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덕질 생활 (3)
하석우 실장은 대표의 눈에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어깨에 뽕이 과하게 들어간 것 같았다. 임원급도 아닌데 실장을 저렇게 칭찬한다는 건 차기 임원으로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직원들의 내부 평가였다.
'하 실장이 한 게 없지는 않지.'
소속사와 계약 만료가 되고 거의 은둔 상태였던 나유정을 삼고초려를 해서 데려온 것이 그였으니까. 그런데도 과하게 으스대는 모습을 지켜보니 쓴웃음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작품이 대박이 났지만 내 일상은 드라마틱하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나유정과 테리우스의 매니저였고 웹소설 작가였다.
다만 나는 더 당당해지고 마음이 여유로워졌다. 농담처럼 하는 근거 없는 자신감 따위가 아니었다.
심지어 나를 편애하는 배우 쪽 나우민 팀장은 나보고 로또에 당첨되었느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로또요? 저 그런 거 안 사는데요?"
"그래? 난 준형이 네가 요즘 바른말을 따박따박 하길래 혹시 로또 돼서 회사 때려치우려고 하는 게 아닌가 했거든."
잠시 생각해보니 내 능력을 로또라고 칭해도 무방한 것 같다.
"왜요. 사람들이 재수 없다고 욕해요?"
"아니 그 반대야. 너 요즘 별명이 뭔지 아냐?
"뭔데요?"
"사이다패스"
"으허허허...."
"얼씨구? 이놈 웃는 거 보니 뜻을 알긴 아나 보네?"
"알죠. 속 시원한 사이다 + 사이코패스의 합성어잖아요. 웹소설에서 발암 요소를 못 참는 독자를 일컫는 말이에요."
"아! 그게 웹소설에서 나온 거냐? 그건 몰랐네. 아무튼, 그냥 단어를 들어보면 요즘 너랑 어울려서 무슨 소리인지 대충 알겠더라."
"음···. 내가 그 정도였나?"
나는 나우민 팀장의 말을 듣고 나 자신을 돌아보았다. 괜히 뽕에 차서 다른 사람을 함부로 하고 그러면 인격이 덜 된 걸 증명하는 꼴이니까.
"괜찮아 인마. 넌 잘못한 거 없어. 너 같은 놈 하나 있어야 우리 회사도 개선될 거 아니냐."
"뭡니까. 형님은 뒤에서 콩고물이나 냠냠 주워드시고 저는 앞에서 그냥 총알받이나 하라는 건가요?"
"총알받이는 무슨···. 그냥 계속 그렇게 해. 김상효 그 짜증 나는 새끼 똥 씹은 표정 좀 보자. 그리고 네가 총알 맞고 쓰러지면 그때는 내가 구해주마."
"에? 팀장님이요? 무슨 힘이 있으시다고···."
"너 모르냐? 내가 나중에 독립해서 기획사 하나 크게 차릴 건데···. 너 자리 하나 줄게."
어이가 없었다. 술 취하면 꼭 나오는 레퍼토리인데 오늘은 멀쩡한 정신에도 당당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하이고···. 어느 세월에···. 살짝 기대한 내가 바보지."
나우민 팀장은 내 어깨를 꽉 잡더니 나를 보고 윙크까지 했다.
"뭐, 뭐하는 거예요."
"준형아~ 내 맘 알지?"
"아. 몰라요. 거참 가까이 붙지 마쇼."
내 인싸 특기가 발휘됐다. 나는 회사의 팀장들까지는 거의 호형호제 하는 놈이었다.
실장급이야 나이도 많이 차이 나고 관리자급이다 보니 제외긴 했지만···.
나우민 팀장의 눈빛을 보니 뭔가 따뜻한 정이 느껴졌다.
앞으론 내가 바른말을 해서 주위가 좋아진다면 그렇게 할 작정이었다.
솔직히 나는 이제 매니저를 관둬도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었다.
모난 돌이 정 맞듯 내가 쓰러질 때 한 명쯤 나를 위해 주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봤다.
'나 팀장이 말한 것처럼 주위에 그런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인생 성공한 거 아냐?'
물론 대부분의 사람은 모른 척할 것이다. 사람들은 다들 직장에 밥줄이 달려있고 서로의 입장이라는 게 있다. 나야 걸리는 게 없으니 이러는 것일 뿐이다.
'남에게 호의나 칭찬을 바라지 말자. 그냥 스트레스받기 싫은 나를 위해서 할 말은 하는 거야.'
"인마. 뭔 생각하냐? 바쁜 거 끝나면 나중에 소주 한잔? 콜?"
술잔을 기울이는 포즈로 내 의중을 묻는 나 팀장을 보고 있으니 피식 웃음이 났다.
"알았어요. 드라마 끝나면 제가 사드리죠."
"헹? 네가 무슨 돈이 있어? 됐어 인마."
나는 문득 직장 동료도 친구 못지않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 *
오늘은 아침에 유정 씨를 샵으로 데리고 가서 단장을 시킨 뒤 다시 드라마 현장으로 그녀를 데려다줘야 했다. 테리우스는 형택이 형이 맡기로 했다.
