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는 스타 작가님-18화 (18/263)

드라마는 내가 만든다 (3)

나는 전신거울에 자신을 비추고 옷매무새를 점검하는 나유정을 보고 한마디 했다.

"유정 씨 카리스마 챙기세요. 여고생 코스프레 하지 마시고···."

나유정은 나의 말에 짐짓 찔렸는지 거울을 통해 눈을 흘기고 있었다. 내 지적으로 다시 냉미녀로 돌변한 그녀를 보니 안심이 되었다.

'아···. 왜 이렇게 웃음이 나지? 갭 차이 뭐야. 진짜···.'

나는 유정 씨와 함께 다시 하 실장 방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테리우스 멤버들이 서 있었는데 그들은 나유정을 보자 깜짝 놀라며 바로 고개를 숙였다.

"하나둘셋! 안녕하십니까! 테리우스입니다."

인사 겸하는 일종의 단체 소개말이었다.

"네. 안녕하세요."

나유정은 새침한 표정으로 그들의 인사를 받았다. 다행히 카리스마는 챙긴듯싶었다.

"자. 다들 모였으니 짧게 이야기할게요. 조 팀장 애들한테도 이야기했나?"

"네. 실장님. 제가 아는 선에서 대강 이야기를 해줬습니다."

"좋습니다. 지금 당장 TVM으로 갈 거예요. 4시에 미팅이 잡혀 있습니다. 일단 유정 씨야 그쪽에서 버선발로 뛰쳐나올 분이니 논외고 테리우스는 캐스팅이 될 수 있도록 좋은 인상을 남겨야 할거에요."

"알겠습니다!"

리더인 영관이 하 실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씩씩하게 대답했다.

"좋습니다. 아무래도 큰 건이다 보니 제가 직접 동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조 팀장 얼른 애들 데리고 이동합시다."

"네. 실장님. 바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준형 씨는 안 가요?"

나가려던 하 실장이 뒤를 돌아 나유정을 쳐다봤다. 그리고 시선을 옮겨 나를 한번 쓱 훑어보는 게 아닌가.

"왜요? 뭐 시키시려고···?"

"아니. 제 매니저인데···."

"그 역할은 저랑 조 팀장이 같이 할 겁니다. 차에 자리도 부족하기도 하고···."

나는 그녀에게 눈빛으로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녀는 내 눈빛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차피 벌써 판은 다 깔아놨으니 굳이 내가 갈 필요가 없지.'

불안한 건 알겠는데 그냥 갔다가 몇 마디만 하고 오면 될 거고 괜히 전면에 나서서 하 실장이 경계심을 갖게 할 필요가 없다.

그는 자기가 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겠지만, 이미 모든 것은 세팅된 상태였고 내가 깔아놓은 판 위에서 말처럼 움직이는 것뿐이었다.

이 아저씨가 의외로 유능한 것 같은데 괜한 의심을 사서 귀찮아질 필요가 없었다. 나는 가만히 님도 보고 뽕도 따면 됐으니까.

'아···. 이거 내가 뭔가 흑막이 된 것 같은 그런 느낌인데? 후후'

나유정은 일행과 함께 방송국으로 출발했다. 나는 창문으로 그들을 태운 밴이 건물을 떠나는 것을 지켜보다 사무실로 돌아왔다.

회의 경과도 들어야 하고 나유정도 퇴근시켜야 하니 차분히 기다리기로 했다.

* * *

나유정의 고급 외제 차에 시동이 걸리자 슈퍼노바의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제 계약은 준형 씨가 말했던 대로 그대로 됐어요."

"만족하시는 거죠?"

"저야 돈은 크게 중요하지 않으니까 그 정도면 된 거 같아요."

"테리우스는 당연히 캐스팅됐겠죠?"

"너무 확신하시네요."

"유정 씨도 대본 다 읽어보셨으니 누굴 모델로 쓴 건지 아실 거잖아요."

"담당 피디님이 테리우스를 보더니 깜짝 놀라시더라고요. 어떻게 알고 컨셉을 딱 맞춰 왔느냐고···."

"흐흐···. 반대인데···."

