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사도 모르는 속편 (4)
다음날 오전 10시 JTVC 스튜디오 관계자들을 만나기로 약속돼 있었다. 하 실장이 계속 따라온다고 고집을 부렸으나 나유정이 칼같이 잘라냈다.
부부의 비밀 제작사의 위치는 가까운 마포구 상암이었다. 건물 주차장에 도착해서 건물로 들어서자 스태프로 보이는 안경 쓴 여자분이 우리를 회의실로 안내했다.
회의실에 들어서니 두 명의 남자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유정 씨. 처음 뵙겠습니다. 김현도 책임 PD입니다."
"안녕하세요. 이준환 PD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그들은 먼저 현재 최고 이슈 메이커인 나유정에게 인사했다. 그리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두 사람. 마치 누구냐는 얼굴이다.
"아. 이 분은···."
"안녕하세요. 작가 이준형입니다."
나유정이 나에 관해 설명하려고 하자 내가 말을 자르고 그냥 정체를 공개해버렸다.
그러자, 그들의 눈에 이체가 감돌았다.
"오! 작가님께서 직접 오셨군요. 하석우 실장에게 들은 바로는 사람들을 잘 안 만나신다는···."
"그건 살짝 오해가 있군요."
"아! 그런가요? 사실 이것저것 물어보려고 했는데 잘 모르는 눈치더라고요."
"네. 아마 그랬을 겁니다."
"이제 앉아서 이야기하시죠."
나와 나유정은 동시에 의자에 앉았다. 시선을 들어 두 PD를 쳐다봤다. 인상만 딱 봐도 만만치 않게 생긴 인간들이었다.
특히, 김현도 CP는 인상이 아주 강렬하고 남성미를 팍팍 뿜어대는 중년의 남자였다.
그에 반해 옆에서 입을 다물고 눈을 내리깔고 있는 머리가 약간 긴 호리호리한 남자가 연출을 맡게 될 이준환 PD인 모양이었다. 나이는 삼십 대 중반으로 보였다.
"일단 유정 씨 드라마 대박 나셨던데 축하드립니다."
"고맙습니다."
".........."
그녀는 내가 시킨 대로 평소에 사무적으로 남을 대하는 투로 두 PD를 대하는 중이었다.
나유정 표정 아주 좋고···.
"작가님이 보내주신 시놉하고 대본 잘 봤습니다. 저는 재밌게 봤고, 상당히 긍정적입니다. 혹시 다음편 좀 볼 수 있을까요?"
이준환 PD는 손을 대본 위에 올려놓고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뭔가 흥분을 가라앉히는 모양새다.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았는지 김현도 CP가 손을 들어 이준환 PD를 제지했다. 아무래도 협상을 하기 위해 그가 나온 모양이었다.
"하하···. 작가님. 저희가 지금 내부적으로 제작할지 말지 결정하는 단계에 있습니다. 혹시 저희와 함께 제작할 생각이 있으신가요?"
"조건이 어떤지가 중요하죠."
나는 눈빛이 형형한 김현도 CP의 말에 주눅 들지 않고 담담하게 그 눈빛을 받아쳤다.
"작가님 외모가 참 준수하시네요."
"감사합니다."
"이런 말 하기 좀 그런데요. 상당히 나이가 어리신 거 같은데···."
"먹을 만큼 먹었습니다."
나이로 공격하는 걸 보니 제대로 협상을 해볼 모양이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니까. 업계에서 이런 식으로 길들이기를 하는 것에 대해 많이 들어본 상태였다.
"하하···. 당연히 그러시겠죠. 저희 쪽은 회당 천만 원에서 천오백만 원 정도 생각하고 있는데 어떠세요?
"그 정도라면 절대 안 합니다."
"와우! 너무 단호하시네요. 원래 협상이라는 게 이렇습니다. 서로 입장을 확인하면서 개선해나가는 거죠."
"죄송한데요. 제가 알기엔 통상 초보 입봉 작가들이 받는 게 천만 원 미만이고, 아주 혹평을 받지 않은 선에서 한 편 이상 집필 경력이 있는 작가가 천오백만 원 정도를 받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라도 히트작이 있다면 단번에 수천만 원을 호가하고요. 맞나요?"
다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실은 나유정과 친분이 있는 작가들에게 전화를 돌려 물어본 내용이었다.
"크흠... 뭐 대략 그렇습니다. 탑 급 작가님들은 억대로 받기도 하시죠 작가님 혹시 전작이 있으신지요?"
아직도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이다. 나를 마치 초보 작가처럼 대하고 있는 김현도 PD였다.
"있습니다."
"아···. 있으시구나. 어쩐지···. 작품이 뭐죠?"
"지금 방영 중입니다."
"네?"
"여기 주연이 앉아 있네요."
나유정이 내 설명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서, 설마···."
김현도 CP의 강렬하던 눈빛이 정처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생각하는 그겁니다. 슬기로운 덕질생활이요."
"슬기로운.... 덕질생활... ?"
"저, 정말입니까?"
