가 그러고 싶었어요. 작가님한테 좀 더 수익을 드리면 좋을 것 같아서요."
"아니··· 그래도 왜··· 전 이해가 잘 안가네요."
"그 작가가 슬기로운 덕질생활 작가님인데도요?"
"예?"
그는 나유정의 말을 듣고 깜짝 놀라는 모습이었다.
"그게 뭐 얼마나 차이 난다고요. CF에서 만회하면 되죠. 제가 연기에 방해 안 되는 선에서 팍팍 찍어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크흠··· 뭐 유정 씨가 그렇다고 하시면 저희야 감사하죠."
맞는 이야기다. 한편만 찍어도 그 정도 이익은 커버가 가능하다. 두 편 찍으면 오히려 회사가 이익이고···
"그렇죠? 제가 생각엔 차기작까지 방영되면 계약이 더 밀려들 것 같은데요?"
"혹시 그 정도로 대본하고 배역이 좋은 건가요?"
나유정은 하 실장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후··· 와 이건··· 으음···"
천하의 냉정한 하석우 실장이라도 깜짝 놀랄 일이었나 보다. 그의 눈이 반짝반짝 이채를 띠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 정도면 자기가 무조건 차기 임원으로 사실상 내정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무표정하던 그의 표정에 은은한 미소가 감돌았다.
"좋습니다. 유정 씨에게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금액이죠. 사람들은 모르는 연예계 10대 부자시잖아요. 4대 기획사 대표님들 빼고 가장 부자신데···"
그 말을 하면서 내 눈을 흘깃 쳐다보는 하 실장이었다.
"쉿! 비밀요."
그녀는 검지를 들어 입술에 갖다 대며 미소를 지었다.
헉··· 4대 기획사 대표들 빼고?
이런 소리를 들으니 뭔가 기분이 이상하다. 나도 그녀를 곧 따라잡을 거긴 한데···
아! 물론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미지수다. 뭐 10년 안으로 가능하겠지. 약간 씁쓸하다. 나유정 씨 나이가 스물일곱인데 이 벌써 저 정도 자산가라니···
나는 아직 차기작이 미계약 상태라 통장 잔고가 1억 원이 채 안 됐다.
냉정해지자! 그녀는 벌써 연예계 활동이 10년이 넘은 사람이다. 경력이 회사로 따져도 실장급 이상이다. 괜스레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
"진짜 그 작가님께는 우리 회사 차원에서 선물이라도 하나 보내드려야겠네요. 그분 때문에 올해 회사의 수익이 상당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런데 연락할 방도가 없으니··· 뭐 유정 씨가 정보라도 좀 주시면 좋겠지만···"
뭔가 말끝을 자꾸 흐리는 하석우 실장이었다.
"가까이서 안 찾으셔도 될 것 같은데요."
“??”
나유정은 나랑 말을 맞춘 대로 그에게 떡밥을 풀기 시작했다. 그러자 하석우 실장은 보란 듯이 그것을 덥석 물고 말았다.
"그게 무슨 소리죠? 가까이서 안 찾아도 된다고요?"
"네. 지금 저랑 같이 앉아 있거든요."
그녀와 나는 다시 시선을 교환했다.
"네? 그게 무슨···."
하석우 실장은 아직도 이게 무슨 소린가 싶은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쉽사리 그걸 깨달을 리 만무했다.
"준형 씨가 슬기로운 덕질생활 작가님이에요."
"·········."
그는 천천히 나와 나유정을 번갈아가며 보더니 뭔가 큰 충격을 받은 듯 마치 소녀처럼 오른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그래도 명색이 임원급을 바라보는 실장이라 그런지 소리를 꽥 지르거나 하진 않았다.
"미리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물론 나는 그에게 전혀 죄송하지 않았지만, 그냥 형식적으로 사과했다.
이런 게 사회생활 아니겠는가?