"그래도 준형 씨가 의리는 있네요? 담당 아이돌을 생각해서 넣으신 거 보면···."

"글쎄요."

"아니면 제일 잘 아니까 그냥 넣은 거 아니에요? 실제 모델로 하면 캐릭터를 따로 만들 필요가 없잖아요."

"그렇게 생각하시던가요."

"흥!"

'그냥 막 써 재낀 거라 그럴 수 밖에 없었다고···.'

그 당시는 실제 있는 캐릭터를 재활용해야지 안 그러면 그 짧은 시간에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분량이었다.

경험상 연재를 하다 보면 머리를 쓰고 생각을 많이 하고 쓴 편은 호불호가 갈리는 경우가 많은데 머리를 비우고 쓴 편은 의외로 반응이 좋은 경우가 많았다.

머리를 비우고 쓴 게 극대화된 작품이 바로 슬기로운 덕질 생활이었다. 주변 인물들과 내가 매니저 생활을 하면서 직접 겪고 느낀 것들이 들어가 있으니 분량을 그냥 쭉쭉 뽑은 것이다.

다음날 TVM의 행보는 재빨랐다. 사태가 더욱 심각해지자 이상진과 지옥에서 온 사나이를 바로 손절하고 부랴부랴 홍보 자료를 배포했다.

[TVM의 슬기로운 닥터 생활의 후속작으로 방영이 잠정 결정된 작품은?]

최근 이상진의 성폭행 고소 사태와 맞물려 곤혹스러워진 TVM이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현재 인기리에 방영 중인 슬기로운 닥터 생활 후속작으로 신규 작품을 자체 제작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후속작의 이름은 슬기로운 덕질 생활(가제)로 결정됐다고 전해졌다.

제목까지 전작과 유사한 이 후속작은 TVM 김호진 PD가 연출을 맡고 베니스 영화제 여우주연상 노미네이트된 나유정이 주연으로 캐스팅됐다고 밝혔다.

이 작품은 유명 여배우가 실은 남자 아이돌 마니아였다는 소재로 정체를 숨기고 중소기획사에 들어가 자신이 좋아하던 아이돌을 최고 인기 아이돌로 만든다는 유쾌하고 가벼운 스토리라고 밝혔다.

하지만 나유정을 빼면 많은 상당히 리스크가 많은 불안한 작품이라는 의견이 대다수다.

일단 주연급으로 캐스팅된 테리우스는 센터 한연준을 제외하고는 연기 경험이 전혀 없는 데다가 작품을 쓴 작가조차 전작이 전혀 없는 신인이며 PD조차 최근 연출한 작품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방송 일자가 채 두 달이 남지 않아 일정이 빠듯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략>

일단 기사가 나가자마자 나유정의 드라마 컴백 소식에 인터넷이 소란스러워졌다. 많이 본 연예 기사 1위에 당당히 등극했다.

그만큼 나유정의 임팩트가 컸던 것이다. 전작인 영화에서 신들린 연기를 펼치며 그간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구축한 그녀가 돌연 가벼운 TV 드라마에 출연한다는 자체가 쇼킹한 일이었던 것이다.

주연 배우의 캐스팅이 끝나자 조연 배우와 촬영팀이 빠르게 준비되었다. TVM 역사상 가장 빠르게 그리고 가장 졸속으로 진행된 드라마 제작 준비였다.

테리우스 멤버들은 한연준을 제외하고 1주일간 속성으로 연기 교습을 받았다. 그렇게 해서 얼마나 늘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안 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드디어 첫 대본 리딩이 있는 날이었다. 조형택 팀장이 출산 휴가라 막내 매니저인 두영이가 따라간다고 했지만 혼자 해도 된다고 극구 사양했다.

"넌 오늘 좀 쉬어라. 그동안 고생했잖아."

신입 매니저인 두영이가 이게 갑자기 무슨 소린지 하는 얼굴로 눈알만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다.

"어차피 테리우스와 나유정 씨가 같은 곳으로 가니까 그냥 내가 혼자 챙긴다고··· 우리가 팬들이 많은 곳으로 가는 것도 아니잖아."

