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는 스타 작가님-25화 (25/263)

대배우가 준 퀘스트 (2)

나는 대배우님이 내려주신 퀘스트를 듣고 어안이 벙벙했다.

"유정 씨. 지금 '부부의 비밀' 같은 작품이라고 하셨어요? 제가 지금 잘못 들은 것 아니죠?"

"아주 잘 들으셨어요. 일주일 드리면 되나요? 아님 2주?"

허··· 무슨 대본이 게임처럼 미션을 주면 뚝딱 나오는 줄 아나.

어이가 없어서 한마디 해주려다가 그녀가 왜 이렇게 떼를 쓰는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이 작가! 부부의 비밀! 속편 써줄 거에요. 말 거에요?"

"갑자기 그런 걸 요구하는 저의가 뭡니까?"

"저의요? 그런 거 없어요."

목소리가 살짝 작아지는 것을 보니 뭔가 켕기는 구석이 있나 보다.

"잠시만요."

'흠···. 불륜녀 한초연 역할을 하고 싶다라···. 그 역을 연기한 배우 이름이 뭐였더라. 김다연이었던가?'

나는 검색사이트를 띄우고 나유정, 김다연을 입력한 후 엔터를 눌렀다.

'역시! 그랬군. 친구였어. 설마 친구 따라 강남 가려고 하나? 그런 건 아닐 텐데···.'

나는 이런 촉이 좋은 편이다. 어렸을 때부터 국어 선생님인 아버지를 따라 독서 조기 교육을 받아서 그런지 스토리 초반부를 보고 후반부를 추정한다거나, 후반부의 충격적인 반전까지 꽤 잘 감지해냈다.

그래서 전 여자친구와 영화관에 갔다가 뒤에 스포일러를 말하고 등짝을 얻어맞곤 했다. 적중률이 상당히 높았기 때문이었다.

검색된 웹페이지와 이미지들을 살펴보니 둘이 사이좋게 찍은 사진이 검색됐다. 교복을 입고 브이 자를 그리고 있는 것을 보니 동창이거나 학창시절 사귄 친구가 아닌가 싶었다.

'옆에서 지켜봤지만 두 달간 연락을 하거나 만난 적은 없는 것 같고···.'

"뭔가 구린내가 나는데···."

"구, 구린내라뇨! 단어 선택하곤··· 작가가 저급하기는?"

나는 살짝 눈을 흘기며 그녀를 위아래로 쓱 훑어봤다. 참 편안한 복장이다.

"써줄 거에요. 말 거에요? 아직 답변 안 함."

"봐서요. 생각 좀 해볼게요. 얼른 씻고 옷 갈아입으세요. 오늘 오후에 촬영 있잖아요.""

"치···. 알았어요. 준비할게요."

욕실로 후다닥 사라지는 그녀를 보며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떠올렸다.

지금까지 가장 확률이 높은 시나리오는 흔하디흔한 클리세일 것 같았다. 친구로 위장한 경쟁자. 몰래 뒤에서 그녀를 욕하고 그녀가 불행한 일을 당한 사이 반사이익을 보는···.

'쯧···. 아님 말고...'

* * *

촬영장에 도착해보니 테리우스 녀석들이 거의 퍼져있었다. 어제도 늦게 끝났는데 새벽부터 샵에 들려 무대 의상과 메이크업을 하고 오전 타임에 팬들과 함께 무대 촬영을 마친 것 같았다.

사실 나도 애들의 의상을 입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이 무대의상이라는 게 평상복과 비교하면 상당히 불편했다. 두꺼운 무대 메이크업은 말할 것도 없이 답답했다.

"어이! 이 녀석들···. 연기 연습도 안 하고 농땡이나 치고!"

"원흉이다! 우리를 수렁에 빠트린 장본인이 왔다."

영관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내 멱살을 또 틀어쥔다.

"컥··· 이거 안놔. 박영관. 네 연기가 수렁이다. 인마. 너 팬클럽에 올라온 본방 사수 리뷰 봤어?"

".........."

"너만 따로 논다잖아. 물 위에 뜬 기름처럼 말이지. 그런 말 못 들었어?"

"괜, 괜찮다고 하던데?"

"너 앞에 붙은 말은 왜 빼는 거냐? 생각했던 것 보다는! 어? 생각했던 것 보다는 이라는 말은 왜 빼느냐고!"

"그, 그게 칭찬 아냐?"

"넌 대사 좀 까야겠다. 영관이 대사를 좀 까서 훈이를 줘야겠어."

의자에 앉아있는 김훈을 슬쩍 보니 그는 손으로 이마를 짚고 실눈을 뜨고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형! 훈이는 연기력이 더 쓰레기잖아. 그래도 내가 낫지."

"그래 약간 나은 것 같은데 도찐개찐이지. 오십보백보, 거기서 거기!!"

