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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매니저는 스타 작가님-23화 (23/263)

슬기로운 덕질 생활 (4)

나는 얼굴이 빨개진 나유정을 더 놀려주고 싶었지만 참기로 했다. 내가 보기엔 나유정은 정말 외롭고 순수한 사람이었다.

2개월 남짓 관찰해봤는데 친구라고 해봐야 연배가 자기보다 높은 작가 몇 명이 다였다. 나중에 물어보니 잘나가던 아역 시절 어머니의 과한 통제로 같은 나이 또래의 친구를 사귀지 못했다고 했다.

"유정 씨. 집에서는 덕질 말고 다른 건 뭐 하세요?

"꼭 덕질이라고 해야 돼요? 그거 어감이 안 좋은데··· 전 지금 드라마 제목 별로예요."

"덕질 말고 뭐하시냐니까요?"

"이...씨··· 영화나 드라마를 주로 봐요. 최근에는 넷플릭에 있는 웬만한 드라마들은 다 봤어요."

"와··· 그거 엄청 많을 텐데요?"

"꾸준히 보는 거죠. 대부분 그저 그런 평작들이 많은데 가끔 하나씩 흥미로운 게 걸려요. 요즘은 국내 드라마도 엄청 많이 올라와서 좋던데···"

하긴 넷플릭에서 한국 컨텐츠의 인기가 심상치 않다. 거대한 인구가 있는 아시아권에서는 거의 맹주나 다름없는 실정.

그렇다 보니 넷플릭에서도 한국 기업들과 공조를 하고 제작비를 대거 지원해 오리지널 작품도 심심치 않게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결과는 보시다시피 엄청난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는 작품까지 등장했다.

특히 '좀비 킹덤'은 1시즌의 흥행 성공을 바탕으로 2시즌까지 전 세계에 성공리에 방영되고 있었다.

최근 CA미디어의 '사랑의 불시착륙'까지 미국 넷플릭스에서 시청률 Top 10에 드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이제는 컨텐츠만 잘 만들면 전 세계적으로 흥행시킬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 것이다.

"일 마치시고 친구는 안 만나세요?"

".........."

나의 질문에 그녀가 입을 꾹 다물었다. 뭔가 잘못 말한 건가 싶어 추가로 한마디 했다.

"흠... 저는 친구 안 만납니다. 글을 써야 하거든요. 뭐 물론 회사 들어오고 나서는 친구도 다 끊겼지만···."

창밖을 바라보던 나유정이 내 말을 듣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동족이라고 생각한 걸까?

"......저는 친구들을 주로 낮에 만나요. 대부분 밤에 일하는 분들이라···. 저번에 최 작가님 보셨죠? 주로 작가 선생님들하고 친하게 지내고 있어요."

나는 그녀의 말에 더는 깊이 묻지 않았다. 굳이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최 작가 같은 사람과 친구라고 하니 당연히 동년배의 또래 친구는 없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남자 친구는 없으세요? 유정 씨 정도면 남자배우들이 일렬종대 헤쳐모여 일 것 같은데요?"

아마도 내가 미소를 짓는 게 미러로 보였을 것이다.

"풋..."

그녀는 나의 유치한 농담에 실소했다. 가라앉았던 기분이 약간 풀어진 것처럼 보였다.

"후··· 그건 노코맨트 할게요."

그녀의 얼굴을 보진 않았지만 대충 짐작이 가능했다.

저렇게 아이돌에 빠진 것을 보면 아직 제대로 된 사랑을 해본 적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나유정은 상대 남자 배우들이 대쉬를 했을 것 같은 외모였으나 그녀가 왕성하게 활동하던 당시 그녀의 어머니가 엄격하게 스케줄을 관리했다고 알려졌었기 때문에 누군가와 마음껏 사귀거나 그러진 못했을 것이다.

'아냐. 남북한 국경을 넘어서도 사랑하는데 뭘. 경험이 있을지도 누가 알겠어.'

