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덕질 생활 (1)
김 PD는 촬영이 시작되자마자 칼 같은 연출로 빠르게 장면을 촬영하고 있었다. 그는 애초에 강력한 보라색 아우라를 지닌 창의력 넘치는 인재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가 워낙 외골수라 주변에 사람이 없을 뿐 연출에 있어서만큼은 스태프나 윗선에 인정을 받는 프로듀서라고 했다.
나는 완전하게 걸레가 된 김호진 PD의 대본을 보고 있었다. 얼마나 읽고 읽었는지 원고의 두께가 거의 두 배가 되어 있는 상태였다.
엄청난 메모와 페이지 사이사이 붙은 포스트 잇은 그가 그간 얼마나 이 작품을 연구했는지에 대한 결과물이었다.
그 결과가 촬영장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리더가 모든 작업을 꿰뚫고 중요한 플롯을 머릿속에 담아두고 쭉쭉 진행하게 하면서 사소한 디테일까지 전부 놓치지 않고 스태프들에게 정확하게 지시하고 정보를 공유하고 있었다.
연출 업무에서는 그야말로 완벽한 리더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촬영장에서 일사불란하게 진행되는 그의 물 흐르는 연출을 보고 문득 한 가지를 깨닫고 말았다.
'이 양반은 드라마 연출자로 썩기 아까운 사람이야.'
모르긴 몰라도 촬영 쪽으로는 황금사자상에 빛나는 천재 봉태호 감독에 버금가는 재능일 것 같았다.
"와우! 일 하나는 끝내주게 잘하네."
"준형 씨! 나 좀 봅시다."
나는 스태프들과 배우들에게 작가라고 부르지 말고 이름을 불러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그래서 나는 현장에서 작가가 아닌 이준형으로 불리고 있었다.
막내 매니저인 김두영은 경험이 부족하다 보니 PD가 왜 자꾸 나를 부르는지 의아해하기만 하고 구체적인 의심은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다행인 게 조 팀장은 요즘 애를 보느라 현장 업무까지는 많이 신경을 쓰지 못했다.
나는 김호진 PD가 촬영하다 말고 나를 부르는 이유를 왠지 알 것 같았다.
"네 PD님. 혹시 디테일한 대사를 하나 더 추가하시려는 거죠?"
"마,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딱 봐도 상황 설명에 대한 디테일이 더 들어가면 더 생동감이 있을 것 같은데요?"
"우와! 정말 작··· 아니 준형 씨는 정말 척하면 척이네요. 이렇게 매일 따라다니면서 보조해주니 시간도 많이 절약되고 진짜 진도가 팍팍 나가네요. 작품 퀄리티도 올라가고 말이죠."
"저야 작품이 좋아지면 이득이죠. 차기작 원고료를 거하게 당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나는 돈을 뜻하는 OK 모양의 손동작을 그에게 보여줬다.
"하하하··· 전 왜 준형 씨의 그 속물 같은 대사가 맘에 들죠?"
"왜요. 너무 속물 같으면 좀 짜증 나지 않나요?"
나는 얼굴에 수염이 돋아난 김 PD의 얼굴을 보면서 빙긋 미소를 지었다. 이 사람 참 순수하고 괜찮은 사람이다.
"저는 준형 씨가 그렇게 말하는 게 위화감이 느껴져요."
"위화감이요?"
"네. 물욕이 없어 보이는 도인이 속세의 처사와 농담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도 내 미소에 전염되었는지 입꼬리가 쓱 올라가는 게 기분이 상당히 좋은 것 같았다.
"PD님 틀렸습니다. 욕심이 미친 듯 높아서 반대로 보일 뿐 입니다. 목표가 너무 커서 그런 건 그냥 하찮게 느껴지는 거랄까요?"
"준형 씨. 농담도 좀 이해가 되게 좀 말씀해 주실래요?"
"일단 농담은 아닙니다만··· 자 대사는 이렇게 바꾸시죠."
나는 농담을 더 하려다 종이에 대사를 추가해서 김 PD에게 건네주었다.
"오케이. 이렇게 갑시다. 배우님들 잠깐 모여주세요. 대사는 이렇게 수정할 겁니다."
정말로 미친 속도로 촬영이 진행되고 있었다. 낭비할 거리가 전혀 없다는 듯 동선이 완벽했다.
그리고 대배우인 나유정!
그녀는 정말로 베니스 영화제의 사실상 여우주연상이라는 별명처럼 미친 연기를 보여줬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말이다.
사람들은 나혜리라는 캐릭터가 실제 나유정의 모습을 그대로 옮긴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물론 실제와 완벽히 같은 모습은 아닐 텐데도 그녀는 나혜리 역할의 120% 보여주고 있었다.
그녀의 엄청나 연기력에 이끌린 것일까? 사실상 메인 남자 주인공인 팀의 센터 한연준의 연기력이 빠르게 늘어갔다.