준비물을 가방에 넣고 힘차게 사무실 문을 나섰다. 나가다가 뭔가를 쑥덕거리고 위층에서 내려오는 하석우, 김상효 팀장과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그냥 반사적으로 인사를 하고 나가려는데 김 실장이 나를 불렀다.
"이준형!"
"예. 실장님."
"오늘도 유정 씨하고 촬영장 가야지?"
"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아니야. 유정 씨 잘 챙기라고···."
오늘 김상효 실장은 뭔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요즘은 웬만하면 나에게 먼저 말을 걸지도 않았는데 평상시와 달랐다. 하석우 팀장한테 차기 배우팀 실장 자리라도 언질을 받은 걸까?
"네.. 뭐..."
나는 이 인간하고는 더는 말을 섞기 싫어 몸을 돌려 나가려는데 이번에는 하석우 실장이 말을 걸어왔다.
"준형 씨. 혹시 유정 씨가 그 드라마 대본을 어떻게 입수했다고 했죠?"
순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자신이 가져다준 것이었다.
"글쎄요."
하 실장의 호기심 어린 눈빛을 담담하게 받아쳤다.
상당히 애매한 발언이었다. 나중에 밝혀질 걸 대비해서 최소한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흠···. 작가가 궁금한데···. 자꾸 윗선에서 물어보셔서 말이지. 되게 난감하단 말이야."
하 실장은 팔짱을 끼면서 뭔가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실장님. 일개 현장 매니저가 그런 고급 정보를 아는 게 더 이상하죠. 지금 TVM에서 작가에 대한 인터뷰를 안 시키겠다고 하잖아요?"
"이 사람아. 그걸 누가 몰라. 일을 무슨 오피셜로만 하나? 이럴 때 그런 정보를 살짝 알고 있으면 엄청나게 플러스잖아! 분명히 유정 씨가 연결고리인데."
'아···. 왜 이렇게 이 상황이 웃기지. 미치겠네! 이거···. 그래도 하 실장이 머리는 있군.'
그도 별다른 기대는 하지 않았는지 나에게 시선을 거두고 김상효 팀장을 타박했다.
"그럼 전 이만."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이 양반들 하는 짓이 너무 귀여웠다.
"잠깐만."
김상효 실장이 또 나를 불렀다.
"저 바쁩니다. 얼른 말씀해주세요."
"바쁘긴 개뿔···. 너 김훈이랑 친하지?"
"그렇습니다만."
"그럼 걔 설득 좀 해봐. 복면 가요왕 좀 나가라고···."
"제가요?"
"왜? 설득할 자신 없어? 친하다며?"
"저번에 다 끝난 이야기 아닌가요? 훈이가 안 한다고 했다면서요."
"그렇긴 한데 물 들어왔을 때 노 저어야지. 오늘 아침에 MBS 복면 가요왕 PD한테 연락 왔더라. 김훈이 어떻게 안되냐고···."
하여간 방송국 놈들 냄새 맡는 건 기가 막히게 빠르다. 담당 작가가 어제 드라마를 본 건가? 바로 이거야를 외치며 훈이를 캐스팅해야 한다고 했나 보다.
"실장님이 이야기해 보세요. 제가 그런 일까지 하는 직책은 아닌 거 같은데요."
나는 눈에 힘을 주고 김 실장을 강하게 노려보았다. 내가 꿀릴 게 뭐가 있겠나. 솔직히 이런 건 내가 하는 일이 아니었다.
내 말을 듣고 김 실장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말만 들어서는 별것 아닌 거 같지만, 나의 태도에서 느껴지는 명백한 무시를 느낀 모양이다.
직책 운운했지만 왜 본인의 일을 나한테 미루느냐는 일종의 돌려 까기였다.
방송 스케줄이나 협의 같은 건 명백히 실장급 몫이었다.
"야 인마! 누가 너보고 하래? 친하니까 한번 물어보라는 거잖아."
"본인이 하지 않겠다는데 제가 왜 그래야 하죠?"
"하···. 이 새···. 너 무슨 외국계 회사 다녀? 할 일 안할 일 딱딱 나뉘어 있냐고?" 엉?"
"어허. 김 실장 톤 좀 낮추자. 사람들 듣는다."
하석우 팀장은 말은 그렇게 하지만 짐짓 재밌다는 표정이었다.
"왜 안 한다고 하는데요? 물어보셨을 거 아닙니까?"
"몰라. 막무가내야. 그냥 하기 싫대."
"예? 왜 하기 싫어하는지도 파악이 안된 겁니까?"
"마, 말을 안 하니 난들 아나?"
"하아···. 실장님. 그런 거 하라고 거기 계시는 거잖아요. 훈이가 왜 하기 싫은지 조곤조곤 상담하셔야죠. 막무가내로 다그치면 어떻게 합니까! 제가 그런 거까지 다 신경 써야 합니까?
솔직히 나유정과 테리우스 챙기면서 글을 쓰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특히 집에 가서는 신작을 몰입해서 쓰기까지 했다.