"아···. 인기인은 부럽네요."

대쉬 했던 남자가 많았을 것 같다며 적당히 기분을 맞춰주는 말을 하고 리어 미러로 유정 씨의 표정을 살펴보니 내 말을 듣고 피식하기만 할 뿐 눈빛은 담담하기만 했다.

"유정 씨 우리 드라마가 케이블 방송 말고 넷플릭에 올라가는 거 아시죠?"

"알아요. 생방송 끝나면 올라오던데요."

"유정 씨 이러다가 한류 스타 되시는 거 아닌가요? 아무리 영화에서 연기로 인정받으셨지만, 영화랑 드라마가 또 다르잖아요. 대부분 한류 스타들이 드라마로 뜨기도 했고···. 솔직히 유정 씨가 예전에 활약하던 시기의 드라마는 한국에선 인기였지만 중국의 한한령도 있었고 일본하고 사이가 꽤 안 좋아서 해외에서 주목을 못 받았잖아요."

"쉬기 직전에 찍었던 중국을 노린 드라마가 진짜 크게 망했었죠."

"아···. 그거 기억나네요. 광고는 진짜 많이 했었는데...."

"제 필모그래피 중 유일한 오점이자 흑역사에요."

"그래도 저는 뭐 그럭저럭 괜찮게 봤었어요. 블록버스터급이기도 했고 약간 웹소설 감성이라 나름 신선했는데···."

"작가님도 처음 쓰신 작품이 대박 나서 기분 좋으시겠네요?"

"저요? 드라마야 처음 쓰지만, 글을 쓴 지 10년은 넘었습니다."

"정말요? 뭐 쓰셨는데요? 알려주세요."

"굳이 의례적으로 안 그러셔도 됩니다. 평소에 웹소설 쪽은 관심도 없으시고 안 보시잖아요?"

"지금부터라도 보면 되죠."

"그냥 연기나 열심히 하세요."

"그러지 말고 좀 알려줘요. 진짜 궁금해요."

나유정은 진짜로 궁금한지 상체를 앞으로 숙이고 리어 미러를 똑바로 쳐다봤다.

'윽... 데일리노블의 '세상을 멸망시킬 나의 악인'은 안돼. 19금이라 민망하다고···."

내가 대답이 없자 그녀는 손을 뻗어 내 옆구리를 꼬집기 시작했다.

"으, 으악... 아, 아파요."

"얼른 알려줄 때까지 계속 꼬집을 거에요."

"사, 사고 나요. 제주도 둘레길도 아니고 저승 가는 황천길을 나란히 산책하고 싶어서 그래요?"

"얼른 알려달라고요! 어서요!"

"시, 싫어요."

"이 씨··· 난 연예인이고 넌 매니저야."

"푸훗···. 아, 알았어요. 알려드릴게요."

내가 어이가 없어서 항복하자 그때야 꼬집던 손을 떼는 나유정이었다.

"방금 그거 개그 친 거였어요?"

"뭐가요?"

"뭐긴 뭐에요. 예전 드라마에 나온 '난 선생이고 넌 학생이야.' 그거 응용한 거잖아요. 요즘 케이블에서 그거 재방송해요?"

"·········."

나유정은 아무 말 없이 눈을 흘기고 있었다.

"어우··· 그리고 무슨 손이···. 예전 초등학교 때 못난이 짝꿍이 꼬집는 것처럼 인정사정없네. 이거 멍들면 어떡하려고 그래요!"

"나한테 숨기지 마요."

"에? 그게 무슨?"

나유정이 나를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그녀는 화를 내도 참 예쁜 얼굴이었다.

"이제부터는 다 이야기 하시라고요. 나만 억울하잖아요. 나는 실제 내 생활이 매니저한테 탈탈 털려서 드라마화까지 됐는데···."

아···. 난 또 뭐라고. 순간적으로 뭔가 간질간질했다.

연애를 한 지 참 오래된 것 같아 기억이 가물가물한 나지만 아직은 감성이 살아 있는 것 같았다.

