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는 스타 작가님-28화 (28/263)

대배우가 준 퀘스트 (5)

어젯밤부터 귀찮게 했던 나유정의 집 앞에 도착했다.

나는 왠지 모를 불길함을 느끼며 들어갈까 말까를 망설이고 있었다.

띠리릭···

문고리를 잡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고 안쪽에서 부스스한 나유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꼭 유령과 같은 모습이었다.

"어우··· 깜짝이야. 저 온 줄 어떻게 아셨어요?"

"등록된 차량이 단지에 들어오면 거실에서 안내 멘트가 떠요."

말을 마친 나유정이 몸을 돌려 거실로 들어갔다. 나도 그녀를 따라서 거실로 들어섰다.

옷차림이야 집에서는 항상 이런 후줄근한 차림새니까 그렇다 싶은데 왠지 잠을 잘 못 잔 얼굴 같았다.

거실 중앙 바닥에는 부부의 비밀 2 (가제) 대본이 어지럽게 펼쳐져 있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들어 그녀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혹시 잠 못 자셨어···"

말을 마치지도 못했는데 나유정이 갑자기 몸을 휙 틀어 내 가방을 덥석 움켜쥐었다.

"내놔요. 다음 화··· 얼른 주세요."

"아··· 뭐 하는 거예요. 가방 찢어져요. 놔요! 놓으라니까요···"

"안, 안주면 안 놓을 거에요."

내가 가방을 당기자 그녀의 몸이 주르륵 당겨졌지만, 결코 손을 놓지 않았다.

"아, 알았어요. 줄게요. 준다고요. 놔요."

내가 준다고 약속을 하자 드디어 우악스러운 손을 놓는 그녀였다. 이 마른 몸에서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원··· 몬스터의 코어라도 삶아 먹은 것 같은 악력이었다.

"혹시 잠을 잘 못 잔 거 아니에요? 안색이 안 좋은데···"

그녀는 내 말에 머리를 긁적이며 시선을 회피했다.

"아니···요···"

"아침부터 어설프게 거짓말하지 마요. 피부 상태만 봐도 아니까. 평소보다 다크서클이 0.5cm 정도 더 내려왔어요."

"거, 거짓말!"

나유정이 다크서클 드립에 꽥 소리를 지르며 놀라는 모습이었다.

"농담입니다. 그냥 얼굴이 피곤해 보여요. 눈도 좀 충혈된 거 같고요."

"다크서클 가지고 뭐라 하지 마세요. 제 콤플렉스니깐···"

"일단 좀 씻고 나오세요. 오늘 시간이 별로 없어요. 슬기로운 덕질 생활 마지막 촬영 날이잖아요. 지금까지 잘 해왔는데 마지막 날 늦을 생각은 아니겠죠?"

그녀는 아직도 내 가방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다 콧소리를 흥하고 내며 욕실로 들어갔다.

"어휴··· 내 팔자야. 매니저 그냥 확 때려치워? 내가 무슨 보모도 아니고···."

준비를 끝마치고 차에 올라탔다. 시동을 걸고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입력하는데 나유정이 다시 내 어깨를 잡았다.

"좀 봅시다. 5화라도···."

나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내 어깨를 잡은 가녀린 손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한숨을 한번 내쉬고 가방을 뒤적여 5화를 넘겨줬다. 다 주면 안될 거 같아서 원고를 이미 화 수별로 나눠 놓은 상태였다.

나는 악셀을 밟고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갔다. 나유정은 5회 대본 첫 부분을 읽다가 고개를 들어 나에게 말을 걸었다.

"이 작가님. 제가 어제 궁금해서 잠이 잘 오지 않았는데요. 나지혜는 왜 그렇게 철저하게 망가트리는 거에요? 나랑 원수졌어요? 일부러 나 보라고 그렇게 허접스럽고 불쌍하게 등장시킨 거죠? 무슨 조연처럼 묘사해놨던데···"

"그거 정식으로 쓴 것도 아닌데 크게 의미부여 하지 맙시다."

"뭐라고요? 내용이 이렇게 충격적인데 크게 의미부여 하지 말라고요? 허 참··· 어이가 없으려니까···"

"내용이 그런데 그걸 방송이나 할 수 있겠어요?"

"부부의 비밀도 19금이었어요. 그런데도 시청률 28% 나왔거든요? 아니면 넥플릭으로 그냥 직행하든가."

