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는 내가 만든다 (4)
영관이가 나를 부르건 말건 나는 김호진 PD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그의 옆자리에 섰다.
"아···. 이분이 바로 저희 작품을 집필해주신 이준형 작가님입니다."
김 PD가 좌중에 나를 소개하자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자기소개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슬기로운 덕질 생활 작가 이준형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아무쪼록 즐거운 작품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간단히 인사를 하자 스태프들과 배우들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너무 젊어 보여서 그런가? 고개를 갸웃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유독 황당한 얼굴로 한 박자 늦게 박수를 치고 있는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테리우스 멤버들이었다.
한연준이야 내가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고개를 휘휘 가로저으며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나머지 4명은 그야말로 이게 무슨 일인지 완전히 경악한 상태였다.
"안녕하십니까? 연출을 맡은 김호진입니다. 정말 쟁쟁하신 분들, 기존에 함께 작업했던 분들 모두 저를 믿고 출연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누가 되지 않도록 현장에서 열심히 연출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에 화답이라도 하는 듯 배우들과 스태프들은 힘찬 박수를 보내 분위기를 달궜다.
"작가님은 인사를 하셨고 마지막으로 주연인 나혜리 역을 맡은 나유정 씨의 인사말을 듣고 대본 리딩을 시작하겠습니다."
드르륵...
나유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꾸벅했다.
"안녕하십니까? 나혜리 역을 맡은 나유정입니다. 예전에 같이 연기하셨던 선배님도 계시고 새롭게 연기를 시작하시는 후배님도 계신데요.
최대한 역할에 맞는 모습으로 연기하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선배님들은 앞에서 잘 끌어주시고 저는 후배들이 힘들면 잘 이끌어서 이 드라마를 꼭 성공시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끝으로 이런 재미있는 작품을 써주신 이준형 작가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짝짝짝짝....
"와···. 예쁘다!"
"외모 미쳤다!"
"역시 유정 씨야. 말 한번 똑 부러지게 하네."
스태프들은 그녀의 실물에 깜짝 놀란 상태였고 배우들은 초장부터 강렬하게 풍기는 그녀의 카리스마를 느끼고 있었다.
나는 나유정의 마지막 코멘트를 듣고 그게 그냥 의례적으로 하는 말이었건 뭐건 기분이 매우 좋아졌다.
'그래요. 유정 씨. 드라마 찍으면서 맘껏 힐링하시길···.'
"자 그럼 대본 리딩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리딩이 시작되자 아직까지 나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놈들이 살짝 걱정되기 시작했다.
나는 4명에게 손을 들어 대본을 가리키며 집중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니 그들도 내 제스처를 알아챈 모양인지 황급히 대본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1화는 거의 나유정의 독무대였다. 나유정은 대사 첫마디부터 좌중을 압도했다. 꼭 캐릭터에 빙의라도 한 것처럼 완벽했다.
사람들은 차분하던 그녀가 180도 변해 푼수기 있는 코믹 연기를 하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아주 고상하게 영화 잡지와 인터뷰를 진행하고 차의 문이 닫히자마자 헐레벌떡 동영상 사이트에 들어가 아이돌 그룹의 신곡 뮤직비디오를 검색했다.
떨리는 손으로 뮤비를 감상하는 신이 대본에 있었고 손을 벌벌 떨고 꺅꺅대는 게 여고생이 된 것 같은 자연스러운 연기가 터져 나왔다.
"아흐···. 곡 너무 좋잖아. 헨리! 얼굴···. 어멋.. 어, 얼굴에서 빛이나. 하악···. 나 죽어···."
"야야···. 왜 그래 또. 하여간 저건 봐도 봐도 진짜 적응 안 되네."
나혜리의 매니저인 사촌 언니였다.
"오빠아! 너무 멋져. 엉엉···. 이번 곡 미쳤어. 흐어엉···."
"하아아... 진짜..."
영관이와 훈이는 대사뿐이지만 실전 연기를 보자 입을 떡 벌리고 있다가 마른 침을 꿀떡 삼켰다.
"자···. 좋고요. 다음 신 갑니다."
차근차근 대본 리딩이 진행됐다. 역시나 연준이는 나유정과 신들린 티키타카로 미친 케미를 보여주며 한껏 기대감을 증폭시켰다.