"알겠습니다. 선배님.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올 때까지 쉬고 있어. 혹시 늦으면 일찍 퇴근하고 알았지?"

나는 TVM 방송국으로 멤버들과 나유정을 데리고 차를 몰았다. 테리우스와 나유정은 연기 때문에 요즘 일주일간 자주 본 상태라 어느 정도 친해진 상태였다.

"누나. 연습 많이 하셨어요?"

"영관이 형. 유정이 누나가 형 같은 줄 알아요? 연기라면 그냥 손으로 툭 치면 나오시는 분이에요."

"부, 부럽다. 난 청심환이라도 사 먹어야 될까 봐. 준형이 형. 혹시 청심환 없어?"

"야 인마. 몇 줄이나 된다고?"

나는 호들갑을 떠는 영관이를 리어 미러를 통해 힐끗 보며 면박을 주었다.

"형은 연기를 모르잖아. 시나리오에서 내 역할이 상당히 중요해. 감초 역할 알지? 그런 포지션이야."

"뭐 개그캐라는 걸 꼭 그리 순화해서 말해야겠냐?"

"하~ 개그캐라니. 약방의 감초 몰라?"

"됐고 나는 훈이랑 이든이가 걱정이다. 너희 연기는 좀 어때?"

나의 물음에 메인 보컬인 훈남 김훈과 리드 보컬인 냉미남 이든의 얼굴이 동시에 구겨졌다.

"형··· 저 형들은 큰일 났어. 어제 유정이 누나가 연습실에서 진짜 친절히 알려줬는데도 발연기 오진다니까?"

막내 한현준이 옆에서 상당히 강하게 딜을 넣었다.

"그 정도야?"

"말도 마. 예전에 그 유명한 로봇 연기 있지? 거의 그 수준이야."

"야 인마. 그럼 네가 좀 알려줘야지. 너만 잘하면 되냐? 안 그래도 시간 없는데 자꾸 둘이 NG 내면 어떡할거야?"

"어. 구제불능 리얼루다가···."

"아! 한연준. 너 아침부터 죽고 싶냐? 안 그래도 짜증 나 죽겠는데···."

웬만해서는 화를 내지 않는 김훈이 미간을 찌푸린 채 막내를 쳐다보고 있었다.

"근데 어차피 훈이랑 이든이는 대사가 거의 없잖아. 그냥 병풍 아냐?"

"아! 형! 형까지 왜 그래? 나 진짜 관둔다?"

"큭큭··· 병풍이래. 하하하···"

내 말에 뭐가 그리도 웃긴지 연준이와 창민이가 킥킥대며 웃고 있었다. 나유정도 웃긴지 몰래 입술을 꽉 깨물고 미소를 짓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두 명의 연기는 기대하지 않고 있었다. 그냥 옆 사람만 잘 따라서 움직이면 되는 수준이었다.

왠지 모르지만, 글을 쓸 때 메인은 한연준으로 잡고, 서브로 래퍼인 창민이를 그리고 감초 역할로 영관이를 넣었다.

주로 연준이와 창민이가 극을 이끌어 갔는데 그 이유는 물론 외모였다. 이든이도 외모가 뛰어났지만, 워낙 말수가 적기 때문에 연기를 당연히 못 할 것으로 판단하고 말을 거의 하지 않는 냉미남 역할로 설정했다.

연준이야 연기력 레벨이 연기자 급일 뿐만 아니라 황금 아우라를 가지고 있는 녀석이었지만 창민이도 의외로 연기력이 괜찮았다.

개그캐를 담당하는 영관이하고 든든한 이미지의 훈남 역할인 김훈만 잘하면 그럭저럭 촬영을 진행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며 방송국 대회의실에 도착했다. 거기에는 이미 조연 배우들이 일찍 와서 대본을 점검하는 중이었다.

나유정은 멤버들을 데리고 들어가 나이 드신 중년의 조연 배우들에게 인사를 하며 테리우스도 인사를 시켜줬다.

중소 기획사 사장 역의 중견 배우 박정필이 나유정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고··· 유정아 오랜만이다. 이게 도대체 몇 년 만이니?"

