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는 스타 작가님-24화 (24/263)

대배우가 준 퀘스트 (1)

헌터물을 밤새도록 읽어 버린 여배우 나유정!

나는 소파 위에 죽은 듯 눈을 감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래서야 오늘 아침에 촬영장에 가는 건 무리겠는데?

오늘은 나유정이 아침 일찍 가서 라이브로 꼭 보고 싶어 했던 테리우스의 공연을 촬영하는 날이었다.

굳이 나유정이 없어도 상관없는 장면이었다. 스태프 측에서 어제 늦게 촬영이 끝난 배우들을 위해 오전 스케줄을 비워준 것이다. 대신 어쩔 수 없이 일찍부터 촬영을 해야 하는 테리우스는 죽을 맛일 거다.

이미 준비된 뮤직넷 음악방송 무대를 사용하려면 가장 이른 시간이거나 가장 늦은 시간밖에 없었다.

소파에 죽은 듯 널브러진 나유정을 보자 한숨이 나왔다.

그게 뭐라고 밤을 새워서 보다니···. 그것도 뻔한 클리세 범벅인 흔하디흔한 양판소 헌터물을!

아···. 물론 그걸 쓴 나는 그냥 욕을 좀 얻어먹으면서 꿀을 빨긴 했다. 욕은 실컷 먹었지만 여러 타 플랫폼까지 돌리며 최고 수익을 올려줬던 그 애증의 작품.

갑자기 그 당시 생각이 났다.

연재 당시 하루에 2~3편 정도는 뚝딱 써놓고 워라벨을 즐겼지만, 공식에 맞춰서 쓰면서 너무 재미가 없어서 한편으로는 괴로워했던 작품이었다.

항상 괴작을 남발하던 나로서는 정신적으로는 전혀 만족할 수 없었던지라 디씨아웃사이드 웹소설 연재 갤러리에서 푸념을 늘어놓으며 거의 상주하다시피 했다.

[게시물 : 훈타물 쓰고 자괴감 오진다.]

처음으로 헌터물을 썼다. 예전 작품과 달리 선호작이 팍팍 늘었고 그 결과 유료화도 했다. 대박은 아니고 스타트는 5,000 정도였고 평균 구매수 2,500쯤? 달동네에서 월 300~400만 원 정도 정산해준다. 타 플랫폼 수익은 제외야.

스트레스가 와서 이것저것 많이 샀다. 노트북도 바꾸고 옷도 사고 여자친구 선물도···. 사줄려고 했는데 어라? 여친이 없네? 사실은 훈타물 쓰기 전에 헤어졌다. 계속 망했거든.

물론 그 전에 유료화를 못한 건 아니야. 유료화를 가도 거의 최저 시급 아르바이트 수준이었지. 집에서 그러고 있으니 살도 찌고 여자친구도 한심하게 생각하는지 헤어지자더라.

헤어짐의 충격으로 마음을 고쳐먹고 헌터물을 써서 어느 정도 돈은 벌었지만 정작 쓰는 나는 너무 재미가 없어서 이거 계속 해야 되나 싶다. 지금 200화 정도 연재 중인데 얼른 완결 짓고 다른 거 쓰고 싶네.

[댓글]

- 월 3백 이상이 뉘 집 개 이름이냐? 망생이는 운다.

- 너 찢어져야 사는 헌터 작가구나? 나름 군더더기 없이 잘 썼던데? 물론 무료 부분만 봤다. 요즘 헌터물 너무 물렸다.

- 자까님이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시다니! 하차합니다!!

- 부럽다. 글로 월 백 정도만 벌면 소원이 없겠다. 투베 못 들어서 지금 몇 번째 뒤엎고 다시 쓰는지 모르겠다.ㅠㅠ

- 위에 있는 놈 보거라. 여기 있는 거 보니 앞으로도 그른 듯. 상하차나 해라.

- 너 순문에서 넘어온 놈이지? 정신적인 만족감을 얻으려면 본업하면서 취미로 글을 쓰던가. 너 꼴리는 데로···

- 야. 장르 문학이 쉽게 보이냐? 우연히 하나 터트린 주제에. 내가 너 같은 애들 많이 봤는데 결국 만족 못 하고 다시 본업하면서 취미로 글 쓰더라.

- 순문 갬성 버리지 않으면 힘들 거다. 웹소 보는 사람들 어차피 뇌를 비우고 대리만족이나 느끼려고 보는데···. 순문 감성이 맞겠어?

- 찢어져야 사는 헌터 작가라면 조금 더 문체를 간략하게 할 필요가 있겠더라. 플롯은 깔끔하고 전개가 빠른데 문장을 보면 순문충 같음.

그랬다. 나는 순문학도 장르문학도 아닌 경계선에 살짝 걸친 박쥐와 같은 존재였다. 순문을 하자니 재능도 별로 인 것 같아 굶어 죽을 것 같았고, 철저하게 장르로 가자니 정신적 만족감이 안 느껴졌다.