"에헤이! 그건 오바지. 형이랑 나랑 같은 20대지만 7살 차이잖아. 어떤 메울 수 없는 간극같은게 존재하걸랑? 훈이랑 내 연기는 그 정도 차이야."

"그 메울 수 없는 간극은 너랑 연준이랑 연기력 차이를 논할 때 쓰는 단어야."

"쟤는 그냥 얼굴로 연기하는 애잖아. 나는 순전히 연기력이고···."

"형! 나는 얼굴로 연기하는데 형은 왜 발로 연기해요?"

한연준의 불꽃 크로스 카운터가 작렬했다.

"뭐 인마? 발연기는 훈이랑 이든이지. 병풍 중의 병풍."

"아우! 형... 아까 커피 마시러 간다며? 시끄럽게 하지 말고 애들 데리고 좀 나가! 나 잠깐 눈 좀 붙이게···."

"그, 그래.. 저 시키 오늘따라 저기압이네. 얘들아~ 구내 카페 가서 라떼 한잔하고 오자."

리더 영관이 멤버들을 달고 카페로 향하자 빈 회의실에 나와 김훈만 남게 되었다.

"형은 안가?"

"어 난 아까 오면서 별다방꺼 마셨어."

"거기 들렸으면 내 것도 좀 사 오지."

".........."

둘 다 아무 말을 안 하니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쭉 늘어져 있는 게 어째 이상하다. 평소에 이런 녀석은 아닌데 말이다.

항상 '안녕하세요. 훈훈한 남자 김훈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라는 멘트로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는 바른 이미지의 훈남 청년이었다.

"연기 힘드냐?"

"야니. 대사도 별로 없는데 뭐."

"그런데 왜 그렇게 축 처졌어?"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 피곤하긴 하지. 연속 며칠 강행군이냐. 멀쩡한 게 이상한 거지."

".........."

"너 결국 복면 가요왕 안 나간다고 했다며?"

"들었구나? 김 실장님이 이야기하지? 혹시 형 보고 나 설득하래?"

약간은 건조하게 내뱉는 말투였다.

"어. 너 좀 설득해 보라고 하더라. 그래서 왜 그런 것까지 내가 직접 해야 되냐고 대들었다."

김훈은 내 말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또 한숨을 쉬었다.

"형. 어쩌려고 그래? 김 실장이 짜증 나긴 해도 회사에서 힘이 없는 사람은 아니잖아. 매니저 그만둘 거야? 아예 작가로 나서려고?"

"글쎄?"

"그럼 뭔데? 요즘 왜 그렇게 들이박고 다녀?"

그래도 아무리 기분이 나빠도 나를 걱정해주긴 한다. 역시 무명의 거센 파도를 같이 넘어온 의리는 있는 놈들이다.

"내가 뭘 들이박고 다니냐. 그냥 하고 싶은 말 하고 살기로 했다."

"다른 애들은 몰라도 나는 못 속여. 형 이제 매니저에 미련 없지?"

"그렇게 보이냐?"

"아니 잘 모르겠어. 그런데 그런 낌새가 약간 느껴져. 뭔가 준비하고 있구나. 그 정도?"

"실제로 뭐 계획하고 그런 거 없어. 그냥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하고 살려고···. 인생 뭐 있냐? 그리고 내가 너희 1티어로 올라가기 전까지는 그만 못 두지. 그 개고생을 했는데···."

"그래서 드라마 작가로 강제로 각성해서 우릴 여기 쑤셔 박은 거에요?"

"박긴 뭘 박어? 누가 들으면 내가 흑막인 줄 알겠다. 너 인마 이런 게 다 피가 되고 살이 된다. 나중에 나이 좀 먹고 군대 다녀와서 솔로라도 하면 혼자 뮤직비디오에 출연할 수도 있잖아. 거기서도 발연기 할래?"

그는 잠깐 말없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쯥··· 저놈의 군대 드립. 때가 되면 어련히 알아서 갈 텐데···."

나는 미간을 찌푸리는 훈이를 보며 말없이 미소만 짓고 있었다.

"형. 나중에 나 독립하면 나 매니저 해주라."

"너 하는 거 봐서 인마. 연기나 좀 신경 써봐. 아무리 재능이 없어도 노오력 하면 다 된다고!"

"여보세요. 꼰대세요? 죄송한데요. 민폐는 안 끼칠 테니 걱정 마요."

"짜식···. 솔로 독립할 생각도 있으면서 복면 가요왕은 왜 안나가? 혹시 어디 아프냐?"

김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몰라. 아픈 건 없는데···. 요즘 노래가 잘 안 돼. 라이브에서 높은음 부르면 플랫 되고 솔직히 음방에서 불안해. 티 날까 봐."

"너 얼굴 하나도 안 보고 노래만 보고 뽑은 앤데 노래가 그러면 어디다 써먹냐?"