이준환 PD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날 듯 두 손으로 테이블을 짚고 있었고, 김현도 CP의 나를 잡아먹을 듯 형형했던 눈빛이 갑자기 순한 양처럼 온화해진 것 같았다.
"그게 뭐라고 거짓말을 할까요. 확인이라도 시켜드려요?"
"아···. 아닙니다. 제가 그 화제의 작가님을 몰라뵙고···.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았군요."
"협상이 다 그렇죠. 뭐."
"하하···.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김현도 CP란 사내는 뭔가 사기꾼 같은 냄새를 강하게 풍겼다. 회사 생활을 하다 보니 이렇게 말로 하는 스타일을 종종 봤다. 약간 영업 스타일에 어울리는 인재 말이다. 인간관계도 넓고 구라도 잘 치고 수습도 잘하고···.
"작가님. 혹시 다음 화부터 좀 볼 수 있을까요? 4화 이후의 흐름이 잘 이어지면 저희 예산에서 할당된 최대한으로 원고료를 챙겨드리겠습니다."
"야! 이준환! 이게 미쳤나!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김현도 CP가 옆에 앉은 이준환 PD를 타박했다.
"형! 듣고도 몰라? 슬기로운 덕질생활 작가님이시라잖아. 지금 그 드라마 시청률이 얼마인지나 알고 하는 소리야? 흥행이 검증됐잖아. 그리고 내부에서 대본 좋다고 평가가 났는데 뭘 그렇게 복잡하게 가요. 그냥 편하게 갑시다!"
"아우···. 싸우지들 마시고요. 진정 좀 하세요."
나유정이 실실 미소를 지으며 말싸움을 하는 두 PD를 말리고 있었다. 원래 불구경과 싸움구경이 가장 재미있는 법이었다.
나는 혹시 몰라서 눈앞으로 손을 흔들어 두 사람의 아우라를 체크했다.
큭···
나는 내 앞에 앉아있는 이준환 PD의 강렬한 보라색 아우라에 깜짝 놀라 황급히 스카우터를 종료시켰다.
'허억 허억··· 미친···'
별 기대를 하지 않아서 그런지 갑자기 환하게 비춰오는 아우라에 깜짝 놀란 것이다. 이건 왜 항상 적응이 안될까?
그런데 웃긴 게 옆에 앉아 있는 김현도 CP에게서는 아무런 아우라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야말로 일반인 중의 일반인! 역시 사회생활은 실력대로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게 아닌 것 같았다.
"괜찮으세요. 작가님?"
이준환 PD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아 괜찮습니다. 약간 목디스크가 있어서요. 오래 앉아있는 작가의 숙명이죠."
그러면서 잠깐 나유정을 쳐다보니 그녀가 이게 무슨 소리지 하는 표정이다. 매니저가 무슨 오래 앉아 있을 일이 있단 말인가. 집에 가서나 책상에 좀 앉아 있을 텐데 말이다.
"디스크는 언제나 조심해야 합니다. 잘 치료가 안되더군요. 근력 운동을 잘하고 평소에 자세도 바르게 하고요."
이 양반아 그걸 누가 모르나. 그냥 연기한 거야. 연기!
김현도 CP가 전과 다르게 나를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평소에 생각하던 스토리를 부부의 비밀의 내용을 약간 접목해서 대본으로 엮은 작품인데 저작권이 살짝 우려되긴 했다. 솔직히 도입부만 비슷하지 나중에 갈수록 아예 내용이 달라진다.
'아냐. 조금만 비슷해도 얼마든지 트집 잡힐 수 있다. 이런 건 깔끔하게 해결하고 가는 게 좋아.‘
그런 면에서는 부부의 비밀을 제작한 JTVC가 제일 나을 것이다. 의외로 추가 비용 없이 말 한마디로 오케이 받을 확률도 있었다.
초반부가 부부의 비밀처럼 시작하는데 누가 봐도 오마주라고 생각할 것 아닌가? 어쨌거나 JTVC에서 제작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안 될 확률이 높아 보였다.
거기다가 연출을 맡을 이준환 PD의 아우라가 심상치 않았다.
회의실에 잠시동안 침묵이 찾아왔다. 다들 각자 생각에 잠겨 있는 듯했다. 그때 이준환 PD가 나를 쳐다보며 말을 했다.
"작가님 저번에 유정 씨가 찍힌 사진을 보니 8화까지 대본이 나온 것 같던데요. 맞나요?
"아뇨. 9화, 10화도···"
나 대신 말을 하려는 나유정을 손을 들어 저지했다. 검지를 펴서 입술에 가져다 댔다.
"쉿!"
"······체!"
나는 나유정을 조용히 시키고 그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아니요. 거의 다 썼습니다."
"에에에?"
나유정의 단말마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이준환 PD도 놀란 모양으로 목소리가 높아졌다.
"네? 정말요? 몇 편인데요?"
"총 16화입니다. 뒷부분 이야기를 조금 다듬고 있어요. 맨 마지막에 반전을 하나 넣을 거라서요."
"4화에 김인애가 녹취 파일을 들으며 실신하잖아요? 그게 어떤 내용입니까?"