의외로 연기를 처음 하는 래퍼 창민이가 준수한 연기력을 선보이며 사람들의 관심을 주목시켰다.
'음···. 대본을 좀 수정해야 하겠는데? 창민이도 꽤 잘하잖아?'
나는 확인도 해볼 겸 아우라 스카우터를 켰다.
'아! 그렇구나. 창민이는 흰색이지만 약간 노르스름하네'.
결국 흰색 아우라 재능을 바탕으로 연기력도 겸비하고 있다는 거였다.
'오케이 새로운 정보 좋았고···.'
훈이와 이든이는 긴장을 많이 했는지 로봇이나 다름없는 연기를 펼쳤다. 그 연기를 보고 김호진 PD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는 게 보였다.
나는 그의 귀에 대고 개선되지 않으면 대사를 최소한으로 줄여 대본을 고쳐주겠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요?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다시 뵙기로 하시죠."
김 PD의 말이 있자 나는 일어나서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혹시 빈 미팅룸을 찾기 시작했다. 그는 테리우스 멤버들에게 전화해서 오른쪽 끝방으로 오게 했다.
"형!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영관이가 미팅룸으로 들어오자마자 다짜고짜 나를 잡고 늘어졌다.
"놔 인마. 옷 찢어져."
"형이 어떻게 우리한테 이럴 수 있어?"
"뭐래? 기껏 캐스팅도 해줬더니···."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를 캐스팅하다니?"
"영관이 형. 이쯤 되면 좀 깨달아야 하지 않겠어?"
문 앞에 서 있는 한연준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문앞에 서 있었다.
"한연준 이놈의 자식! 너는 알고 있었구나. 둘이 한패였어."
다시 연준이한테 가서 팔을 잡고 늘어지는 리더였다.
"이이! 알긴 뭘 알아. 나도 몰랐어. 준형이 형이 우리를 감쪽같이 속인 거야."
연준이는 자신의 팔을 붙잡고 있는 영관이를 뿌리치고 나를 바라봤다.
"형! 이거 중소기획사 남자 아이돌 이거 모델이 우리지?"
역시···. 일 년 반 넘게 소설을 무지막지하게 읽어온 녀석 다웠다. 나는 입꼬리를 씩 올리며 대답했다.
"딩동댕!"
"진짜야? 와! 미치겠다. 우리를 모델로 썼다고? 나는 왜 그걸 몰랐지? 응? 잠깐! 내가 왜 개그캐야? 난 그룹의 기둥이잖아."
"미안하지만 팩트에 기반을 둬서 쓴 거다."
"매니저고 뭐고 죽엇!"
그는 다시 나에게 와락 달려들어 내 멱살을 잡았다.
"얘들아 이놈을 얼른 떼어내라."
그러자 훈이와 이든이가 리더를 내게서 떼어냈다.
"형 우리 진짜 놀라 뒤로 자빠지는 줄 알았어요. 미리 좀 말해주면 어디가 덧나?"
"그냥 시끄러워 질까 봐 그랬어. 솔직히 나도 이게 이렇게 빨리 드라마로 만들어질지 몰랐거든."
정말이었다. 김 PD 전화를 받기 전까지 일하느라 연재하느라 잊어먹고 있었으니까.
"형들 이제야 제가 비밀을 말해드릴게요. 준형이 형이 실은 웹소설 작가예요. 작품도 상당히 많아요. 뭐 인기는 그닥···."
"으흠..."
"형! 미치겠다. 왜 우리한테는 비밀로 했어? 연준이만 편애하는 건가?"
"편애는 개뿔. 그냥 쟤한테 쓰다 걸렸어."
"일단 우리는 그렇다 치고 유정이 누나는 어떻게 합류시킨 거야?
이번엔 그냥 가만히 우리를 지켜보던 창민이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냥 내가 관리하는 배우니까 이왕이면 다홍치마 아니겠냐?"
"이거 살짝 어이가 없어지려고 하네."
"잠깐! 형! 설마 나혜리 역할도 유정이 누나를 실제 모델로 해서 쓴 거야?"
나는 날카롭게 추론하는 연준이를 힐끗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건 아냐."
"아야 넌 말이 되는 소리 좀 해라. 유정이 누나가 어떻게 나혜리야? 맨날 저질 소설만 읽다 보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저, 저질 소설이라니? 너무하네. 저시키 콱 사망시켜 버려?'
