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는 스타 작가님-33화 (33/263)

고구마남을 구하라 (1)

"제가 한창 활동할 때 번 돈을 투머로우에셋에 유명한 PB(Private Banking)팀 자산관리사 선생님께 맡겨놨는데 미국 첨단기업인가? 그런 곳에 투자해서 거의 열 배로 불려놓으셨어요. 제가 공격적으로 투자해달라고 했거든요."

"열···. 열 배요?"

뭐야. 이거 실화냐? 잠시 은둔생활을 했지만 몇 년 전에도 나유정은 CF를 많이 찍는 톱스타 중 하나였다.

그렇다면 그녀의 자산은 이미 수백억 원대라는 이야기다. 실로 무시무시한 이야기였다.

나는 체면도 잊은 채 입을 떡 벌리고 고개를 돌려 나유정을 바라보았다.

"저, 저도 그분 소개 좀···."

"쏘리··· 돈 많이 버시고 은퇴하셨어요."

젠장! 아쉽다.

뭐 그래도 괜찮다. 나도 계약만 성사되면 내 연령대에서는 톱클래스 자산가니까.

우리가 잡담을 나누고 있는 가운데 이준환 PD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유정 씨 확실하게 이 작품에 출연하실 작정이십니까? 이미 기사로 대한민국에 쫙 퍼져서 저희는 유정 씨 캐스팅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게 됐습니다."

"왜요? 제가 출연하는 게 마음에 안 드시나요?"

"아,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저희야 유정 씨가 출연해 주신다면 한숨 돌리는 거죠. 베니스 영화제 여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될 정도로 연기도 잘하시고 인기도 현재 최상이신데요. 오히려 나이가 안 맞아서 김인애 역할을 못 드리는 게 아쉽습니다."

이준환 PD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니에요. 전 나지혜 역할이 마음에 들어요. 후반부에 가면 각성하거든요. 후후···."

"그게 무슨···."

"오늘 후반부 대본 보시면 알게 되실 거에요."

"네··· 뭐 알겠습니다. 그럼 출연료는 작가님 맞춰드려도 괜찮으시겠어요?"

"네. 괜찮아요. 사실 작가님이 캐릭터를 잘 써주셔서 다음 주부터 CF를 계속 찍어야 해요. 무슨 뜻인지 아시죠?"

"아하! 그렇군요."

이준환 PD는 이제야 이해했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럼 이제 다 된 건가요?"

"네. 일단 후반부 내용을 들어보니 제작은 거의 확정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대본 보내주시면 읽어보고 많이 이상하지 않으면 최종 계약을 하도록 하시죠. 그 자리에서 캐스팅에 관한 이야기도 좀 하시고요."

"알겠습니다. 그럼···."

나는 나유정을 따라 얼떨결에 자리에서 일어나고 두 PD와 악수를 했다. 그리고 그들과 헤어져 JTVC 스튜디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나유정은 차에 올라타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휴···. 잘 끝난 거 같네요."

"은근슬쩍 배역 확정하는 솜씨가 장난 아니네요. 오늘 한 수 배웁니다. 이 냉정한 연예계에서 탑으로 군림하신 분인데 항상 후줄근한 추리닝을 입고 있어서 제가 잠시 착각했나 봅니다."

"지금 제 집안 패션 디스하시는 건가요?"

"아뇨. 제가 말하고 싶은 건 그게 아닙니다만."

"뭐···. 아셨으면 됐어요."

"참, 나···. 벨트 매세요. 오늘도 파주 가시는 거죠?"

"네. 거기로 가주세요."

시동을 걸자 보이그룹의 최신곡이 스피커로 흘러나왔다. 볼륨을 좀 높이고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기분이 좋은지 리듬을 타며 고개를 살짝살짝 까딱거리고 있었다.

한 중간쯤 왔나? 갑자기 나유정이 뜬금없는 말을 던졌다.

"작가님. 큰돈 버신 기분이 어떠세요?"

"아직 안 벌었습니다. 하지만 뭐. 기분은 나쁘지 않네요."

"치···. 쿨한 척하시긴."

나유정이 내 말을 듣고 픽하니 웃고 만다.

"유정 씨에 비하면 새 발의 피겠지만, 저도 웹 소설로 월에 천만 원 이상 버는 사람입니다. 오늘 같은 일에 벌벌 떨고 하는 수준이 아니에요."

"아예···. 그러시겠죠."