그 두 명이 연기하며 티키타카 하는 모습을 보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곤 했다.
나유정의 표정은 찍는 동안 그야말로 행복 그 자체였다.
드라마의 특성상 카메오로 다른 보이 그룹들도 나올 수 밖에 없었는데 그때마다 헤벌쭉 입이 벌어지곤 했다.
'음··· 섣부른 추측이지만 이거 뜰 거 같은데?'
현대인들이 아무 생각 없이 가볍게 웃으며 볼 수 있는 내용, 배우들의 찰떡같은 명연기, PD의 군더더기 없는 연출이 강력한 시너지를 내고 있었다.
* * *
그렇게 한 달이 훌쩍 지나갔다. 이번 주에 슬기로운 닥터 생활의 촬영 에피소드를 끝으로 방송이 최종 종료되고 다음 주부터는 후속작인 슬기로운 덕질 생활이 방영될 예정이었다.
촬영은 이미 50~60% 가까이 끝난 상태였다. 1화, 2화는 이미 편집까지 끝낸 상태였다. 더구나 목요일 주 1회로 방영되는 드라마라 살짝 여유가 있는 상황이었다.
나는 촬영 현장을 같이 누볐지만 쉬는 시간과 집에서는 틈틈이 기존 연재작을 쓰고 윤하영의 집필을 독려했다.
사실 초보자에게 많은 지적을 해봐야 쓸데없는 일이고 실망을 한 나머지 종종 붓을 꺾어버리는 사태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저 처음에는 오냐오냐하면서 쓰는 팁만 살짝 주면 됐다.
저번에는 회빙환을 한번 넣어보라고 했는데, 과감히 회귀를 넣고 프롤로그를 다시 썼길래 그대로 한번 쭉 진도를 빼보라고 톡으로 우쭈우쭈를 해줬다.
집에 돌아온 나는 톡을 켜고 윤하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몇 화까지 썼나요?]
[윤하영 : 앗! 작가님. 저 지금 15화까지 썼어요.]
[좋습니다. 아주 좋아요.]
[윤하영 : 성적은 지금까지 최고예요. 뭐 물론 눈에 띌 정도는 아니지만···.]
[제 경험상 초보의 경우 40화 미만에서는 지표가 큰 의미가 없더군요. 분량이 쌓이면 괜찮은 작품일 경우 투베에 들곤 합니다.]
[윤하영 : 엉엉 ㅠㅠ 저 투베 들고 싶어요 자까님 ㅠㅠ]
[꼭 들 수 있을 겁니다. 한 달만 쭉쭉 분량을 뽑아보세요. 가능한 한 많이요.]
[윤하영 : 넵. 알겠습니당! 그런데 작가님. 작가님은 요즘 뭐 하세요? 작품은 계속 1위를 순항하고 있던데 댓글도 전혀 안다시던데요?]
[네. 제가 어젯자로 '세상을 멸망시킬 나의 악인'을 전부 다 썼어요. 몇 개월간은 죄다 예약 연재로 올라갈 겁니다.]
[윤하영 : 그거 한 400화 정도로 완결치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걸 다 쓰셨다고요? 벌써?]
[제가 좀 빨라요. 사실상 리메이크 작품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곧 방송될 드라마 때문에 약간 정신이 없기도 했네요.]
[윤하영 : ???]
[윤하영 : 드라마요?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다음 주 목요일 TVM 9시 방영입니다. 전 바빠서 이만]
[윤하영 : 저기요? 작가님?]
[운하영 : 으음? 작가님? 드라마라니요? 하아악··· 저 궁금해서 죽어욧!]
[윤하영 : 자까님 ㅠㅠㅠ]
[윤하영 : 어? 서···. 설마 슬기로운 닥터 생활 후속???]
나는 일부러 궁금하게 놔두고 톡을 닫아버렸다. 누구보다도 스마트폰 타자에 자신이 있는 나였지만 오래 문자를 주고받는 일은 역시 쉽지 않았다.
그녀에게 열심히 글을 쓰라고 했으니 최소한 40~50화까지 힘을 내서 쓰지 않을까 싶었다.
"아으···. 피곤하네."
갑자기 쓸 작품이 없어지니 시간이 남아돌았다. 다른 작품들을 읽어볼까 하다가 달동네 앱을 종료해버렸다.
"내가 굳이 트렌드 같은 거 신경 쓸 필요가 있을까? 그냥 재미있는 내 글을 쓰면 되잖아. 어차피 분야별로 독자층이 다들 확고히 있으니 그분들을 노리고 들어가는 거지 뭐."
나는 폴더를 열어 아이디어를 모아놨던 파일을 클릭했다. 그 파일에는 정말 많은 아이디어가 가득했다.
"이야··· 나도 참 열심히 구상하긴 했네. 이러고도 잘나가지 못한 거 보면 참 나도 황소고집이었어."
리스트를 주르륵 살펴보았다.
