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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매니저는 스타 작가님-34화 (34/263)

고구마남을 구하라 (2)

"예? 이 매니저님이 슬기로운 덕질생활 작가님이시라고요?"

"네. 맞아요. 작가님이 저를 그 작품에 캐스팅(?)하신 거고요."

"허어···"

정혜성 사범은 나유정이 해준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라는 얼굴이었다. 이 매니저가 히트작을 쓴 작가라니! 그 작가가 나를? 이라는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JTVC 차기작을 들어가는데 거기 괜찮은 조연 자리가 하나 있고, 그것을 제가 하면 괜찮을 것 같다는 겁니까?"

"네. 그 배역하고 아주 싱크로율이 잘 맞습니다."

"작가님이야 뭐 그렇다고 치고 제작사에서 그걸 용납할까요? 제가 변변한 출연 작품 하나가 없는데요?"

"예전에 태엽 시계라는 작품에서 뜬 이정진도 거의 무명이었습니다. 물론 연기를 못해서 대사까지 다 까여서 벙어리처럼 나왔지만 캐릭터빨로 빵 떴죠. 제가 볼 때 사범님 연기력은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네. 제가 사실 경험은 부족하지만, 연기가 어디 가서 꿀릴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 이 양반. 순둥이 같으면서도 자신감이 있다. 정식으로 테스트를 해봐야 하겠지만, 일단은 싹수가 보였다.

"연기는 저도 봐 드릴게요. 사범님 서로 윈원하시죠? 액션 노하우 좀 팍팍 풀어주세요."

"...노하우요? 좀 더 강하게 가르치는 건데··· 유정 씨가 버틸 수 있다면야 저야 오케이죠."

"하··· 좀··· 더··· 강하게요? 그건 좀···"

정혜성 사범의 엄숙한 표정을 본 나유정이 그만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말을 잘못 꺼냈다 싶은 거겠지.

"일단 기초체력을 더 키우시고 약간 더 강도를 올려보도록 하죠."

"아··· 아니··· 그럴 필요까진···"

나유정의 당황하는 표정을 보자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에게는 이런 식으로 진지(?)하게 접근하는 게 좋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런데 작가님이 저를 직접 캐스팅 할 수 있는 건가요?"

"원래 캐스팅 권한은 연출하는 감독의 영향이 큽니다만 작가의 의견도 무시할 수 없죠. 원칙적으론 작가보단 연출의 권한이지만, 탑 급 작가의 경우는 영향력이 세지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작가님의 권한으로 추천해본다는 거네요."

"맞아요. 제가 검증도 안 됐는데 우길 수는 없고 아마도 내부 오디션을 봐야 할 겁니다. 대본이 공개되면 그 배역을 노리는 사람이 좀 있을 거예요. 상당히 매력적인 역할이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것보다는 훨씬 파괴력이 있는 조연이지. 대한민국을 오열시킬 캐릭터니까.

"작가님. 말씀하신 그 조연 배역이 김하진 맞죠? 경찰 선배요."

"후후··· 맞습니다. 하여간 눈치하고는···"

"헤헤··· 사범님 그 역할 저를 짝사랑하는 역할이에요."

"어? 정말요? 그럼 왠지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예? 지금 저한테 속마음을 털어놓으시는 거에요?"

"아···. 저 여자친구 있습니다. 다만 유정 씨는 배우로서 존경하고 있죠. 그런 대상이라면 얼마든지 감정 이입을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뭐 유정 씨가 낯설지도 않고요."

"자자··· 이제 그 정도로 하고요. 일단 오디션을 볼 기회를 드릴 테니까 연기 연습 좀 해보세요. 대본은 미리 드릴 순 없어도 김하진이 나온 부분은 따로 떼서 보내드릴 테니까 연구 좀 해보세요. 사범님은 연기만 좀 되면 액션 연기에 가산점을 받을 수 있어서 상당히 유리할 겁니다.

"아니···. 어떤 드라마길래 저 같은 전문 액션 배우가 필요한 것인지···"

"나중에 대본 보시면 알아요. 선혈이 낭자한 액션이 있거든요. 그래서 제가 여기서 고생하고 있잖아요."

"그, 그렇군요."

"아··· 그리고 오늘 저랑 서울로 나가서 스타일 좀 바꾸시죠. 솔직히 스타일이 너무 거슬려요."