"그리고 말은 바로 하시죠. 나지혜 역할을 누가 시켜준답니까?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시고 계시네."

"치··· 다 나 주려고 쓴 거 다 알아요. 남자 츤데레야 뭐야."

나유정은 다 안다는 듯 살짝 눈을 흘기며 자리에 똑바로 앉아 다리를 꼬았다.

"뭐라고요? 나 원 참···"

"그건 그렇고 아까 내가 물어본 거 왜 답변 안 해요?"

"뭐요?"

"왜 나지혜 캐릭터를 그렇게 허접스럽게 만들었느냐 구요. 생각해보니 나 씨인걸 보면 분명 나를 생각하고 만들었네."

"우연히 성씨가 같은 거에요. 혹시라도 드라마화되면 나중에 오디션 지원을 해보든지 말든지···"

"우와! 방금 그거 완전 츤데레 멘트다. 대박."

"그게 무슨 소리예요?"

"뭐 이런 거 있잖아요. 피곤한 여사친을 보며 '엄마가 나 먹으라고 준 영양제인데, 나 이거 안 먹거든? 버리기 뭐해서 그런데 네가 갖던지 말던지 해.' 이러는 거요."

"허···"

"그게 바로 속마음을 남에게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츤데레죠."

"유정 씨 아이돌 덕질 말고 혹시 일본 만화나 애니메이션도 열심히 봐요?"

"아닌데요?"

"그런데 왜 그래요?"

"뭐라고요?"

잠시 차 안은 침묵이 흘렀다. 내가 너무 세게 말한 게 아닌가 아차 싶었는데 나유정은 바로 말을 하며 내 말에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을 보였다.

"지금 공권력은 경찰 간부인 한승호가 몰래 컨트롤 하고 있어서 전혀 도움이 안 되고 천재 해커 이영민이 IT쪽을 주름잡고 있어서 폭로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고 거기다 김태원의 사이코패스 하수인들이 암중에서 계속 움직이고 있고요.

도대체 연약한 여자 둘이서 어떻게 이 거대한 트라이앵글을 벗어나는 거죠? 아무리 김인애가 아이큐 160의 천재긴 하지만··· 상대방도 장난 아니잖아요."

"스포일러 해도 돼요?"

끄덕끄덕···

나유정은 버블헤드 인형처럼 고개를 과하게 끄덕였다.

"나지혜가 왜 엘리트 경찰이었을까요? 그녀는 뛰어난 두뇌 말고도 특기가 하나 더 있습니다. 제가 1화에 살짝 배경으로 언급한 내용인데···."

"그, 그게 뭐였죠?"

나유정은 기억이 안 나는 듯 내 말에 눈이 동그래지며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그녀의 안전벨트가 쭉 늘어났다.

"경찰인 나지혜는 세계검도선수권대회 여자부 개인전 5년 연속 챔피언인 괴물 중의 괴물입니다. 특히 진검을 잘 다루죠.

후반부인 8화 이후부터는 나지혜가 각성하게 됩니다. 암흑 조직과 싸우는 그때부터는 아주 선혈이 낭자한 피의 활극이 펼쳐질 거에요.

"저, 정말요? 미, 미쳤어요! 크으···"

"사실 중국 영화처럼 여자가 남자들이랑 주먹으로 치고받는 것이 말도 안 되고 현실성이 없으니 좀 억지 같지만 검도를 끼워 넣었어요.

진검을 든 세계챔피언이면 좀 할만하겠다 싶어서··· 그대신 진검이라  피가 콸콸 쏟아져서 너무 잔혹하니 이게 드라마로 방영되긴 힘들 겁니다."

"아아···"

리어 미러로 나유정의 얼굴을 보니 뭘 생각하는지 눈이 살짝 풀리고 입이 쩍 벌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암흑 조직과 진검을 들고 나쁜 사이코패스들의 팔다리를 마구 자르는 상상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마치 킬 빌처럼 말이다.

나는 왠지 모르게 몸이 으스스 떨려왔다.

갑자기 나유정의 흥분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요. 저기요. 있잖아요. 나지혜가 각성할 때 그 장면을 넣으면 좋겠어요."

"???..."