목록에는 정통 판타지, 헌터물 포함 현대 판타지, 게임 판타지, 전문가물 (연예계물 포함), 대체 역사물, 아포칼립스물, 심지어 무협지, 19금 작품까지 다양했다.
"너무 많아서 못 고르겠는데 이거?"
리스트를 고르다가 현재 나의 자산 현황을 정리해봤다. 과연 내가 돈을 쫓아서 글을 계속 써야 하는 것인지 진단을 해 볼 필요가 있었다.
현재 연재 중인 작품은 월 500만 원이 아니라 월 1,000만 원씩 통장에 따박따박 꽂히고 있었다. 그리고 그냥 부수입(?)으로 취급하고 있는 매니저 월급 230만 원도 있었고···
드라마 원고료로 받은 7천만 원까지 들어온 상태였다. 통장 잔고가 1억3천만 원이었다.
"와우! 29살인데 벌써 1억3천만 원이라니! 대박이네?"
더구나 몇 개월간 데일리노블에서 연재하는 '세멸악(세상을 멸망시킬 나의 악인)'이 월 천씩 정산금이 발생할 테고 19금을 덜어내고 타 플랫폼을 돌리면 또 벌었던 것만큼 다시 벌 수 있었으니 올해 말쯤이면 약 3억 원 정도의 잔고가 예상되었다.
물론 타 플랫폼은 그냥 최저로 잡은 수치였다.
"뭐야 이거! 서울에 집도 금방 사겠는데? 아닌가? 어디 보자··· 허미 서울 평균 집값이 10억이네! 10억."
아직 먼 것 같지만, 왠지 모르게 자신감이 생겨났다. 더 노력만 하면 더 큰돈도 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이번엔 그냥 내가 쓰고 싶은 작품을 해보고 싶었다. 돈도 충분했겠다. 당장 결혼할 여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집을 사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최근 흐름인 사이다 패스 웹소설 공식에 맞추지 않고 그냥 순전히 취미 삼아 내 맘대로 써서 올리기로 했다. 일단 달동네 필명을 새로 팠다.
[필명 : 연쇄폭참마]
기존작들은 프로모션을 받지 못해서 수익이 거의 없는 상황이었고 보는 사람도 없어서 그냥 과감히 비공개로 돌려 버리려고 했지만, 아직 계약이 끝나지 않은 작품들이 있어서 두 개 정도는 비공개로 돌릴 수 없었다.
'에이. 그냥 이건 놔두자. 뭐 예방 주사라고 생각하자고···'
비공개로 못 돌린 것은 양판소 헌터물과 연예계물이었다. 둘 다 욕을 먹으며 그럭저럭 평타는 쳤지만 솔직히 그냥 시류에 타협하면서 쓴 글이라 썩 만족스럽지 못했던 작품이었다.
지금 읽어보면 전업 작가 후반기에 초조하게 쓴 글이라는 게 티가 팍팍 났다. 억지로 사이다 패스를 욱여넣은 부자연스러움이란···.
나는 신규 작품으로 아이디어 리스트에서 아포칼립스를 선택했다.
드라마를 한번 찍어보니 작품이 영상으로 만들어지는 것 자체에 엄청난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냥 단순하게 글을 써서 돈을 버는 것 이상의 기쁨이었다.
나는 처음부터 웹소설 공식을 따르지 않고 마치 넷플릭 드라마 시리즈처럼 빌드업을 하면서 떡밥을 풀어 나갈 작정이었다.
독자들이 보면 좋겠지만 안 봐도 상관없었다. 일종의 극본의 베이스가 되는 소설을 연습용으로 쓸 작정이었다.
최근에 국내 작품으로 좀비 킹덤이라는 우리나라 작품이 대박을 쳤기 때문에 한번 시험 삼아 시도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작품명 : 세상의 멸망은 나만 아는···.]
일단 제목조차 독자들의 유입을 방해하고 있었다.
스토리는 원인 모를 괴질을 앓고 평생을 살아온 과학수사대 검시관이 항상 꿈에 나타나는 좀비들이 실제로 나타날까 두려워 가진 재산을 모두 벙커를 짓는 것에 투자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좀비에게 물린 시체가 국과수 검시소에 들어오게 되는데···
1부는 과묵하지만, 카리스마 있는 주인공이 멸망 이후의 세상을 대비하기 위해 평소에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사람들을 좀비 웨이브가 터진 후 구하러 다니는 활극이었다.
구명을 받은 이들은 주인공이 제작한 벙커에 도착하는 것으로 종료된다.
2부, 3부, 4부까지 계획이 머릿속으로 쭉 연결되고 있었다. 일단 플롯을 쭉 적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재미가 있을까? 타협하지 않고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쓴다는 건 너무나 재미있는 일이었다. 나는 정신없이 그 작업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걱정 반 기대 반 속에 슬기로운 덕질 생활의 방영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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