"리다! 잘 들어 우리를 캐스팅한 게 여기 계신 웹소설 작가 이준형 선생이야. 그런 선생님 앞에서 저질이라니! 입이 뚫렸어도 말은 바로 해야 해."
"아 미안···. 난 그런 거 도저히 못 읽겠더라."
"어이가 없네. 대본 재밌다고 아주 입에 달고 사시던 분이 왜 그러실까?"
"이건 드라마잖아. 드라마."
아주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이쯤에서 정리를 좀 해줘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다들 조용."
내가 묵직하게 무게를 잡으니 모두 나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김훈, 정이든!"
"으, 응?"
"너희 둘 캐릭터 분석은 한 거냐? 어떻게 그렇게 연기를 못해?"
"그, 그야. 연기가 처음이잖아. 한연준이야 원래 잘했고···. 창민이도 예전에 잠깐 아역 배우도 했다더만."
내 질문에 변명만 하기 급급한 메인보컬 김훈이었다.
"내 말은 그게 아니잖아. 연기가 말고 캐릭터 분석 해봤냐고."
"아니···."
"..........."
"하아···."
'이 녀석들이 제대로 대본을 읽어봤는지 의심스러운데? 캐릭터가 다 자기라는 걸 왜 모르지?'
"아까 연준이가 말했잖아. 너희를 모델로 썼다고! 내가 왜 다른 그룹들 오디션도 안보고 너희를 캐스팅했는지 아직도 모르겠어?
그냥 평소 하던 대로 하란 말이야. 특히 김훈, 정이든! 너희 둘! 그리고 박영관! 그래 너! 너 인마!"
"작가님. 전 평타는 쳤습니다만?"
영관이는 자신은 두 명과 다르다고 결사적으로 항변했다.
"잘 들어. 두 번 말 안 한다. 쉬는 시간 끝나고 다시 대본 리딩 할 때 평소 때랑 다른 톤으로 대사를 치거나 아까처럼 연기하는 놈 있으면 대본 수정해서 대사 다 빼버릴 거야."
"혀, 형!"
"너무해요."
"뭐가 너무해. 그냥 평소에 하던 대로 하라고! 아니면 드라마에서 진짜 병풍으로 만들어줄 테니까···."
"너, 너무 감이 안 오는데?"
"그래 그거! 그 톤! 평소 톤으로 하라고···. 어차피 연기력이 필요한 부분은 연준이랑 창민이가 알아서 하면 되니까!"
"자! 작가 선생님 말씀 잘 들었지? 잘 기억해. 대본 속 캐릭터는 우리 자신이야. 우리는 그냥 평소에 우리가 하는 대로 대사치고 장난치고 그러면 되는 거라고."
나는 지금 내 말을 정리해서 형들에게 전해주는 연준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역시 우등생이라 이건가. 정리하는 수준 무엇?'
"자 이제 나가자. 이러다 대본 리딩 늦겠다."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연준이가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형. 이거 회사에 이야기 해야 돼요? 아니면 조용히 있어야 해요?"
"으음···. 일단은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말아봐."
"일단 알았어요."
우리는 문을 열고 복도로 우르르 빠져나갔다. 그러다 화장실에 다녀오는 김 PD와 마주쳤다.
"어? 작가님. 왜 거기서 배우들이랑 같이 나오시나요? 혹시 연기 조언이라도 좀 하셨어요?"
그는 우리를 보고 빙긋이 웃었다.
"예. 얼차려 좀 줬습니다."
"네?"
나는 그냥 말없이 미소를 지으며 대회의실로 들어갔고 애들도 나를 따라 쫄래쫄래 들어왔다.
다시 대본 리딩이 시작되었다. 역시나 100% 캐릭터에 빙의한 나유정의 연기는 모두를 빠져들게 하였으며 한연준과 이창민의 연기력도 수준급이었다.
그리고···.
그냥 본인의 톤으로 자연스럽게 연기하라는 내 조언이 먹혔는지 기타 3명의 연기력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그들이 대사를 치는 것을 본 김호진 PD가 내 얼굴을 힐끔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 얼차려를 진짜라고 생각하면 안 되는데···.'
어차피 연기가 메인도 아닌 애들한테 바라는 건 이 정도 수준이 최고일 거로 생각했다.
'야 이 녀석들아. 너흰 내가 강제로 1티어로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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