허··· 이 아가씨가 월 천만 원이 우습나!

"원래는 제가 차라도 좋은 거 하나 사드리려고 했는데 오늘 일로 퉁치면 되겠네요."

"크흠···"

뭐? 차를 사주려고 했다고? 사실일까?

회당 이천만 원을 나에게 양보한 꼴인데···16화니까 총합이 삼억이천만 원이다. 차 값으로 따지면 벤틀리 정도?

"제가 유정 씨를 위해서 슬기로운 덕질생활을 쓴 것도 아닌데요. 딱히 이런 걸 바라고 한 일은 아닙니다."

"알아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그냥 선물은 선물일 뿐!"

"음··· 사실 금액이 좀 커서 살짝 부담되는군요."

말은 이렇게 했지만, 솔직히 부담 같은 건 없었다. 내가 너무 속물인가?

기브앤 테이크지 뭐.

"기사 못 보셨어요? CF 밀린 거? 한 달도 안돼서 버는 돈이 수십억이에요. 회사랑 계약도 엄청 유리하게 했기 때문에 무지 짭짤하죠."

"포탈에서 기사로 봤습니다. 돈방석에 앉으셨더군요. 그런데 계약은 어떻게 하셨길래···"

"8 : 2 에요. 물론 제가 8이고··· 뭐 2만 가져가도 회사 수익이 한 해에 20억은 될걸요?"

"아··· 그만합시다."

저런 이야기를 들으니 숫자 감각이 없어지기 시작한다.

"그런데 다 수익은 아니에요. 과세표준이 최고라 세금으로 40% 내니까요. 전 그냥 깔끔하게 다 내는 편이에요. 물론 기준 경비 처리를 해서 딱 40%는 아니고 그거보다는 덜 내요."

"그러니까··· 신문에 나오는 것만큼 버는 것은 아니라는 거네요."

"맞아요. 많이 벌어서 많이 납세하죠."

"그래도 일반인들이 보기엔 아득한 금액이네요."

"아무래도 그렇겠죠.? 아마 작가님도 마찬가지로 탈세하지 않으면 팍팍 뜯기실 거에요."

큭··· 아프다··· 세금 너무 아프다···

"···탈세 안 합니다. 한 해 벌다가 끝낼 것도 아니고요."

"맞아요. 괜히 한두 푼 아끼려다가 고발당하고 이미지 망치지 마세요."

오늘 보니 나유정 어설픈 거 같은데 그런 것도 아닌 것 같다. 돈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완전 똑순이다.

우리는 파주 액션스쿨을 가는 도중 중간에 멈춰 간장게장을 점심으로 먹었다.

"와! 맛있겠다. 역시 밥 도둑! 사장님 잘 먹겠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먹는 것만 봐도 흐뭇하네. 드라마 너무 잘 보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여기 앞에 계신 분이 그거 쓰신 분이에요."

"어머나! 이 총각이? 난 무슨 같은 배우인 줄 알았는데··· 글도 참 잘 쓰고 참 대단하네. 대단해."

"가, 감사합니다. 사장님."

간장게장집 사장 아주머니가 야무지게 먹고 있는 나유정을 보고 정말 좋아했다. 계산을 마치려는데 한사코 식대를 받지 않으셨다.

"에이~ 그럼 사진이나 한 장 찍어줘. 사인도 좀 해주고···"

"헤헤··· 해드려야죠. 공짜로 점심도 주셨는데요."

나유정은 가게 사장님과 나란히 서서 손으로 브이 자를 그리며 사진을 찍었다.

"잠깐만! 작가 총각도 여기 와서 사진 한번 찍어줘."

"저도요? "사장님 전 연예인도 아닌데 뭐하러···"

"제가 작가님 작품을 너무 재밌게 봐서 팬이 됐어요. 한 방만 찍어줘."

"준형 씨 빨리 와요. 얼른 찍고 가야 해요. 늦었어요."

"허··· 참, 나."

찰칵!

나는 얼떨결에 같이 사진을 찍고 말았다.

식후 인스턴트커피를 한잔 마시며 차에 올랐다.

"유정 씨. 이제 점심은 다른 것 좀 먹죠?"

"왜요. 여기 맛집이잖아요. 간장게장 비린내도 안 나고 너무 좋은데요?"

"아니··· 많이 먹다 보면 물려서 안 나던 비린내도 날 거 같은데요?"