"안녕하셨어요? 선배님."

"나야 뭐 맨날 그럭저럭 연기하면서 밥 벌어 먹고살지. 얼마 전 네 영화 진짜 잘 봤다. 아쉽더라. 네가 여우주연상 받았어야 했는데···"

"괜찮아요. 욕심 없었어요. 복귀해서 오랜만에 연기해서 그런지 너무 몰입했나 싶기도 하고요."

"그래. 너무 몰입해도 안 좋아. 전작 영화 캐릭터가 너무 강렬했는데 표정이 좋은 거 보니 그 역할에서 잘 빠져나왔나 보네?"

"네. 약간 힘들긴 했는데요. 이제 많이 좋아졌어요."

나유정이 전작 때문에 힘들긴 했나 보다. 하긴 그 캐릭터의 영향 때문에 더 냉정하게 변했을 수도 있었다. 그녀는 전작에서 점점 미쳐가는 역할을 했으니까.

대배우이신 최만식 선생님도 사이코패스 연기를 했을 때 과도하게 몰입해서 동네 주민을 보고 영화에서처럼 심한 욕을 막 해버릴 뻔 했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작품에 출연하게 된 거야? 너무 의외더라."

"그냥 대본을 봤는데 너무 재밌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출연을 결심했죠."

"그래. 나도 보긴 했는데 진짜 재밌더라. 작가가 초보치고는 진짜 감각 있던데? 근데 네가 연기를 엄청 잘해야 할 거 같아. 이건 유정이 네 캐릭터가 처음부터 멱살 잡고 끌고 가야겠더라."

"열심히 하려고요. 선배님."

"그래 우리 잘해보자."

'뭐야. 박정필 배우 감각 있네? 내 작품을 알아보다니 흐흐흐···.'

나는 그들이 인사를 나누고 덕담을 하는 것을 보고 잠시 회의실을 빠져나가 김호진 PD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김호진 PD는 스태프들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어? 작가님 오셨어요? 안 그래도 어디쯤 오셨는지 궁금해서 전화하려고 했습니다."

"잠깐 캐스팅된 조연 배우들을 쭉 살펴보니 다들 괜찮던데요?"

"네. 힘들었습니다. 맛깔나게 뽑아봐야죠."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감독님만 잘해주시면 되겠네요. 저야 대본도 다 쓴 상태고요."

"저만 믿어주십시오.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온 힘을 다해서···"

"감독님 가벼운 개그, 일상물인데 힘 빼셔야죠."

"그런가요? 하하하··· 일단 회의실에 가 계세요. 저는 5분 있다가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그와 헤어져 다시 회의실로 들어갔다. 대본 리딩시간 5분 전이라 배우들은 이미 다 도착해서 착석한 상태였고 감독과 작가 자리만 비어있는 상태였다.

주위를 둘러보니 기자들도 많이 도착한 상태였다. 요즘은 대본 리딩하는 것도 홍보용으로 많이 쓰는 편이었다. 아이돌로 따지자면 일종의 쇼케이스 정도 되려나?

그런 잡다한 생각을 하고 있으니 앞문으로 김호진 PD가 들어왔다. 그는 제일 상석에 서서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연출을 맡게 된 김호진 PD입니다. 반갑습니다."

짝짝짝짝···.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쉬가 터지고 배우들의 박수가 이어졌다.

그가 인사를 하며 자리에 앉으려다가 배우들의 얼굴을 확인하려고 고개를 들어 좌중을 보다가 내 눈과 딱 마주쳤다.

"어? 작가님. 왜 거기 서 계세요? 얼른 이쪽으로 오세요. 인사하셔야죠."

그는 나를 발견하고 손을 들어 자기 쪽으로 오라는 시늉을 했다. 테리우스 멤버들은 작가가 자기들 쪽에 있다고 착각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멤버들 뒤에서 벽에 기대 서 있다가 팔짱을 풀고 앞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어···? 준형이 형 뭐해···! 어디가···."

영관이가 앞으로 걸어가는 나를 보고 낮게 소리쳤다.

그 모습을 보고 나유정이 씨익 미소를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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