"어라? 전 작가님이 외모에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실 줄 몰랐네요. 그래서 내가 집에 있을 때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건가?"

"무슨 눈이요?"

"뭔가 맘에 안 든다는 그런 눈빛요!"

"그걸 이제 알았어요? 계속 풍겼는데···"

"왜요! 내가 어때서요? 말해봐요. 말해봐!"

"제 입으로 말해야겠습니까? 아침에 가보면 엉겨 붙은 머리에 기름기 잔뜩 낀 안경! 목이 늘어난 티셔츠! 무릎이 해진 연두색 추리닝 바지! 거기에 김치, 라면 국물은 기본으로 묻히고! 읍 읍 읍···"

나유정이 갑자기 달려오더니 내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액션 스쿨에서 수업을 받더니 확실히 몸이 날렵해진 것 같았다.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빠르기였다.

"거참 쓸데없는 소리 하고 계시네··· 농담도 참···"

나유정은 민망한지 정혜성을 힐끔 쳐다보았다. 정 사범은 그냥 빙긋이 웃고만 있었다.

"괜찮아요. 제 여자친구도 그렇습니다."

"그렇죠?"

그렇긴 뭐가 그래. 내 동생도 그 정도는 아니라고!

"하하하··· 유정 씨 성격이 진짜 밝아졌네요. 예전엔 농담도 안 하고 진짜 연기하는 기계 같으셨는데···"

"제··· 제가요?"

"네. 여기 동료들도 다 그랬어요. 무서워서 말도 못 걸겠다고요."

뭐 다른 매니저들한테도 전설이었지. 그런데 나한테는 안돼. 난 꿀릴 게 없거든. 결국, 씹덕의 실체를 낱낱이 까발렸지.

그게 드라마라 사람들이 실제가 아닐 거라고 오해하고 있다는 게 문제지만 말이야.

"조, 좀 바꿔 보려고요. 이번 드라마 영향도 있고···."

그녀가 살살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하긴 말해놓고 자기도 찔리겠지.

"좋아요. 진짜 좋은 거 같습니다. 원래 이런 게 본래 유정 씨 성격인 거 같아요. 예전의 그 모습은 뭔가 불편해 보였어요."

"·········"

"자 이제 그런 이야기는 그 정도만 하시고 사범님 스타일을 좀 바꿔야겠어요. 곧 차기작 계약도 할 거고 거기서 캐스팅 이야기도 있을 건데 배우가 프로필 사진조차 없다는 것은 그냥 탈락으로 직행하는 거에요."

"아··· 그렇군요."

진짜 정혜성 사범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같았다.

"휴··· 일단 유정 씨가 가는 샵에 가서 관리 좀 받읍시다. 얼른 좀 씻고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나오세요."

"네, 네. 알겠습니다."

정혜성이 사무실로 들어가자 나유정이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좀 가망성이 보여요? 그런데 사범님 뭘 보고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그녀는 아까 장단은 맞춰줬지만, 갑자기 내가 꺼낸 캐스팅 제의에 의문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당연했다. 아우라라고 말하면 누가 믿겠는가.

"그냥 감입니다. 유정 씨랑 액션 연기를 하는 것을 보니 그림도 진짜 잘 나올 것 같고요. 연기력도 썩 나빠 보이지 않은 것 같아요. 솔직히 말하면 제가 생각하는 김하진 역할의 외모와 판박이에요. 싱크로율이 찰떡이랄까?"

"저는 찬성이요. 사범님 진짜 좋으신 분이세요. 액션 연기가 많다면 진짜 추천해도 될 거 같아요. 연기야 뭐··· 제가 좀 봐 드리죠. 뭐. 김하진 역할이 대사가 별로 없지 않아요?"

"그렇죠. 그래도 태엽 시계의 이정진 정도는 아니고 대사가 좀 있긴 있어요."

잠시 기다리니 정혜성이 급하게 샤워를 하고 나왔다. 나는 그를 쓱 한번 훑어보았다.

"응? 외출복이 또 추리닝이에요?"

"아··· 이런 옷밖에 없어서요."

정혜성은 민망한지 검은색 삼디다스 추리닝을 잡고 머리를 긁적였다. 덩치에 안 맞게 쑥스러움을 많이 타는 것 같았다.