"에이! 맛있기만 하구만. 전 원래 뭐 하나 꽂히면 두세 달은 그것만 먹어요."

"크흡···석 달씩이나···"

갑자기 입에서 비린내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다 김치볶음밥에 꽂히면?"

"그거라면 두 달 정도?"

"허··· 말을 맙시다. 출발하죠."

차를 몰아 액션스쿨에 도착했다. 나유정은 씩씩한 발걸음으로 정혜성 사범에게 인사하며 훈련에 돌입했다.

그녀는 몸을 풀고 기초체력 훈련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검도 액션까지 지도를 받았다.

'참 열심히 하네.'

야외 테이블에서 그녀를 지켜보다가 깜빡 졸았다. 점심에 간장게장을 너무 많이 먹은 듯싶었다. 그렇게 꾸벅꾸벅 졸다가 동네 개들이 짖는 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렸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손으로 눈을 비볐다. 그리고 나유정이 수업을 잘 받고 있는지 건물 안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헉···"

건물 안쪽에서는 나유정과 정혜성 사범이 도를 사용한 액션을 맞춰보고 있었는데 그들 둘에게서 노란색 광휘가 엄청나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나유정은 진한 황금색, 정혜성 사범은 연노랑이었다. 나유정의 아우라야 원래 알고 있었는데 정혜성 사범의 아우라 또한 만만치 않았다. 특히 액션 연기를 할 때 정혜성 사범의 아우라 포스가 압도적이었다.

'와··· 저 정도면 진짜 엄청난 수준인데?'

연노랑이면 노란색과 흰색이다. 창민이가 연노랑이었는데 흰색 아우라가 랩 같은 능력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신체 능력인 것 같았다.

창민이는 운동신경이 좋았고 축구만 했다 하면 거의 혼자 날아다니는 수준이었다.

'저 양반 완전 액션 배우 감인데?'

차기작에 임팩트 있는 조연이 있는데 왠지 정혜성 사범이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더벅머리에 소년같이 순진하고 깨끗한 얼굴···머리도 좀 만져주고 옷도 세련된 것으로 입는다면 도저히 삽 십 대 초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외모였다.

'마스크도 준수하고··· 체격은 최고고···'

나는 뭐에 홀린 듯 의자에서 일어나 건물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하잇! 하!"

나유정과 정혜성 사범이 칼을 내려치는 동작을 반복하고 있었다.

"헉헉··· 왜··· 왜요? 전화라도 왔어요?"

수업 받는 도중에 내가 난입을 하자 의아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는 두 사람이었다.

"아직 안 끝났어요?"

"거의 끝났습니다. 오늘은 그만할까요?"

정혜성 사범은 칼을 검집에 꽂아 넣으며 이마에 맺힌 땀을 손으로 훔쳐냈다.

와우··· 상남자 포스! 반전 매력 터지네.

나유정은 체력이 고갈됐는지 손으로 무릎을 짚고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하아 하아··· 죽겠다. 와···. 액션 연기 진짜 힘들다."

나는 나유정은 일단 무시한 채 정혜성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사범님. 정확하게 나이가 몇 살이세요?"

"저요? 서른하나입니다."

"혹시 연기는 해보셨어요?"

"에? 갑자기 매니저님이 왜 그런 게 궁금하실까요?"

"허억...허억··· 준형 씨! 왜요. 왜요. 갑자기 뭐에요."

나유정이 뭔가가 흥미로운 일이 생길 것 같은지 헉헉대면서도 근처로 슬금슬금 다가왔다.

정혜성 사범이 자신의 이야기를 간단하게 해줬다. 그는 원래 액션 영화를 좋아해 액션 연기를 하는 배우가 되는 게 꿈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배우는 너무 많고 변변한 역할은 없었다. 요즘은 캐스팅에서 신인 연기자가 설 자리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 오히려 신인 연기자들은 어느 정도 티켓 파워가 있는 아이돌들에게도 밀려나는 상황이라고 했다.

심지어 독립영화에서조차 아이돌을 캐스팅하는 실정!

자신이 좀 큰 기획사 소속이었다면 신인 끼워팔기로라도 얼굴을 내밀 수 있겠는데 중소 기획사 신인 연기자는 정말 써주는 데가 없다고 했다.

특히나 액션 영화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고 나중에 허겁지겁 연기를 본격적으로 배웠지만 커리어도 쌓지 못하고 어중이떠중이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데 왜 여기 액션 스쿨에서 사범 일을 하고 계세요?"