"우리 PD님 성질 급하시네요. 오늘 계약하면 집에 가서 나머지 대본 다 넘겨드릴건데요. 그때 보시면 되죠. 스포일러인데 듣고 싶으세요?"
"네. 계속 마음에 걸리더군요. 무슨 내용이길래 천재이자 의사인 김인애가 그걸 듣고 실신을 할까 싶습니다. 부부의 비밀과는 다르게 극이 상당히 다크한 것도 마음에 걸리고요."
김현도 CP는 흥에 겨워 신나게 말하고 있는 이준환 PD를 옆에서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김인애가 녹취 파일에서 들은 것은 남편인 한승호와 친구인 의사 김태원 그리고 IT 재벌인 이영민이 자신들의 계획을 최종 브리핑하는 장면입니다."
"무슨 계획이요?"
"네. 그들은 대한민국을 접수할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허··· 왜 그렇죠?"
"그들은 사이코패스입니다. 30년 전 우연히 영재학교에서 만나 한승호의 주도로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사적인 모임이 단체로 발전하죠."
"허···. 미친··· 한마디로 한니발 같은 천재 사이코패스 3명이 오랜시간 국가를 접수할 계획을 세운다는 말입니까?"
"비슷해요."
"왜요?"
"이유가 필요합니까? 피디님은 평소에 나라에 불만 없으세요? 맘에 안 드나 보죠. 지금 이 자본주의가요."
"좋습니다. 국가를 접수한다라···. 그런데 그게 가능합니까?"
"힘드니까 30년이 걸린 거죠. 한 명은 IT 재벌이 되어 국민 메신저를 독점해서 모든 이들의 사생활을 엿볼 수 있는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 상태고 한 명은 정신과 의사로 자신들의 결사대를 만들어오고 있습니다. 마치 신흥 종교의 교주처럼 말이죠. 그들의 더러운 일을 해주는 손과 발의 역할이죠.“
“마지막으로 김인애의 남편인 한승호는 연쇄살인범을 잡는 스타 경찰로 곧 정치에 입문해서 국회의원이 되고 45세에 대권 주자가 되어 대통령에 당선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김인애와 결혼한 것도 4선 정치인인 김인애의 아버지를 이용하기 위해서죠."
"주인공 여자 둘이 이들의 계획을 막는다는 거죠? 하아···.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네. 뭔가 황당하지만, 또 그럴싸해요. 대본을 봐야 알겠지만, 이거 연출 잘못하면 유치해지겠지만 잘만하면 일생의 역작이 나오겠는데요?"
"이준환 PD님 실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습니다. 저번 부부의 비밀에서 이상한 몇 개 신만 없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그··· 그건···"
갑자기 이준환 PD가 고개를 돌려 김현도 CP를 무섭게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시선을 피하는 김현도였다.
뭐야. 그거였어? 김현도 CP가 그런 식으로 참견한 건가? 괜히 능력도 없는 사람이 이래라저래라 해서 갑자기 이상해진 거구만.
"뭐 그런 내용이고요. 마지막에 반전이 하나 있는데 그건 나중에 따로 이야기해드릴게요. 그걸 알아야 전체적으로 피디님이 제대로 맛을 살릴 수 있을 겁니다."
"아···. 알겠습니다. 살짝 걱정되는데요. 일단 집에 가서 대본을 보고 말씀드릴게요."
"그러시죠."
"아! 그런데 아직 원고료 이야기를 마무리 못 했네요? 얼마를 드리면 될까요. 작가님?"
"회당 일억까지는 좀 무리인 것 같고 한 칠천만 원 정도 주시면 되겠네요."
"네? 칠천이요? 허··· 미친···."
김현도 CP가 소리를 꽥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준환 PD가 그런 그를 보고 일단 앉으라고 했다.
"작가님. 죄송한 말씀이지만··· 저희가 맥시멈으로 책정한 게 오천만 원입니다. 그 이상은 제작비 때문에 무리입니다."
"흐음···."
나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턱을 어루만지며 고민하는 척을 했다. 사실 뻥카였는데 자신들의 패를 드러내다니··· 솔직히 내가 업계 탑 급 작가도 아니고 칠천은 좀 과한 면이 있었다. 오천만 원이면 총 16화니 팔억이나 되는 금액이다.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이빨을 꽉 깨물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나유정이 내 등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작가님. 원고료가 너무 낮아서 화나신 거에요?"
그녀는 내가 이빨을 꽉 깨물자 화가 났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 반대인데···.
"피디님. 원고료 모자라시면 제거 출연료에서 까서 우리 작가님 7천만 원 맞춰 주세요. 저는 그냥 적당히 주시면 돼요."
'헉! 나유정 이게 무슨 개소리야! 왜 자기 출연료를 깎는다는 소리를 하는 거야?'
나는 짐짓 근엄한 얼굴로 그녀를 훈계하기 시작했다.
"유정 씨. 돈이 아무리 많아도 그런 말씀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닙니다."
"에이···. 괜찮아요. 솔직히 제가 돈이 적당히 많은 게 아니라 엄청 많잖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컥···"
나유정의 말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충격적이었다.
거기다, 추가로 더 엄청난 말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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