"아이씨···. 내가 안 그래도 그 말 할 줄 알았어. 얼굴 가지고 그만 좀 놀리시지? 나 요즘 집에서 용 됐다고 난리라고. 드라마 1화 나간 거 보며 우리 엄마 쓰러지시고 누나들도 펑펑 울었대."

"구라 적당히 쳐라."

"구라겠어? 진짜야."

"하이고 우리 김훈이 강원도산 못난 감자! 촌티 줄줄 났었는데 맞지?"

"무슨 소리야? 원주에서는 나름 얼짱이었다니까!"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신인개발팀에서 노래만 듣고 무작정 뽑은 인재였는데 데뷔 후 카메라 마사지를 받고 꽤 훈남으로 진화(?)한 상태였다. 비주얼 3인방(연준, 창민, 이든)에게 치어서 그렇지 나름 괜찮은 수준이었다.

나는 혹시 몰라 아우라 스카우터를 한번 켜봤다. 그의 몸에서 붉은 아우라가 여전히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우라는 여전한데···. 왜 노래가 문제라는 건지 모르겠네.'

나는 그냥 무심결에 스카우터를 끄려다가 문득 훈이의 파장이 연준이와는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의 아우라의 밑부분이 약간 흐릿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점멸을 하는 것처럼···.

'어라? 혹시···. 저게 무슨 신호 아냐'

"너 목은 진짜 괜찮은 거냐? 평소에 연습 많이 했잖아."

"괜찮은데···. 목이 아프다거나 그런 느낌은 없었어. 요즘 그냥 컨디션이 안 좋은 것 같아."

뭔가 심상치 않았다. 분명 무언가 안 좋은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내 불안한 예감은 항상 틀린 적이 없었으니까. 여자친구가 헤어지자고 한 날도 미리 눈치를 챘던 나였다.

아우라가 위태롭게 흔들리는 건 그의 재능도 위험에 처했다는 뜻일 수 있었다.

'이건 좀 더 조사를 해봐야겠어. 가만히 놔두면 큰일 날 수도 있겠다.'

* * *

오후 촬영이 시작되었다. 드라마 촬영은 거의 후반부에 접어들고 있었다. 나혜리(나유정)의 인맥, 도움, 아이디어 등으로 드디어 음방 1위에 오르는 남자 아이돌 제우스였다.

김호진 PD는 여전히 거의 기계처럼 정확하게 장면을 나눠 촬영하고 효율적인 동선으로 하나하나 신들을 처리해 나갔다.

지금 노을이 지는 저녁 신은 나혜리와 한민준의 러브 라인이 그려지는 장면이었다. 한민준이 호감을 느낀 나혜리에게 고백하는 장면이었다. 한민준이 나혜리의 등을 보고 있었고 나혜리는 두손을 가슴에 모으고 있었다.

"누나. 나 좀 봐. 중요한 시기에 나 이러면 안 되는 거 알거든? 그런데 이 말은 꼭 해야겠어. 나 누나 좋아하는 거 같아. 정말이야."

한연준의 실감 나는 연기였다.

하지만 나혜리는 여전히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카메라가 그녀의 얼굴을 비치자 나유정은 눈물, 콧물을 글썽이며 훌쩍이고 있었다.

자신이 입덕했던 아이돌에게 사랑 고백을 받아 기쁜데 그녀는 다음 주면 회사를 관두고 다시 여배우에 복귀해야 하는 상황!

나혜리는 여배우를 관두고 정말로 기획사에 취직을 해야 되는지 심각하게 갈등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로맨틱 코메디의 요소를 지니고 있는 작품들이 그러하듯. 일단은 헤어져야 했다.

"미, 미안해. 민준아. 누, 누나는 파렴치하게 그럴 수 없어. 넌 내 연예인이고, 난 매니저니까. 흐윽..."

나유정은 정말로 나혜리에 빙의라도 한 것처럼 눈물 콧물을 질질 짜고 있었다. 손등으로 흘러내리는 눈물과 콧물을 계속 훔치고 있었다.

'하이고··· 저거 또 흑역사네. 방송 특집에서 한 100번은 넘게 나올 장면인데?'

그렇게 촬영이 밤까지 이어졌다.

시간은 흘러 목요일 오후 9시 슬기로운 덕질 생활 2화가 방송됐고 시청률은 18%를 돌파했다. 그야말로 쾌속의 진격이었다.

빵구만 안 내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TVM은 난리가 났고 나유정은 최강 씹덕 연기의 아이콘이 됐으며, 테리우스의 남자 아이돌 브랜드 평판 그래프는 급격히 우상향을 찍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나유정이 내준 퀘스트를 수행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컴퓨터 앞에 앉아 계속 고민 중이었다.

"오랜만에 원조 쿠폰루팡의 실력을 한번 보여줄까? 흐흐··· 막장이 뭔지 제대로 약빨고 써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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