"허··· 하나같이 다들 왜 이래. 강남 한복판을 추리닝 바람으로 누비게 생겼네."

나는 정혜성 사범과 나유정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쩝··· 뭐 일단 갑시다. 유정 씨는 집에 내려드려요?"

"아뇨. 저도 옆에서 사범님 코디 좀 해드려야죠."

"땀났는데 괜찮겠어요?"

"차에 타서 에어컨 좀 틀어놓으면 괜찮아져요."

"그냥 말린다고요?"

"뭐가 어때서···"

"아니에요. 갑시다. 얼른··· 끄응···"

나는 두 짐 덩어리를 싣고 강남구 청담동으로 향했다. 평소에 가던 샵에 도착하니 저녁때가 돼가고 있었다.

“선생님 머리 좀 깔끔하게 잘라주세요. 약간 짧으면서 촌스럽지 않은 스타일로요.”

“배우예요? 어디 오디션 가시나? 무슨 역할이신데요?”

“한 여자밖에 모르는 순박한 경찰이에요. 키는 크고 얼굴은 소년처럼 생기고요.”

“아하! 요즘 유행하는 것보다는 좀 길게 잘라드려야겠네요.”

확실히 이 헤어 디자이너 감각이 있는 것 같다. 그녀의 화려한 손놀림에 정 사범의 덥수룩한 머리가 점점 가벼워졌다.

“그냥 동네에서 해도 되는데···”

“에이··· 그게 무슨 소리예요. 여기가 제일 잘합니다. 눈이 있으면 거울 한번 보세요. 어떻게 달라졌는지요.”

정혜성은 짧게 변한 자신의 머리가 어색한지 거울을 보며 쑥스러워했다. 이 양반은 한 끗 차이가 촌스러움과 세련됨을 가른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다.

하···. 이놈의 심미안.

“자! 다 됐습니다. 일어나셔서 한 번 보실래요? 와아···. 진짜 훤해졌다. 진즉에 이렇게 좀 하고 다니시지.”

’오오! 대박! 바로 저 모습이다.‘

“와! 우리 사범님 진짜 멋지다. 몇 년은 더 젊어 보이네요.”

“매니저님 제 솜씨 어때요? 괜찮은가요?”

“최고네요.”

정 사범은 덥수룩했던 머리를 쳐내니 더 젊어진 느낌이었다. 그는 거울로 내 표정을 흘깃 쳐다보았다. 나는 말없이 엄지를 척 내보였다.

그는 머리를 감으러 다른 선생님을 따라 자리를 옮겼다.

“어때요? 진짜 괜찮죠?”

나유정이 대박이라는 듯 약간은 흥분한 모습이었다.

“괜찮네요. 엄청 잘생긴 건 아닌데 트랜드를 타지 않는 그냥 깔끔한 얼굴이에요. 나이에 비해서 동안이기도 하고··· 키랑 덩치도 좋고요.”

나는 담담히 내 감상평을 말해주었다.

“어디서 저런 인재를 구해왔어요? 저런 원석은 오랜만이네요.”

“어떤가요. 디자이너님?”

“내가 이 바닥 벌써 12년째에요. 내 손을 거쳐 간 배우, 가수들만 해도 한 트럭이죠. 그런데 아까 저분은 뭔가 달라요. 그렇다고 얼굴이 엄청나게 잘생긴 건 아닌데 뭔가 압도되는 느낌이 있어요.”

“혹시 체형 때문에 그런 거 아닐까요? 머리도 작고 몸매가 완전 서양 남자 스타일이잖아요. 얼굴도 저 정도면 준수한 편이고요.”

“아! 그리고 격투기 챔피언이에요. 은연중에 상남자 스타일이 몸에 배 있어요. 아까 샌드위치 주신 거 먹는 거 보셨어요? 그냥 두 입에 뚝딱 없애버리던데요.”

“생각해보니 그러네. 뭔가 전체적으로 비율이 진짜 대박이네요. 마치 소간지를 보는 것 같달까?”

맞다. 정 사범 같은 스타일은 안 꾸미면 동네 아저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만 워낙 베이스가 좋아 조금만 신경을 써서 꾸미기 시작하면 환골탈태 수준으로 외모가 변하는 그런 스타일이었다.