"으음···"
그는 목이 타는지 잔을 들어 녹차를 벌컥 들이켰다.
"크으··· 아 뜨뜨···."
아까 차에서 나유정하고 이야기하면서 오늘 내 정체를 공개하기로 했다. 이미 어제 JTVC 제작진들에게 얼굴을 보였으며, 파주의 한 식당에서도 무심코 사진을 찍었다.
자기 전에 생각해보니 식당 일은 살짝 문제가 되지 않겠나 싶어서 오늘 다시 들러서 공개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하석우 실장에게는 알리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됐건 이 사람이 직장에서 내 상사인 건 맞고 내 정체가 공개됐을 때 가장 당황하고 피해를 볼 확률이 높은 사람이었다.
같이 일을 해보니 사람이 계산적이고 차가운 것만 빼면 같이 일하기에는 꽤 크게 무리가 없는 사람인 것 같았다.
물론 김상효 실장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 알 바가 아니었다. 다른 팀장급들이야 그 정보가 공개된다 한들 아무 상관도 없는 거고··· 그냥 신기해하거나 배신감 정도 느끼려나?
하석우 실장은 나유정의 대박을 자기 공으로 윗선에 인정을 받는 중이었으니 만약 정보가 공개됐을 때 제대로 대처를 못 하게 된다면 꼴이 우스워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된다면 나는 적이 하나 생길 수밖에 없는 거다. 적은 굳이 만들 필요가 없는 법!
김상효 실장처럼 막무가내면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하석우 실장은 달랐다. 괜히 잠재적인 적을 만들 필요가 없어서 미리 대처하라고 떡밥을 푼 것이다.
"그, 그러니까···. 준형 씨가 작가···."
그는 검지를 들고 나를 가리키더니 결국 말을 잇지 못했다.
"사실입니다. 실장님."
"어, 어떻게 된 거지···. 요?"
그는 나에게 살짝 반말하려다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이성을 되찾고 마지막에 존대를 했다.
역시 상황 판단이 빠른 양반이었다. 김상효 실장 같았으면 바로 큰소리가 나왔을 거다.
"그게··· 사실은···"
나는 사실대로 그간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줬다. 나유정이 진짜 씹덕이라는 사실만 빼고 말이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하 실장의 표정은 점점 썩어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마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났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내가 말을 마치자 일순간 사무실에 싸한 침묵이 감돌았다.
뻘쭘해진 나는 시선을 돌려 나유정에게 빨리 차에서 했던 말을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실장님."
"네. 네."
하 실장은 지금 어떤 소리도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았다. 오로지 지금 이 사태를 위에 어떻게 보고해서 사태를 무마할 것인지에 대한 생각만 하고 있으리라.
"실장님? 저기요."
"아··· 네. 말씀하세요. 제가 잠시 딴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일이 이렇게 잘 풀린 건 실장님 역할도 컸어요."
"네? 그게 무슨··· 지금 방영되고 있는 슬기로운 덕질생활부터는 제가 한 거라곤 유정 씨와 함께 가서 계약한 것밖에 없습니다만···"
자기를 감쪽같이 속인 것에 대해 약간은 삐진 모습이었다.
"에이··· 그건 아니죠. 애초에 복귀할 생각이 없었던 제가 실장님 때문에 마음을 고쳐먹은 거였죠."
"아···."
내가 듣기론 저건 분명히 사실이 아니었다. 하 실장이 귀찮게 계속 찾아온 것은 맞지만, 결정적으로 마음을 고쳐먹은 것은 최하나 작가의 일침이었다고 했다.
마음을 고쳐먹었을 때 마침 하석우 실장이 세 번째 찾아와서 왠지 안쓰러운 마음에 덜컥 계약해버린 거라고···
하석우 실장은 그냥 운이 좋았을 뿐이었다. 솔직히 나유정이 왜 중형급 XM Ent.에 소속된다는 말인가!