"영화 아저씨 보셨어요? 거기 반이 오빠가 어린 친구를 구하러 갈 때 상체 노출하고 면도칼이랑 바리깡으로 긴 머리를 정리하면서 거울을 보는 신요.

레전드 신인데··· 옆구리 상처를 붕대로 막고··· 집에 잠들어 있던 진검과 구해온 총을 손질하는 거죠."

어라? 이 아가씨 폭주하네?

"반이 오빠요?"

"아··· 예전에 소속사가 같아서 안면이 좀 있어요."

"그건 그렇고··· 진짜 머리 자르시게요? 아예 남자처럼? 지금 샴푸 광고하잖아요."

"그렇게 짧게는 아니고 단발 정도? 곧 전속 기간 끝나요. 짧아서 안 된다고 하면 계약 연장 안 하면 되겠죠?"

어이 어이···. 방송이 될지 안 될지 모르는 대본을 가지고 너무 도를 넘는 거 아닌가? 그게 돈이 한두 푼이 아닐 텐데···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잠깐··· 상체를 드러낸다고요?"

"뭐··· 위에 속옷만 입으면 되지 않을까 싶은데··· 스포츠 브라같은..."

"에이··· 명색이 검도 최고수인데 몸이 지금처럼 물렁물렁하면 되겠어요? 뽀대가 안 살죠."

"어, 언제 본 적 있어요? 어이없네! 진짜."

"본건 아니고 예전에 집에서 내 헌터물 읽었을 때요. 그날 날 새서 제가 들어서 침대로 옮겼잖아요. 보니까 몸이 두부처럼 물렁물렁하던데···."

"뭐, 뭐욧! 그, 그거야 PT 해서 몸을 만들어놓으면 되죠! 예전에도 해본 적 있어요. 근육질로 만들어 놓으면 되잖아요!

"굳이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네. 사서 고생하고 CF 연장 못 해서 돈 날리고···"

그녀는 리어 미러로 쳐다보고 있는 내 눈을 지긋이 응시했다.

"그럼 준형 씨는 돈 벌려고 맨날 헌터물만 쓸 거예요? 아니잖아요. 자기가 만족스러운 작품도 있어야 할 거 아니에요!"

"·········."

솔직히 나유정의 촌철살인 멘트에 나는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크흠··· 그렇게 말하면 내가 또 할 말이 없네요. 그런데요. 유정 씨."

"네. 말씀하세요."

"평소 이런 액션물에 로망이 좀 있었나 봅니다?"

"마, 맞아요. 초등학교 때 태권도를 억지로 배운 적이 있었는데 대련이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한번은 대련하다가 상대방에게 발로 얼굴을 맞았는데 바로 관두게 해서···"

"에이··· 난 또 뭐라고···"

"나 그런 활극이라면 진짜 미친 듯 온몸을 불 싸질러서라도 해볼 자신 있어요. 솔직히 여자가 액션에서 그런 연기를 해볼 기회가 거의 없거든요. 거의 들러리나 서는 거지···"

갑자기 나는 장난이 치고 싶어졌다. 마침 횡단보도 신호등에 걸린 상태였다.

"그럼 나중에 오디션 할 테니까 정식으로 지원하세요."

"에? 뭐에요 진짜! 이거 내가 써오라고 숙제 내준 거잖아요."

"숙제는 무슨···. 내가 생각해본다고 했지 한다 안 한다 가타부타 대답한 적 없는데요?"

"정말 이러기에요? 내가··· 이 나유정이 꼭 오디션까지 봐야겠어요?"

갑자기 그녀가 내 팔을 붙들고 늘어졌다.

"놔, 놔요···. 신호 바뀌면 어쩌려고···."

"제발요. 배역은 저한테 좀··· 네? 이준형 작가님, 아니 선생님! 이건 정말 나유정이 해야 되는 캐릭터에요. 제에발···."

"아, 증말!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아우··· 이건 뭐 진드기도 아니고··· 사람 참 피곤하게 하네."

"헤헤헤···"

"뭡니까? 그게 그렇게 좋아요?"

"네. 스토리 자체는 뒤로 갈수록 재미있어요. 처음에는 내 캐릭터를 너무 형편없이 만들었길래 화가 났는데··· 작가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야말로 후반부 히어로네요. 그것도 피를 튀기는 액션 활극! 어머 어떡해... 너무 좋아."