정혜성이 머리를 감고 나오자 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고 스타일링제로 머리를 정리해 줬다.

“끝났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우와! 누구세요?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달라 보이지? 역시 남자는 머리빨인가 봐요.”

“아··· 좀 쑥스럽네요.”

그는 한껏 멋을 낸 스타일이 어색한 모양이었다.

“자. 머리는 됐으니 옷을 사러 갑시다.”

“수트를 사야 하는데 어디가 좋을까요?“

“수트 사려면 휴고 보스 매장으로 가요. 여기 근처에 강남점 있어요.”

“좋습니다. 거기 가시죠.”

우리는 차를 타고 다시 이동해서 그 매장을 방문했다. 가게 안에서 수트의 가격을 확인하던 정혜성이 깜짝 놀라서 나에게 물어왔다.

“매니저님··· 아니 작가님. 여, 여기 너무 센데요? 양복이 백만 원이 훌쩍 넘어요.”

“이 정도는 입어 줘야 해요. 사범님 머리도 깔끔하게 잘랐는데 이 수트 입으면 진짜 멋있을걸요.”

내가 빙긋 웃으며 말을 건네자 그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귀에 대고 이야기를 했다.

“그게 아니라 제가 돈이 없어서···”

“·········.”

“하하하··· 쑥스럽네요.”

“제가 빌려드리죠.”

“굳이 이렇게까지 비싼 걸 사실 필요가 없는데요.”

아니 이 양반이 그냥 하라면 할 것이지.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혜성 씨. 그냥 제 말 들으세요. 인생이 바뀔지 모르는 일인데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시는 거 아닙니까?”

아무래도 이런 성격이 그를 무명으로 오래 있게 한 게 아닌가 싶다. 그는 내 차가운 눈빛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며 수트를 받아들고 탈의실로 쭈뼛 쭈뼛거리며 들어갔다.

나유정도 아무 말 없이 내가 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니 그냥 기분인가?

끼익···

문을 열고 나오는 정혜성의 모습을 보고 입이 떡 벌어졌다. 멋들어진 휴고 보스 수트를 입고 나오는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모델이나 다름없었다.

“대··· 대박!”

매장의 직원도 눈을 휘둥그레 뜨고 손뼉을 치고 있었다.

그는 전신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더니 머리를 쓱 매만지며 어깨를 으쓱해봤다. 아마도 이제야 이 고급 수트의 위력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왜 사기꾼들이 하나같이 고급 양복에 외제차를 몰고 다닐까?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고급 수트는 자신감을 상승시킨다. 자신감 상승은 말빨의 향상을 가져다준다. 말빨의 향상은 사기꾼에게 필수 스킬!

물론 사기를 치라는 게 아니고 이런 자신감 상승은 그의 묘한 매력과 함께 시너지를 내고 있었다.

담담한 자신감. 그는 육체적으로도 누구에게 꿀리는 사람이 아닌지라 부드러운 카리스가 느껴졌다.

“오케이! 그걸로 합시다. 아! 그리고 저거 색상 다른 거로 한 벌 더 주세요. 좀 푸른빛 도는 거로요··· 네 그거···.”

“어? 한 벌만 있으면 됩니다. 작가님. 무리에요.”

정혜성이 손사래를 치며 나를 말렸다. 나는 그의 손을 떼어내고 그를 쳐다보며 담담히 입을 열었다.

“아··· 죄송한데요. 그건 제가 입으려고··· 저도 이런 거 한 벌도 없거든요.”

"???"

"풋···"

쓸만한 조연 한 명을 구했다. 이런 식으로 사단을 만드는 거다. 탑 급 작가들 보면 무슨 무슨 사단이라고 불리니까. 그렇게 하루가 갔다.

그리고 그날 밤 이준환 PD에게서 급하게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PD님? 이 늦은 밤중에 무슨 일이신지···."

"자, 작가님!! 이거 꼭 저랑 같이하시는 겁니다! 아셨죠? 절대 다른 곳하고 계약하시면 안 됩니다!"

허 참···. 뭐야 이거···. 진짜 예의 없는 양반이네. 밤늦게 무슨 짓이야. 아무리 재미있어도 그렇지.

나는 그렇게 속으로 이 PD를 타박했지만, 실상은 입이 귀에 걸린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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