그녀라면 초일류 기획사에서 버선발로 달려 나와 데려가려고 했을 것이다. 그녀는 2년을 넘게 쉬었지만 부동의 1티어 여배우였으니까.
나유정은 첫 번째 떡밥이 통하는 것 같자 곧바로 두 번째 당근을 꺼내 들었다. 나는 그녀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솔직히 실장님이 준형 씨를 붙여주지 않았더라면 이런 좋은 결과가 있었을까요? 전 커리어 최고의 이슈 캐릭터를 보유하게 되었고 앞으로 차기작에서는 제가 정말로 하고 싶은 역할을 맡게 되었으니까요."
"으음..?"
그 냉정하던 하석우 실장의 눈빛이 정처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실장님아. 그동안 으스댄 게 우스워지지 않으려면 수습 좀 잘 해보세요. 나도 괜히 누구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으니까요. 우리가 알려준 거 잘 써먹으시고···.’
'아··· 생각해보니 이 양반이 나를 유정 씨한테 붙이지 않았으면 진짜로 일이 이런 식으로 안 풀렸겠네. 운명 같은 건가?'
하 실장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니 아마도 머릿속으로 시나리오를 짜고 있는 듯했다.
어떡하든 자신의 공을 어필해야 하는 샐러리맨의 처지란···
나는 나유정에게 엄지손가락을 까딱이며 이제 일어나자는 신호를 보냈다.
드르르륵···
"실장님. 저희 이제 가볼게요."
"아··· 가시려고요?
"네. 그럼 내일 봬요."
나유정은 사무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나도 그녀를 따라서 밖으로 걸어 나가다가 몸을 돌려 뒤를 바라봤다.
"실장님."
"응? 왜··· 왜...요?"
"내일 계약하기 전에 유정 씨 데리고 사무실로 오겠습니다. 내일 사장님하고 임원분들 다 계시겠죠? 그럼 자리 잠깐 비우시고 저희랑 같이 계약하러 가셔야죠."
"아···"
그는 이미 내 말에 뭔가 힌트를 얻은 모양이다. 내일 계약하러 가기 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나는 그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문을 닫았다.
그가 어떻게 이 위기를 돌파할 것인지 궁금했다.
다음날
계약서를 작성하기 위해 나유정을 데리고 회사 사무실에 들렀다.
들어가자마자 경비실에서 사무실로 연락했는지 엘리베이터 앞에 하석우 실장이 대기 중이었다.
"두 분 다 어서 오세요. 잠시만 이리로···"
그는 마치 의전을 하듯 정중히 우리를 회의실로 안내했다.
대회의실 문이 활짝 열려있고 그 앞에는 풍채가 아주 좋은 아티스트지원본부장 정재욱 이사가 영업 사원 같은 미소를 머금은 채 서 있었다.
그는 매니지먼트팀인 배우 1, 2, 3팀과 가수팀을 총괄하고 있었다.
'허허··· 평소에 잘 안 보이는 본부장까지 출동했네. 하 실장이 정 이사 라인이자 심복이었지. 아마?'
"어서 오세요. 들어가시죠. 대표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정이사는 손을 들어 굳이 안 해도 되는 길을 안내했다.
회의실 안으로 들어가니 경영지원본부장인 안해연 이사와 프로듀싱&콘텐츠 총괄 본부장 한상훈 이사 그리고 조형석 전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김준환 대표이사가 한 박자 늦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 우리 복덩이 두 분께서 드디어 오셨네요. 자 박수!"
김준환 대표의 말에 회의실에 모든 사람이 다 같이 손뼉을 쳤다.
임원진 총출동? 뭐야 이거!
나는 얼떨결에 나유정과 함께 인사를 하고 고개를 돌려 하석우 실장을 바라보았다.
그는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살짝 쫄리는지 입꼬리가 약간 떨리고 있었다.
그의 눈은 제발 한 번만 협조해달라고 애원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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