나유정은 마치 드라마 방영이 확정되어 캐스팅된 사람처럼 방방 뛰며 기뻐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렇게 5화 대본을 가슴에 소중히 품고 있었다.

'참··· 그렇게 좋은가? 그걸 누가 찍는다고··· 쩝."

나는 살짝 맛이 간 듯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마침 신호등이 바뀌고 길이 뚫리기 시작했다.

*  *  *

오늘은 슬기로운 덕질 생활 마지막 장면을 촬영하는 날이었다.

결국 뛰어난 활약으로 제우스를 1티어로 올려놓고 회사를 퇴사한 나혜리.

그녀는 이제는 여배우의 일상으로 복귀한 상태였다.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에도 출연해서 번아웃 후 완벽하게 복귀 신고식을 치룬다.

그리고 2년 후가 지났지만, 그녀의 가슴은 뻥 뚫린 것처럼 공허하기만 하다. 여전히 자신은 배우로 승승장구 중이고 제우스는 국내 스타를 넘어 전 세계에 거대한 팬덤을 거느린 제2의 슈퍼노바가 되어 있었다.

오늘도 그녀는 쓸쓸하게 제우스의 신규 앨범을 언박싱하고 있었다. 그녀는 제우스와 함께 했던 치열했던 6개월을 떠올렸다.

나혜리는 타이틀곡 아닌 마지막 곡에서 한민준이 작사한 가사 말을 듣고 그만 펑펑 울게 된다.

Track 12. 고마워 누나  *작곡 H-Team / 작사 한민준

제목만 보면 누나 팬들에게 전하는 노랫말 인 것 같지만 파란만장했던 나혜리의 좌충우돌한 사건을 이야기하며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가사였다.

나유정은 진짜로 나라를 잃은 것 같이 혼자 집에서 가슴 절절하게 눈물, 콧물을 쏟으며 연기를 했다. 그녀는 제우스의 신규 앨범을 가슴에 얹고 몸을 웅크리며 미친 듯 오열했다.

'와! 진짜 미쳤네. 저게 바로 메소드 연기라는 건가? 뭐 거의 빙의잖아? 아 빙의할 필요가 없구나. 본래 자신의 모습인데 뭐···.'

나는 어쨌거나 그녀의 연기력에 압도되고 말았다. 아마 나뿐만 아니었을 것이다. 주위의 스태프들도 그녀의 가공할 연기력에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다들 촬영이 끝나고 나서 한마디씩 했다.

"괜히 대배우가 아니네···"

"저번 베니스 영화에서 사실상 여우주연상이었다니까?"

"아까 유정 씨 연기 보다가 온몸에 소름이··· 후··· 대박이더라."

"나는 그냥 울었어. 눈물이 막 쏟아지더라고···."

드디어 마지막 신을 촬영하고 있었다. 서울 가요대상 시상식이었다. 우연히 시상을 맡게 된 나유정은 시상식에서 제우스에게 최고 인기상을 수여하게 되는데···.

오랜만에 본 한민준은 역시나 눈부시도록 멋졌다. 그의 화려한 외모에 시선을 빼앗긴 여배우 나혜리.

상을 수여하고 카메라가 다른 곳을 비추는 동안 한민준이 나혜리 옆에서 담담하게 입을 연다.

[누나. 이제 매니저로 다시 돌아오면 안 돼? 훗···.]

나혜리의 눈이 충격으로 물들고··· 몇 개월 전으로 시간이 되돌려진다.

항상 그만둔 매니저를 생각하던 한민준은 급기야 이력서까지 뒤져 그녀를 찾아 나서기 시작하고··· 나혜리의 사촌 동생에게 자초지종을 듣게 되는데···

화려한 시상식장에서 나혜리와 한민준은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드디어 마지막 회 촬영이 끝났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스태프들과 테리우스 멤버들의 시원스런 인사를 끝으로 마지막 촬영이 공식 종료됐다.

김호진 PD는 종방연 대신 내일 회식이 있을 예정이라는 공지를 전했다.

그리고 슬기로운 덕질 생활은 시청률 21%를 돌파하는 신기록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TVM은 그야말로 경사가 났고 나유정은 신들린 씹덕 연기로 신드롬급 인기를 구가했으며, 테리우스는 히트곡만 없다뿐이지 인지도급에서는 강제로 남자 아이돌 1티어에 올라온 상태였다.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