"크흠... 제 글을 어떻게 볼 수 있느냐면···. 스토어로 가서 달동네 앱을 검색해서 내려받으시고 찾기에서 연쇄폭참마를 검색하시면 작품이 3개 뜰 겁니다."

"지금 다운받고 있어요. 와! 신난다. 기대된다!"

"뭐가 그리 신나는데요?"

"몰라서 물어요? 작품에서 작가의 생각이 묻어나오는 거··· 평소 준형 씨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죠."

"난 그런 작품 잘 안 쓰는데··· 그냥 웹 소설이라고요."

갑자기 나유정이 손을 들어 내 말을 제지했다.

"쉿! 됐고요. 사실 그런 것보다는 거기에 악플을 잔뜩 달 수 있잖아요."

"악플을? 굳이?"

"작품이 도저히 수준 떨어져 읽을 수가 없다면 나유정의 댓글 지옥을 경험하게 될 거에요. 거의 멘붕이 올 때까지 아주 탈탈 털어드리죠. 뼈와 살을 발라··· 내가 소싯적에 별의별 악플을 다 당해본···"

"하하···. 무서운데요?"

"진짜 요즘은 연예기사에 댓글도 다 막혀서 진짜 좋아졌어요. 나 때는 말이죠."

나유정도 라떼를 참 좋아하네. 씁쓸했다.

"어디 보자. 연쇄폭참마. 연쇄폭참마라···. 찾았다. 작품이 3개네요?"

"진짜 보려고요? 웹소 스타일 안 맞으면 못 보실 텐데···."

"아무래도 제일 처음 썼던 게 제일 못 썼겠죠? 악플 달기 딱 좋겠네."

"거참···. 연기에 집중하셔야죠. 지금 그따위 웹소설이 문제입니까? 지금 한류스타가 되느냐 마냐 하는 판국인데?"

"전 그딴 거 필요 없어요."

".........."

그런 건가. 나유정은 한류스타 그런 거에 관심이 없나 보다. 한류스타를 그딴 거로 취급하는 호기로움.

'한류스타'

연예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꿔보는 타이틀이건만···. 왜 관심이 없는 걸까?

"자 어디 보자. 한번 읽어보고 악플을 한번 달아보실까나?"

"달긴 뭘 달아요. 샵에 다 도착했습니다. 내리세요."

"캬··· 준형 씨를 하늘이 돕네요. 일단 오늘 집에 가서 잔뜩 달아줄 테니 그리 아세요."

나는 그냥 그녀가 하는 짓을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때 썼던 글과 지금 나의 수준은 차이가 크다는 걸 알아줘야 할 텐데···.

'뭐···. 그냥 스트레스나 풀게 놔둘까?'

어차피 기존작들은 곧 계약 만료되면 두 작품 모두 비공개로 돌릴 예정이었다.

댓글 창에 욕설은 그저 무심히 지나쳐야 하는 오늘의 명언 같은 존재인 걸 이 숙녀분께서는 모르시는 것 같다.

지금 남아있는 제일 오래된 작품이 양판소 헌터물일 거다.

'그래. 유정 씨 이 기회에 실컷 스트레스 좀 풀어. 내가 고소는 안 할 테니까. 요즘 로또에 맞은 것처럼 관대해졌거든. 하하하.'

그렇게 나는 그녀가 단장을 끝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촬영장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 * *

촬영장에 도착해보니 배우들과 스태프들의 표정이 매우 밝았다. 특히나 연출을 맡은 김호진 PD의 얼굴이 확 펴져 있었다. 어제 오전까지만 해도 거의 죽상에 곧 응급실에 실려 갈 정도로 초췌했었다.

갑자기 시청률 뽕이라도 맞은 것처럼 그는 한 달 전의 그 쌩쌩한 김 PD로 돌아온 것이다.

"오··· 준형 씨 어서 와요. 어라? 유정 씨랑 또 같이 들어오시네?"