"아! 제가 원래 파쿠르하고 격투기도 같이 헸었어요. 제 자랑이지만 워낙 몸 쓰는 것에 타고 나서요.

국내 입식타격기 대회에서 우승도 한 경험이 있습니다. 비록 대회 주관사는 망했지만요. 거기서 여기 운영하시는 정두형 감독님하고 알게 되었고 요즘엔 제가 이 일을 도와드리고 있습니다."

오··· 격투기 챔피언이 연기도 한다고? 아무리 봐도 이 양반 심상치가 않다. 이런 인재가 파주에서 사범이나 하고 있다니···

내 차기작에는 아주아주 매력적인 캐릭터가 하나 있었다.

나지혜를 짝사랑하는 순박한 경찰 선배인 특공무술 고수 김하진!

그 캐릭터가 딱 정혜성 사범과 들어맞는다. 비록 나지혜가 한승호와 불륜 관계가 되지만 끝까지 그녀를 지키려 하는 지고지순한 캐릭터다.

나중에 여성 시청자들의 눈물을 쏙 빼버릴 비극의 주인공.

이 역할의 모티브는 어렸을 적 케이블TV에서 재방송으로 봤던 '태엽시계'의 여자 주인공의 보디가드로 나왔던 이정진이었다.

그는 여주인공을 짝사랑하던 보디가드 역으로 마지막에 그녀를 구하기 위해 적진으로 뛰어들어 목검을 들고 일당백의 싸움을 하고 장렬히 전사하는 역할이었다.

솔직히 그 장면을 보고 펑펑 울었다.

그 고리타분하게 꽉 막힌 고구마남 역할에 왜 이입을 했을까?

어린 날의 나는 왠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만큼 고연정이 예뻤으니까. 병맛 같지만 남자들은 그런 이상한 것에 꽂히곤 했다.

어렸지만, 목숨을 바쳐 그녀를 지키겠다는 그 고구마남의 순애보가 이해되었다.

나는 그 장면을 현대적으로 다시 탄생시키고 싶었다.

만약 웹 소설에서라면 '극혐!', '켁! 목이 막히네요. 하차합니다!' 하면서 댓글이 수백 개가 주르륵 달릴만한 캐릭터지만 영상으로 나가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만화로 그리는 웹툰만 보더라도 고구마 전개가 태반이다. 글이 아닌 시각적으로 느끼는 게 더해지면 사람들은 받아들이는 게 달라진다.

고로 이 역할에 딱 맞는 배우만 찾는다면···

순수한 얼굴에 지고지순한 사랑을 연기하면서 액션 연기는 최강인 사람이 필요했는데 왠지 모르게 정혜성 사범이 딱 어울렸다.

그야말로 싱크로율 120%!

나는 잠시 그를 위에서부터 쭉 훑어보았다. 약간 기분 나빴으려나?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보시는 거에요?"

정혜성이 질문하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음···. 사범님 연기 한번 해보실래요?"

"연기요?"

"네. 액선, 멜로요."

옆에 있던 나유정이 뭔가를 눈치챈 듯 눈동자가 찢어질 듯 커지고 있었다.

"오오오!!"

"시켜주기만 하면 하죠. 저라고 평생 여기서 액션 연기나 가르칠 수는 없으니까요."

"흐음···. 그러면 말이죠. 이렇게 하시죠."

"??"

"먼저 그 더벅머리나 좀 깎읍시다."

".........."

"진짜 촌스러워 죽겠어요."

헉··· 갑자기 이 말이 왜 나온 걸까? 진즉부터 저 촌스러운 머리스타일이 너무나 거슬렸다.

요즘 심미안이 너무 높아져서 뭔가 이상하면 그냥 넘어가질 못했다.

누가 들으면 화가 날 법한 이야기가 나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왔다.

"아··· 머리 좀 깎아야 되겠네요. 안 그래도 지저분하긴 합니다. 하하···"

그는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머리를 긁적였다.

으음··· 왠지 이 양반···. 스타의 자질이 보이는 것 같은데?

쑥스러워하는 그의 모습을 보니 안타깝게 여자를 구하고 사망하며 대한민국을 비탄에 빠트릴 장면이 떠오른다.

'허···. 뽕이 차오른다. 그때가 되면 나는 욕먹는 것도 모자라 저주를 받을 것 같은데···. 이걸 어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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