"으으음..."

나유정이 소파가 불편한지 끙끙대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우···. 뭔 생각이냐? 난 이제 예전하고 달라. 순문이건 장르건 둘 다 잘 쓸 수 있다고···.

나는 나유정을 힘으로 들어 올려 안방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편히 잠을 잘 수 있도록 커튼을 치고 안방 문을 닫아줬다.

그녀는 도중에 살짝 깼지만, 글을 읽느라 날을 세워 정신이 몽롱한 것 같았다.

회사에 연락해서 나유정 씨가 피곤을 호소해 오전에 휴식을 취하기로 했고 오후에 촬영장으로 데려간다고 보고했다.

갑자기 오전 시간이 프리해졌네?

나는 불현듯 내가 쓴 헌터물의 줄거리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만큼 공식에 맞춰서 대충 썼다는 의미일 것이다. 아니 사실은 쓰면서 나를 괴롭혔던 자괴감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머릿속에서 지우려 했을런지 모른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해보니 이런 식의 생각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 깨닫게 되었다.

세상에 쓸모없는 글은 없다.

심지어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순수하게 취미로 글을 쓰더라도 최소한 쓰는 사람에게는 만족감을 줄 수 있는 법이니까.

나는 사회생활의 고단함을 깨달으며 순문학의 선민의식을 버렸고, 현실의 팍팍함을 잊기 위해 웹소설을 쓰며 더는 자괴감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유정 씨를 재우고 소파에 앉아 나의 이전 작품인 헌터물을 다시 읽어보기 시작했다.

[찢어져야 사는 헌터!]

주인공은 각성한 D급 헌터였다. 포지션은 탱커.

D급 능력자라 직접 몬스터와 싸우는 길드에서는 찾지 않지만, 완전 몸으로 때우는 하급 헌터도 아닌 이른바 회사나 공무원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인 애매한 급수의 헌터였다.

주인공은 어느 정도 공부도 잘해 각성자로 국내 굴지의 화학 회사에 신규원료 조달팀에 입사하게 된다. 부서원(딜러, 힐러)을 거의 대부분 여성으로만 뽑은 팀장이 탱커로 입사한 남자 주인공을 괴롭히며 원료 조달을 위해 위험한 곳으로 보내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주인공은 위기를 겪지만, 자신의 히든 클래스  벌거벗은 전사 를 각성하고 마는데···. 옷을 벗어야만 본신의 능력이 발휘되는 변태 탱커 클래스였던 것이다.

첫 번째 게이트가 열린 First Impact 때 공중목욕탕에서 목욕하다가 괴물과 마주쳤고 알몸인 상태로 고블린을 목 졸라 죽여서 얻은 히든 클래스였다.

[띠링~ 인류 최초! 당신은 알몸으로 고블린을 처치하였습니다. 보상으로 히든 클래스가 부여됩니다. 벌거벗은 전사 Level1]

하지만 크게 다치고 실신하면서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만 것이다.

나름 기업물 + 헌터물 + 코믹 요소를 적절히 섞은 밸런스형 수작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작품이었다.

워낙 괴작으로 유명한 작가라 아예 맛도 보지 않고 거른 사람들이 많았고 그 당시 달동네가 카오스페이퍼와 냉전 중이어서 평가에 비해 수익도 덜 나온 작품이었다.

"훗···. 다시 읽어보니 웃기네? 이거 나름 괜찮은데?"

천천히 처음 부분을 읽어보던 나는 계속해서 피식거리면서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술술 읽히네..."

이 찢어져야 사는 헌터는 웹소설계의 레전드 에프다트님의 술술 읽히는 문체를 흉내 내려고 했던 작품이었다. 물론 노력만 했지 순문충의 냄새가 짙게 깔린 작품이긴 했다.

나는 비로소 왜 나유정이 날을 세고 이걸 계속 봤는지 이해했다.

웹소설을 처음 보는 사람은 이런 양산형에 가까운 형태의 헌터물도 신선한 법이다. 처음 보는 신기한 스토리에 글까지 쭉쭉 읽히니 잠을 도저히 잘 수 없었으리라.

"이거 나름 웹툰으로 만들어도 괜찮겠다."

나는 나유정의 상황을 이해하고 달동네 앱을 종료했다. 글을 쓸까 하다가 남의 집에서 작업이 잘 안될 거 같아 생각을 접었다. 그냥 TV나 보기로 했다.

TV를 켜보니 나유정이 보고 있는 작품들 목록이 주르륵 떴다.

"부부의 비밀이라···. 이런 거 좋아하나?"

나는 대충 내용은 기사를 통해 알고 있었다.

부부의 비밀은 최근 JTVC에서 방영해 28%의 높은 시청률로 종영한 드라마였다.

그야말로 신드롬에 가까운 열광적인 반응을 끌어낸 작품으로 행복하기만 했던 결혼 생활은 모두 다 위선이었고 주인공을 제외한 주변인들이 모두 주인공을 속이고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다는 충격적인 내용의 드라마였다.