"오다가 만났습니다."

웬만하면 눈치를 챌 것 같은데 참 무심한 양반이다. 아직 내가 나유정과 테리우스의 매니저란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물론 내가 공식적으로 밝힌 건 아니다. 스태프들이야 이런 거에 관심이 많지 않지만 다른 배우들은 벌써 나와 주연배우들의 관계가 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물론 킹리적 갓심 정도?

뭐··· 알면 어떻고 모르면 어떠하리···

"PD님 축하드려요. 첫회 시청률 대박 났던데요? 근래 방영된 드라마 중이 아니라 거의 역대급 1화 시청률 아닌가요?"

"그거야 작가님이 대본이 좋아서 그렇죠. 내가 그날 밤을 새우고 다 읽었다니까. 이걸 어떻게 찍어야 하나 싶어서 잠이 안 오더라고요."

"그래도 잠은 꼭 주무셔야 해요. 큰일 납니다."

나는 시선을 옮겨 나유정을 바라보았다. 나유정도 슬기로운 덕질 생활 대본을 날 새서 봤었지.

그녀는 꼭 자신에게 하는 소리라고 생각했는지 인상을 살짝 썼다.

나는 열정적으로 연기하는 배우들과 그들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스태프들을 지켜보았다.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미소가 지어졌다. 모두 생기가 넘치고 있었다. 그리고 얼굴에는 다들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

잘된 작품은 배우와 스태프 모두에게 좋은 경력이 된다. 특히나 역사에 남을 역대급 첫화 시청률을 냈으니 이 기세를 이어간다면 TVM의 역대 시청률 순위에 들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

그렇게 밤까지 촬영이 이어졌고, 녹초가 된 나유정을 데리고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그녀는 매우 피곤했는지 시트를 젖히고 잠을 자고 있었다.

김호진 PD의 연출은 효율적이지만 쉬는 시간이 적고 컷이 많아 배우들이 집중력이 요구되는 스타일이었다. 경험이 많은 나유정이 저 정도라니··· 테리우스 애들은 죽어 나가고 있었다.

'그 정도로 하니까 벌써 후반을 찍고 있는 거지."

일정이 촉박한 것 같았는데 김 PD의 신들린 연출에 오히려 넉넉하게 여유가 생겨버린 것이다.

끼익···

"유정 씨. 다 왔어요. 일어나세요."

"으.. 으응? 집에 다 왔어요? 아으으으··· 꿀잠 잤다."

"짐 잘 챙기시고 들어가서 씻고 얼른 주무세요. 내일은 아침엔 테리우스 애들 공연하는 장면을 찍는다니까 잊지 마세요. 그거 라이브로 보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

나는 나유정이 엘리베이터로 사라지는 것을 본 후 집으로 향했다. 사람들이 힘을 내는 모습을 보니 나도 오늘 밤 글이 아주 잘 써질 것 같았다.

다음날···

나는 아침 일찍 차를 몰아 다시 마포에 도착했다. 도어의 비밀번호를 눌러 들어가니 나유정이 거실에서 다리를 딱 모으고 쪼그려 앉아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뭐야? 아침부터···'

그녀는 역시 편안한 복장에 안경을 쓰고 머리를 묶은 상태였다.

"유정 씨··· 뭐 하고 있어요? 에? 눈 밑 다크서클 실화? 이거 얼굴 왜 이래요?"

나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나는 나유정을 일으켜 소파에 앉혔다.

"잠 안 잤어요? 정신 차려요! 아이씨···. 오늘 촬영 어떻게 하려고!"

"으헝헝··· 너무 재밌어요. 악플 달려다가··· 그, 그냥 계속 읽어버렸어요."

나는 떨어져 있던 나유정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제목 : 찢어져야 사는 헌터 155화]

'엥? 이건 양판소 헌터물인데··· 이걸 날 새서 읽었다고???"

어이가 없어서 뒤를 돌아보니 소파 위에서 죽은 듯 눈을 감고 있는 그녀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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