옆에 서 있는 하석우 실장은 이 상황이 재미있는지 실실 웃고 있었다. 이 사람도 은근히 밉상이었다.
김 실장은 지금 당황하고 있을 것이다. 그냥 가볍게 한 말인데 새파랗게 어린놈이 눈을 치켜뜨고 따박따박 대들고 있었다.
아마도 회사에서 이런 식으로 대드는 유일한 놈이었을 것이다. 다들 똥은 더러워서 피하는 법이었으니까.
김 실장의 얼굴이 붉어지다 못해 불지옥의 야차 같은 모습으로 변했다.
'난 당신의 못생긴 불독 같은 얼굴을 보고 겁먹는 사람이 아닙니다만.'
"김 실장님. 혈압 안 좋으신 거 아니셨어요? 표정 좀 푸세요. 혈관 터지면 큰일 납니다."
"아니!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잠깐만요. 저 이제 진짜 가봐야 합니다. 그럼···"
"저··· 저···"
나는 그냥 몸을 돌려 출구로 걸어갔다. 뒤에서 김 실장이 발광하려는 것 같았지만 하석우 팀장 앞에서 제 성질을 다 보이진 못할 것이다. 그냥 나가려다 마음을 고쳐먹었다.
'에이··· 14% 넘은 시청률 기념이다.'
"실장님! 정 급하시면요. 제가 한번 왜 싫은지 물어는 볼게요. 에이. 바빠 죽겠는데 내가 꼭 이런 것 까지 해야 되나? 그럼 저는 진짜 갑니다."
김 실장은 어이가 없는지 둥그스름한 허리에 손을 올려놓고 있었고 하 실장은 그게 웃긴지 팔짱을 끼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
* * *
밴을 운전해 나유정을 태우고 샵으로 출발했다.
"어제 첫 방송 보셨어요?"
"봤어요."
"혹시 혼자 보셨어요?"
"혼자 보는 게 뭐가 어때서요?"
"누가 뭐랍니까??"
나는 리어 미러로 슬쩍 나유정의 표정을 살폈다. 아닌 척하는 것 같지만, 은근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슬쩍 장단에 맞춰져 볼까나?'
"유정 씨 때문에 오늘 연예면이 완전 난리던 데요?"
"아··· 그거···"
내 생각에 방금 그녀의 오른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가 내려간 것 같았다.
"다들 유정 씨 연기력에 반했다네요. 완전 드라마를 통째로 캐리 했다는 평가도 많고··· 시청률 보셨죠? 14%대 찍은 거요. 그게 거의 역대급이 출발이라던데요?"
"치··· 예전 같으면 20%~30% 넘는 드라마 엄청나게 많았는데 새삼스럽지도 않네요."
'헐··· 내숭 보소. 이거 다 알면서 하는 말이지?'
"죄송하지만 그건 구석기시대 공중파 방송 시청률입니다. 그렇게 흥행했던 TVM의 역작 '저승사자'도 20%였어요. 아시죠? 난리였던 거···"
"내 연기가 그 정도로 괜찮았나?"
그녀는 머리를 슬쩍 쓸어 넘기며 도도하게 말했다.
'거의 빙의했던데 뭘··· 사실 본 모습이니 당연할 수밖에···'
"제 연기 중에서 어떤 게 제일 인상적이었어요?"
그녀는 반짝이는 눈을 들어 리어 미러에 비친 내 눈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했다.
"듣고 싶으세요?"
"마, 말하기 싫으면 하지 마시던가요."
그녀가 뭔가 불안함을 느낀 걸까?
"아닙니다. 진짜 인상 깊었던 장면이 있었어요. 잠시만요."
마침 차가 사거리에서 신호등에 걸린 상태였다. 나는 송풍구에 거치 되어 있던 휴대전화에서 미튜브 앱을 클릭하고 오늘 아침 마지막으로 봤던 짧은 동영상을 클릭했다.
영상이 플레이 되고 블루투스로 연결된 스피커에서 엄청나게 빵빵한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동영상은 나유정이 항상 집에서 입고 있는 낡은 츄리닝 차림으로 영화 잡지를 뒤적이는 장면이었다.
"나나나··· 나나.. 나···"
자신의 키스 신이 크게 나왔던 페이지를 콧노래를 부르며 가위로 오리더니 남자 아이돌 포스터에 정성스럽게 각도를 맞춰 붙이는 장면이었다.
그녀는 너무 행복한지 배시시 웃으며 혼자 어찌할 줄 모르는 연기를 펼치고 있었다. 그러더니 꺄아~라는 소녀틱한 감탄사를 터트리며 쿠션을 끼고 방바닥을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나는 씨익 웃으며 당황한 나유정을 보고 입을 열었다.
"이 부분에서 정말 혀를 내둘렀습니다. 연기가 아니라 완전 진짜 같던데요."
그녀의 집에 갔었던 날 나는 그녀의 만행을 목도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데칼코마니였나 콜라주였나··· 그 소름 끼치는 포스터들을 말이다.
그녀의 하얗던 얼굴이 삽시간에 홍당무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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