JTVC는 이 작품을 과감히 성인용 드라마로 편성했다. 상당히 자극적인 내용 위주로 중장년층을 겨냥한 작품이었고, 결국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얼마나 재미있길래 그 난리였는지 소파에 앉아 1화를 클릭해 드라마를 시청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바로 충격적인 설정과 배우들의 연기에 빠져들고 말았다.

와! 스토리랑 연기 뭐야. 대박이네. 미쳤잖아? 저 주연 여배우 예전에도 연기력 하나는 끝내줬었는데 몰입감 대박이네.

연달아 3편을 보니 나유정이 깼는지 안방 문을 열고 거실로 비적비적 걸어 나왔다.

"뭐해요? 으으···."

그녀는 몸이 뻐근한지 팔을 들어 기지개를 켰다. 상의가 위로 올라가며 귀여운 배가 드러났다.

어이 어이~ 유정 씨 배꼽 보인다고.

나는 민망한 나머지 시선을 슬쩍 TV로 돌렸다.

"심심해서 드라마 봤어요."

"에? 이걸 아직도 안 봤어요? 드라마 작가 맞아요?"

"웹소설 작가입니다만···."

"웹소설 작가 겸 드라마 작가잖아요."

나는 그녀의 화장기 없는 얼굴을 보고 씩 웃었다.

"아니요. 웹소설 작가 겸 나유정 매니저죠. 드라마는 그냥 유정 씨 때문에 얻어걸린 거고···."

".........."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표정도 화난 거 같기도 하고 기쁜 것 같기도 하고···. 뭔가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갑자기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하하···. 드라마 작가라고 하기엔 좀 머쓱하네요."

나는 이 상황을 깨기 위해 아무 말이나 했다.

"지금 나 맥이는 거죠? 자꾸 내 취미 걸고넘어지면서?"

"아니에요. 저도 걸그룹 마니아라니까요?"

"아니요. 아닌 거 알아요. 그냥 노래만 듣잖아요."

그녀는 검지를 좌우로 흔들며 내 말을 일축했다. 솔직히 말해서 그녀의 말이 맞다. 난 그녀 정도의 중증 마니아는 아니었다. 그냥 라이트 한 삼촌팬 정도?

"분명 웹소설 작가 겸 나유정 매니저라고 했죠?"

"그렇습니다만?"

"매니저라면 무엇을 해야 될까요?"

"글쎄요. 현장 매니저니까 스케줄을 차질없이 수행할 수 있도록 운전하고 심부름도 하고 결국 도와주는 일을 하는 거죠."

"그걸로 됐습니까? 이준형 씨? 자신을 그냥 현장 매니저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큼... 그럼···. 스케줄 관리, 홍보, 섭외, 계약 같은 것까지 하는 실장 같은 역할?"

"그 정도는 지금도 하고 있죠. 저를 드라마에 섭외했으니까."

"좀 더? 하이 레벨? 230만 원 주면서 너무 부려 먹으려고 하네."

"지금 돈이 문제가 아니잖아요. 진정한 매니저라면 내가 관리하는 배우가 어쩐 일을 하고 싶은지! 어떻게 해야 잘 나갈지! 고민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말은 엄청나게 잘하네요? 그런데 내가 무슨 보모라도 됩니까?"

나는 나유정이 이렇게 말을 길게 하는 것을 처음 봤다.

"어쨌거나 제 매니저라면 저를 위해서 일하는 게 맞겠죠?"

"그거야 뭐 당연한 소리를···."

"오케이. 준형 씨가 이 드라마를 보고 있으니까 진짜 매니저다운 임무를 하나 드리죠."

"또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려고..."

"왜요? 자신 없어요?"

그녀가 허리춤에 손을 얹고 눈썹을 치켜떴다. 끼고 있는 안경에 지문이 잔뜩 묻어있었다.

허허···. 뉘 집 아가씨인지 고것 참 귀엽네. 그래 뭐 들어준다 들어줘.

"진정한 매니저의 업무라면 들어주는 게 인지상정!!"

나는 포켓볼 몬스터에 나오는 악당들의 대사를 인용하며 뎁스 자세를 취했다.

"첫 미션은···."

얼굴에 미소를 띠며 눈웃음을 흘리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부부의 비밀 같은 작품을 써오세요."

"에? 뭐라고요?"

나는 지금 뭐 잘못 들은 게 아닌가 하고 두 눈을 껌뻑였다.

"나 한초희 같은 역할을 진짜로 해보고 싶어요. 진정한 나유정의 매니저라면 가능하겠죠?"

자기도 말을 하고 민망한지 웃음을 참는 그녀를 보니 괜시리 웃음이 나왔다.

허허···. 이 아가씨가 점점···. 내가 무슨 대본 자판기인 줄 아냐?

졸지에 부부의 비밀 후속편(?)을 쓰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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